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내가 한창 '청춘'을 보낼 때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나는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뭔가 모를 불안을 느끼곤 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갑작스레 병역을 마치기 위해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지금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나만 혼자 전방부대에서 낙오자처럼 뒤로 처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걱정을 했더랬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 반쯤은 '공부삼아서' 그랬다고 쳐도 좋았다.
PX에서 구입한 대학노트를 낙서장 겸 '독서노트'로 삼았다. 언제 어디서 주워들은 문구인지는 몰라도 '칸트의 묘비명'까지 떡하니 내걸어 놓았다. 1984년 가을이었으니 상병 계급장은 달았을 듯하고, 전역을 1년 가량 앞둔 때였다.
(독서노트 앞표지를 넘기면 컬러 내지가 한 장 더 있었다. 거기에 내 소속/이름과 함께 저런 걸 적어 놓았었다.)
그 당시에 내가 주로 읽었던 책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세계사상전집(전32권)》이었다. 그 책은 내가 입대하기 전에도 가끔씩 들춰본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서 나와 함께 자취를 하던 형이 큰 맘 먹고 '전집'을 한꺼번에 마련해 놓은 덕분이었다. 나는 읽고 싶은 책들을 두어 권씩 골라서 형한테 편지를 보냈고, 형은 그때마다 그 책들을 어김없이 소포로 내게 보내줬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책들을 단 한 권도 간수하지 못했지만, 그 책들의 목록은 아직도 '독서노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독서노트'에 기록해 놓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세계사상전집(전32권)》목록. 그 당시 책들은 대개 세로로 쓰여진 데다가 국한문 혼용이 기본이었다.)
이 때 읽었던 책들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책들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Ⅰ,Ⅱ』, 플라톤의 『국가』,『소크라테스의 변명』, 홉즈의 『리바이어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분』, 막스 베버의『사회경제사』, 슘페터의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등이다. 그런데, 독서노트를 살펴 보면 내가 꼭 《세계사상전집》만 읽은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상전집'보다는 '문학'이 훨씬 더 읽기 쉽고 재미있었으니 당연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독서 취향'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제는 어느덧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괜한 불안감도 다 사라지고 없는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세계사상전집》류의 책들에 대해 좀처럼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2010.12.31 '독서노트'에 적어 놓은 메모이다.
오래 전에 내가 독파하리라 마음먹었던《세계사상전집(전32권)》은 어느새 홀연히 내 곁을 모두 떠나고 말았지만 나는 그 책들을 되찾지 못해 그렇게 안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다행히 그와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주는 책들을 적잖이 갖고 있다. 그건 바로《동서문화사 월드북》이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이 책들을 한꺼번에 몽땅 구입해서 동네 도서관에 기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전집의 권수가 179권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살펴보니 그 목록이 무려 259권으로 불어나 있다. 대략 5년 만에 80권이나 불어난 셈이다.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을 책들의 목록'이 풍성해지는 걸 못마땅하게 여길 이유는 별로 없을 듯하다. 죽기 전에 다 읽으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 문득 심심풀이삼아 그 목록에서 내가 읽은 책들을 다시 꼽아 보니 대략 60권쯤 되는 듯하다. 까마득한 옛날 군복무 시절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온《세계사상전집(전32권)》을 바라볼 때만 하더라도 저 많은 책들을 도대체 언제 다 읽을까 싶었는데 격세지감이 절로 든다. 그렇지만 저 목록에서 내가 숱하게 눈독을 들이고도 여태까지 읽지 못한 책들도 무려 200권 가량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과연 어느 세월에 나는 저 책들을 '제법' 읽을 만큼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 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동산 찾는가
그래도 나는 희망마저 버리지는 않겠다. 그리고 나는 이미 스스로 위안을 얻는 방법까지도 일고 있다. 내가 이번에 기댈 사람은 예전에도 여러 차례 불러냈던 클리프턴 패디먼이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이 리스트는 '단번에 슥 훑어보는" 그런 리스트가 아니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2017년 2월 현재까지 내가 읽은 고전 가운데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와 겹치는 책들>
(다른 출판사의 판본을 통해 읽은 책들도 많지만 일부러 '월드북 시리즈'의 이미지와 상품으로 표시해 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