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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훌륭한 역사가는 이야기꾼 기질과 과학자로서의 재능을 겸비하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뿐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것 같은가'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이미 일어났던 일을 기술하고 있으므로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일어났던 일은 다시 되풀이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역사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문헌은 없다.
- 모티머 J. 애들러
이 책을 지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역사가가 아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로 재직중이면서도 조류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으로 그 영역을 점점 확장해 왔다. 그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공룔에 대한 연구에 못지않게 과학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될 것임을 낙관하면서, 인류사를 하나의 과학으로 발전시키는 과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1972년 7월에 열대의 섬 뉴기니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을 때 우연히 만난 얄리라는 정치가로부터 받은 질문은 이렇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문명)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후 저자는 인류의 진화, 역사, 언어 등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 연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바로 이 책을 통해 얄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실로 '인류 문명의 불평등에 대한 기원'을 찾아나서는 방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의 탐구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25년 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를 담은 이 책은 1만 3,000년에 걸친 모든 대륙의 인류의 고고학적 발자취와 문자와 언어등에 남아있는 그 흔적들을 쫓아서 우리들을 기나긴 시간과 넓디 넓은 공간들로 흥미진진하고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이 책은 인류 문명에 관한 기념비적 저서일 뿐만 아니라 모티머 J. 애들러의 말대로 이야기꾼 기질과 과학적 재능이 겸비된 훌륭한 역사가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며, 역사가 얼마나 과학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누가 봐도 뚜렷이 알 수 있는 '문명의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명의 불평등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 기존의 인습적인 지식들은 상당부분 인종적 민족적인 차이에서 그 해답을 찾아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은 현상적인 이유일 뿐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각 대륙의 인류가 지닌 타고난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경험했던 '지리적 환경적 차이' 때문이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또한 그러한 '지리적 환경적 차이'가 수만년 혹은 수천년간 지속되면서 각 대륙마다 식물과 동물의 작물화 가축화를 통한 식량 생산 체제가 여러모로 달라졌고, 이 중대한 차이가 결국 총, 균, 쇠로 대표되는 문명의 차이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각 대륙마다 오랫동안 누적되면서 크게 달라진 기술 문명의 차이가 인류 역사를 극단적으로 바꿔버린 사례는 무수히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항해인 콜럼버스의 1492년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1519년에 코르테스가 아스텍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멕시코 해안에 상륙한 기록에 뒤이어 1532년 피사로가 잉카제국의 황제 아우타알파를 생포한 사건에서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
지난 1만 3,000년 동안 일어났던 인구 교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구세계와 신세계 사회의 충돌에서 빚어진 최근 500년 동안의 인구교체였으며, 막상 그 교체에 걸린 시간이라는 것도 기나긴 인류 역사에 비춰보면 몇 장의 스냅 사진을 찍는 정도에 불과할 만큼 짧았던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일이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전개된 원인은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도 시사하는 바와 같이 총, 균, 쇠로 상징되는 기술과 문명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임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기술문명의 발달이 더욱 가속화된 오늘날에 와서는 소위 '와해 기술'이 등장할 경우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기존 기술을 채택한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가 순식간에 도태되고 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코 그 변화의 속도를 더하면 더했지 늦추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도 있어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역사적 교훈의 하나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의 차이가 인구 교체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는 했어도 병원균이 맡은 지대한 역할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식량 생산과 정주형 생활로의 변모에 따라 인구의 조밀화가 이뤄짐과 아울러 동물의 가축화가 초래한 병원균의 진화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내성을 갖춘 대륙의 인류에게는 그들의 숙주들을 쉽게 무너뜨리기 어려웠지만 그러한 내성을 갖추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던 신대륙 원주민들에게는 막강한 위력을 되찾을 게 뻔했다. 현대전에서 마치 탱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위력을 뽐낸 스페인 기병대의 말(馬)들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불가항력이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들의 침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어서 신대륙의 인구 교체에 있어서 훨씬 더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역할을 떠맡았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한 두 세기에 걸쳐 인디언의 인구는 최대 95%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래 북아메리카에는 약 2,000만명 가량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코르테스와 함께 상륙한 구대륙의 유행병은 아스텍 제국 정복시 2,000만명에 달했던 멕시코 인구를 약 160만명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으며, 수백만의 백성을 거느리고 있던 잉카제국의 황제인 아타우알파를 보란듯이 생포해버릴 때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거느린 오합지졸의 숫자는 불과 168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한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후 오랜 세월 동안의 수렵 채집민에서 벗어나서 야생 동식물을 가축화 작물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저자는 많은 역사학적 고고학적 증거들과 아울러 생물학적 유전적 증거들을 동원한다. 이 대목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작물화 가축화하는 데 따른 어려움과 그 지난한 희생과 도전끝에 이룩한 성공 사례에 대해 높이 추켜세우기라도 하듯이 여러가지 흥미로운 얘기들을 매우 세세하게 밝혀놓기도 한다. 또한 쟁기를 사용하게 되고 농경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정주형 생활이 시작되면서 산아간격이 단축되고 인구의 조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식량의 저장이 이뤄지고 왕과 관료를 비롯한 전업식 전문가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각종 '발견'과 '발명'에 대해서도 그 발생 시기의 차이와 확산 속도의 차이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인류 문명을 크게 바꿔놓은 바퀴의 발명과 문자의 발명 과정에서부터 기술 문명과 문화의 확산이 어떻게 '자가 촉매 작용'과 '퇴행 현상'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도 흥미롭다.
이 책은 전 인류의 역사를 한 자리에 뭉뚱그려 놓은 셈인데, 저자의 주된 주장이 '환경결정론적' 시각이라거나 '지리적 결정론'이라고만 한정하기 힘든 과학적 증거들이 너무 명쾌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중요성이나 문화적 차이를 결코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다만 어떤 환경은 다른 환경에 비해 더 많은 재료를 구비하고 있으며 발명품을 이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도 한결 유리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고 애써 부연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꾼으로서 다양한 가정과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져가면서 역사의 예측가능성들을 시험해보는 점들도 재미있다. 저자가 역사적 교훈으로서 들려주는 몇 가지 사례들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특히 다음의 두가지 사례가 흥미롭다. 하나는 비옥한 초승달지대가 유럽에 추월당한 불운한 과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은 어쩌다 기술의 선도자 위치를 유럽에 추월당했을까?'에 대한 사례이다. 후자의 경우에 대한 대답의 단서는 엉뚱하게도 중국 조정의 두 파벌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찾고 있다. 많은 나라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뒷걸음질쳤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는 전 인류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들을 저자가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뛰어넘는 것 말고도 한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어느 곳이든 다루지 않는 장소가 없을 뿐더러 특히 흥미롭고도 신비롭게 여겨지는 지구상의 여러 오지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풍성하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곳들은 아프리카 대륙과 같은 큰 땅덩어리 말고도 그 옆에 놓인 놀라운 문명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다마가스카르섬을 포함하고 있으며, 자바, 뉴기니를 거쳐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남아있던 이스터섬에까지 이른다. 이스터섬은 겨우 인구 7,000명에 더구나 인력 이외에는 다른 동력원이 전혀 없었던 섬이지만 3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들이 널려 있다.
이 책은 1997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20세기가 낳은 중요한 과학 저술의 명저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특히 한글로 이 책을 읽는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해주는 점 한가지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인류의 문자를 비교 검토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한 논문을 1994년 미국의 과학 전문지《Discover》에 싣기도 했고, 이 책에서도 한글에 대해 '세계의 어떠한 문자 체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새로운 원칙으로 만든 전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 체계'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마침 한글날이 엊그제여서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우리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인가를 새삼 되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