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습니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습니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지요.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이 격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였으며,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바람의 신부> 또는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를 통해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림 속의 남녀 모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알마 쉰들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마 쉰들러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숱한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40대의 노총각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으며, 그와 헤어진 이후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습니다.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습니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 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습니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으며,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합니다. 무려 19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집니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씁니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1911년에 구스타프 말러가 불과 51세에 죽자, 알마 말러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습니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였습니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옵니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습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친 끝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합니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저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오랫동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지요.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 클리프턴 페디먼, 『평생독서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최근에 저는 알마 말러에 관한 또다른 놀라운 사실 하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찾는 이웃님의 유튜브 동영상 덕분이었는데요. 그 영상은 1943년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흑백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는데, 그 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가 놀랍게도 프란츠 베르펠이었던 것입니다. 그 유태인 소설가는 1938년 자신의 아내 알바 말러와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피신하던 중 프랑스의 어느 산간마을에 숨어들어 2년 동안이나 은신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을 루르드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숨겨준  마을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성 베르나데트 수비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으며, 그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 <베르나테트의 노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1943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제1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골든 글로부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알바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이 한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꼭꼭 숨어 지냈던 그 산골 마을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성모 발현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바람의 신부 알바 말러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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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글을 제가 왜 못 봤을까요 ㅠㅠ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

oren 2022-03-09 12:09   좋아요 1 | URL
아이고.. mini 님 댓글이 아니었더라면 이 글이 이달의 당선작으로 뽑힌 줄도 모를 뻔했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https://www.youtube.com/user/ojcojj/community


영상 업로드를 하고 나면 며칠은 쫌 쉬는 편이랍니다. 
물론 '다음 영상을 뭘로 할까'를 구상하면서요... 

사실, 업로드와 업로드 사이의 짧은 틈새시간이 저로서는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고된 영상 편집작업에서 벗어나, 아무런 부담 없이 맘껏 릴렉스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다음 작품의 후보작들을 '그냥' 쭈욱 아무 생각없이 써 보면 다음과 같네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국가>, 플라톤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적과 흑>, 스탕달 
<모비딕>, 허먼 멜빌 
<역사>, 헤로도토스 
<신곡>, 단테 
<셰익스피어 비극 중 아무거나>, 셰익스피어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방인>, 알베르 카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마의 산>, 토마스 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예브게니 오네긴>, 푸슈킨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성>, 프란츠 카프카 
<인형의 집>, 헨릭 입센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일리아스>, 호메로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황무지>, T.S.엘리어트... 

사실 이들 작품들은 '언젠가는' 영상으로 만들 생각을 지닌 작품들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시' 읽어봐야 겨우 영상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난이도가 제법 느껴지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몇몇 작품들은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갖고 있는 책조차 없고요...) 

물론 대본 녹음까지 다 마쳤지만, 
영상 제작을 시도하다가 중지한 작품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요. 

이들 작품들을 쭈욱 나열하고 나니, 
이 작품들을 앞으로 1년 이내에 동영상으로 만들 수만 있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걸 만드는 게 가장 좋을까요? 
'4월은 잔인한 달'이니, <황무지>를 한번 다녀와 볼까 싶기도 하고요.... 

p.s
제 영상을 정말 열심히 봐주시는 어떤 구독자분께 달았던 댓글인데, 
오늘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하면서, 
이 목록에 언급된 책들을 그냥 한번 불러내서 사진으로 담아봤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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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8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프로페셔널 한 느낌이 들어요!! 취미에서 프로의 세계로? ^^
4월은 잔인한 달이니, 좀 재밌는 책의 영상을 준비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잔인한 달이라서 더 삭막한 책 보다는요. ^^;

oren 2021-03-18 19:38   좋아요 1 | URL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한 달이면 두세 번씩 하곤 하는데,
매번 선택지 앞에서 고민이 많더라구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는 생각도 들곤 하고요.
해마다 4월만 되면 엘리엇의 잔인한 시구절이 떠오르니,
그 작품을 언젠가는 한번 다뤄보긴 해야 할 듯해요.
어쨌든 라로 님 말씀대로라면,
4월엔 잔인한 데다가 삭막하기까지 한 책은 피해야 좋겠군요!

scott 2021-03-1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슨 진정한 책탑!의 경지!!4월 황무지 부터 시작하신다면 본격적으로 벽돌책 하나씩 돌파하는 유툽 콘텐츠가 될것 같네요 홧팅!!

oren 2021-03-18 19:48   좋아요 1 | URL
텍스트에서 나열한 순서대로 책탑을 쌓았는데,
맨 나중에 언급된 <황무지>는 너무 얇은 책이어서,
책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완전 대실패네요.^^
그나마 빵빵한 부피를 자랑하는 작품들을 먼저 꺼내든 덕분에,
책탑의 밑받침이 든든해지는 효과는 확실히 본 듯해요.^^

p.s
작품 목록에는 있고 책탑에는 없는 책들은 주로 1980년대에 읽은 작품들인데,
그 작품들의 실물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요.^^
 

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언제나 '삶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교양과 무질서』라는 유명한 작품을 쓴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습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습니다.  

 

작가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습니다. 그는 단테의 작품을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습니다.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가 토머스 헉슬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력마저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요?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입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입니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집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입니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집니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합니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됩니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세계입니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에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지요.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독자들까지도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지만, 센터 내부는 온갖 실험실용 플라스크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지요.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납니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 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 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돕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웁니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습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하지요.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납니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습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습니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습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오지요.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말이지요.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챕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냅니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칩니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갑니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합니다. 오웰의 작품에 담긴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됩니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지요.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요.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증대시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첨단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과학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9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아바타가 가상의 공간에서 유명 아이돌 그룹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춤을 추는 등 메타버스 공간이 실제의 삶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도 품고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이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존은 인간 삶의 본질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냅니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리둥절해 합니다.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야만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합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과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는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등등을 말이지요.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멋진 신세계>의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요.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말이지요.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말이지요.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겠다는 말이었지요.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습니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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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3-15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소마만 기억하는 저로서는 ㅠㅠ 헉슬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좀 더 깊이있게 느껴져요. 표지를 보니 제가 갖고 있는 건 문예출판사거네요. ㅎㅎ

oren 2021-03-15 20:34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판으로 읽었습니다! 이번에 영상을 만들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어머니, 할아버지(토마스 헉슬리), 외할아버지의 형님(매슈 아놀드), 친형, 이복동생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실물 사진을 찾아봤네요..

책으로 읽을 땐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던 <책 속 내용들>을 실제적인 영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재미가 때론 쏠쏠하긴 합니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영상 자료들을 긁어모으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평소에 TV를 별로 시청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미스터 트롯 열풍이 대단한 듯하다.

 

나와 거의 똑같은 날에 구독자 1,000명을 돌파한 어떤 유튜버 분은 <정동원의 인기 비결 3가지> 영상 하나가 대히트를 치는 바람에 순식간에 구독자 8,000명을 돌파했다. 요즘 그 유튜버 분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신라의 달밤>을 부른 조명섭 씨를 소개하는 유튜버 분들도 부쩍 늘어났다. 고민고민 끝에 나도 하나 만들어봤다.

 

<막걸리 한 잔>, <찐이야>,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노래로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무명 가수의 설움을 단번에 날려버린 가수 영탁이 마침 고교 후배여서, 그런 인연에 기대어 만들어본 영상이다.

 

이 영상이 업로드 하루 만에 조회수 1,000회를 가뿐하게 넘기는 걸 보면, 대중들의 인기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걸 절감한다. 동영상 내용 중에 모교를 너무 미화하는 듯한 내용이 담기는 바람에 '자뻑이 흠'이라는 댓글도 받았는데,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내가 봐도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게 보는 사물들도 남들이 보면 도리어 기분 나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 댓글에 공감한다는 댓글을 달아드렸다. 진짜로 공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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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5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영상을 재밌게 봤습니다. 이렇게 안동과 영탁 가수를 연결해서 잘 설명해 주신 오렌 님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네요.
굿 아이디어였어요. 안동의 자랑은 곧 우리나라의 자랑으로 들었습니다. 베리 굿!!! 입니당~~

oren 2020-06-29 16:37   좋아요 1 | URL
영상 재미있게 보셨나요?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에 비해 이런 영상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어요. 뜻밖에도,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 만들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네요. 지금도 조지 오웰의 <1984>를 소개하는 영상을 만드는데, 힘들어 죽을 지경입니다요. ㅎㅎ
 

 

4년 전쯤에 우연히 발견한 글 한 편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붉은돼지 님께서 올리신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에 관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고 불현듯 아토스에 대한 기억들이 몇몇 떠올라, 아토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이 책 저 책을 마구 뒤져봤더니 놀랍게도 무려 일곱 권에서 '아토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한 때는 그저 아토스가 무슨 자동차 이름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수다에 관하여』라는 책에도 아토스가 언급되어 있다. 사진에서는 그 책이 빠져있다.)

 

그 때 쓴 글을 바탕으로 아토스에 대한 영상을 하나 만들어봤다. 그런데 그 영상을 악전고투 끝에 다 만들고 나서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난 뒤 영상 공개 시간까지 예약해 둔 사이에, 저작권 침해 경고가 날라왔다. 자세히 알고 보니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주제가인 '조르바의 춤'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영상을 다시 해체하고 수정하는데 꼬박 하루가 더 걸렸다. 영화 《300》과 《제국의 부활》에 이어 《그리스인 조르바》로 영상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내 야무진 꿈은 저작권이라는 드높은 장벽 앞에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유튜브 영상들을 조회해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그 멋진 장면과 음악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내가 만든 영상에 담은 2분 남짓한 영상만이 문제라는 것인가. 아무튼 그 영상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담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여기서라도 다시 올려놓아야 겠다.

 

 

맨 처음 영상은 이렇다. 그 멋진 《조르바의 춤》과 음악이 등장해야 할 대목에 그게 안 나온다!


유튜브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u-U19KvREPw


 

 

두 번째 영상은 '아토스'를 담은 수많은 영상 중에 하나 골라본 것이다.

 

세 번째 영상은 흑백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하이라이트다.

이토록 멋진 영상과 음악을 내 영상에 담지 못한 아쉬움이 참으로 크다.

 

 

네 번째 영상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소개하는 어느 북튜버의 최신 영상이다.

아직은 채널의 구독자수도 얼마 되지 않고 영상도 몇 개 없지만,

꼼꼼한 영상 제작과 똑 부러지는 나래이션 때문에 즐겨 찾는 채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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