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이룬 불후의 업적
우리는 인식이 원래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을 고려하는 것을, 오직 의지에 봉사하도록 정해진 것을, 따라서 완전히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방식으로, 실로 마치 자극 대신 동물성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된 단순한 동기 작용의 조건으로서 단지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 때 나타나는,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세계의 형상은 설계도일 뿐이다. 그 설계도에서 동기는 목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 형상은 직관된 객관 상호 간의 공간적·인과적 관계를 제약하지만, 그럼에도 동기와 의지작용 간의 매개일 뿐이다. 그러면 그런 방식에 의해 우연적으로 지성에서, 즉 동물적 존재의 뇌 기능에서 그 기능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동물에게 나타나고, 그렇게 해서 그처럼 덧없는 것들에게 그들 행성에서의 길을 밝혀줌으로써 발생하는 세계의 이 형상을, 말하자면 이 단순한 뇌 현상을 사물(사물 자체)의 참된 마지막 본질이라고, 그리고 그 부분들의 연결을 절대적 세계질서(사물 자체의 관계들)라고 간주하고 그 모든 것이 또한 뇌로부터 독립적으로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떤 비약일 것인가! 이 가정은 여기서 우리에게 극도로 경솔하고 주제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가정을 근거이자 토대로 삼아 칸트 이전의 모든 독단주의 체계가 세워졌다. 그 가정은 그들의 모든 존재론, 우주론, 신학론의 암묵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가정은, 이들이 증거로 끌어대는 모든 영원한 진리의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비약은 언제나 암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비약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이 바로 칸트가 이룬 불후의 업적이다.(141쪽∼14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에서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핵심 물음이 해결될 것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핵심 물음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상의 본질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진 의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지가 있는 곳에 더 이상 인과성이 없고, 인과성이 있는 곳에 의지가 없다"라는 오류를 정정하여 쇼펜하우어는 "인과성이 있는 모든 곳에 의지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의지도 인과성 없이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과성은 세계의 한 측면인 표상의 본질이고, 의지는 세계의 다른 측면 즉 물자체라는 것이다. 인과성이 더 분명히 나타날수록 의지가 적게 표명되듯이 반대로 우리 자신에게서는 의지가 더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인과성은 더 먼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인과성과 의지는 언제나 함께 성립한다는 말이다.(274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 '옮긴이 해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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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위대한 칸트에게서 배운 것
우리가 위대한 '칸트'에게서 배운 것은 '시간과 공간과 인과성'이 그 모든 합법칙성이나 형식의 가능성으로 보아 객관 속에 나타나며,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객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인과성은 객관으로부터 출발하든 주관으로부터 출발하든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객관의 객관(칸트는 현상이라 함)', 즉 '표상'인 이들은 똑같은 이유로 주관의 직관 방법 또는 객관의 상태라고 부를 수도 있다. 또 이 형식들은 객관과 주관 사이에 있는 불가분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모든 객관은 이들 형식 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주관은 객관으로부터는 독립하여 이들 형식을 완전히 소유하고 개관한다. 만일 이들 형식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객관이 공허한 환영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 객관은 객관이 아닌 그 무엇을 의미하며, 그 무엇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 무엇이라는 것은 다시 이들 객관, 즉 표상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주관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인 제약으로서 주관에 대립하는 것과 그 형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 즉 '표상이 아니라 물자체'가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기게 된다. 이들 '표상'이나 '객관'은 주관의 표상이며, 주관의 객관이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의 것인가? 이들 객관이 갖고 있는 것으로 표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물자체는 무엇인가? '의지'. (639쪽∼640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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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혼동
데카르트는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의 ' 두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 공리 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에게조차 이 물음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존재하기 위해 어떤 원인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본성인 무한성이 곧 원인 혹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기 위해 아무런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무한성을 신이 아무런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출하는 인식이유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을 섞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가 원인과 인식이유 사이에 놓여 있는 큰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이 둘을 혼동한 것은 원래 그 자신이 의도한 바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과법칙이 원인을 요구하는 여기서 원인 대신에 인식이유를 슬쩍 써넣는다. 왜냐하면 인식이유는 원인이 그렇듯이 또다시 계속 찾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바로 이 공리를 통해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개척한다. (25쪽∼26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스피노자의 기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은 존재하는 사물의 고유한 본성과 정의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그 원인은 그 사물이 존재하려는 본질 자체에 속하므로) 사물의 외부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에티카》1부 정리8 주석2). 후자의 경우에서 스피노자는 다음에 밝혀지듯이 하나의 작용하는 원인을 의미한다. 반면 전자의 경우에서 그는 단지 하나의 인식이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을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신을 세계와 동일시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위한 사전작업을 한다. 하나의 주어진 개념의 내부에 놓여 있는 하나의 인식이유를 외부에서 작용하는 원인과 혼동하고 이 원인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스피노자의 기교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교를 데카르트에게서 배웠다. (29쪽∼30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말하자면 데카르트가 오직 관념적으로, 오직 주관적으로, 즉 오직 우리를 위해, 오직 인식을 목적으로, 즉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을 목적으로 제시한 것을 스피노자는 실재적이고 객관적으로 신과 세계의 현실적인 관계로서 받아들였다.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신의 개념 안에 존재가 놓여 있고, 따라서 이것이 신의 현실적인 현존을 위한 논증이 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신은 그 자체로 세계 안에 숨어 있다. 그에 따라 데카르트에 있어서 단순한 인식이유였던 것을 스피노자는 실재이유로 만든다. 데카르트는 존재론적 증명에서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가 도출된다고 가르쳤고, 스피노자는 그것으로부터 자기원인을 만들고 그와 함께 대담하게 자신의 윤리학을 시작한다. "'자기원인'으로서 나는 그것의 본질이 현존을 자신 안에 포함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는 "존재는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소리쳐 경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이유와 원인에 대한 가장 명백한 혼동을 본다. 그리고 신스피노자주의자들(셸링주의자, 헤겔주의자 등등)이 언어를 사유로 보는 것에 익숙하여 이 자기원인에 대한 경건한 경탄에 자주 몰입한다면, 나로서는 '자기원인'에서 단지 형용모순을, 이후의 것인 이전의 것을, 무한한 인과 고리를 절단하는 거만한 권력의 명령을 볼 뿐이다. 자기원인은 끈으로 고정시킨 자기 머리 위의 모자에 브로치를 달기에는 손이 충분히 높이 닿지 않아서 의자 위로 올라간 그 오스트리아인과 유사하다. 자기원인의 적절한 상징은 바로 뮌히하우젠이다. 그는 물에 가라앉는 자신의 말을 다리로 꼭 껴안고 머리 위에서 앞으로 향한 자신의 땋은 머리로 자신의 말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당기면서 그 밑에 "자기원인 Causa sui"이라고 서명했다. (31쪽∼32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이미 홉스, 스피노자, 프리스틀리, 볼테르, 그리고 칸트도 같은 것을 가르쳤다.
의지의 자유는 (철학교수들의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의 사람에게,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두 가지 상이한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완전히 불합리하다는 것은 분명하고 명백히 증명된 진리다. 이것은 마치 순수 수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진리가 불합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위에 언급된 진리는 노르웨이 왕립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한, 의지의 자유에 관한 나의 수상논문에 가장 명백하고 체계적이며 근본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이 논문에서는 문외한들로 하여금 위에 언급된 불합리를 착각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의식의 사실이 특별히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안점에 있어서는 이미 홉스, 스피노자,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 볼테르 Voltaire, 그리고 칸트⑴도 같은 것을 가르쳤다. (71쪽∼72쪽)
⑴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인 목적 안에서 의지자유의 개념을 무엇으로 삼든지 간에 의지의 현상인 인간의 행위는 자연에서의 다른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자연법칙에 따라 규정된다"(〈세계시민의 의도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첫 문장).
"현상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경험적 성격과 자연질서에 따라 공동작용하는 다른 원인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인간의 자의에 의한 모든 현상을 그 근거에까지 탐구할 수 있다면, 우리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거나 그것의 선행조건에 의해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식할 수 없는 행위는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험적 성격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가 없다. 우리가 단순히 관찰하려 한다면, 그리고 인간학에서 하듯이 인간의 행위들로부터 그 동인을 생리학적으로 탐구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 경험적 성격에 따라 인간을 고찰할 수 있을 뿐이다"(《순수이성비판》, 1판, 548 / 5판, 577쪽).
"그러므로, 내적 외적 행위들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이 행위를 일으키는 모든, 최소한의 동기 조차도, 그리고 동시에 이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외적 유인(誘因)들도 알아내는 깊은 통찰을 갖는 일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태도를 월식이나 일식처럼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실천이성비판》, 로젠크란츠판, 230쪽, 4판 177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