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전들에 담긴 '여자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겐 언제나 독특한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요즘 사람들에겐 도저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불가사의한 일'로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 과거엔 도리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뀌어 나타납니다. 그런 일들이 주로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일어났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제우스의 숱한 애정 행각이 바로 '불가능을 모르는 신의 무한 능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저 유명한 트로이아 전쟁도 바로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일으킨 전쟁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의 '전기'에서도 여자 이야기가 빠질 리는 없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온갖 절세의 미녀들을 탐내어 벌였던 엽색행각이 여기저기 난무할 테니까요. 그러나 영웅전은 모름지기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다 보니 그런 내용들이 언제나 맛뵈기로만 다루어진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마치 중국집에서 '육해공'으로부터 날라온 온갖 재료를 다 써서 만든 다양한 코스 요리를 실컷 맛보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약간의 허기'를 채울 때 시키는 '맛뵈기 기스면'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지요. 만약에 플루타르코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던 철학자도 아니었고, 방대한 분량의『윤리론집』을 쓸 만큼 그리스인 특유의 높은 '윤리와 도덕의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쓴 고대인들의 전기에 담긴 '여자 이야기'가 얼마나 더 풍성하고 다채로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저만의 생각은 아닐테지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명이 모두 '본받을 만한 걸출한 영웅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는 점은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에겐 그래도 한가닥의 희망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파렴치한 악인이 저지른 일이라도 모른 체 지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더 열심히 배우고 깨달으며 본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쓴 전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매우 지탄받을 못된 짓을 숱하게 저지른 인물로 그려진 그리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 로마를 끔찍한 내전으로 몰아넣었던 악명높은 인물인 술라, 독재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 브루투스를 추격하는데 앞장섰고 끝내 클레오파트라의 치맛자락에 빠져 자신의 군대마저 내팽개치고 이집트로 도망가 자살하고 말았던 안토니우스와 같은 인물이『영웅전』에 당당히 '자신의 전기'를 갖추고 있는 사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로마가 인정했던 세계적인 미남이자 바람둥이였던 안토니우스에 '대비'되는 인물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군림했던 데메트리우스였습니다. 그 또한 당대의 호사가들이 널리 인정할 만큼 뛰어난 용모를 갖췄던 데다가 그가 지닌 권력과 방탕한 성격 때문에 평생 동안 숱한 여자들을 빼앗고 또 거느렸습니다. 이쯤에서 그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한 플루타르코스의 얘기 한 대목만 들어 보고 넘어가지요.
두 사람 모두 권력을 누리는 동안 교만한 모습을 보였으며,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와중에도 행동해야 할 때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는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에만 쾌락에 빠졌고, 그가 사랑했던 라미아도 꿈처럼 살면서 놀 때에만 가까이했을 뿐이었다. …… 저 유명한 시인 에우리피데스 시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바쿠스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금세 무섭고 용맹한 전쟁 신 마르스의 사자가 되어 달려나갔다. 데메트리우스는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 때문에 싸움에 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옴팔레에게 곤봉을 빼앗기고 몸에 걸친 사자 가죽이 벗겨진 헤라클레스처럼 언제나 클레오파트라에게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그녀와 함께 카노푸스나 오시리스 무덤이 있는 타포시리스 해안으로 놀러 다니느라 대정복 계획을 모두 놓쳐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스처럼 전쟁에서 달아나 클레오파트라 치맛자락에 파묻혔다. 파리스는 그래도 전쟁에 져서 달아났지만, 안토니우스는 승부가 결정 나기도 전에 비겁하게도 클레오파트라 뒤를 쫓아 달아난 것이었다.(1723∼172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와 안토니우스의 비교>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에서 '애정 행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인물들의 전기와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이지요. 사실 '대비 열전'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도덕적으로 몹시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전기에서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를 발견하기란 연목구어 격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인데, 그런 점에서라도 데메트리우스의 전기는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 일부 독자들로부터 특별한 흥미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품들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 자체도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서 내용이 제법 풍성한 편입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전3권에 총 2,015쪽에 이르지만 '작품 해설' 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전기 부분만 따진다면 대략 1,870쪽 분량입니다. 1인당 평균 37쪽 정도인데, 데메트리우스 편은 무려 51쪽이나 되지요. 20쪽 남짓으로 다뤄진 인물들도 꽤 여러 명인데, 전기의 분량이 특히 방대한 인물들로는 알렉산드로스 75쪽, 폼페이우스 73쪽, 안토니우스 73쪽, 카이사르 56쪽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데메트리우스가 Top 7에 꼽힐 만큼 분량이 많은 셈이지요.
여기서 데메트리우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중언부언 더 소개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지루해 질 게 뻔합니다. 그래도 '명함 한 장'에 담을 정도의 최소한의 프로필마저 아예 빼놓고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들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급작스레 죽고 난 이후의 소위 '디아도코이(후계자) 전쟁'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은 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었던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이었고, 그들의 자식들인 카산드로스, 안티오쿠스와 같은 인물들도 데메트리우스와 활동이 겹쳤으며, 에피루스의 지배자로 유명한 피로스도 데메트리우스와 여러 번 전쟁터에서 맞닥뜨렸지요.
이제 그만 각설하고 본론인 데메트리우스의 여자 이야기로 들어가 보지요. 그의 숱한 아내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시절의 아내들은 주로 '과부'였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 보면 그 당시에 패권을 노리던 인물들 사이에 '혼인 동맹'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도 엿보여 몹시 흥미롭습니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이에 잠시 머무는 동안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다. 영웅 밀티아데스의 후손인 에우리디케는 키레네의 오펠타스 왕의 아내가 되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테나이로 돌아와 혼자 살고 있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이 결혼을 아테나이 시의 영광이라고 여기며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이미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이 결혼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는 필라였다. 그녀는 안티파트로스의 딸로서 이미 크라테루스와 결혼했었는데, 크라테루스는 그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크라테루스가 죽고 필라가 과부가 되자,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필라와 결혼시키려 했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처음에 이 결혼 제의를 받고 매우 못마땅해하자,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속삭였다.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시에는 본디 '복종'으로 되어 있는데, 안티고노스가 '결혼'으로 고쳐 말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필라를 비롯해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기생이나 첩들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같은 시대 어느 왕보다도 좋지 않은 평판을 들었다.(161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오래 탐닉한 여자는 '라미아'였습니다. 그녀는 데메트리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한 끝에 자연스레 딸려온 전리품 목록 속에 포함된 여자였습니다.
포로들 가운데 라미아라는, 이름이 꽤 알려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플루트를 매우 잘 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음악적 재능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연애 사건으로 점차 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즈음 그녀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었고, 나이도 데메트리우스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라미아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녀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은 그녀를 너무나 부러워했다.(161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젊어서부터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 데메트리우스는 어느새 헬라스의 '최고 사령관'이란 이름이 붙었고, 곧이어 자신의 아버지 안티고노스와 함께 '왕'으로까지 격상되어 불리게 되지요. 그가 라미아 때문에 욕을 먹은 일화들은 널리 해외에서도 곧잘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아테나이에 돌아온 데메트리우스가 시민들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50탈란톤이나 되는 큰돈을 즉시 바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린 일이다. 관리들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시민들의 돈을 긁어모았다. 게다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치 푼돈밖에 안 된다는 듯 라미아를 비롯한 여자들 화장품 값으로 내어주게 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데메트리우스가 자신들의 귀한 돈을 이렇게 써버리자, 돈을 잃은 것 이상으로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 일 말고도 라미아는 데메트리우스 왕 환영 연회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돈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이 호화로운 잔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사모스 사람 린케우스는 이 일에 대해 쓴 역사책까지 따로 남겼다. 이즈음 어느 풍자 시인은 라미아를 '도시점령자'라 불렀고, 솔리 사람 데모카레스는 데메트리우스를 '미투스'라 불렀다. 데메트리우스 곁에 라미아가 늘 붙어다니는 것에 대해, 미투스 전설에 나오는 괴물 라미아에 빗대어 한 말이다.
실제로 데메트리우스가 라미아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자 그의 다른 아내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신하들마저도 그녀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데메트리우스의 신하들 몇 명이 리시마쿠스 사절로 갔을 때 일이다. 리시마쿠스는 마침 한가로운 때에 자신의 허벅지와 팔에 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상처들은 언젠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기를 사자 우리 속에 처넣었을 때 사자와 싸우면서 생긴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사절들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자기들 왕의 목에도 사자만큼 사나온 짐승에게 할퀸 상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나운 짐승이란 데메트리우스의 아내 라미아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놀라운 것은 데메트리우스가 시든 꽃이라며 필라를 거부하면서도,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라미아에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1621∼162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엽색 행각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추행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 여신을 자신의 누님이라 불렀으나 조금도 여신을 존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문 집안의 미소년들과 아테나이 여자들을 아크로폴리스로 불러들여 온갖 추한 행동을 했다. 차라리 크리시스, 라미아, 데모, 안티키라 같은 창부들을 상대했을 때가 이곳을 더 깨끗하게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테나이 시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는 젊은 다모클레스가 보여준 훌륭한 미덕과 정조에 대해 말해보겠다. 다모클레스는 '아름다운 다모클레스'라 불릴 만큼 외모가 아름다운 젊은이로, 데메트리우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이 젊은이에게 빠져서 온갖 선물로, 때로는 위협까지 하며 꾀어내려 했지만 젊은이는 계속 거절하기만 했다. 마침내 다모클레스는 사람들이 모이는 경기장 같은 곳에 가지 않고 목욕도 집에서만 했다. 하지만 기회만 노리고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그가 혼자 목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를 붙잡았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알아차린 다모클레스는 끓는 물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젊은이가 이렇게 삶을 마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모클레스의 행동은 그의 나라와 그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게 드높여 주었다.(161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플루타르코스가 <데메트리우스 편>에서 들려주는 숱한 '여자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그녀의 딸 스트라토니케에 얽힌 이야기이지요.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은 데메트리우스의 사위의 아들이었는데, 후세 사람들로부터 '병든 왕자'라는 별명을 얻은 안티오코스였습니다. 그 왕자가 자신의 계모를 사랑하게 된다는 스토리는 일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힙폴뤼토스』를 연상시킵니다. 테세우스의 후처 파이드라가 전처 소생의 아들 힙폴뤼토스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그녀의 애정 고백이 거절당하자 도리어 휩폴뤼토스가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편에게 남기고 목매달아 죽는다는 얘기 말이지요.
데메트리우스의 딸 스트라토니케는 이미 셀레우쿠스와 결혼하여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으나,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왕자 안티오코스가 계모 스트라토니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처음부터 자기 감정을 억누르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마침내 그는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기 위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안티오코스가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상사병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안티오코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의사는 하루 종일 안티오코스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젊은 여인들이 문병을 올 때마다 안티오코스의 태도와 몸 상태를 빈틈없이 살폈다. 그런데 스트라토니케가 자기 의붓아들을 만나러 올 때마다, 혼자서 오든지 남편 셀레우쿠스와 함께 오든지 관계없이, 저 유명한 사포가 발견해 낸 병증이 그의 몸에서 나타났다.
안티오코스는 스트라토니케 앞에서 늘 말을 더듬고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면서, 그녀의 눈길을 애써 피하려 했다. 게다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빨라지고 식은땀까지 흘리다가, 마침내 감정이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면서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이제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왕자가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조용히 굶어 죽기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 바로 왕비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가는 왕자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차마 왕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셀레우쿠스가 자기 아들을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셀레우쿠스에게 아들의 병에 대해 말했다. 의사는 젊은 왕자를 혼돈에 빠뜨리는 병이 다름 아닌 상사병이며, 이 사랑이 희망도 없고 치료도 불가능한 상태임을 덧붙여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셀레우쿠스는 의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치료할 수 없다는 건가?"
의사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왕자님은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셀레우쿠스가 말했다.
"그래? 에라시스트라투스! 그렇다면 그대가 아내를 포기하고 나의 아들에게 보내주면 안 되겠는가? 왕자는 그대의 친구이며, 왕자를 살릴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만일 왕자님이 스트라토니케 왕비님을 사랑한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시겠습니까?"
에라시스트라투스의 말을 듣고 셀레우쿠스가 대답했다.
"이보게. 하늘과 땅에 맹세하지, 나는 사람에게나 신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왕자가 스트라토니케를 사랑하게 만들겠네. 안티오코스를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왕관마저 내려놓을 수 있네."
셀레우쿠스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며, 그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러자 에라시스트라투스가 셀레우쿠스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며 셀레우쿠스야말로 가정에서 일어난 아픔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의사라고 말했다.
셀레우쿠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 안티오코스를 아시아 지역에 왕으로 보내고 스트라토니케를 그의 왕비가 되도록 허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신하들에게 왕자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순종해 왔으므로 이 결혼 또한 반대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스트라토니케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기 말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왕이 내리는 명령은 모두 옳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그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코스는 계모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게 되었다.(1632∼1633쪽)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에 제가 찾아낸 그림은 아래의 석 점이었습니다. 세 번째 그림을 그린 앵그르는 알고보니 마침 두 번째 그림을 그린 다비드를 사사한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호메로스 예찬> 등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이지요.
이 이야기와 관련된 그림을 찾다가 우연히 덩달아 발견한 짧은 텍스트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엔 조금 아쉽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카셀의 회화박물관에 들러 벨루치의 그림을 직접 봤으며, 이 '병든 왕자'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도 풍성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말이지요.
이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앞으로도 여러 번 나오는 이 <병든 왕자 der kranke Koenigssohn>의 모티프는 원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데메트리우스편 제38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조인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B.C. 312-280)의 아들 안티오쿠스Antiochus는 젊고 아름다운 계모 스트라토니케Stratonike를 사모하여 시름시름 앓는다. 계모가 방에 들어올 때 왕자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발견하고 병인(病因)을 알게 된 의사는 왕에게 우선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자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묻는다. 이에 왕은 왕국을 위해 부디 그의 결혼생활을 희생하고 왕자가 동경하고 있는 사랑을 성취시켜 주기를 간청한다. 이때 의사가 왕자의 진짜 병인을 밝히니, 왕은 스트라토니케를 단념하고 안티오쿠스를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도록 한다. 왕과 의사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에 스트라토니케가 왕자의 병석으로 다가서는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에로부터 많은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일찍이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도 <병든 왕자>의 그림을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카셀Kassel의 회화박물관에는 벨루치Antonio Belucci의 그림 「병든 왕자」가 괴테 시대에 이미 전시되어 있었는데, 1779년 9월에 괴테가 그곳을 방문한 것이 입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스바덴Wiesbaden의 박물관에도 치크Januarius Zick의 「병든 왕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괴테는 1774년경에 이 화가와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 106, 각주)
이것으로 병든 왕자와 스트라토니케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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