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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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1932∼2016)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였다. 이만큼 특이한 이력을 지난 그가 최초로 쓴 소설이 1980년에 출판된 『장미의 이름』이었고, 이 책은 이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여기에 크게 고무된 에코는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 『푸코의 진자』, 『프라하의 묘지』 등을 연이어 쏟아냈고, 소설 말고도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궁극의 리스트』 등 많은 책들을 써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여러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최고의 석학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엄청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를 일약 세계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불쑥 올려 놓은 작품이다. 도대체 그 책에 무슨 내용이 담겼길래 전세계의 독자들이 그토록 이 작품에 환호했을까. 장미의 이름들로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뜻밖에도 『장미의 이름』에는 장미에 관한 이야기가 아주 짧게 비유적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쉽게 말해서 장미의 이름 속엔 그 어떤 장미의 이름조차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말 뜻밖에도 이 책 속엔 장미가 아닌 기묘한 책 한 권이 등장한다. '장미의 이름' 속에 아침에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마는 장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결코 시들지 않는 희귀한 책이 한 권 등장한다는 사실로부터 실로 수많은 상상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게다가 그 한 권의 책이 참으로 절묘하다. 가령, 그 책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책이라면? 또한 발견된 적도 없는 그 책이 이미 금서로 지정할 정도로 위험한 책이라면? 더군다나 그 책이 중세의 어느 철옹성처럼 당당한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에 깊숙히 숨겨져 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을 둘러싼 수도원 내부의 갈등 때문에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더군다나 그 연쇄 살인 사건이 《요한의 묵시록》에 따라 7일 동안 단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착착 진행된다면?

 

어쨌든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과는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를 담은 책일 수밖에 없다. 지난 날의 장미는 얼마나 빨리 시들고 마는가.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그러나 한 권의 책은 얼마나 끈질기게 오래 살아 남아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비록 그 책이 그토록 연약하고 가냘픈 종위 위에 쓰여졌음에도 말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책에 얽힌 이야기임을 새삼 강조한다. 그것도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던 14세기에 실존했던 어느 인물의 입을 빌어서.

 

누항(陋巷)의 일상 잡사가 아닌, 책에 얽힌 이야기여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저 모방의 도사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명언이 한숨에 섞여 나올지도 모르겠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이쯤되면 이 작품에 담긴 책이 얼마나 흥미로울지는 거의 보장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 책이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임에랴.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는 이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을 중세의 요새 같은 수도원에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채, 장서관의 희귀한 금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빚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당대의 수도원이 품고 있음직한 온갖 음험한 분위기와 상징들과 함께 절묘하게 버무려 놓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의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도록 옭아맨다.

 

중세 유럽 수도원이 지니고 있는 음험한 상징들은 무엇일까. 그곳은 단지 탈속한 수도사들이 죽어서조차 거기서 뼈를 묻어야만 하는 영구히 속박된 기도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대학을 대신해서 인류의 지혜가 보존되고 전승되는 지식의 요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으로 대표되는 교권 옹호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정신적 · 물질적 토대였고, 수도사들의 온갖 인간적 번민과 고뇌가 교차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의 수도원은 '감히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성채의 표징'으로 성별(聖別)될 만한 어마어마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러고는 놀라고 말았다. 기독교 세계에서 흔히 보아 왔던, 수도원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벽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벽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에 놀란 것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 건물은 바로 수도원의 본관이었다. 이 본관은 8각 기둥 건물이었지만, 멀리서는 4각 기둥 건물(성도의 위엄과 금성철벽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였다. 남쪽은 수도원이 앉은 고원과 닿아 있었고, 북쪽은 산의 가파른 사면에서 솟은 듯이 불겨져 있었다. 아래쪽에서 본 광경도 소개해야겠다.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른 석벽이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는데, 색깔이나 재질이 한결같은 이 석벽의 정점은 그대로 탑과 관망대(하늘과 땅을 두루 아는 대가의 작품임에 분명한)였다. …… 크기나 형태로 보아 본관은 뒷날 내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보았던 카스텔 우르시노, 카스텔 데 몬테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 범접하기 어렵게 하는 위용이나, 거기 다가가는 행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위구심(危懼心)으로 말하면, 후일에 내가 보게 되는 어떤 수도원이나 성채도 이와 같지 못했다.

 

 

소설의 시간적인 배경이 때마침 1327년 11월이라는 사실은 교권과 속권의 권력 갈등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저 유명한 <아비뇽의 유수>와 직접 연결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교황인 요한 22세는 당연히(!) 프랑스 남부지방 소도시인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에 머물고 있었으며, 당시의 황제인 루트비히와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등을 빌미로 격렬하게 대립했다. 급기야 교황 요한은 루트비히 황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황제는 교황을 배교자(背敎者)로 비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벌어졌던 극렬한 권력 다툼은 소위 <프란체스코회 청빈 논쟁>으로 번졌고, 수많은 카톨릭의 신학자와 사제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싸움에 휘말려들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시대 배경을 소설의 시간적인 배경으로 골라잡은 것이다.

 

1322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황제는 정적(政敵)이었던 프리드리히를 거세했다. 황제가 둘일 때보다는 하나 있을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황 요한은 승리자인 루트비히 황제를 파문했다. 우리 황제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배교자(背敎者)로 비방했다. 바로 이 해에 프란체스코 참사회가 페루자에서 소집되었고 총회장이었던 체세나의 미켈레(1270∼1342)는 엄격주의파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고, 신앙과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해,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usus facti(사용권, 이용권)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교단의 가치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이 귀중한 헌장은, 교황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했다. 이는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주교를 임명하는 황제의 권리를 부인하고, 교황이 황제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했던 교황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요한 22세는 1323년 회칙(回勅) <쿰 인테르 논눌로스>를 통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언을 묵살해 버렸다.(33∼34쪽)

 

마침 이럴 때 소설의 주무대인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교황과 황제의 첨예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 참석하는 주요 인물들인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체세나의 미켈레, 베르나르 기 등은 모두 당시 카톨릭 세계를 대표하던 실존인물들이다. 이들이 황제와 교황을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청빈'과 '이단 논쟁'을 둘러싸고 벌이는 불꽃 튀는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들이 격렬하게 맞붙어 자신들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하는 와중에도 연쇄 살인 사건은 계속 진행되고, 이단 조사관을 지낸 양 진영의 고위급 핵심 멤버들은 이 살인 사건조차도 자신들의 영역 확대를 위한 싸움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파고들수록 의혹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공간은 뜻밖에도 본관에 있는 장서관으로 모아진다.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들이 한결같이 장서관의 사서나 보조 사서 혹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특명을 받고 수도원에서 열리는 실무 회담에 파견된 윌리엄 수도사는 그 수도원에 도착하던 당일부터 비범한 추리력을 발휘하면서 단숨에 수도원장의 신임을 받고 살인 사건의 조사를 떠맡는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유난히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14세기 초반의 교황파와 황제파의 권력 다툼을 조정하기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에 어찌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불려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위 '프란체스코회 청빈 논쟁'을 둘러싼 치열한 논리 싸움에서 황제파에 가담한 인물들은 체세나의 미켈레(1270∼1342), 오컴의 윌리엄(1280∼1349), 카잘레의 우베르티노(1259년~1329년) 등이 대표적이었고, 교황파를 대표한 인물들은 중세의 악명 높은 이단 심문관이었던 베르나르 기가 주축이었다.

 

이들이 주고 받는 날선 논쟁들은 중세의 이단 논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양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을 본받아 교회의 재산권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황제파와 그에 반대하는 교황파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했고, 교황파 인물들은 마침내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이단으로 몰고 간다. 그들이 논리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상대방에 의해 순식간에 이단으로 내몰리고 결국은 화형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타협점은 좀체로 찾기 어려웠고, 소설 속에서도 그 회담은 결렬된다. 먹을 게 부족해서 밤마다 수도원을 들락거리며 몸을 팔며 주방의 식재료를 얻어가던 애꿎은 사하촌 처녀 하나만을 희생물로 삼은 채.

 

이 작품이 책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실존하는 많은 책들이 수많은 등장인물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가운데 주인공 격인 책은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시학』에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 서사시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충분한 설명이 담겨 있지만 희극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만 나올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대해 쓴 『시학 2편』이 망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장미의 이름』속에 '희극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책 속의 책'이자 수도원 연쇄 살인 사건의 핵심적인 사물로 재등장시키고 있다. 망실된 줄로만 알았던 바로 그 책이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미궁 같은 장서관에 깊숙히 숨겨져 있었고, 이 책을 둘러싼 모종의 암투가 수도원 연쇄 살인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밝혀진다는 얘기다. 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학』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증거로 『시학』1449b 21을 보면 희극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 후로는 희극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정치학』 1341b 38을 보면 '카타르시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에 관해서는 『시학』을 참조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시학』에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 천병희 옮김, 『시학』, <옮긴이 서문> 중에서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다.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장장 9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추리 소설이 이렇게 단촐한 문장으로 시작해도 좋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독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수기(手記)인 이유 자체가 미궁을 헤메는 것처럼 몹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작가는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이야기가 결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교묘한 장치'를 통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1968년 8월 16일, 작가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그 책의 저자는 당연히(!) 실존인물이었던 발레(1754∼1824)라는 프랑스의 수도원장이 펴낸 책이었다. 출판사는 1842년 파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였다. 책의 제목은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였다. 이 책 이름에 등장하는 마비용 수도사 역시 실존 인물이고 멜크 수도원 역시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원이다. 더군다나 이 수도원은 90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실제로' 로마 가톨릭의 본거지였으며, 때로는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요새이기도 했다.

 

멜크 수도원(출처:위키백과)

(멜크 수도원은 1089년 최초로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건축되어 1297년 대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다고 한다. 에코가 이 수도원을 소설의 배경 가운데 일부로 삼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 책에는 18세기의 석학 마비용(1632∼1707)이 멜크 수도원에서 발견한 14세기의 수기를 충실하게 복원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가는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독파한 뒤 단숨에 대학 노트에다가 이 책을 번역한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이 탄 배는 다뉴브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멜크에 닿는다. 작가는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아드소 수기의 사본을 찾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러다가 그만 그 중요한 책을 잃고 만다. 연인과 함께 이동중이던 작가가 몬트제 호반에서 짧게 1박할 때 그들의 관계가 끝장 났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 비극적인 밤에 연인과 헤어질 때 그 소중한 책마저 상대방의 짐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작가는 그 책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 파리의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을 뒤지는가 하면 유명한 중세학자와도 상의해 보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다. 라 수르스 수도원으로 달려가도 그런 책을 낸 적이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생각마저 품는다. 어쩌면 그 책이 위조된 유령 도서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던 중에 작가는 197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코리엔테스 거리에서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작은 고서점의 서가를 뒤지다가 우연히 밀로 테메스바르라는 사람이 쓴 카스틸리아어판 소책자 『장기 놀이에서의 거울 이용법』을 찾아낸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책에 아드소의 수기로부터 인용된 대목이 상당수 있는데다가, 그 내용 또한 발레 수도사가 불역한 수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까마득한 옛날 '프랑스 접경에 있는 아페니노 산맥 중앙부 기슭쯤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일어난 '7일 동안의 기록'인 아드소의 수기가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움베르토 에코가 책에 대한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뒤섞어 '아드소의 수기'에 대한 실재성을 강조하는 수법은 곧바로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이처럼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 전달 방식은 일찌감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속에서 능청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보인 솜씨이기도 하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이야기는 결코 자신이 지어낸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아랍 사람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책이며, 자신은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다가 어느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 속에서 그 이야기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식이다.(☞ 다시 읽는 돈키호테)

 

움베르토 에코는 '아드소의 수기'를 소개하는 방식에서만 보르헤스에게 빚진 게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보르헤스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 딴 늙은 수도사를 소설 속에 직접 등장시킨 것이다. 『장미의 이름』을 단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결코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는 '책에 미친' 늙은 수도사의 이름은 부르고스의 호르헤였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 많은 수도사인데, 젊어서 한 때 수도원 장서관의 사서를 맡았지만 너무 일찍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그는 눈이 멀었어도 머리 속에 담긴 기억만으로 장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책들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눈 먼 수도사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는 게 마땅하다. 『장미의 이름』은 지적 호기심을 만낄할 수 있는 드물게 뛰어난 추리 소설인데, 호르헤의 비밀을 이런 글에서 너무 자세히 드러내는 것은 미지의 독자들에게 결코 유익할 리 없기 때문이다.

 

비록 7일 동안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뜻밖에도 이 소설은 엄청나게 길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작가가 미리 세심하게 마련해 놓은 여러 장치들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프롤로그이다. 거기엔 '늙고 병든 몸으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갇힌' 아드소가 젊어서 수련사로 지낼 때 경험했던 '7일간의 기록'을 어떤 심정을 담아 썼는가가 절절히 베어 있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 바야흐로 바닥 모를 심연, 고요와 적막의 신성(神性)이 가득한 그 심연을 헤맬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의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욕망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싯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나는 보고 들은 바를 한 순간 산 순간,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기되 굳이 어떤 구상의 형식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 뒤에 오는 이들(가짜 그리스도가 먼저 오지 않는다면)에게 표적을 표적으로만 남기는 뜻은 글을 아는 교우로하여금 이를 음미하게 하기 위함이다.

 

원컨데 주님께서, 이름이야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온당하고 크신 뜻에 합당할 터인 저 대수도원 일을 투명하게 그려 낼 권능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때는 주후(主後) 1327년 말, 루트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 찬탈과 성직 매매를 일삼으며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온 해이다(죄 많은 사교의 우두머리가 누구던가?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황 요한 22세라고 부른 카오르의 자크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 수많은 다른 책들을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너무 희귀한 책들이어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독서욕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 배경이 14세기 초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에, 정말 뜻밖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이미 읽은 책들 가운데 '다시 한번' 펼쳐 읽고 싶은 책들을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 책들은 주로 희극과 웃음과 책과 도서관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만한 책은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들』이다. 도대체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눈 먼 수도사인 호르헤는 왜 그토록 '웃음'을 죄악시했던가를 그 책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플라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ㅡ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ㅡ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웃음을 사랑한 니체의 보다 결정적인 말은 이랬다. "신들도 위버멘쉬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 그들은 신성한 행위를 할 때조차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쓴 『웃음』이라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본질을 제대로 건드려보지 못했다던 '웃음의 비밀'을 그 철학자가 무려 2,000여 년 만에 다시금 들춰봤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베르그송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 연구'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다시금 찾아 읽어보고 싶다.(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한 철학자다.) 그 다음으로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다. 미궁처럼 끝없이 펼쳐진 바벨의 도서관 이미지야말로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원의 장서관 모습을 가장 닮았을 테니.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책은 뜻밖에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이 책을 꼽은 이유가 그저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인물과 같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조르바도 젊어서 한 때 그리스의 아토스 산자락에 위치한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었고, 케이블 고가 선로 계약서에 서명을 받으러 찾아간 수도원에서는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것처럼 '기묘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수도원 살인사건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 '살인 사건'과 얼마나 닮았을지 괜스레 궁금해진다.(☞ 아토스에 대하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이 책의 두께 때문에라도 끝까지 읽지 못한 독자들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괴롭힐(?)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이 책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전해진 놀라운 소식 하나도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덴마크의 어느 대학 지하실에 보관된 수백년 전 고서 가운데 희귀서적 3권에 맹독이 묻어 있었다는 뉴스였다. 중세시대 양피지에 적힌 라틴어 글자 판독을 위해 분석한 결과 고농도의 비소 성분이 거기서 검출됐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니다, 어쩌면 움베르토 에코는 이 정도의 뉴스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로서는 아무래도 궁극의 빅뉴스를 기다릴 테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고 약속했던 시학 제2권이 정말로 유럽의 어느 수도원의 장서관에서 발견되는 대사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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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3-12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전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읽은 중에서는 가장 지루하지 않고 흥미있게 읽었던 것이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해요. 물론 앞부분은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사실 기록이고 어느 것이 소설로서의 내용인지 혼동되어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읽어야했지만 그러면서까지 읽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게 한 매력이 있던 작품이었어요.
덴마크 고서의 맹독 소식은 오싹하네요. 그리고 곧 드는 생각은 그 희귀서적 세권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요! ^^

oren 2019-03-12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오래 전에 사 놓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답니다. 언젠가 읽을 기회가 오겠지, 하고 때를 기다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다른 분의 서재에서 <소설의 도입부, 최고의 첫 문장 Best 10>이라는 글을 봤어요(☞ http://blog.aladin.co.kr/caspi/10693048) 그 열 권의 책 가운데 제가 여태껏 안 읽은 책이 딱 두 권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었지요. 그래서, 올커니, 이제야 마침내 읽을 때가 찾아왔군, 하고 마음 먹은 후로 틈을 엿보기 시작했더랬지요. 사실, 이 책이 너무 유명한 데다가, 나름대로 기대가 컸던 탓인지 엄청 재미있지는 않더라구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을 자주 떠올렸는데, 똑같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그 소설이 저는 훨씬 재미있더라구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날 정도였으니까요.(그 책도 몹시 방대하고 복잡한 데다가, 소설의 초반과 중반과 후반에 나오는 인물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안개가 걷히듯이 마침내 하나 하나 촘촘히 연결되어 드러날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동적이더군요.) 그에 비하면 <장미의 이름>은 ‘결말 부분이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추리소설의 결말을 미리 안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를 그 때 절절히 느끼겠더군요.

그리고, 이 소설의 도입 부분에 사용된 트릭은 보르헤스의 소설들, 가령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등에서 이미 봐왔던 터라 ‘작가가 일부러 이러는구나‘ 하고 재빨리 눈치를 챘었지요. 미처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지 않은 상태로 이 책을 먼저 붙잡았더라면 저도 엄청 헤맬 뻔 했지요. 그런데, 일반 독자들이 의외로 이런 데서 많이 당하면서(?) 중도에 너무 일찍 책 읽기를 포기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긴 하더군요. 그게 다 작가가 일부러 독자들과 함께 잠시 장난을 즐기자고 하는 수법인데 말이죠. 실컷 뺑뺑이를 돌리고 나서, 나 잡아 봐라~, 어디 있게? 하는 거죠.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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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졸음과 납덩어리 같은 아른함이 몰려오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지는 그때, 그 우렁찬 계명(鷄鳴)이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다.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침나절 길다란 낫을 가는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는 울림이다. 공기에서는 취할 듯이 짙은 향내가 난다. 이제부터 뜨겁고 건조한 하루가 되리라. 이글이글 열을 지은 채원(菜園)의 풀줄기가 햇볕 속에서 찌듯이 익어가리라.

 

화려한 농촌의 소음으로는 길다란 장대에 달린 나무 갈퀴로 마른 풀을 뒤적거릴 때 들려오는 메마른 바삭거림이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느덧 경건한 기도 소리 들리는 밤을 생각하게 된다. 초원 사이로 열린 오솔길을, 그리고 마주 걸어오는 쟈네트의 어깨 위로 드리워진 새하얀 수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사랑스러운 끄적임.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라는 구절 다음에 한동안 막혀버린다.(14∼15쪽)

 

(나의 생각)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 너무 오래다. 한겨울 새벽을 힘차게 열어젖히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립다. 까마득한 옛날,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던 암탉들이 소 외양간이며 마루 밑에도 숨겨 놓곤 하던 달걀의 따스한 감촉도 그립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마다 괜스레 훼방이나 놓곤 하던 그 옛날, 그 암탉들은 우리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 * *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나는 즐겨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웃에서 들려와서는 안 된다. 얼마간 바람결을 타고 불어와 조화된 소리여야 한다. 그 금속성은 내 어린 가슴을 한껏 설레게 했었다. 프랑켄의 장터에 자리잡은 대장간에서는 섬뜩한 느낌의 풀무가 훨훨 타오르는 석탄 불길 속에서 용해되고 있었고, 시커먼 칠을 묻힌 대장장이가 멀찌감치 서서 쇠망치로 달아오른 쇳덩이를 때리면, 불똥의 빗줄기가 꿈처럼 아름답게 곡선을 그으며 어두운 대장간 창고 안으로 비산(飛散)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분수의 낙수 소리. 중세풍의 슈바벤 할 시(市)의 어느 주막 앞에는 분수가 하나 서 있어 온 달밤을 지새우도록 전설과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15∼16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도 대장간이 있었다. 그 대장간은 마을의 신작로를 살짝 벗어나 냇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대장간 바로 옆에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이 있어서 어린 아이들에겐 괜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대장간은 주로 여름철에 바빴던 것 같다. 우리가 대장간 구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던 때도 주로 '매미'를 잡기 위해 그곳까지 진출했던 여름방학 때였으니까. 아무튼 대장간 구경은 소리 보다는 빛이 중심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릴 때마다 불똥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좋은 구경거리도 없었다. 

 

 

 * * *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樹冠)을 휙휙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고성(古城)이나 농장의 뜰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도깨비라도 나올 듯 매우 기묘한 것이다.

 

거울처럼 잔잔하게 잠든 호면(湖面)에서 보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 보라. 끌어올린 노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원의 물방울. 알아보기도 힘든 자디잔 물체와 들릴 듯 말 듯한 소음.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스러져가는 것이다.

 

바다의 소음. 칠흑 같은 밤, 그것이 그윽하게 성난 듯이 백사장의 조약돌이나 해변의 암석에 탄식하듯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를 야릇한 그리움과 설렘 속에 몰아넣는다. 그것은 속세의 음성이 아니라 해신(海神)의 음성이며, 수정(水精)의 유혹하는 호소이며, 인어의 노래이다.

 

산골짜기에서 와르릉 꽝꽝 바위 구르는 소리. 저 푸른 절벽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시무시하게 쿵쾅거리는 굉음! 다시 한번 이 죽음의 음성은 바로 곁에까지 왔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가슴 깊숙이까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던가.(16∼17쪽)

 

(나의 생각)

 

몹시도 추운 한겨울, 썰매를 타러 나간다거나 연을 날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 닥치면, 문풍지 바른 문틈 사이로 '우웅~ 우웅~' 하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그런 날에는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하루종일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든다거나 자전거를 만들며 놀곤 했다. 그런 날 점심 매뉴는 으레 김치와 콩나물이 적당히 버무려진 질펀하면서도 뜨끈뜨끈한 비빔밥이었는데, 거기다 고추장을 적당히 비벼 먹으면 이내 후끈하게 땀이 났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수수깡 놀이는 저녁나절까지 계속 되곤 했다. 그런 날에는 '우웅~ 우웅~'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도 온종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리곤 했었다.

 

 

 * * *

 

 

전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나는 더없이 사랑한다.

 

또 그르릉거리는 뱃고동과 추진기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닻의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삐걱대는 소리. 투박한 시골의 우편마차 위에서 철썩 내리치는 채찍의 울림. 비행기 모터의 성급한 붕붕거림. 이것은 귀가 겪는 순수한 음향의 모험들이다. 고도(古都)의 아치 성문을 덜그럭덜그럭 지나는 말발굽 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방랑하는 시인 아이헨도르프를 생각하고, 마리안네 폰 빌레머(장년기 괴테의 애인)의 여행복에서 풍기는 라벤더의 방향(芳香)을 생각하게 된다.(17쪽)

 

 

 * * *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힌 물주전자의 노랫소리는 나를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엌, 파란 그릇들로 가득 찬 할머님의 부엌, 곡식과 과일 냄새 풍기는 농촌의 부엌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와 같은 소음인 것이다.

 

헤센과 프랑켄의 작은 마을들,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밤의 소음들이 있다. 밀가루 덮인 농촌의 물방앗간 방파제 위로 단조로운 파도를 치면서 끊임없이 좔좔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버릇에 젖은 어느 주정뱅이가 포도(鋪道) 위를 비틀비틀 비척거리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끄륵대는 트림 소리. 돌풍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손마디인가, 덧문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 문간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어느 처녀와 총각의 입맞춤 소리. 그리고 교회 탑의 시계가 뚝딱거릴 때마다 녹이 슨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18쪽)

 

(나의 생각)

 

언제나 쌀가루가 뽀얗게 덮여 있던 우리 마을 방앗간은 언제 없어지고 말았던가. 벼베기도 다 끝난 초겨울쯤, 볏가마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방앗간에 갈라치면, 그곳엔 언제나 곡식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아저씨가 계셨다. 온갖 벨트들이 바삐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새하얀 쌀알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던 그 풍경들이 새삼 그립다. 가끔씩 바삐 돌던 벨트가 멈춰 서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참았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엔 소음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이 멈춰 설 때마다 방앗간 뒤켠에 있던 큼지막한 발동기의 시동 거는 소리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백남봉의 소리 모사에서도 언제나 백미는 발동기 시동 거는 소리였다.  ‘돼지가 새끼를 납니다. 그때 나는 소리입니다. 꿀꿀’, ‘부산에서 인천으로 날아온 지친 기러기입니다. 끼룩 끼룩’ 하면서 온갖 소리를 멋지게 흉내 내던 그 옛날의 소리 모사꾼들의 목소리도 이젠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 * *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지어 나르는 뇌명(雷鳴)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ㅡ 하는 가슴 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18∼19쪽)

 

 

 * * *

 

눈(雪)이 일으키는 소음도 내가 사랑하는 소리에 속한다. 섬세하고 알알한 싸라기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봄철 높새바람에 무너져내리는 눈사태의 우레 소리까지. 마을 우편배달부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걸어오는 발소리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ㅡ 반갑고 궂은 소식, 아득히 먼 세계가 이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차역의 덜커덕대는 소리. 도시의 왁자한 소음. 해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뜨거운 그리움이 사박거리며 함께 들려오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까지.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그것 역시 신비스럽다. 들리는가 하면 어느덧 지나쳐버린다. 그렇게 불현듯 스쳐 불어가는 것이면서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이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연주할 때, 그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꽥꽥 긁어대며 활주(滑奏)하는 불협화음 뒤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장려하고 거창한 음(音)의 바다가 높이 펼쳐지는 것이다.(19쪽)

 

(나의 생각)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겨울방학때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빨간 색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였다. 그 아저씨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달려오다가 우리집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소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편물 가방을 열어젖히면, 거기선 어김없이 '연재 만화'가 실린 소년동아일보가 특유의 신문지 냄새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 당시엔 어린이용 '연재 만화' 만큼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도 드물었다. 연재 만화 속의 풍경들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아득히 먼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 * *

 

 

뚝…… 뚝……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지난날 수업 시간에 들리던 납같이 무거운 소음.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피로에 지친 울먹한 음성이 들려왔다. "Nemo ante mortem beatus" ㅡ 어느 누구도 죽음에 직면해서 행복을 구가할 수는 없다. 소년은 노(老) 교수의 육중한 지혜에는 아랑곳없이 창 앞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걸려 있는 전선줄 위로 수백 개의 물방울이 나란히 매달려 있어서, 일순간 가만히 방울 지어 있다가는 다음 방울에 밀려 곧 부서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뚝…… 뚝…… 그것은 대자연의 언어이며,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이다. 또한 그것은 바다의 인사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넘쳐흐르는 샘물의, 돌 고드름 열린 종유동으로부터의 인사이다. 소곤거리는 분수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인사이며, 나이아가라와 라인 강의 뇌성(雷聲)이며, 아득한 해안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이다 ㅡ 이렇듯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야성과 위대함, 충만함과 풍요함이 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20쪽)

 

 

 * * *

 

 

봄날 저녁 떼지어 들끓는 풍뎅이의 붕붕거림. 이제 곧 붉은 만월이 떠오르리라. 거리는 어느덧 시골 처녀들의 다감한, 조금은 구슬픈 노랫소리로 가득 찬다.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선율이라도 끼어든다면, 그곳에야말로 깊어가는 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감미로움이 자리잡는 것이다.

 

아코디언 켜는 소리. 그 소리를 못 들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깊은 밤, 방 안에서 무엇인가 가구에 딱 부딪히는 소리. 누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가는 걸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들의 잠자리를 굽어보시는 어머니였을까? 요정이었을까? 겁 많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밤중 방 안에서 나는 유령 같은 소리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환희에 겨운 두 연인의 잔 부딪치는 소리. 춘삼월, 습기 찬 풀밭에서 연주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 ㅡ 그것은 목신(牧神)이 새로이 인생의 불멸을 구가하는 소리였다.(20∼21쪽)

 

 

 * * *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눈 녹은 물줄기가 홈통으로 흐느낌처럼 후둑후둑 쏟아지는 소리. 물고기가 잔잔한 수면으로 팔딱 뛰어오르는 소리. 어린아이의 종종거리는 발소리. 바람 잠든 날, 전선줄의 윙윙거리는 소리 ㅡ 이것은 마을 소년들이 먼 곳의 사람들의 욕설처럼 변덕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스런 기상의 신호이다.

 

아, 한 잎 가랑잎이 살그머니 떨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지친 소리. 아직도 나무에는 여름이 달려 있는데 어느덧 한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팔락거림이나 출발을 앞둔 말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자랑스러운 소리이며 승리의 소리인가! 대목을 앞둔 장터에서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목쉰 음성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희가 막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감사와 축복, 자랑과 기쁨의 미소를 띄울 때, 터져 나오는 갈채 소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21∼22쪽)

 

(나의 생각)

 

불현듯 스치며 떠오르는 옛 추억들은 섬광처럼 반짝 빛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게 특징이다. 그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누구에겐들 없겠냐마는, 그런 느낌들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포착하고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수필가였던 안톤 슈낙의 글 솜씨가 참으로 부럽다.

 

 

 * * *

 

 

찾아오는 여인의 발소리는 온 심장과 기대를 끌어당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정원에 깔린 자갈 위로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온다. 가볍고 날렵하게 사뿐사뿐 걷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소리. 축복의 발소리, 후광을 지닌 발걸음, 그것은 걸음 중의 걸음 소리이다.

 

정적의 소리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위(無爲)로부터, 근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심연의 흐름 ㅡ 바로 오르간의 음악 소리요, 조개껍질의 소리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 속을 흐르는 피의 음악이다. 심실(心室)의 노래이며,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인 것이다.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은 자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입맞춤은 심장을 그렇게 고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질주하며 울리는 격동을 듣고 있다. 이 이중창을 듣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단은 일이란 지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다.(22∼23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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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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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많은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10∼12쪽) 

 

 

 * * *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찌기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2쪽)

 

(나의 생각)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던 풍경이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이었다. 그곳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장소였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눈싸움 장소였다. 추운 겨울에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기엔 너무나 따분한 날, 거기선 개구장이 녀석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훔쳐 낸 성냥불로 불장난도 치곤 했다. 어른들처럼 몰래 잎담배를 말아 피워보기도 했다. 내가 입대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 마을 우리 집에는 30여 년 전에 우리 식구가 서울로 떠나올 때 이웃 마을에서 이주해 온 그 식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눌러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옛날에 우리 집이었던 그 집을 찬찬히 둘러 보고 오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옛날 우리 집이었던 그 집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 집은 이미 남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미 30년 이상이나 남의 집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남의 집으로 남아 있을 그 집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타깝고 아련한 느낌부터 맛본다. 내가 한 때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 다른 낯선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 * *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짓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ㅡ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3쪽)

 

(나의 생각)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를 바라보는 느낌은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게 아닐까. 한 해 동안의 고된 노동이 비로소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기서 무언가를 불에 태울 정도로 한결 여유롭다는 느낌부터 들지 않는가. 고요한 한밤중에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들려 오던 '컹컹' 개짖는 소리 또한 슬프기보다는 뭔가 아련한 느낌부터 먼저 떠오르는 소리가 아닐까. 그 개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짖는 지와는 상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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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oren 2019-01-01 13:4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 조셉 캠벨, 『신화의 힘』중에서


 *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따라가자면 그 곁가지가 너무나 많아 매번 곤욕을 치른다. 하르퓌아이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면 제법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을 두루 거쳐야만 '이야기의 얼개'가 완성된다. 나는 꽤 오래 전에 이 마녀새에 얽힌 신화를 몇몇 책을 통해서 읽고 나서 그 강렬한 인상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문득 니체의 작품 『선악의 저편』에서 정말 뜬금없이 이 마녀새를 다시 만났다.(http://blog.aladin.co.kr/oren/8597307) 그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이 마녀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찾아 읽었고, 글을 하나 지어볼 요량으로 신나게 자판을 두드려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고작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이렇게나 '수많은 곁가지 이야기'를 다 펼쳐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자꾸만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마녀새' 이야기를 최근에 '기가 막힌 장소'에서 다시 발견했다. 무대는 이탈리아 나폴리 앞바다의 어느 '무인도'였다. 좀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그 마녀새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태풍』속에서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엔 그 마녀새를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냈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다 만 '하르퓌아이' 이야기를 마저 쓸 힘을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반쯤은 '과거에 써 놓았던' 글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이번에 '다시금 이어 쓴' 글이다. '신화'는 몇 년 사이에 쉽게 바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쓴 글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쓰여졌다고 '변질'이나 '변색'을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다. 다소 먼 여정이지만, 어쨌든 이제 다시 떠나 보자.


이 마녀새를 다루기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장소는 '파가사이 항'이다. 파가사이는 텟살리아 지방의 해안도시다. 거기엔 고대의 수많은 영웅들이 '황금 양모피'를 찾기 위해 '지상 최대의 모험'을 떠날 채비를 갖춘지 오래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인물들만 하더라도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다.

 

원정대장은 이아손이 맡았다. '원정대원'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있었다. 고대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되어 '쌍둥이자리'에 오른 카스토르폴뤼데우케스도 동참했다. 이 두 쌍둥이는 제우스가 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와 사랑을 나눈 후 낳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온 인물들이다. 하나의 알에서는 카스토르와 헬레네 남매가 나왔는데, 이 헬레네는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헬레네다. 다른 알에서는 폴뤼데우케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 남매가 태어났는데,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물론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을 떠맡았던 아가멤논의 아내이자, 자신의 정부(情夫)와 짜고 귀환하는 승전사령관이자 남편인 아가멤논을 독살한 바로 그 여자다.

 

이들 쌍둥이 장수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헬레네 납치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을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크레테 섬'을 한 번 다녀와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섬에 갇혀 지내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나라의 왕비 파시파에가 황소에 반해 '교접'을 하고 얻은 괴물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였고, 그녀가 암소로 분장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당대 최고의 장인(匠人)이었던 다이달로스가 기가 막힌 솜씨로 빚은 '나무 암소' 덕분이었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필요가 있을 때 왕비는 다시 한번 다이달로스를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지어달라고 말이다. 그 미궁에서 첫 번째로 빠져나온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고, 그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홀딱 반한 '아리아드네 공주'가 '실'로 그를 묶어 준 덕분이었다.

 

어쨌든 해마다 아테나이의 젊은 처녀와 총각들을 공물로 바치게 해서 꿀떡꿀떡 삼켜 넘기던 공포의 괴물이 미노타우로스였고, 그 괴몰을 처치하기 위해 자진해서 미궁 속으로 뛰어들어갔던 인물이 테세우스였으니, 그가 임무를 마치고 아테나이로 무사히 귀환했을 때 받았을 환영행사가 얼마나 거창했을 것인지는 달리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자가 젊어서 한 때 자신의 친구와 공모하여 '카스토르와 폴뤼네이케스 형제'의 누이인 헬레네를 납치한 적이 있었다. 쌍둥이 장수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진 자신들의 누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고 다닐 무렵 그녀의 행방에 관해 '결정적인 제보'를 해 준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아카데모스였다. 누이를 찾은 쌍둥이 형제는 제보자의 공을 기려 그의 고향을 '아카데메이아'라고 부르게 했고, 아테나이 근교에 있는 그 마을은 훗날 플라톤이 철학을 가르키는 '학문의 전당'을 세움으로써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학원 이름이 바로 '아카데메이아'였다. 그 이름은 오늘날 숱한 학원과 학교뿐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에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상에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이야기가 순식간에 너무 곁가지로 흘렀다. 다시 고대의 항구로 되돌아 와서 그 배에 탄 영웅들을 다시금 살펴보자.

 

아르고스는, 원정대가 50명으로 짜일 것이나 그 대원 하나하나가 일당 백의 범 같은 장수들이어서 그 크기와 무게 또한 엄장할 것인즉 유념하고 배를 지으라는 이아손의 말에 따라 배를 지어놓고도, 모여든 장수들의 면면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50명의 원정대는 하나의 '미크로코스모스(소우주)'를 상기시킨다. 아이손이 이 미크로코스모스를 짜고, 배 지을 뜻을 세운 선견자(先見者)라면, 이르고스는 그 뜻에 따라 미크로코스모스가 깃들 그릇을 마련한, 천궁으로 말하면 헤파이스토스에 견줄 수 있는 섭리의 집행자다. 날개가 달려 있어서 하루에 천 리를 날 수 있고 하루에 500리를 걸을 수 있는 저 보레아스(북풍)의 두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는 이 선견자가 보고 집행자가 빚은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다리이고, 아틀라스를 대신해서 하늘 축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와, 말을 타고 걷는 것보다 둘러메고 걷는 쪽이 편하다는 스파르타의 역사(力士) 폴뤼데우케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팔이며, 새 우는 소리에서 모이라이(운명)의 발소리를 듣는 예언자 몹소스와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로 뱃길을 짐작하는 암피아라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귀고, 90리 밖에 있는 작대기가 참나무 작대기인지 소나무 작대기인지 알아보는 천리안(千里眼)의 망꾼 륀케우스와 밤에 보아둔 별자리로 낮의 뱃길을 짐작하는 천부적인 뱃사람 나우폴리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노래와 수금 가락으로 저승 왕 하데스를 울리고, 영원히 도는 익시온의 불바퀴를 멈추게 했던 트라키아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있고, 배를 몰고 산모룽이을 돌아가되 노수(櫓手)로 하여금 노 끝으로 산자락 꽃을 어루만지게 할 수 있는 보이오티아 최고의 키잡이 티퓌스도 있으며,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둔갑의 도사인 페리클뤼메노스도 있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헤엄친다는 수영의 명수 에우페모스도 있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인이나 영웅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신들에게 비는 인간을 썩어가는 인간이라고 믿는 참람한 인간 이다스도 있었고,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여걸 아탈란타도 있었으며, 신들에게 빌지 않는 인간을 오만한 짐승이라고 믿는 이피토스도 있었고, 동성인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알고 떠받드는 나약한 미소년 휠라스도 있었다.

 

더 있었다. 칼뤼돈의 멧돼지를 잡은 호걸 멜레아그로스도 있었고, 후일 트로이아 전쟁의 명장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되는 펠레우스도 있었고, 헤라클레스 덕분에 죽은 아내를 되살리는 아드메토스도 있었고, 테세우스와 함께 명계로 내려가 저승 왕에게 아내를 내어놓으라고 했던 페이리토스도 있었다.127∼12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고대세계의 가장 유명한 모험은 이렇듯 숱한 영웅들을 태우고 항구를 떠나면서 돛을 가득 부풀렸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었지만, 흑해 연안 콜키스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양모피'를 구하기 위한 '굳은 결심'만은 단단했다.


항해가 시작된 이후에 그들이 겪은 '온갖 우여곡절들'을 여기서 모두 얘기할 수는 없다. 원정대가 맨 처음으로 도착한 렘노스에서 '냄새 나는 여자들'을 마침내 해방시켜 준 몽환적인 이야기, 사모트라케를 지나고 헬레스폰토스를 지나 퀴지코스라는 나라에 들렀을 때의 불행한 이야기, 헤라클레스가 아끼던 휠라스를 샘의 요정에게 빼앗기고 중도하차하게 되는 애석한 이야기 등은 아쉽지만 모두 생략해야 옳다. 우리가 기어이 만나 보고 싶은 그 '하르퓌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라면 우린 재빨리 목적지로 '날아가듯' 달려야 하니까.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아르고 원정대가 마침내 닿은 곳은 흑해 초입에 있는 트라키아의 어느 해안이었다. 그들이 그 땅에 상륙해서 맨처음 찾은 곳은 언덕 위에 보이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하도 늙고 하도 마르고 하도 그을려, 발밑에 엇비슷하게 누운 그림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말은 이랬다.


"왔구나, 왔구나. 아르고나우타이가 이제야 왔구나. 왔구나, 왔구나, 보레아스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왔구나."


그 노인은 장님이었다.


"먹을 것을 좀 주어.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 모두 맛본 지 오래……. 하지만 지금 줄 것은 없어. 지금 주어도 나는 못 먹어. 아직은 먹을 때가 되지 않았어."


그 노인은 이내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나는 아게노르의 아들 피네우스야. 내 이름, 귀에 설지 않지? 나는 세상이 접시같이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세상이 휘페르보레이아(極北)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나는 헬리오스(태양)가 검은 너울을 쓰는 까닭도 알고, 셀레네(달)가 뜨고 지는 이치도 알아. 어떻게 아느냐고? 아폴론께서 가르쳐주셨지. 그런데 나는 포이보스 아폴론(빛나는 아폴론)이 모르는 것도 알아. 내 잘못인가? 나는 이걸 사람들에게 가르쳤어. 그랬더니 제우스 대신이 어째서 천기를 누설하느냐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벼략을, 조그만 것으로 하나 던지시더라고. 그게 무슨 벼락이었는지, 한 대 맞았더니 살갗이 떡갈나무 껍질같이 늙고 눈이 보이지 않아. 내 눈에는 자네들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알아. 자네는 젊은 대장 이아손이고, 자네는 트라키아의 풍각쟁이 오르페우스, 자네는 개똥 점쟁이 몹소스, 자네는 술장수 팔레로스…… 주신(酒神)의 사생아지? 그리고 저기 주먹 쥐고 서 있는 것은 쇠주먹 폴뤼데우케스…… 주먹에 피가 묻었구나. 뱃길이 남았는데 해신(海神)의 아들을 죽여? 그리고 자네는 달거리(月經)하는 무사로구나. 그 옆에 있는 것은 눈 밝은 륀케우스…… 눈구녕만 밝으면 무얼해? 심안(心眼)이 있어야지. 나 장님이라도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아. 제우스 대신은,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는 장님이 또 보기 싫으셨던 게야. 그래서 하르퓌아이를 보내어 나를 괴롭히는데…… 하르퓌아이 알아? 새야 새. 크키가 독수리만 해. 새는 새인데 대가리는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 사람이야. 물론 계집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이게 하르퓌아이야. 너희들도 곧 이 '제우스의 사냥개들'을 보게 돼. 이것들, 꼭 세 마리씩 짝을 짓고 다니는데, 끼니 때마나 나타나 내 먹을 걸 대신 먹고는 접시에다 똥을 싸 갈기고 날아가 ……. 물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보리죽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실과를 하나 먹으려 해도 날아와. 저승에서 탄탈로스가 물을 마시려고 하면 멀쩡하게 있던 물이 달아나버린다더니 나는 살아서 이 꼴을 당하고 있어. 아,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맛본 지 오래야."


이아손이 곧 아르고선에서 술과 고기를 내려오게 한 뒤에 음식을 한상 잘 차려 대접했지만 피네우스는 먹지 못했다. '하르퓌아이'라고 하는 요괴가 어느새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쏜살같이 내려와 덮쳤기 때문이다. 얼굴은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인데 나머지는 영락없이 새인, 참으로 요상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모습보다 더 요상한 것은 그 버르장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였다. 피네우스 노인과 아르고호 원정대원들이 코를 싸고 있는 동안 요괴들이 음식을 말끔히 핥아 먹고 접시에는 똥을 싸 갈겨놓고 하늘로 날아올라갔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풍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잽싸게 그들을 뒤쫓았다. 그들이 세 마리 하르퓌아이를 따라잡은 흑해에 떠 있는 조그만 섬 상공에서였다.


하르퓌아이는 섬을 돌다가 방향을 바꾸어 아마존의 나라가 있는 텔모돈 강 하구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집이 유난히 커 보이는 하르퓌아이 하나는 여전히 뒤처지고 있었다.

칼라이스는 이 뒤처진 것을 노리고 꼬리 쪽을 겨누어 칼을 둘러메는 순간 뒤따라오던 제토스가 소리쳤다.

"보아요, 무지개가 아니오!"

언제 섰는지 무지개가 하나 텔모돈 강과 구름 사이에 걸려 있었다.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여신 이리스와 자매 간이라는 말 들어보았소?"

제토스의 말에 칼라이스가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사이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보레아스의 아들들아, 너희들이 나를 아느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숨자 헤라 여신의 사자(使者)인 이리스 여신이 쌍둥이 형제를 불러 세웠다. 형제의 눈에는 무지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스 여신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칼라이스가 물었다.

"너희들 눈앞에 있다. 이제 제우스 대신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하르퓌아이를 더 쫓지 마라. 칼질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하르퓌아이는 대신께서 길들이신 대신의 사자들인즉 너희들은 칼을 거두고 돌아가거라."

"여신께서 하르퓌아이의 자매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돌아가야 합니까?"

"피네우스에게 내려졌던 제우스 대신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말이다. 내가 이리스 여신이라는 것을 믿느냐?"

"무지개 안에 계시니 이리스(무지개) 여신이겠지요."

"그러면 내가 제우스 대신의 몸을 받아 스튁스 강에다 맹세를 친다. 금후로는 하르퓌아이가 피네우스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피네우스는 너희 은혜를 입었다."

"저희들이 무엇으로 징표를 삼으리까?"

"피네우스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니 징표가 필요하지 않다. 칼라이스여, 네가 칼로 내려치려던 게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 '포다르게(빠른 자)'다. 포다르게가 왜 뒤처졌는지 알기나 하느냐? 자식을 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자식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 아비 보레아스(북풍)의 자식이다. 내가 칼질을 멈추게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포다르게의 복중에 든 형제를 죽였을 것이다. 쫓는 너희가 짐승이면 모르되, 인간이거든 뒤로 처진 것에다 칼질을 삼가라. 어린것, 늙은것, 아니면 새끼를 밴 것일 테니 ……."

쌍둥이 형제는 이리스 여신의 말을 믿고 피네우스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뒷 이야기지만, 하르퓌아이의 하나인 포다르게가 낳은 북풍의 자식은 두 마리의 말이었다. 트로이아 전쟁 때 명장 아킬레우스가 타던 두 마리의 말 '크산토스(밤색 털)'와 '발리오스(얼룩무늬)'가 바로 이 빠르기로 소문난 북풍과 포다르게의 자식들이다. 뛰는 것 중에 아킬레우스가 따라잡지 못할 것은 이 두 마리의 명마뿐이었다.(172∼174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쌍둥이 형제가 돌아왔을 때 피네우스의 오두막 앞마당에는 마침 푸짐한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고, 피네우스는 먹은 위에 또 먹고, 마신 위에 또 마셨다. 그리곤 아르고호 원정대 팀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이아손 대장이, '먹을 것을 누가 마련해주느냐'고 물었을 때 '희망이 마련해준다'고 한 내 말은 허사가 아니오. 에르피스(희망)가 내 옆에 없었더라면 나는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데스에 가 있었을 것이오. 나는 오래전에 그대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나는 그대들을 만나고, 이렇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술과 고기는 '희망'보다 내 '예지'보다 맛이 있구료. 제우스 대신께서는 그대들 만나는 자리를 꾸미려고 나를 연단(練鍛)하신 것이 아니라 참 술맛, 참 고기맛을 알게 하시려고 나를 굶긴 것만 같아요. 나는 이렇게 먹고 마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에욱세이노스, 저 적대하는 바다를 열 아르고나우타이여,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여기에서 뱃길로 이틀 거리 되는 곳에는 이 적대하는 바다의 문이 있어요. 그대들이 열어야 하는 이 문을 뱃사람들은 '쉼플레가데스'라고 부른답니다. '충돌하는 바위섬'인 것이지요. '에욱세이노스'라고 하는 저 검은 바다(흑해) 초입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섬이 바로 '쉼플레가데스'인데, 지금까지 이 두 섬 사이를 지나간 배는 한 척도 없어요. 왜냐, 이 두 바위섬은 뿌리를 땅에다 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델로스(떠 있는 섬)'처럼 물 위에 가만히 떠 있다가 그 사이로 뭐가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피네우스는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탁 맞부딪치면서 말을 이었다.


"…… 꽝 부딪친답니다. 이러니 배가 지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중략) 알겠소? 내 말을 명심하지 않으면 에욱세이노스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데스의 땅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것이니 그리 아세요. 그대들이 내 말대로 해서 이 섬 사이를 뚫어내면 쉼플레가데스가 다시는 맞부딪치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대체 무슨 말씀이시지요?"


점쟁이 몹소스가 물었다. 피네우스가 같은 예언자이자 점쟁이인 몹소스한테는 여전히 예를 갖추지 않고 꾸짖었다.


"너 같은 것은 천상 새점이나 칠 팔자구나. 세이레네스(사이렌 무리)가, 저희들 노래에 홀리지 않는 뱃사람을 만나면 자결하고 만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스핑크스가 제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오이디푸스 앞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그러니까 쉼플레가데스도 세이레네스나 스핑크스같이 ……."


"너 같은 것을 데리고 천기를 누설하라는 말이냐? 그것은 그렇고…… 이아손 대장은 귀담아 들으세요. 적대하는 바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라도,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뻐하느라고 마음 빗장까지 열었다가 슬픈 일 당하고, 슬퍼하느라고 삼가다가 기쁜 일을 만나는 수가 있는 법이오.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 그대들이 겪을 앞날도 이와 같을 것이오. …… 하면, 지나는 뱃사람에게 콜키스 땅이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며, 콜키스 땅에 이르면 그대가 근심해야 할 일은 콜키스 땅이 마련하고 있을 것이오."(176∼17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이렇게 해서 아르고 원정대가 '쉼플레가데스'를 무사히 통과하고 마침내 콜키스 땅에 이르러 황금양모피까지 얻게 된다. 무서운 용이 지키는 진귀한 보물인 '황금양모피'를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처녀가 바로 메데아 공주였다. 오비디우스는 콜키스의 공주가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게 된 사연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아손과 메데아 

 

그녀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이성으로는 자신의 광기를 이길 수 없자

"메데아야, 싸워봤자 소용없어!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신이 너를

방해하고 있어." 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런 것이거나 아니면 이와 비슷한 것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아버지의 명령이 너무 가혹해 보이는 거지?

그 명령은 사실 너무 끔찍해. 왜 나는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가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이 뭐지? 불행한 소녀여, 타오르는 불길을

네 소녀의 가슴에서 떨쳐버리도록 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어. 하나 어떤 이상한 힘이

싫다는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욕망은 이래라 하고, 이성은 저래라

하는구나. 더 나은 것을 보고 그렇다고 시인하면서도

나는 더 못한 것을 따르고 있어. 이 공주님아, 왜 너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며, 왜 낯선 세상과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거지?

이 나라도 네가 사랑할 만한 것을 줄 수 있어. 그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신들에게 달려 있어. 그래도 그가 살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기원할 수 있는 거라고.

사실 이아손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지?

비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아손의 청춘과 가문과

용기에 반하지 않을 수 있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준수한 그 용모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7권 10∼28


[이아손과 메데이아], 귀스타브 모로, 1865년, 오르세 미술관


 

숱한 인물들이 얽혀 있는 신화 속에서 어쩌면 '하르퓌아이'는 단순한 괴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르퓌아이'는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다가 기어이 신의 노여움을 얻게 된 인물이 겪는 '먹지도 못하는 불행'만 들려주는 단순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배고픔과 배부름의 엄청난 차이뿐 아니라 오랜 간난신고와 기다림의 고통, 그 끝에 찾아오는 만족과 보람, 분노와 증오, 관용과 화해 등등의 요소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연관을 맺고 있어서 여느 '마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들려주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이 '마녀새'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수 없이 이토록 '길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쓰다 만 글을 이렇게 다시 꺼내어 이어서 쓰고 나니 셰익스피어의 『태풍』이라는 작품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하르퓌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이미 충분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주요 등장 인물들이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마주한 장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절묘하게 등장시킨 하르퓌아이는 순식간에 나를 또다시 '새로운 경이로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미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이런 놀라운 이야기에 또다시 그토록 새롭게 더욱 놀라도록 '하르퓌아이'까지 등장시키다니. 그것도 어쩌면 그토록 알맞은 상황에 그토록 어울리는 마녀새를 그처럼 알맞은 때에 등장시킬 수 있단 말인가.


『태풍』은 셰익스피어가 만년에 쓴 최후의 낭만희극이지만,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만 놀라운 게 아니다. 등장인물들과 대사들이 두루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은 "신의 심판의 우의극(寓意劇)"으로 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뒤늦게 다시 생각해 보니, 동생의 쿠데타로 하루 아침에 밀라노의 군주에서 쫒겨나 무인도로 휩쓸려간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하르퓌아이'에게 시달린 피네우스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피네우스 또한 왕년에 트라키아에서 임금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프로스페로 역시 피네우스처럼 '세상의 비밀'을 알기 위해 '통치'는 내팽개치고 '책'만 들여다봤던 인물이다. 프로스페로가 척박한 무인도에서 고난을 겪는 모습도 황량한 언덕 위 찌그러진 오두막에서 홀로 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 그리고 프로스페로가 '12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복수할 기회'를 잡게 되는 모습도 '기다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철천지 원수들이 태풍에 휩쓸린 끝에 무인도로 떠밀려 온다.). 프로스페로가 결국 그들을 '포용'하고 '증오' 대신 '관용'을 베풀어 '화해'를 이루는 모습조차 '하르퓌아이 이야기'와 닮았다. 심지어 세익스피어는 『태풍』에서 '하르퓌아이와 자매지간인' 이리스 여신까지 등장시켜 멋진 시를 읊조리게 만든다. 그러니 내가 '하르퓌아이'를 이럴 때조차 못본 체 외면하고 지나치기는 너무나 어려웠던 셈이다.


           알론소

앞으로 나가서 먹겠다,

이게 끝일지라도. 상관없다, 최고의 시절은

지나갔다 느끼니까. 자, 동생과 공작께선

나가서 짐처럼 하시게.


천둥과 번개, 아리엘, 하르푸이아처럼 등장,

식탁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진기한 무대 장치에 의해

잔치 음식이 사라진다.


(중략)

     프로스페로

너는 이 하르푸이아의 형상을 멋지게

연출했다, 아리엘. 빼어난 흡인력이 있었어.

내 지시를 네가 꼭 해야 할 말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또, 넘치는 생동감과

놀라운 관찰로 급이 낮은 정령들도

본분을 다하였다. 최고급 마술이 통하여

나의 적들 모두가 정신 착란 상태에서

뒤엉켜 있구나. 그들이 내 손안에 있으니

한동안 발작하게 버려두고 난 어린

(그들이 익사했다 여기는) 페르디난드와

그의 애인, 내 사랑, 딸애를 보러 간다.    (퇴장)


 - 셰익스피어, 『태풍(Tempest)』, <4막 1장>


《폭풍우》의 미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

(앤터니 홀든/장경렬 옮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담긴 사진)



『그리스 로마 신화_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쓰고, 『신화의 힘』, 『변신 이야기』,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등을 두루 번역한 분은 이윤기 선생님이다. 그 분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매료되어 작고하기 몇 해 전엔 손수『겨울 이야기』를 번역해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분이『겨울 이야기』의 '앞과 뒤'에 잔뜩 펼쳐놓은 '해설'에는(무려 40여 쪽에 달하는데) 온통 흥미로운 신화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 말미에 그 분이 남겨 놓은 다음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안타깝기만 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민담과 관련이 있는 작품에는 이런 압축 파일이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이 압축 파일을 푸는 일이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번역하는 일은 이렇게 풀어낸 압축 파일을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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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5-29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화의 힘>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군요! 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펼쳐 볼 일이 없어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신화 관련 책은 손이 잘 안가네요. 오렌님은 여전히 ~ 두껍고 도전하기 힘든 책을 읽으시는 거 같아 부럽습니다. 간접적이나마 캠벨의 책을 접할 수 있으니 좋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30 11:10   좋아요 1 | URL
신화는 이상하게도 ‘진입 장벽‘이 있는 듯해요. 저도 그런 느낌을 꽤나 오래 경험했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 읽는 책들은 <셰익스피어 전집>에 담긴 작품들이랍니다. 대략 37편의 작품 가운데 절반쯤 읽었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읽으면 그리 멀지 않아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다 읽을 수 있을 듯해요.
 

 

(밑줄긋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책읽기


"저작에도 창조적인 저작이 있듯이 독서에도 창조적인 독서가 있다. 마음이 노력과 창의로 긴장해 있을 때에는 우리가 읽는 그 어떤 책의 페이지에도 다양한 암시들이 가득 차서 영롱해진다."

 - 에머슨(1803∼1882), 미국의 사상가, 시인.



"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톨스토이(1828∼1910), 러시아의 소설가.



"무엇이든 하루에 5시간만 독서하라. 그러면 당신은 박학다식해질 것이다."

 - 보스웰(1740∼1795), 영국의 전기 작가, 변호사.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이해하는 것, 그가 우리에게 시사하여 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 파게(1847∼1916), 프랑스의 비평가.



"독서에 소비한 만큼의 시간을 생각하는 데 소비하라."

 - 베네트(1867∼1931), 영국의 소설가.



"읽는 기술은 이미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다. 모든 독서는 언제나 하나의 재창조다. 독서는 끊임없는 발견이고 이미 새롭게 행해지는 모험이다."

 - 가이 미쇼(1879∼1955), 프랑스의 문학사가.



"책은 청년에게는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자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면 위안이 된다."

 - 키케로(B.C. 106∼43), 로마의  정치가, 철학자



"아침에는 일하기 전이므로 과학이나 철학과 같이 머리를 쓰는 책을, 일을 한 다음에는 약간 부드러운 내용의 책을, 오후에는 역사, 수필, 비평 호근 전기 따위를, 저녁에는 소설이나 시집을, 밤에는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책을 읽는 게 좋다."

 - 몸(1874∼1965),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가장 위대한 책이란 종이 테이프에 찍히는 전문처럼 두뇌에 새로운 지식이 박히는 게 아니고, 생명이 넘치는 충격으로 다른 생을 눈뜨게 하고 또 다른 생에서 생으로 여러 가지 정수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 롤랑(1866∼1944), 프랑스의 소설가, 평론가.



"과학에 관해서는 늘 새로운 책을 읽도록 힘쓰고, 문학에 대해서는 오래된 책을 읽도록 힘쓰라. 고전 문학은 항상 새롭다."

 - 리튼(1803∼1873), 영국의 정치가, 소설가 겸 극작가.



"읽는 것은 빌리는 것을 말한다. 독서하고 창작하는 것은 자기가 진 빚을 갚는 것이다."

 - 라히텐베르크(1742∼1799), 독일의 물리학자, 비평가.



"독서는 정신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만든다. 사색은 사려 깊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논술은 확실한 사람을 만든다."

 - 벤자민 플랭클린(1706∼1790), 미국의 정치가, 문필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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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5-25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중에서 몇 개 골라 댓글을 씁니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저처럼 다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글입니다.

˝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글을 읽었어요. 독서의 단점을 말하더라고요.

˝무엇이든 하루에 5시간만 독서하라.˝
- 하루에 보약을 세 번 챙겨 먹는 것도 바빠서 하루에 두 번만 먹고 있어요. 저는 하루에 두세 시간만 독서하겠습니다.
이것도 안 될 때가 있어요.ㅋ

oren 2017-05-26 00:41   좋아요 0 | URL
저도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을 부러워 한 적은 없었던 듯해요. 제 취향과도 영 맞지 않고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독서를 위해 남겨진 시간‘도 자꾸만 들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해서도 아무 책이나 붙잡고 읽는 걸 피하게 되고요. 헤럴드 블룸이 취했던 ‘독특한 고집‘도 ‘어떨 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싶기도 하더군요.
* * *
세계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헤럴드 블룸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해리포터 열풍에 대해서 “진부함에 강하고 상상력에는 약하다(Long on Cliches Short on Imaginative Vision)˝고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전자책의 선봉이 되었던 SF 작가 스티븐 킹이 작년에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에 대해 “스티븐 킹은 싸구려 스릴러 작가이며 그의 작품에는 문학이 주는 그 어떤 미학이나 독창적 지성이 없다”며 혹독한 비평을 했다. 헤럴드 블룸의 문학에 대한 입장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해줄 수 있는 것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