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 책에 대한 감회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겨보고픈 욕망은 억누르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 동안에 수없이 자주 느꼈던 독특한 감회들을 이런 기회에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되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감회를 밝힐 때 첫 번째로 눈길을 돌려야 마땅할 방향은 당연히 작가의 서재 쪽이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꼬박 20년 이상을 로마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온전히 다 바쳤지 싶다. 그는 아마도 이 책을 쓰기 위해 결혼도 기꺼이 포기했던 듯하다. 불후의 작품을 쓰기 위한 그의 노고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평탄한 결혼 생활과 장기간의 방대한 연구 과정을 필요로 하는 걸작의 출산이 순조롭게 병행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5현제의 치세가 시작되는 서기 98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1,355년 동안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가라도 이 기간 동안의 로마 역사를 깊이있게 다루기 위해서라면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서기 97년까지의 선행 역사를 도저히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가 건국된 B.C 753년부터 5현제의 치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기원후 97년까지 850년의 역사가 자연스레 덧보태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로마 건국 초기의 역사가 상당 부분 자세하게 다뤄진다. 또한 건국 초기의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에 이를 때까지 로마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숱한 인물들도 수없이 자주 등장한다.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가문의 영웅들을 비롯하여,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브루투스, 카토,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등이 여러 차례 기번의 붓끝에서 되살아 난다.
로마의 건국으로부터 제국의 멸망까지 다루는 데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또다른 역사는 수많은 이민족들의 역사다. 여기에 포함되는 국가와 민족들은 쉽게 말하자면 아메리카 신대륙을 빼고는 거의 다 포함된다고 봐도 좋다. 로마 제국의 영토와 겹쳤던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란, 이라크, 사우디 정도로만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는 물론 저 멀리 볼가 강과 돈 강 너머에 살았던 러시아 대륙, 티무르가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징기스칸의 몽골, 무굴제국의 인도, 중국은 물론 '고려(Corea)'까지도 두루 자세히 언급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역사적인 무대의 시공간적인 방대함이야말로 외형적으로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봐도 좋다. 물론 아놀드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라는 작품이 전 인류의 전 지구적인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훨씬 더 방대한 시공간을 자랑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의 기나긴 역사에 대한 기번 특유의 깊이 있는 고찰, 로마 제국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과의 경쟁에 대한 상세한 연구(게르만족, 사라센족, 페르시아, 몽골족, 타타르족, 투르크족 등), 십자군 전쟁에 관한 자세한 연구,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과 종파 간의 갈등, 그리스도교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과의 분쟁 등을 포함하는 기번의 방대하고 깊이 있는 연구는 토인비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방대함과 깊이를 자랑한다.
기번의 역사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특별한 감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저자의 방대한 독서 경험과 놀라울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이다. 그는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기록해 나가는 동안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역사적 장소와 장면을 묘사할 때마다 거기에 딱 어울릴 만한 또다른 인물이나 장면들을 다른 책에서 끌어와 절묘하게 겹쳐 놓는다. 똑같은 무대에서 주인공만 바뀐 채 500년 혹은 100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는 '영웅들의 행위'를 비교하는 재주야말로 기번을 따를 역사가가 없을 듯하다. 그가 로마의 역사를 설명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불러 내는 인물들은 역사상으로 실재했던 영웅들도 많지만, 특별히 문학작품들로부터 인용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단순히 로마 제국의 영토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와 겹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번의 호메로스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웅숭깊은 데가 많다. 훗날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를 설명하는 몇몇 대목들만 보더라도 그는 호메로스를 얼마나 자주 불러냈던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였던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사실상 볼모나 마찬가지 상태에서 로마 황제였던 사촌 형님 콘스탄티우스와 함께 전차를 타고 궁정으로 귀환하는(사실상 끌려가는) 동안 마음 속으로 암송했던 싯구절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운데 어떤 대목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놀라운가. 율리아누스 황제는 특히 웅변 실력도 탁월했는데, '호메로스의 연구'를 통해 그런 실력을 갈고 닦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메넬라우스의 단순하고 간결한 화법, 겨울의 싸락눈처럼 쏟아져 나오는 네스토로의 달변, 오뒷세우스의 감상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웅변을 모방하는 방법이야말로 율리아누스가 호메로스를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라는 식이다.
기번이 호메로스를 어떤 식으로 인용했는지 두 대목만 더 소개하고 넘어 가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경기 대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리스에서는 저명한 이들이 직접 경기에 참가한 반면, 로마에서는 관람객들이 저명한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올림피아 경기장은 부와 공훈,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자가 스스로의 기술과 민첩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디오메데스와 메넬라오스의 발자취를 따라 전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봄직도 했다.(56쪽)
(기번의 주석)
『일리아스』 23권을 읽어 보면 전차 경주의 방법과 예절, 그 열정과 정신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에 관한 학술 논문을 보면 더욱 흥미진진하고 근거가 분명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그는 거친 군대 생활을 통해 강인한 심신을 무쇠처럼 단련했다. 스뱌토슬라프는 곰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말안장을 베개 삼아 땅 위에서 잠자곤 했다. 그는 먹는 음식도 거칠고 소박해서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고기를(주로 말고기) 석탄에 구워 먹었다. 실전을 거치면서 그의 군대는 안정되고 규율이 잡혀갔다. 대장이 누리는 것 이상의 사치를 감히 누릴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532쪽)
(기번의 주석)
『일리아스』 9권에 나오는 아킬레스의 식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서사 시인이 이런 묘사를 했다면 자기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독자들의 비위를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서사시는 조화로우며 사어(死語)라서 실감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2700년의 세월을 둔 지금으로서는 고대의 원시적인 풍습에 재미를 느낄 따름이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호메로스 다음으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들은 고대의 시인, 철학자, 역사가들이다.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등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와 희극을 쓴 메난드로스,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 철학자 키케로, 역사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리비우스,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가 대표적이다. 기번과 비교적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도 자주 인용되는데, 손에 꼽을 만한 인물들은 페트라르카,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밀턴, 몽테스키외, 볼테르, 데이비드 흄, 루소, 아담 스미스 등이다.(특히 볼테르,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는 기번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쓴 작품 속의 내용들이 얼마만큼 정교하게 '로마제국 쇠망사'에 녹아드는지는 기번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가령 셰익스피어가 쓴 『헨리 4세』의 주인공은 내란을 통해 권력을 찬탈했기 때문에 무너져 가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더라도 도와줄 여력이 전혀 없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런 '놀라운 주석'을 덧붙인다.
여러 날 런던에 머무는 동안 마누엘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은 성전에 참여할 준비를 하기에는 프랑스보다도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이 해에 세습 국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사형을 당한 데다가, 지금의 왕 헨리 4세는 왕위를 성공적으로 찬탈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야망에 대한 벌을 받기라도 하듯이 시기심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랭커스터 가문 출신의 헨리 4세는 끊임없이 왕좌를 위협하는 음모와 반역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성전에 직접 참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병력을 빌려 줄 여유조차 없었다. 헨리 4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의 인품을 칭송하며 연일 연회를 베풀어 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만약 영국의 군주가 십자가를 메는 체 했다면, 그것은 경거한 대의명분을 따르는 시늉으로 신민들의 마음과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394∼395쪽)
(기번의 주석)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는 왕이 십자군 서약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극을 마친다.
(나의 생각)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라는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는 그 작품을 읽고 난 뒤로도 헨리 4세가 다 쓰러져 가는 동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간절한 파병 요청을 받았을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 작품이 시작되는 부분이 '십자군 전쟁'과 연관된 줄도 전혀 몰랐다. 또한『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으면서 헨리 4세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될 줄도 몰랐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책의 표지를 뒤집어 펼치면 각 권마다에 해당하는 세계 지도가 펼쳐진다. 겉표지를 벗긴 책의 모습은 왠지 너무 고색창연한 색상이어서 조금은 아쉽다.)
이토록 많은 인물들의 작품을 『로마제국 쇠망사』에 절묘하게 버무려 녹여 낸 기번의 박학다식함과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될까. 기번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꼈던 생각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체력뿐만 아니라 책력(冊歷, '책을 읽은 이력'을 뜻하는 나만의 신조어)도 알맞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기번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얼마나 기쁘고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던가. 기번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내가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무수한 책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해지고 시무룩해졌던가.
이 책을 읽은 감회를 정리하기 위해 '기번의 서재 쪽으로' 향했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급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기번의 문장력이다. 기번 특유의 지독한 만연체는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가 없다. 6권을 읽는 동안에 '만연체' 때문에 문장의 정확한 뜻을 해독하는데 애를 먹은 경우가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아마도 기번에게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났다고 믿고 싶다. 그런 문장들만 제외한다면 기번의 독특한 만연체가 독해를 특별히 방해한다거나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특유의 긴 호흡 한 번으로 유장하고도 장중하게 역사를 매조지하는 점에서는 기번의 만연체만큼 멋들어진 역사 서술도 찾기 어렵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기번의 역사책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문장들은 아마도 '너무나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표현들'을 역사 서술에 서슴없이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일 듯하다. 그런 문장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하는데, 빛나는 명문장들을 일일이 여기에 소개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수도사들은 독방에서 보내는 낮 시간에는 개개인의 신앙이나 열정에 따라 묵도나 통성 기도를 했다. 저녁이 되면 모두 모여서 밤이 되어도 자지 않고 수도원의 공공 예배에 참석했다. 이집트의 맑은 하늘에는 거의 구름이 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확한 시간은 별의 위치로 정해졌다. 예배 시간을 알리는 신호는 투박한 모양의 뿔피리나 나팔을 두 번 울려 광활한 사막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불행한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라 할 수 있는 수면마저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노동도 쾌락도 없는 수도사들의 공허한 시간은 느릿느릿 무겁게 흘러갔으므로,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 그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태양의 지루한 발걸음을 탓했다.(448∼449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3권』
십자군 전쟁의 일단을 소개하는 대목은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된다.
왕실 역사가인 아불페다는 하마 부대에 종군하면서 성전을 직접 목격했다. 아무리 타락한 프랑크인이라 해도 열정과 절망으로 용기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들은 열일곱 명이나 되는 대장들의 불화로 갈가리 찢겨 사방에서 술탄의 병력에 제압당했다. 33ㅇ리간의 공방전 끝에 이중 성벽이 이슬람군에게 돌파당하고, 중심 탑도 그들의 공성 무기 앞에 무너졌다. 마말루크인들의 일제 공격에 도시는 초토화되고, 6만 명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죽음 아니면 노예가 디는 운명을 맞았다. 요새에 가까운 템플 기사단의 수도원은 사흘을 더 버텼으나, 대장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며 500명의 기사 중 살아남은 자는 단 열 명이었다. 그러나 부당하고 잔인한 사형 명령에 따라 교수대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보다 운이 나빴다. 예루살렘 국왕, 총대주교, 요하네스 기사단의 대장은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바다는 거칠었고 배도 부족했다. 대부분의 도망자들은 키프로스 섬에 닿지 못하고 익사했다. 술탄의 명령으로 라틴인들이 건섫나 도시의 교회와 요새들이 파괴되었다. 탐욕이나 공포심 때문에 여전히 일부 신앙심 깊은 비무장 순례자들에게 성묘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고 했으나, 세계적인 항쟁이 그토록 오랜 세월 메아리쳤던 해변에는 이제 슬픔에 잠긴 고독의 침묵만이 깔렸다.(113∼114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6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진두지휘한 끝에 완성된 성 소피아 성당을 묘사한 대목은 또 얼마나 철학적인가!
어느 시인은 성 소피아 성당의 초기 모습의 광휘를 보고, 10∼12종의 대리석과 벽옥, 반암의 색상과 음영 그리고 반점까지 하나하나 다 열거하면서, 특히 각 광석의 반점은 자연이 매우 열심을 다하여 다양하게 만들어 낸 것으로 마치 매우 뛰어난 화가가 배합하고 대조시킨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이교도들에게서 빼앗아 온 마지막 노획품으로 이 성당을 장식하기도 했지만, 그 값비싼 돌의 대부분은 소아시아의 채석장, 그리스 본토와 여러 섬들, 이집트, 아프리카, 갈리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 둥근 천장의 빛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했다. 지성소에는 4만 파운드가 넘는 은이 사용되었고, 성스러운 물병들과 제단의 옷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수많은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이 교회가 땅에서 위로 2큐빗의 높이가 되기 전에 이미 4만 5200파운드의 돈이 소비되었고, 결국 전체 비용은 총 32만 파운드에 이르게 되었다. …… 장엄한 성전은 그 나라의 취향과 종교를 반영하는 칭찬할 만한 기념비이다. 열렬한 신자는 성 소피아가 신의 거처이거나 심지어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물도 성전 바닥을 기는 가장 하찮은 벌레가 만들어 놓은 벌레집과 비교해 보면, 인간의 재주란 얼마나 둔하고 그 수고는 얼마나 하찮은지!(93∼94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장구한 세월에 걸쳐 펼쳐지는 무수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노라면 새삼 인간의 삶이 하찮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그 드넓은 공간이라고 해 봐야 기실 지구에서 충분히 멀리 벗어난 거리에서 바라보면(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만큼 멀리 떨어진 우주탐사선에 딸린 특별한 눈으로 그런 광경을 생생하게 바라봤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빛나는 창백한 푸른 점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머나먼 우주 밖에서 보내온 한 장의 감동적인 사진에 마음을 온전히 다 빼앗긴 채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를 한낱 부처님의 손바닥 가운데 일부인 것처럼 하찮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우리의 현실 공간으로 돌아 오자.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수많은 도시들과 바다와 강과 산맥들은 우리의 귀에 익숙한 경우보다는 낯선 경우가 훨씬 많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옛 지명 그대로 쓰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이 변치 않은 도시들, 가령 로마, 밀라노, 라벤나, 나폴리, 베네치아, 파리, 아테네,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메카, 메디나 등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쉽지만, 그 반대인 경우에는 보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터넷을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도 뒤따랐다.
카르타고는 오늘날의 튀니스 북동쪽 도시, 틴기스는 오늘날의 탕헤르, 싱기두눔은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베로이아는 오늘날 시리아 북부 도시인 알레포, 니시비스는 지금의 터키 누이시빈, 아미마는 지금의 터키 디얄바클, 싱가라는 지금의 이라크 신자라, 안티오크는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 나이수스는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니슈, 무르사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크테시폰은 지금의 이라크 테시폰, 트레브는 지금의 독일 트리어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읽는 작업은 흥미로울 때도 있지만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때도 많았다.
수많은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이 보상이나 약속을 믿고, 혹은 전리품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혹은 그들이 정복하는 영토는 영원히 그들 소유로 해 주겠다는 보장을 믿고 라인 강을 건넜다. 그러나 임시 방편으로 이렇듯 경솔하게 야만족들의 탐욕을 부추긴 황제는 일단 로마의 비옥한 영토 맛을 본 이 막강한 야만족 동맹군들을 다시 쫓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고 후회해야만 했다. 이 제멋대로인 도적떼들은 충성과 반역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재산을 소유한 로마인이라면 누구든 적으로 간주했다. 통그르, 콜로뉴, 트레브, 보름스,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를 비롯한 마흔다섯 개 도시와 그보다 훨씬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여전히 조상들의 신조를 충실하게 지키던 게르마니아 야만족들은 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것을 혐오하면서 그런 곳을 감옥이나 무덤 등으로 불렀다. 그들은 라인 강, 모젤 강, 뫼즈 강변에서 독립 가옥들을 짓고 큰 나무를 쓰러뜨려서 길을 가로막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기습 공격의 위험에 대비했다.(134쪽)
(나의 생각)
통그르는 벨기에의 통게렌, 콜로뉴는 독일의 쾰른, 트레브는 독일의 트리어, 보름스와 슈파이어는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 주의 보름스와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도시로 프랑스어로는 스트라스부르, 독일어로는 스트라스부르크로 불린다. 유럽의 도시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변방의 독자들은 이들 도시가 옛 이름인지 현재 쓰이는 이름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나는 이들 도시 가운데 트리어만 가 봤고, 트리어를 떠난 뒤 스트라스부르크를 그냥 지나쳤던 일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수많은 도시들과 산과 강들을 살필 때는 '구글 어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수만 혹은 수십 만의 군대가 건곤일척의 대전투를 벌였던 유명한 장소들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폐허로 변한 곳도 드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장소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유명한 전쟁이 과연 로마 제국의 어드메쯤에서 일어났는지를 지구의를 돌려 보듯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현대인들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기번이 유럽의 온갖 도서관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켜켜이 먼지가 쌓인 채 낯선 고대의 언어들로 쓰여진 수많은 사료들을 뒤지거나, 혹은 고대 여행자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기록들과 지리지(地理志)들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비교 검토한 끝에 최대한으로 오류를 바로 잡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위치 정보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그냥 책상 앞에 앉아서 편리한 검색과 클릭만으로 찾아가기가 미안할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드넓은 로마 제국의 영토들을 (기번의 문장과 구글 어스를 따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가끔씩 '나도 이미 가 봤던 장소들'을 마주치는 기쁨은 생각보다 컸다.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같은 도시들은 단 한 번밖에 찾지 못했지만 그런 도시들을 가 보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특히 '제국의 수도'로서 너무나 특별했던 도시인 로마에 대한 기번의 언급은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그 도시를 미처 가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청난 여행 욕구를 불러일으킬 게 틀림없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 성 베드로 대성당,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포로 로마노 등등에 대해서 기번은 얼마나 자주 감탄하며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던가.)
프랑스의 경우 수도인 파리밖에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아비뇽, 아를, 릴, 스트라스부르크 등등의 도시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이미지조차 떠올리지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독일의 여러 도시들(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하이델베르크, 트리어 등)을 여행했던 경험은 기번의 책을 읽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의 카이로, 멤피스, 아스완, 리비아 사막 등을 여행했던 경험은 그리스도교의 발달과 이집트 수도원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데 유익했다.(알렉산드리아를 빠트린 건 두고두고 아쉽다. 기번의 책에서도 이 도시는 특별 취급을 받는다.) 저 멀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실크로드와 티무르의 무덤을 찾았던 여행 경험은 타타르족의 대활약을 다룬 대목들을 읽을 때 특히 유익했다. 유럽을 여행할 때 구경했던 여러 강들도 독서에 보탬이 됐다. 이집트의 나일 강, 독일의 라인 강, 모젤 강, 엘베 강, 네카 강,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을 여행지에서 만난 경험은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기번의 독서와 결합될 때 한층 강렬하게 되살아났다. 지중해, 아드리아해, 북해, 대서양까지도 여행지에 포함시킨다면 너무 지나친 걸까.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는 동안에 맞닥뜨리는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이 여전히 내게 단 하나의 이미지도 불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건 로마 제국이 그만큼 드넓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유럽권의 독자들이 유럽을 이웃나라처럼 쉽사리 드나들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라벤나, 볼로냐, 피사, 파비아, 제노아, 팔레르모 등), 스페인(바르셀로나, 톨레도, 발렌시아, 코르도바, 세르비아, 그라나다 등)과 포르투갈(리스본),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들(알렉산드리아, 트리폴리, 카르타고, 탕헤르 등), 그리스(아테네, 크레테 등), 터키(콘스탄티노플, 아드리아노플, 니케아, 에페수스, 안티오크, 알레포 등),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메카, 메디나, 바그다드,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흑해, 홍해, 카스피해 등등 수많은 도시들과 강과 바다가 내겐 여전히 미답의 상태로 남아 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이제 다시 기번의 책으로 들어가 보자.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흔히 '기번의 잡담'이라고 불리는 저자의 각주가 엄청나게 붙어 있다. 기번이 원본에 달아놓은 깨알같은 각주는 무려 8,3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국내 완역본 기준으로 따져 보더라도 한 페이지에 평균 2개가 넘는 각주가 딸려 있는 셈이다. 영문판조차 이 방대한 주석이 부담스러워 4,700여 개로 대폭 줄인 '버리 판'이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국내 최초의 완역본이라고 자부하는 민음사 판본 또한 이 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무튼 기번의 각주가 너무나 방대한 까닭에 번역자의 주석이 단 하나도 붙지 않는 건 아쉽다. 온갖 함축과 비유가 가득 담긴 기번 특유의 문장들에 대해 '번역자의 주석' 하나 없이 독자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 책을 모조리 읽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적잖은 선행 독서를 요구하는 셈인지도 모르겠다.(유럽의 지리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역사 등에 두루 생경할 수밖에 없는 비유럽권 독자들이 기번의 역사책을 능숙하게 독파하기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선행 과제로서 다음 두 가지를 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과 동유럽을 적어도 두세 번쯤은 여행할 것. 많을수록 좋으니 서양 고대의 이름난 고전들을 최대한 많이 읽을 것. 물론 이 책부터 먼저 읽고 난 뒤에 강렬한 자극을 받고 나서 서둘러 유럽 여행길에 오르거나, 서양 고전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