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였어요. 그 책이 있는데 과연 앞으로 쓸 게 뭐가 남아 있을까요?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군요.”

- 버지니아 울프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2편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라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7편에 이르는 엄청난 길이의 연작소설이지요. 민음사에서 총 열세 권을 목표로 2012년부터 새롭게 번역 출간중인 이 작품은 어느새 제5편인 <갇힌 여인>(9,10권)까지 출간되었고, 앞으로 완간까지는 딸랑 세 권만 남겨두고 있지요.

 

이 소설은 작품의 길이뿐만 아니라 작가 특유의 만연체 문장으로도 독자들을 질리게 만드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 악명 높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때때로 독자가 미리 만나본 몇몇 친숙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철학자들이야말로 이 방대한 작품의 독서 탐험에 더없이 소중한 안내자가 될 테니까요.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을 여행하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에게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꼭 그런 존재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총 13권 가운데 지금까지 딸랑 네 권밖에 읽지 못한 저같은 독자라면,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축조된 고딕 양식의 거대한 대성당 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처럼 자주 길을 잃고 당황스러워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무리는 아니겠지요. 그런데도 잠깐씩, 이토록 생소하고도 복잡한 건축물 속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다시 말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낯설고도 빽빽한 문장들의 숲속을 헤쳐 가면서도 잠깐씩이나마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이 예전에 어디선가 미리 언급했던 내용들이 이 작품 속에서도 자주 엿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몇몇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프루스트(1871∼1922)와는 동시대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가까운 친인척 사이였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베르그송은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는데 매형이 될 새신랑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던 프루스트도 그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석했다고 하지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했던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무려 2,2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마침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역했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담겨 있어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처럼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곧바로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마치 한참 뒤에나 세상에 등장할 프루스트의 소설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기나 한 듯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이 이 논문을 발표한 해는 1889년이었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으로 출간한 해는 1913년이었습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소설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거명하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들을 은연중에 자주 드러낸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매형이자 당대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로 인정받던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단정기는 어렵겠지요.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굳이 '시간에 관한 소설'임을 따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프루스트는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간' 말고도 '지속'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단어를 끊임없이 자주 불러내고 있습니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깊이 연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베르그송 작품의 번역본(작품 해설)에서도 그런 영향의 일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적 자아, 심층 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베르그송의 철학이 프루스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프루스트의 문장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지요. 어쨌든 저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동안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철학자들' 혹은 '작가와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런 작품들이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를 밝히는 게 주목적이니까요.

 

그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2부 격인 <꽃핀 처녀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아! 슬프게도 더없이 싱싱한 꽃 속에서도 우리는 지극히 미세한 점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 점은 정통한 정신에게 오늘 꽃핀 육체마저도 건조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예정된 불변의 형태가 되리라는 걸 벌써부터 그려 보인다. 아침 바다를 감미롭게 부풀리며, 조수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고요한 바다이기에 움직이지 않아, 그린 듯 보이는 잔물결과도 흡사한 코를 우리는 기쁘게 쫓아간다.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자기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고 있던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유대인 애국주의나 그리스도교인의 유전적 특징처럼 그렇게도 깊숙이 피할 수 없는 채로, 난 알베르틴이나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미 꽃송이 아래서 그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을 위해 보존한 듯한 커다란 코나 튀어나온 입, 통통한 몸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지만, 실은 무대 뒤에 있어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상황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체를 앞선 본성에서 갑자기 발생한,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드레퓌스주의나 교권주의, 또는 민족적이고 봉건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들이다. 개인은 이러한 본성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본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개인적인 동기와 구별하지도 못한 채 생각하고 살고 진화하고 확고히 하며 또는 죽어간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연계 법칙에 의존하므로, 우리 정신은 어느 은화식물이나 이런저런 벼과 식물마냥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줄로만 여기는 여러 특징들을 미리 소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차적 원인을(유대인 혈통이나 프랑스 가문 등) 인식하지 못하고 이차적 관념만을 포착하는데, 실은 이 일차 원인이 이차 원인을 필연적으로 생산해 냈으며, 그것이 때가 오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관념은 심사숙고의 결과처럼 보이며, 또 다른 관념은 건강상 부주의의 결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콩과식물이 종자로부터 그 형태를 이어받듯이, 실은 우리도 우리 가족으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관념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어받는다.

 

마치 모종관 하나에서 꽃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무르익어 가듯, 나는 발베크 해변의 노부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닮을 그 단단한 씨앗과 무른 덩이줄기를 보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꽃들의 계절이었으니. ……(411­∼41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저는 이 복잡미묘한 구절을 읽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잇따라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때로는 극히 느린 움직임으로 포착한 미세한 떨림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카메라 기술이 자주 보여주듯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매우 빠르게 재생시킨 듯한 느낌을 줍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불과 1,2초 만에 빠르게 지나가고, 태양과 별들이 뜨고 지는 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영상을 우리는 이미 유튜브에서도 너무나 쉽게 목격하고 있지요.

 

꽃핀 풍경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들이 다 스러지고 난 다음의 풍경들은 또 얼마나 서늘하고 쓸쓸한가!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자주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가! 또한 꽃들이 '사랑'과 자연스레 연결될 때 '꽃이 피고 지는 일'은 그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폭풍의 언덕』이었습니다. 언제나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황량한 언덕에도 어김없이 피어났던 히스 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토록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싱그럽게 피어났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듯한 사랑은 또 얼마나 빨리 시들어 광기어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가요.

 

두 번째로 떠오른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소설 『율리시스』였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또한 '꽃'을 '애정'과 결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난해한 책 속에서도 '호우드 언덕'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테지요.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우드 언덕에서 주인공인 블룸과 몰리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은 얼마나 농밀하면서도 해독하기 쉬웠던가요! 이번 기회에 일부러 시간을 들여 그 두툼한 책 속에서 간신히 다시 찾은 그 부분을 여기서 인용해 보지요.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기계에 넣고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열이지.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 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호우드 언덕의 야생 고사리 아래 숨겨진 채 우리들 아래 잠자는 만(灣) : 하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늘, 라이온 곶(串) 옆의 자색의 만(灣). 드럼레크 곁에는 녹색. 서턴 쪽으론 황록색. 바다 밑의 들판, 희미한 갈색의 선(線)들, 매몰된 도시. 그녀는 나의 코트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있었지. 헤더 숲속의 가위 벌레가 그녀의 목덜미 밑에 있던 나의 손을 간질이고, 이러다가 저를 뒹굴게 하겠어요. 오 얼마나 근사하랴! 연고(軟膏)로 차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워 있었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씹혀진 시드케이크(씨 과자)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 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싱싱한 생기. 뾰족하니 내게 내민 그녀의 입술. 부드럽고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젤리 같은 입술. 그녀의 눈은 꽃이었어, 저를 안아 줘요, 욕망에 찬 눈. 자갈이 굴렀다.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지. 산양 한 마리. 아무도 없고. 만병초 꽃 우거진 호우드 언덕에 한 마리 암 산양이 발 디딤을 든든히 하면서 걷고 있었다. 까치밥나무 열매(똥)를 떨어뜨리며. 고사리 숲 아래 가려져 따뜻하게 안긴 채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 위에 마구 덮쳐 누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눈, 그녀의 입술, 혈관이 뛰는 그녀의 뻗친 목, 얇은 망사의 블라우스 속에 부푼 여인의 앞가슴, 그녀의 위로 솟은 도톰한 젖꼭지에. 뜨거운 혀를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지.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 나는 키스 받았지. 몸을 온통 맡기며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지. 키스를 받고,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144쪽)

 

* 몰리에게 한 구애가 절정을 이루는,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숨가쁜 기억(제18장, 몰리의 최후의 독백 참조). 무성한 만병초꽃과 고사리 숲에는 어느 관광객이 꽂아 놓은 '블룸을 방해하지 말라(No disturbing Bloom)'라는 푯말이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8장 더블린 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중에서

 

 

만병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호우드 언덕의 추억은 '역자의 주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율리시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18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지요. 이번에는 블룸이 아닌 몰리의 회상을 통해서 말이죠.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몰리의 독백은 Yes에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이지요. 그녀의 독백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엔 쉼표나 마침표가 없으니까요.)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가능한 한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기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황량한 곳이었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회랑이랑 포곽(砲郭) 및 저 무시무시한 바위들 그리고 고드름인지 뭔지는 모르나 늘어져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성 미가엘 동굴 진흙이 온통 내 구두를 더럽히고 원숭이가 죽으면 저 길을 통해 바다 밑으로 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저 멀리 배들은 마치 나뭇조각 같았어 그것은 몰타를 향해 지나가는 보트였지 그렇지 바다와 하늘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 누워 영원토록 말이야 그이는 옷 위로 유방을 애무했어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좋아하지요 거기가 동그랗기 때문이야 나는 그이에게 기대고 있었어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너무 새것이 되어서 조금 햇볕을 쬘 양으로 말이야 내 얼굴은 왼쪽에서 보는 것이 제일 예쁘지 나는 블라우스를 그와 헤어지는 날을 위해서 터놓았어 살이 다 들여다뵈는 셔츠를 그이는 입고 있었지 나는 그의 가슴이 분홍빛임을 볼 수 있었어요 그이는 한동안 자기 것을 내 것에다 터치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았어 정말 후련해졌어 처음에 그는 몹시 당황했지 두려운 것은 폐병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혹시 임신될지도 모르잖아 저 늙은 하녀 아이네스가 내게 가르쳐줬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나중에 바나나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지 그러나 그것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딘가 몸속에 토막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한때 의사들이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고놈의 것이 수년 동안 석탄염에 덮인 채 그곳에 숨어 있다나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 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오 그렇고 말고 나는 그이 것을 내 손수건에다 빼게 했지 나는 흥분하지 않은 척 하려 하고 있었지만 내 두 다리를 벌렸지 그가 내 패티코트 속을 터치하지 못하도록 했어 나는 옆이 벌어지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그이에게서 억지로 생명을 짜냈던 거야 처음엔 그이를 간질이고 있었지 나는 호텔에 있던 그놈의 개를 흥분시키는 것을 좋아했어 르르스스트 그르르릉 그이는 눈을 감고 그리고 새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아래쪽을 날고 있었지 그이는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아침의 기분처럼 그이가 좋았어 내가 그런 식으로 그이를 덮쳤을 때 그이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 내가 그이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꺼내 살갗을 벗겼을 때 그 끝이 일종의 눈(眼) 모양을 하고 있었어 남자들은 안쪽으로 아랫배 밑까지 단추 투성이야 내 사랑 몰리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 ……(626∼627쪽)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18장 침실(페넬로페)>

 

 

한편, 우리의 성격이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핋연적으로 - 프루스트가 말한 대로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로' -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진화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과학자들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서 특히 놀랍습니다. 『빈 서판』과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스티븐 핑커야말로 이런 프루스트의 주장들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진영의 주역이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 『칭조적 진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두뇌의 운동기작은, 거의 모든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현재 상황을 조명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을 도와 결국에는 유용한 일을 낳을 수 있는 것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잉여의 기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통과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전달자로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 뒤에서 이끌고 가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갖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모호하게 과거가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를 응축한 것이고, 심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더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영혼의 만곡(彎曲)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비록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표상으로 된다 하더라도, 전체가 그 추진력에 의해 그리고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4∼26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프루스트의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담긴 7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지요. 바야흐로 지금이야말로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니만큼,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가운데 특히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을 거의 동시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화려한 문장을 한 대목만 더 인용해 보지요.


소녀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렴풋한 붉은 빛 여명에 섞여 확실한 특징들이 아직 솟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몇 해가 지나서야 분명해질 그 구별되지 않는 윤곽 아래로 매혹적인 빛깔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의 윤곽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저 자연이, 가족 가운데 고인이 된 분에게 추모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일시적인 유사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우리 몸이 어떤 놀라움도 약속하지 않는 부동성 속에 고정되는 순간은 너무도 빨리 오는 법이어서 그때 가면 한여름에도 벌써 죽은 잎이 보이는 나무들처럼 아직은 젊은 얼굴 둘레에 머리칼이 빠지고 희끗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 찬란한 아침은 그토록 짧기에 우리는 소중한 밀가루 반죽마냥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살갗을 가진 어린 소녀들만을 특히 사랑한다. 소녀들은 매 순간 그녀들을 지배하는 일시적인 인상들로 응고된 유연한 물질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그러나 가소성(可塑性) 덕분에 우리는 한 소녀가 보여 주는 상냥한 배려에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상냥함은 성숙한 여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여인들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 뭔가 따분하게도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냥함 자체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얼굴에 유연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여, 생존경쟁이 영원히 투사의 얼굴 또는 종교적 황홀에 사로잡힌 얼굴로 만들고 굳어지게 한다. 어떤 얼굴은 ㅡ 남편이 아내를 복종하게 하는 그 지속적인 지배력 탓에 ㅡ 여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사의 얼굴로 보이며, 어떤 얼굴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견디어 온 희생이 새겨져 사도(使徒)의 얼굴로 보인다. 또 어떤 얼굴은 수년간의 항해와 폭풍우가 늙은 뱃사공을 연상시켜 단지 복장에서만 여성이란 성별이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 대한 한 여인의 관심은 우리가 그 여인을 사랑할 때면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새로운 매력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에게 연달아 다른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쾌활하든 쾌활하지 않든 여인의 겉모습은 항상 똑같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완전한 응고가 진행되기 전이라, 소녀들 곁에 있을 때면 그 불안정한 대립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희하는 형태가 주는 광경에 상쾌함을 느끼게 되고, 이 대립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관조하듯,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434∼43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어떤가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들이 참으로 놀랍지 않나요? 그가 여느 과학자 못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철학자 베르그송의 작품 속 문장들과 긴밀히 조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의 진정한 심층적 원인은 생명이 자신 안에 보유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성격이라는 특수한 경향의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인격이 비록 불가분적이지만 다양한 인물들을 그 안에 결합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발생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전체가 혼합되어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속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야말로 유년기의 최대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호침투하는 인격들은 성장하면서 양립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거쳐가는 길은 우리 자신이 처음에 그러했던 상태, 또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태들 전체의 잔해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결코 그러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성장하면서 분기된 다양한 경향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따로 진화하는 종들의 분기하는 계열들을 그 경향들과 함께 창조한다.(161∼16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이것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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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5-1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만나게 되었네요.ㅎ
영상을 보고 한눈에 알았습니다.^^

oren 2021-05-10 19:42   좋아요 1 | URL
아... 모나리자 님이 알라딘에도 계셨었군요!!
정말 깜놀이고, 또 반갑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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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4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어느새 현대인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느낌을 주는 아주 독특한 소설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조르바는 온갖 사회 규범과 따분한 일상에 갇혀 틀에 박힌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나약한 현대인의 모습과는 완전히 정반대편에 있는 인물이며, 그 어떤 전통적인 도덕이나 가치관으로부터도 훌쩍 벗어나 있어서 마치 태초의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 유형'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자리잡았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1964년에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만든 「조르바의 춤」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곡이 되었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두 차례나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는데,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라는 말을 남겼었지요. 아마도 이 작가에 대한 문인들의 평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코멘트는 콜린 윌슨의 다음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콜린 윌슨의 이 평가는 어쩌면 절반쯤만 진실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예 탄생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너무나 그리스인 다웠고, 그런 실존 인물을 소설 속에서 재창조한 작가 또한 <그리스적인, 너무나 그리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그리스인 답다'라는 표현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 하면 과연 어떤 이미지부터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인류가 남긴 영원불멸의 서사시로 칭송받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쓴 호메로스? 트로이아 전쟁?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숱한 비극을 쓴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믿기지 않는 투혼을 보여준 스파르타의 300 전사들? 혹은 살라미스 해전? 4년 마다 올림픽 성화 채화식이 열리는 고대 그리스 신전?


제가 방금 주마간산격으로 대충 언급한 고대의 여러 인물들이나 사건들만 놓고 보더라도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대해 유별난 애착과 탐구열을 보였던 철학자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작품에서 그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호메로스에서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들에게 내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전까지, 우리에게 그리스인들이 의미하는 바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의미했던 바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의 단계는 깊은 불만감에서 한번쯤은 그리스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본 경험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 앞에 서면 자신이 이룬 모든 것, 외면상 완전히 독창적으로 보이는 것, 진정으로 감탄할 만한 것들이 갑자기 색채와 생명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모사품으로, 회화로 오그라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들이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묻곤 한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5장


독일 철학자 니체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를 깊이 연구했던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도 ‘그리스인의 남다른 특징들‘에 대해 인상적인 언급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했으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고, 그런 삶을 ‘인류 역사상‘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람들 또한 ‘그리스인‘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위로는 영웅시대 내지 호메로스 시대로부터, 내려와서는 4,5세기 후의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의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걸치는 그리스의 역사 · 문학 · 예술 · 시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느끼는 흥미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나가 몸소 그리스의 한 시기를 경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스적 상황이란 육체적 본성의 시대, 관능 완성의 시대이다. 정신적 본성이 육체와 엄밀하게 일치하여 나타난 시대이다. 거기에는 조각가에게 헤라클레스, 아폴론, 제우스의 모델을 제공한 것과 같은 그러한 인간의 육체가 있었다. 근대 도시의 거리에서 많이 보이는, 막연히 이목구비가 뒤섞여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또렷이 윤곽이 잡힌 균형적인 용모로 이루어지고, 눈동자만 하더라도 이런 눈으론 곁눈질하거나 이쪽저쪽 흘겨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머리 전체를 돌려서 보아야만 되도록 틀이 잡혀 있었다.

이 시기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맹렬하다. 그러나 나타난 존경은 인간적 자질에 대한 것이다. 즉 용기 · 숙달 · 자제 · 공정 · 힘 · 민첩 · 고성(高聲) ·넓은 가슴 등에 대한 것이다. 사치와 우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구가 매우 적은 데다 부유하지도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이 시종(侍從)으로도, 요리인으로도, 도살자로도, 군인으로도 된다.

그리스인은 반성적이 아니다. 그러나 관능(官能)에 있어서, 건강에 있어서 완벽하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육체 조직을 가지고 있다. 어른은 애들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행동했다. 그들은 꽃병을 만들고, 비극을 쓰고 조상(彫像)을 만들었다. 그것도 건전한 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좋은 취미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것은 계속하여 어느 시대에나 만들어졌고, 어디에서나 건전한 육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 그들은 어른의 활력과 어린이들의 매력 있는 천진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린이와 같은 천재와 타고난 활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인인 셈이고, 그는 헬라스의 시신(詩神)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소생시킨다. 나는 저 필록테테스 극(劇)에 나타난 자연애를 찬탄한다. 그 잠과 별과 바위와 산과 파도에 대하여 호소하는 글을 읽을 때, 나는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에머슨이 일찌감치 1849년에 발표한 <위인이란 무엇인가>에 실린 이 그리스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그가 100년쯤 후에나 세상에 등장할 어느 멋진 소설의 주인공(조르바)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만큼 <그리스인 조르바>는 철저히 그리스인이었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면서도 힘과 민첩함과 넓은 가슴을 지닌 어른스러움을 동시에 간직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그리스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이제부터는 그리스인 조르바 못지않게 뼛속까지 속속들이 그리스인이었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해서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그는 그리스의 여러 섬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섬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출생지 하나만으로도 예민한 독자들로 하여금 온갖 신화적 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작가였습니다.


크레타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문명이 개화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700년경부터 고대문명이 꽃핀 곳이지요. 크레타 문명의 황금기에 중심도시 크노소스에는 인구가 8만 명에 육박했으며 크노소스 궁전은 사방으로 8백 개 이상의 방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건축물이었다고 하지요. 장구한 세월 동안 잊혀졌던 이 크레타 문명은 19세기 말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었습니다.


이 크레타 문명의 전성기를 다스린 인물은 미노스 왕이었는데,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그는 제우스가 황소로 둔갑해 에우로페를 유혹하여 낳은 아들이었지요. 미노스 왕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고, 분노한 포세이돈은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를 사랑하게 만들지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괴물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였습니다. 미노스 왕은 이 괴물은 가두기 위해 기술 장인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미궁을 짓게 하고, 그 속에 갇힌 괴물은 9년마다 한 번씩 왕국의 속국 아테네로부터 선남선녀 각 일곱 명씩을 공물로 받아 먹었습니다.


이런 비극을 참다 못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세 번째로 공물을 바치던 해에 열네 명의 희생팀에 자발적으로 합류하여 크레타로 건너갑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맞장을 뜨기 위해서였지요. 마침 이 용감무쌍한 아테네의 왕자에게 첫눈에 반한 크레타 처녀가 있었으니 그녀는 미노스 왕의 공주 아리아드네였습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 공주의 실타래 덕분에 미궁 속에서 괴물을 처치하고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아내로 맞아 함께 조국 아테네로 향합니다. 그런데 일행을 태운 태운 배가 도중에 낙소스 섬에 들렀다가 그만 테세우스가 사고를 치고 맙니다. 테세우스가 딴 여자에 눈이 멀어 아리아드네를 헌신짝처럼 팽개쳤던 것이지요. 이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를 기꺼이 맞아들인 신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아리아드네 공주를 버리고 낙소스 섬을 떠난 테세우스는 무사히 아테네로 되돌아오지만 항구에 도착하자말자 뜻밖의 비보를 듣게 됩니다. 자신이 크레타 섬에서 괴물을 처치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경우에는 흰 돛을 달고, 실패하면 출발할 때 달았던 검은 돛을 그대로 달고 오겠노라 약속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흰 돛으로 바꿔달지 못했던 탓에 테세우스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틀림없이 변고가 생긴 줄 알고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 앞바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의 이름을 따서 에게 해로 불리고 있지요.


이처럼 크레타 섬은 이미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찬란한 고대문명이 싹튼 곳이자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와 디오니소스 등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전설적인 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테세우스의 영웅담은 단지 신화로만 전해오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전기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일까요?


여러 시인이나 역사가들에 따르면, 배가 크레테에 닿았을 때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그가 미궁에 들어갈 때 삼으로 만든 실타래를 주면서 길을 찾아 나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테세우스는 미궁 속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 소년 소녀들은 물론 아리아드네까지 데리고 무사히 아테네로 돌아왔다.


이 사건과 아리아드네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서 버림받아 목을 매 죽었다고도 하고, 테세우스의 배를 타고 낙소스 섬으로 가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오이나루스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그곳에 버려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테세우스> 중에서


제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소개하면서 엉뚱하게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소개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도 얼마쯤은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 얽힌 테세우스의 모험담을 현재진행형으로 되살린 『크노소스 궁전』을 출간했는데, 자신의 조국 아테네를 해방시키기 위해 괴물과 맞서 싸우는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모험이야말로 카잔차키스 문학의 핵심 주제인 '인간의 삶이란 자유를 갈구하는 영원한 투쟁'임을 표상했기 때문이지요.


카잔차키스의 작가 정신이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문장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영혼의 자서전』에 담긴 다음의 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


1883년에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평생 동안 말 그대로 수많은 대륙과 도시들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이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닮아가고 있었던 셈이지요. 현대판 오뒷세우스라 불리는 그는 아토스 산을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지방은 물론, 파리, 빈, 취리히, 카프카스, 나움부르크, 폼페이,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스페인, 로마, 이집트, 시나이, 키예프, 모스크바, 베를린, 니스,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일본, 영국, 네덜란드 등등을 두루 떠돌아다녔는데,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였지요.


1908년 아테네에서 대학을 마치고 파리로 건너간 카잔차키스는 그곳에서 생()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만납니다. 때마침 그 철학자는 자신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1907)를 막 출간한 직후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창조적인 힘에 따라 생명의 약동으로 부단히 진화하는 존재였습니다. 베르그송의 생철학은 카잔차키스가 베르그송 다음으로 만난 니체의 위버멘쉬() 철학과 절묘하게 결부됩니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초인을 인류의 희망이라고 부를 정도였지요.


<구원의 문은 우리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에게 《초인》은 희망이다. 《초인》은 대지의 종자이며, 해방은 그 종자 속에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니체에 뒤이어 카잔차키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실존 인물인 게르기오스 조르바였습니다. 1917년, 1차 대전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카잔차키스는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꾼으로 고용한 인물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카잔차키스는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공공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어 카프카스에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처한 15만 명의 그리스인들을 송환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는데, 이때에도 다시 한번 자신의 팀에 조르바를 합류시켰습니다.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은 대략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이제부터는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소설 속 이야기보다 이 작품을 둘러싼 배경 이야기를 구구절절 펼쳐놓은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정작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해봐야 탄탄한 구성을 갖춘 짜임새 있는 서사라기보다는 화자인 나와 주인공 조르바가 허구헌 날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 자체가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마치 『돈키호테』의 핵심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대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화자인 '나'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항구 도시 카페에서 우연히 조르바를 만납니다.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살아가는 나약한 지식인인 나는 이제부터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아 크레타 해안을 찾아가는 중이지요. 그곳엔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키카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인 조르바는 한 눈에 보기에도 먹물인 '나'와는 영 딴판이지요.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대뜸 어디로 여행하느냐고 묻고, 크레타로 가는 길이라는 화자의 대답을 듣자 말자 조르바는 '날 데려가시겠소?' 라고 도발적으로 묻지요.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한 조르바의 모습을 보자 그 헌털뱅이 같은 친구를 섬으로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나는 기꺼이 그와 동행합니다. 마침 조르바는 광산에서 십장으로 일한 경력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황량한 크레타의 해안에 오두막을 짓고 갈탄광을 채광하는 사업을 함께 시작한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출신 배경과 나이임에도 서로 기가 막힌 케미를 보인 끝에 끝내 '영혼의 단짝'이 됩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둘이서 크레타 섬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나'는 단테의 시행을 찾아 읽으며, 붓다에 대한 원고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에 골몰하지요. 그러나 조르바는 책 속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에서 펄떡이는 야생의 자유로운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의 자그마한 마을 해안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갈탄광 사업을 함께 꾸려가는 동안, 화자는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조르바를 점점 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조르바는 세상만사에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나간 건,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손가락이 녹로 돌리는데 자꾸 거치적거려 손도끼로 잘라버렸기 때문이었고, 젋은 시절 마케도니아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잡화를 팔고 다닐 때면 어둑해진 마을마다 과부들 집만 찾아다니고 묵었으며, 터키의 지배를 받던 크레타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땐 행상 대신 총을 집어들고 크레타 독립군에 가담해 숱한 터키인들의 목과 귀를 잘랐던 이력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자는 섬약한 손과 창백한 얼굴, 피투성이가 되어 진창을 굴러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요. 


조르바는 크레타의 해안가 작은 마을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며 지내는 퇴물 카바레 가수 오르탕스 부인과도 이내 연인 사이가 되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또다른 젊은 과부에게 몹시 이끌리지만 차마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대는 화자와 대비되지요. 조르바의 지극히 남성우월적인 독특한 여성관은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루는데, 적잖은 독자들은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당혹스러워 하지요. 조르바의 여성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수많은 어록(?) 가운데 한둘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되는 겁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사내가 오겠지요……. 」


「두목, 당신은 여자가 별것인줄 아는데……. 하기야 별것은 별것이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데 뭣하러 감정을 품어? 여자는 불가사의한 거예요. 법률과 종교가 들고 나서 봐야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여자에 대해서는 그런 걸 쓰면 안 됩니다. 두목,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에요. 공정하지 못해요. 내가 법을 만든다면 남자와 여자에게 같은 법을 만들어 적용하지는 않겠어요. 남자는 십 계명, 백 계명, 천 계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사내는 사내니까……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지킬 능력이 있어요. 그러나 여자에게 필요한 율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아니 두목, 이놈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는 겁니까……. 여자는 힘이 없는 피조물이오.」


남녀평등 사상은 개나 줘버리라는 식의 조르바식 여성관은 페미니즘이 날로 강조되는 요즘 세태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온갖 속박이나 굴레로부터 벗어나 본능적인 욕구에 오롯이 충실하고자 했던 디오니소스적 인간 조르바로서는 여성을 달리 생각할 다른 까닭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을 쓴 작가가「디오니소스 찬가」를 지어바친 철학자 니체를 끔찍히 숭앙하는 인물이었으니 달리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여기서 잠깐 니체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 하나만 인용하고 넘어가지요.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8절


소설 속의 이야기는 조르바와 오르탕스 부인과의 사이에 피어났던 때늦은 로맨스, 요부 같은 젊은 과수댁 소멜리나를 향한 연정이 좌절된 마을 청년의 자살과 그걸 앙갚음하는 복수극이 차츰 마무리되고 나면 서서히 종반부로 접어들지요. 한편, 나날이 기울어가던 갈탄광 사업을 단번에 반전시키고자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고가 케이블 선로 작업은 개통식 당일에 파국을 맞고 말지요. 케이블에 매단 통나무에 악령 같은 가속도가 붙어 철탑들이 모조리 쓰러져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졸지에 닥친 파국을 마주하면서도 두 사람은 절망 대신 도리어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개업식을 위해 마련한 양고기와 빵과 포도주로 잔뜩 배를 채운 두 사람은 이내 구두와 양말을 벗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 유명한 조르바의 춤이지요.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러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애지중지해 오던 모든 것이 수포로 끝난 순간 뜻밖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갈탄광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은 두 사람은 그 길로 영영 헤어지지만 그 후로도 7년 가까이 엽서를 주고받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던 조르바의 유언은 세르비아의 스코플리예 가까운 마을로부터 온 편지 속에 담겨있었습니다.다. “그 사람을 생각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전해주시오.


조르바가 남긴 최후의 유언이야말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조르바는 까마득한 옛날 자신의 선조들이 외족의 침략이나 지배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듯이 '자유'를 향해 끝까지 투쟁하는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결혼이나 가정은 물론 조국이나 하느님한테 얽매이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처럼, 그는 타고난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매순간을 기적처럼 바라보며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원숭이 껍질을 처음으로 벗어 던진 원시인처럼, 아니면 위대한 철학자처럼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에 지배당한다. 조르바는 이들 문제를 목전의 급한 필요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비록 현대소설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고전이나 신화에 얽힌 미묘한 흔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아주 독특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까마득한 옛날 미궁에 갇힌 괴물과 싸우기 위해 크레타로 건너간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에 위험한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문득 삶이 미궁처럼 복잡하게만 보이고 도무지 출구조차 보이지 않을 때, 에게 해의 쪽빛 바다가 넘실대는 크레타 섬으로 조르바를 만나러 독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갈탄광 사업이 쫄딱 망한 날 크레타 섬의 어느 해안가에서 기뻐 날뛰며  춤을 추던 조르바가 우리 인생의 '실마리'를 건네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니 그대들 자신을 뛰어넘어 웃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대 멋진 춤꾼들이여, 활짝, 더욱 활짝 가슴을 펴라! 건강한 웃음 또한 잊지 말고!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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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5-01 0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튜브 활동을 하시느라 oren님 글이 서재에 자주 올라오지 않아 아쉽네요. 대신 더 깊이있는 글을 가끔이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오랜만에 글을 읽고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oren 2021-05-01 15:00   좋아요 1 | URL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일이 여간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더라구요. 가끔씩은 ‘고된 유튜브 영상 만들기‘에서 벗어나서 한가로운 ‘알라딘 글쓰기‘ 시절로 되돌아가고픈 마음도 들 때가 있고요. 그래도 알라딘 서재보다는 유튜브 채널이 훨씬 더 역동적이라, 그 넓은 무대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겨울호랑이님을 비롯한 훌륭한 알라디너분들의 좋은 글들을 예전처럼 꼼꼼히 읽고, 감사의 표시와 댓글을 남기는 것조차 등한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지요. 아무쪼록 겨울호랑이님께서는 오래도록~~ 알라딘 서재를 풍성하게 꾸며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도 유튜브 영상 작업에 쓰이는 대본만이라도 꾸준히 올려보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https://www.youtube.com/user/ojcojj/community


영상 업로드를 하고 나면 며칠은 쫌 쉬는 편이랍니다. 
물론 '다음 영상을 뭘로 할까'를 구상하면서요... 

사실, 업로드와 업로드 사이의 짧은 틈새시간이 저로서는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고된 영상 편집작업에서 벗어나, 아무런 부담 없이 맘껏 릴렉스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다음 작품의 후보작들을 '그냥' 쭈욱 아무 생각없이 써 보면 다음과 같네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국가>, 플라톤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적과 흑>, 스탕달 
<모비딕>, 허먼 멜빌 
<역사>, 헤로도토스 
<신곡>, 단테 
<셰익스피어 비극 중 아무거나>, 셰익스피어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방인>, 알베르 카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마의 산>, 토마스 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예브게니 오네긴>, 푸슈킨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성>, 프란츠 카프카 
<인형의 집>, 헨릭 입센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일리아스>, 호메로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황무지>, T.S.엘리어트... 

사실 이들 작품들은 '언젠가는' 영상으로 만들 생각을 지닌 작품들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시' 읽어봐야 겨우 영상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난이도가 제법 느껴지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몇몇 작품들은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갖고 있는 책조차 없고요...) 

물론 대본 녹음까지 다 마쳤지만, 
영상 제작을 시도하다가 중지한 작품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요. 

이들 작품들을 쭈욱 나열하고 나니, 
이 작품들을 앞으로 1년 이내에 동영상으로 만들 수만 있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걸 만드는 게 가장 좋을까요? 
'4월은 잔인한 달'이니, <황무지>를 한번 다녀와 볼까 싶기도 하고요.... 

p.s
제 영상을 정말 열심히 봐주시는 어떤 구독자분께 달았던 댓글인데, 
오늘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하면서, 
이 목록에 언급된 책들을 그냥 한번 불러내서 사진으로 담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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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8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프로페셔널 한 느낌이 들어요!! 취미에서 프로의 세계로? ^^
4월은 잔인한 달이니, 좀 재밌는 책의 영상을 준비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잔인한 달이라서 더 삭막한 책 보다는요. ^^;

oren 2021-03-18 19:38   좋아요 1 | URL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한 달이면 두세 번씩 하곤 하는데,
매번 선택지 앞에서 고민이 많더라구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는 생각도 들곤 하고요.
해마다 4월만 되면 엘리엇의 잔인한 시구절이 떠오르니,
그 작품을 언젠가는 한번 다뤄보긴 해야 할 듯해요.
어쨌든 라로 님 말씀대로라면,
4월엔 잔인한 데다가 삭막하기까지 한 책은 피해야 좋겠군요!

scott 2021-03-1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슨 진정한 책탑!의 경지!!4월 황무지 부터 시작하신다면 본격적으로 벽돌책 하나씩 돌파하는 유툽 콘텐츠가 될것 같네요 홧팅!!

oren 2021-03-18 19:48   좋아요 1 | URL
텍스트에서 나열한 순서대로 책탑을 쌓았는데,
맨 나중에 언급된 <황무지>는 너무 얇은 책이어서,
책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완전 대실패네요.^^
그나마 빵빵한 부피를 자랑하는 작품들을 먼저 꺼내든 덕분에,
책탑의 밑받침이 든든해지는 효과는 확실히 본 듯해요.^^

p.s
작품 목록에는 있고 책탑에는 없는 책들은 주로 1980년대에 읽은 작품들인데,
그 작품들의 실물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요.^^
 

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언제나 '삶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교양과 무질서』라는 유명한 작품을 쓴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습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습니다.  

 

작가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습니다. 그는 단테의 작품을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습니다.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가 토머스 헉슬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력마저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요?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입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입니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집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입니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집니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합니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됩니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세계입니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에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지요.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독자들까지도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지만, 센터 내부는 온갖 실험실용 플라스크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지요.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납니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 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 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돕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웁니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습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하지요.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납니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습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습니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습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오지요.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말이지요.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챕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냅니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칩니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갑니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합니다. 오웰의 작품에 담긴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됩니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지요.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요.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증대시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첨단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과학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9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아바타가 가상의 공간에서 유명 아이돌 그룹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춤을 추는 등 메타버스 공간이 실제의 삶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도 품고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이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존은 인간 삶의 본질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냅니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리둥절해 합니다.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야만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합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과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는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등등을 말이지요.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멋진 신세계>의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요.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말이지요.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말이지요.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겠다는 말이었지요.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습니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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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3-15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소마만 기억하는 저로서는 ㅠㅠ 헉슬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좀 더 깊이있게 느껴져요. 표지를 보니 제가 갖고 있는 건 문예출판사거네요. ㅎㅎ

oren 2021-03-15 20:34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판으로 읽었습니다! 이번에 영상을 만들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어머니, 할아버지(토마스 헉슬리), 외할아버지의 형님(매슈 아놀드), 친형, 이복동생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실물 사진을 찾아봤네요..

책으로 읽을 땐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던 <책 속 내용들>을 실제적인 영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재미가 때론 쏠쏠하긴 합니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영상 자료들을 긁어모으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을 소개합니다.


찰스 다윈은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지동설을 증명한 갈릴레이와 함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대 과학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다윈이 1859년에 발표한 『종의 기원』은 인류 역사를 바꾼 100권의 책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중요한 책이지요.


196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은 다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내 어머니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생명과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다윈은 청년기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으나 도중에 그만 두고 박물학만 파고들었는데, 실망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냈다고 하지요. 그러나 결국 그는 자연사(自然史)를 평생의 학문으로 선택하였고, 1831년에는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걸친 '역사적인 항해'를 하게 도지요. 이 비글호가 갈라파고스 섬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유명한 배가 되리라고는 그 당시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지요.


다윈은 비글호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남미와 대서양, 태평양과 인도양을 넘나들며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채집하였으며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마침내 '종의 기원'에 대한 극적인 영감을 얻게 되지요.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관찰 전에 추리하는 것은 필요하고 관찰 후에 추리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관찰 중에 추리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라고 말이지요. 그토록 신중한 그였기에 그는 비글호와 함께 했던 5년 동안의 오랜 항해 끝에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여행기인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한 뒤 무려 20여 년 동안, 오로지 진화론을 입증할 방대한 증거와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셈이지요. 

오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그는 1859년에 인류를 미망에서 깨어나게 만든 『종의 기원』을 출판합니다. 다윈의 이론은 비록 일부의 오류는 포함하고 있지만 그의 대부분의 이론은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적 발전에 의해서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확고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요.

『종의 기원』의 핵심 내용은 간략합니다. 생물은 창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생물이 생존하는 동안 생식과 유전을 통해 끊임없는 변이를 일으키며,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를 거친다는 것이지요. 한편 자연계의 생물은 제한적인 생존환경 때문에 서로간의 생존경쟁이 벌어지며, 결국 환경에 대하여 유리한 변이를 가진 개체만이 생존하고 그 외에는 도태되는 ‘적자생존’이 일어나며,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생물의 형질변이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결국 개체 뿐만 아니라 생물종 자체도 끊임없이 새로운 변종을 낳으며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를 거치고 나면 결국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다윈이 살던 시대에만 하더라도 세계는 창조의 입김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 졌으며, 인간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자연계의 생물의 진화를 '나뭇가지'에 비유해 설명하고, 포유류나 영장류 역시(인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생물체와 똑같이 나뭇가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윈의 이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다만 그러한 이론이 기존의 '창조적 세계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 '반박당하지 않을만큼 완벽한' 이론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에 매달렸으며, 그런 그의 노력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로서의 나의 성공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는 별도로 하고 ······ 복잡한 갖가지 심적 소질과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 과학에의 사랑 - 어떤 문제라도 오랫동안 끝까지 생각하는 무제한의 강한 인내심 - 그관찰이나 사실 수집에서의 근면함 - 그리고 창안력과 상식이 함께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

 - 다윈,『자서전』 중에서

『종의 기원』은 생물학은 물론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기준을 세운 고전입니다. 다윈이 생존했던 시기에도 종(種)이 진화한다는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을 주장하고, 나무에서 뻗어가는 가지에 비유해 종의 분화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몰고 온 파장은 대단했으며, 신에 의한 창조설이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기에 종교계는 물론,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기존 학계로부터도 심한 반박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못된 궤변”이라는 종교계의 거센 비난은 다윈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윈의 생각과 주장에 열광하는 옹호자들도 속속 생겨났습니다. "난 정말 바보다. 이처럼 쉬운 설명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영국 동물학자 T.H. 헉슬리의 이 탄식은 『종의 기원』의 가치를 단번에 알려줍니다.


다윈의 ‘혁명’은 이 책이 출간된 지 1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다윈의 '생명은 진화한다'는 사상은 자연과학은 물론 의학.철학.심리학.문학.경제학 등 수많은 잔가지들로 계속 자라나 뻗어나가고 있으며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종의 기원』을 읽어 보면 생명체의 진화와 다양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듭니다. 내용이 너무 전문적일 것 같아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온갖 다양한 생명들을 왕성한 호기심으로 관찰하고 그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 내고자 했던 다윈의 열정도 느낄 수 있으며, 또 여러 동식물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12년 뒤에 마침내 『인간의 유래』를 발표합니다. 『종의 기원』에서 '훗날 인간의 기원과 역사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인류의 조상이 과연 어디서부터 갈라져 나왔는가를 추적하는 집요한 연구가 이 책에 담기게 되지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다윈이 밝혀낸 인류의 조상은 협비원류, 일명 긴꼬리원숭이였습니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유인원들이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그리고 인간이었습니다. 인류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침팬지와 구분된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700만 년 전이었습니다.

 

다윈의 끈질긴 관찰과 추론으로 밝혀낸 심오한 생각들은 오늘날 수많은 생물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을 너무나 자주 좌절시킨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첨단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 등에 힘입어 현대의 과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롭고도 탁월한 이론을 전개해 볼 욕심으로 눈에 번쩍 뜨이는 주제를 찾아 막상 연구에 착수하려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들의 대부분은 오래 전에 찰스 다윈이 내놓은『종의 기원』이나『인간의 유래』등에 '이미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는 일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이 단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놀라운 생각을 떠올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갈라파고스 섬에서였습니다.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이미 남아메리카에서 많은 화석을 발견한 다윈은 과거에 멸종한 생물이 현재 살아 있는 종과 유사하고, 특히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기후 조건이 비슷한 남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동식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물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된 것이지요.


런던으로 돌아온 다윈은 표본에 대한 깊은 고찰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결국 '진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변화는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일어났고, 현존하는 모든 종은 결국 하나의 생명체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을 세우게 됩니다. 다윈은 생물종 내의 변이가 무작위하게 일어났고, 이렇게 다양한 변이를 갖춘 개체들은 환경의 적응능력에 따라 선택되거나 소멸된다고 봤습니다. 이른바 '자연선택 이론'이 탄생한 것이지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한 배경인 갈라파고스는 흔히 세상을 바꾼 섬으로 불립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난 역량을 갖춘 BBC의 자연사 프로젝트팀은 다윈이 방문했던 갈라파고스에 대해 생생한 사진과 글로 담아낸 책을 펴낸 적이 있는데, 그 책만 살펴보더라도 갈라파고스가 다윈에게 얼마나 중요한 섬이었는지를 금세 알수 있습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구상의 생명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종은 영속하지도 않으며, 지적 창조자의 완벽한 작업도 아니다.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경쟁을 통해 생존해온, 단순히 자연의 맹목적인 힘에 의해 선택된 순간적인 모습이다. 500쪽에 이르는 그 책에서 비록 갈라파고스는 단 한 줌 잠깐 언급되지만, 먼 청춘 시절 한 번 방문했던 매혹적인 작은 섬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다윈은 그곳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만큼 그 섬들은 그의 모든 견해의 기원이고, 『종의 기원』의 근원이었다.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이 책의 서문에 남긴 글도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과학의 착한 요정이 전 세계를 날아다니다가 그녀의 요술지팡이로 건드리고 싶은 가장 멋진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을 과학의 낙원이자 지리학과 생물학의 에덴동산, 진화생물학자들의 아르카디아(이상향)로 바꿔놓았다. 아마도 여러분은 요정의 의도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요정이 빛을 비춘 그곳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이다. 그곳은 서경 91도 남위 1도로 에콰도르 해안에서 서쪽으로 1,170킬로미터, 동태평양에 위치한 다윈의 '적도공화국', 바로 갈라파고스다. ······ 『갈라파고스』는 내가 다음에 이곳을 방문할 때 귀중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나는 탑승할 배의 서가에 기증하기 위해 이 책 한 권을 더 가져가려 한다. 만약 여러분이 갈라파고스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고 감상하기를 권한다. - 리처드 도킨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 상륙한 날은 1835년 9월 17일이었습니다. 그가 비글호에 몸을 싣고 영국 남단에 위치한 데번포트 항구를 떠난 지 4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에 복받쳐 있던 26세의 다윈'은 그날 자신의 일기에 '끊임없이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어두운 하늘'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하지요.

 

다윈이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국 갈라파고스를 '세상을 바꾼 섬'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1835년 10월 20일에 갈라파고스를 떠났고, 이듬해 10월 2일에 영국 해안의 팰머스에 도착해서 비글호에서 내렸지만, 그가 갈라파고스에서 봤던 풍경들은 무려 24년 동안이나 '놀라운 생각과 연구를 거듭하는 밑거름' 역할을 계속 한 끝에 마침내『종의 기원』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해 낼 수 있었던 게 자신의 눈 앞에서 툭~ 떨어지는 '한 알의 사과'였다면 다윈이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찾아낸 건 멀고도 먼 항해 끝에 다다른 '갈라파고스에서 보낸 시간들'이 결정적이었던 셈이었습니다.


갈라파고스는 비록 우리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생명이 신비로운 창조주의 입김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단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발생하여 끊임없이 진화하는 동안에 이토록 경이로운 광경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아득한 옛날, 찰스 다윈이라는 20대의 젊은 청년의 눈앞에도 똑같이 펼쳐졌던 그 섬의 풍경들을 마저 소개하는 것으로 이 영상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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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EvH_PWB-4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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