『평생 독서 계획』이 알라딘에서는 제법 '뜨거운' 책인가 보다.
금방 뜨거워졌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평생 동안의 읽을 거리'를 친절히 안내해 준다는 클리프턴 패디먼의 속삭임에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안하는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일단 '서둘러 구입한' 책들이 어제 배달되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서둘러서 빠르게 책을 읽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번처럼 '한꺼번에' 대량으로 책을 구매할 일도 거의 없는데, 어쩌다가 이번에 '평생' 읽을 책들을 구매하느라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왕창 사들이게 되었다. (책의 권수로 보나 지출 금액으로 보나 단일 규모로는 알라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두 번째로 많은 규모이다)
여러 권의 책에 대해 한꺼번에 소개하는 식의 글들은 '인터넷 전문 서평꾼'에게나 어울리는 영역이므로 나의 관심사항이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로 구입한 책들의 외양이라도 보여드리는 일이 아닐까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 『평생 독서 계획』을 펼쳐 들고 저자 서문과 역자 후기 등을 읽어보니 꽤나 마음에 들어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1960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후 수정판이 거듭되다가, 저자(1904-1999)가 사망하기 2년 전에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여 손을 본 결정판이 이번에 나온 책이란다. 그래서 예전 판본에 들어 있던 작가들이 탈락되기도 했다는데,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내지 못한 까닭'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같은 대형 논평서 역시 제외되었다. ······ 남의 책을 논평한 그런 책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독자에게 직접 자신의 사상을 호소하는 책들만 선택하기로 했다.
이 부분을 읽으니 나 개인적으로도 '남이 쓴 책을 읽고 나서 쓴 글들'을 담은 책들은 여태 '한 권'도 제대로 사서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을 시간을 그리 넉넉하게 확보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애써 책을 읽을 시간을 만들게 되면, 남들이 쓴 서평글을 읽는 것보다 '독창적 사상'을 담은 책을 읽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남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평생 독서 계획』이라는 책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인데, 그 이유 또한 이 책이 나름대로 '시간의 테스트'를 훌륭히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공저자인 존 S. 메이저의 글이다)
가령 패디먼은 투키디데스에 대하여 집필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는 권력 정치의 내면을 파악한 최초의 역사가이다. 홉스, 마키아벨리, 마르크스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그의 자식들이다." 이 교차 참조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작가들을 즉시 뒤져보게 만들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독창적 사상을 가진 작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위대한 대화'를 나누어 왔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작가들을 동시에 생각함으로써 그 위대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나 또한 투키디데스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나름대로 꼼꼼이 읽었기 때문에 저자의 얘기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키케로의 책(노년에 대하여/우정에 대하여/변론집) 뒷 부분에 나오는 '키케로의 생애와 사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키케로의 자식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몽테스키외, 볼테르, 칸트, 헤겔,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를 거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키케로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독자들과의 간단한 대화'에서 패디먼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이 책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이다. 한번 당신의 내부에 자리 잡으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꾸준히 작용한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이 리스트는 '단번에 슥 훑어보는" 그런 리스트가 아니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사들인 책들도 어쩌면 평생토록 먹어야 하는 '쌀'처럼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쌀'이나 혹은 '돈'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다른 여러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 이 순간의 세상에 집착하는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비록 명확하게는 아닐지라도-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저 오랜 인류의 역사로부터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위대한 사상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항으로서, 고매한 사상과 느낌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평생 독서 계획'에 담긴 저자와 책들을 '제대로' 읽어본 걸 기준으로 꼽아보니 고작 20권이 조금 넘는데 그쳐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지만 저자의 다음 글에서는 조금 용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평생 독서 계획』은 18세부터 81세의 독자를 위한 것이다. 이런 독자들은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에 그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자료를 목말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여기에 열거된 작가들의 10퍼센트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독서 계획』은 학부 시절에 여기에 제시된 책들을 많이 만났으나 정작 읽지는 못한 대학 졸업자들을 위한 책이다.
몇 해 전에 헤로도토스의『역사』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이번에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한 책을 새로 사서 읽어볼 생각인데, 패디먼은 이 책 속에서 이런 조언을 담아 놓았다.
"그는 책 속에서 당신을 이끌고 가면서 자신(헤로도토스)이 들은 것을 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조언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냥 따라가면서 사물들을 보도록 하라.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여기서 우리는『평생 독서 계획』의 뜻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것은 첫째, 이 책에 소개된 133명의 작가들을 평생에 걸쳐 읽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이 작가들을 시간을 들여 통독한 다음 그 중에서 특히 가슴에 와 닿는 작가들을 평생에 걸쳐서 재독 삼독 사독 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두번째 뜻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덧붙인다.
책과 인생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이런 좋은 비유가 있다. "인생의 마흔까지는 책으로 따지자면 텍스트이고 마흔 이후는 그 텍스트의 주석이다."
나도 마흔을 넘겨 조만간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책을 읽을수록 점점 더 책의 여백에 '주석'을 주렁 주렁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나는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배울 때에는 "이 한심한 화상아!"라는 대사의 심오함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젊은 대학생에게 셰익스피어 드라마는 벅찬 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읽고 또 배울까? 어릴 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가르침의 선견지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본령이고, 『평생 독서 계획』의 원대한 취지이며, 텍스트와 주석의 관계인 것이다.
역자의 다음 구절도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감하게 되는 내용이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클리프턴 패디먼의 책 얘기를 마칠까 한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대목에 이르니 갑자기 '책 읽어주는 남자'를 비롯해서 '책'이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마구 떠오른다.
어차피 영화나 소설이나 책에 담긴 내용들이 결국은 '삶 그 자체'에 다름 아닐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평생 동안 일용할 양식인 '쌀'과 함께 배달되어 온 책 박스
- '평생독서계획'과 무관한 듯 무관하지 않은 '대하소설'도 많이 포함해서 샀다.
(술술 읽히는 소설을 특히 좋아하는 '평생'의 길동무인 아내가 먼저 읽을 책이다.)
-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역시 한 사람의 '평생'이 담긴 책이니만큼 분량이 만만치 않다.
- 막강한 분량을 자랑하는 몇 권의 책들
- 드디어 구입하게 된 '로마제국쇠망사 전6권'과(대광서림에서 나온 1권짜리 축약본만 읽었다)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본으로 다시 읽고 싶어 구입한 '역사'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그리고 이런 책들에 대한 얘기를 '아주 절묘하게' 제시한다는 '평생 독서 계획'
- 기존의 책들이 왜소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책들
- 아직도 책꽂이에는 빈 틈이 많아 읽히지 않은 채로 편히 누워있을 공간이 많다.
- 갑자기 '문학' 쪽으로 곁눈질을 많이 한 느낌이 든다.
책 읽기도 등산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정식으로 등반가를 양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등산학교' 과정을 졸업했고,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암벽등반'까지 배우고 경험해본 터여서 '등산은 오히려 투자'와 더욱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어렵다는 특성과 실패에 따르는 참담한 결과와 성공에 뒤따르는 희열과 보상 등에서 특히 닮았다. 그리고 치밀한 사전 준비와 충분한 경험과 훌륭한 안내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책 읽기로 돌아와서 얘기해 보자면, 독서도 '등산'과 닮은 점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부피가 얇은 책들은 쉽게 오를 수 있는 동네 주변의 야트막한 산들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두껍고 어려운 책들은 높이가 1,000m 혹은 2,000m 이상의 높은 산들에 가깝다고 본다. 한 사람의 평생의 노고가 닮긴 훌륭한 책들은 뛰어난 등반가가 '수많은 산들을 섭렵하고 난 뒤에' 오르게 되는 5,000m ∼ 8,000m 급의 '고봉'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높은 산은 그 자체로 낮은 산들을 수없이 많이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낮은 산에 올라서는 도저히 볼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놀라운 장관과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국내의 여러 산들을 자주 찾아 오르고 몇년 전 중학생이던 아들과 함께 백두산도 종주해 봤지만, 여전히 히말라야에는 여태껏 가보지 못했다. 10여년 전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어느 겨울날 등산학교 담임 선생님과 같은 반 동기들과 함께 '태백산 겨울산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막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선생님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았다. 네팔에서 직접 사오신 세계 최고의 봉우리들을 담은 사진인데 내 방 책상 앞에서 고개만 들면 (사진으로나마) 언제나 그 멋진 광경을 마주할 수 있다.
한때나마 에베레스트를 올라가 보고 싶은 열망도 있었던 것 같지만,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언젠가 부터는 저 높은 산들을 '실제로'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5,000m급의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도 다녀왔으면 하는 소박한(?) 꿈으로 줄어들었는데, 그 꿈만은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어서 여태껏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독서가 등산에 비해 명백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육체적 능력의 측면에서 나이가 들수록 등산이 어려워지는 반면 독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 히말라야의 웅장한 모습이 담긴 사진의 일부
('파노라마' 사진의 일부분, 이 사진에는 Mt. Everest를 비롯 4개만 보이나, 전체 사진에는 16곳이 보임)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