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태 부모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키티의 순진성과 애잔함, 세대 간 의사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는 장사람 간의 정서나 교감보다 사회적 평판에 기초한 판단이 불러오는 환멸 등을 그려내고 있다.




제대로 눈 뜨게 되는 안나의 정념은 사교계를 뒤집어 놓을 만큼 팜므파탈적이다. 자기기만에서 오는 괴로움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비감이 교차한다. 브론스키의 자책(시체를 앞에 둔 살인자 느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레빈의 자연친화 사상 및 도덕적 인간 존중 사상이 전개된다. 사랑에서 개인의 삶을 의미화하려는 건실한 시도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너무나 톨스토이답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브론스키의 경마 에피소드를 통한 위기감과 안나의 임신 소식으로 인한 두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독자로 하여금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한 현실임을 자각케 한다. 가만 읽기만 해도 공감이 되는 장면들, 장애물 경기에 나오는 애마를 통해 안나와의 힘든 현재와 암울한 미래를 암시한다. 생각하지 않으려도 애마 프루프루에 안나를 대입해서 생각하게 된다. 쓰러진 프루프루를 발로 차는 브론스키를 기억하라. 인간 운명의 불완전성과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




적극적 비난 없이, 평온한 거짓 감정으로 안나를 대할 수밖에 없는 카레닌. 카레닌의 이런 마음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브론스키만 생각하는 안나. 안나의 내면적 요청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키티의 독일 온천장 요양과 한껏 성숙해가는 과정도 지켜볼 만하다. 바렌카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키티. 바렌카처럼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러시아로 돌아와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키티, 레빈, 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어느 한 캐릭터도 내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 군상의 다양한 질료들을 현실감 있게 배치하고 있다. 이 중 한 명만 선택해서 같이 아파보라면 단연 카레닌. 온건한 독종이라서 더 고통스러울 카레닌.




 

 

등장인물

*리디야 이바노브나 - 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백작부인, 카레닌 성공에 도움

*랴비닌 - 스티바에게 숲을 사려는 자, 돈만 아는 속물 귀족

*프루프루 - 브론스키의 애마

*바렌카 - 독일 온천 요양지에서 키티가 만난 아가씨, 헌신적





 

줄거리(2, 스포일러 심함)


실연당한 키티는 요양이 필요하다. 키티 아버지는 딸에게 바람 넣은 아내를 나무란다. 브론스키가 아니었다면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돌리는 엄마에게 말한다. 키티 엄마는 자책감에 괜히 화를 낸다.




돌리언니에게 키티는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않는다. 레빈의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대신 화를 낸다. 자신이 시장상품 같아 수치스럽다. 언니와 조카들이 있을 때만 자유롭다고 키티는 말한다.




돌리는 스티바가 또 바람피운 것 같아 괴롭다. 살림살이도 쪼들린다. 아이들 돌보는데 치인다. 조카들을 돌보려고 키티는 언니와 함께 언니집으로 가지만 차도가 없어 부모와 외국여행을 떠난다.




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는 세 갈래이다. 카레닌과 같은 정부관리, 관대하고 신앙심 가득한 나이든 여자들, 그리고 야심가 남편들. 리디야 이바노브나 백작부인이 그 중심이다. 카레닌도 출세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안나가 보기에 그 부류들은 위선적이고 지루하다. 차라리 무도회와 만찬 파티 세계가 안나는 더 좋다. 그쪽으로 연결해준 벳시 공작부인을 통해 브론스키를 자주 만난다.




브론스키는 사랑을 간청하고, 제어할 수 없는 안나의 눈길. 카레닌이 도착해 그 둘을 의식하며 벳시와 대화한다. 손님들이 그 둘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걸 카레닌은 눈치 챈다. 안나의 만류에도 파티장을 떠나버린다.




카레닌은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숙고한다.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질투가 나고 혼란스럽다. 관직에서만 있어온 그는 삶 자체와 대면하니 겁이 난다. 안나와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신을 달랜다.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안나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을 느낀다.




안나는 남편 앞에서 거짓의 갑옷을 입었으며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변화를 카레닌도 알아차린다. 열려 있던 영혼의 깊은 곳이 닫혀 버린 안나. 웃고 있는 안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는 대화 나누는 게 헛수고임을 느낀다




카레닌은 안나의 처신을 경고한다. 브론스키와의 지나치게 생기발랄한 대화를 예로 든다. 카레닌은 하느님에 의해 맺어진 그들 관계의 의무를 모자 관계를 들어 상기시킨다. 안나는 별 할 말이 없어 억지로 미소 짓는다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안나 부부는 많이 달라졌다. 공직 생활에서는 카리스마를 발휘해도 아내를 다루는 데는 무력감을 느끼는 카레닌. 유순한 황소가 되어 머리 위로 도끼를 맞는 느낌이다.




브론스키와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안나. 사랑을 얻은 브론스키는 살인자가 된 기분이고, 안나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다. 안나는 카레닌의 아내이자 동시에 브론스키의 아내인 악몽에 시달린다. / 시골에 돌아온 레빈은 거절당한 청혼에 고통스럽지만 영지 생활의 일상과 그 개선을 계획하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스티바가 어느 저녁에 온다. 아내 소유의 숲을 팔기 위해서다. 둘은 사냥을 즐긴다. 매수인 랴비닌이 숲 값을 깎으려하는 걸 보고 레빈은 화가 난다. 스티바는 레빈이 생각하는 것보다 헐값으로 팔기로 한다.





키티가 병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된 레빈. 키티 엄마의 속물근성, 환심으로 숲을 헐값에 매수하는 랴비닌, 양아치 같은 브론스키 등을 보면서 레빈은 귀족에게 반감이 생긴다. 대대로 토지를 소유한 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고갈시키고 토지 가치를 떨어뜨리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은 귀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권력자의 호의를 얻어 출세하는 것보다 물려받은 땅이나 노동을 통해 얻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스티바와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있을 고통스러운 주제이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서로의 이해가 전제된다. 스티바는 돌아간다.





책무를 다하지만 안나에 대한 열정으로 브론스키는 내적 갈등이 심하다. 젊은 남자들은 그를 부러워한다. 바람둥이인 그의 형은 자신들이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이 그 둘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에 동생 행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엄마는 연애 자체는 괜찮지만 그것 때문에 요직을 거절하고 페테르부르크에 남으려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약삭빠른 연애가 아니라 물불 안 가리는 열정이란 사실이 맘에 들지 않는다. 사교계 여자들은 섣불리 안나를 비난하기보다 여론을 관망한다.





브론스키는 말과 경마에 관심이 있다. 영국산 경주마를 사서 장애물 경주 우승을 꿈꾼다. 경기가 열리는 날 암말 프루프루의 최고 컨디션에 만족하고 안나 집으로 만차를 몬다. 거짓과 속임수가 필요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 막상 안나를 보는 순간 얼이 빠진다. 안나는 애기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이혼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고 브론스키는 이혼을 권유하지만 안나는 세료쟈를 잃을까봐 결정하지 못한다. 그 맘을 브론스키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세료쟈 목소리가 들리고 브론스키는 경마장으로 향한다.





브론스키는 프루프루와 우승을 다툴 글라디아토르를 본다. 경쟁자 마호친을 따라 출발문으로 간다. 17명의 장교들이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글라디아토르를 바짝 쫓는 애마가 맘에 든다. 우승을 확신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말과 함께 쓰러진다. 자신의 실수로 말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에 화가나 말의 배를 찬다. 등뼈 부러진 말은 사살하기로 했다. 경마장을 떠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불운에 쓰라리기만 하다.





카레닌은 겉보기에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여름별장에 간 안나를 매주 찾는다. 안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적대감은 아들에 대한 냉담함으로 표출되고 세료쟈는 입을 다문다. / 경마장에서 브론스키만 쳐다보던 안나를 떠올린다. 브론스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카레닌이 내민 팔을 잡고 밖으로 나오던 안나. 마차 안에서 카레닌은 안나의 꼴사나운 처신에 대해 말하면서 체면을 지키라고 말한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며 그의 정부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카레닌의 절망에도 안나는 저녁에 브론스키와 만날 일을 고대한다.





독일 온천장에서 키티는 바렌카를 알게 된다. 슈탈 부인의 헌신적이고 예쁜 간병인인 바렌카를 본받고 싶다. 레빈의 형인 니콜라이와 그의 여자 마리야도 만나게 되는데 어쩐지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다. / 바렌카와 친해진 키티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다. 고상한 삶을 살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친절이 수치스러운 부작용도 낳는다. 키티의 도움을 받은 가족의 안주인이 키티에게 반한 자기 남편을 나무란다. 그 여자는 키티에게 냉담하고 무례하게 군다. 키티는 슈탈 부인을 비롯한 경건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위선을 맛본다. 바렌카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우정만은 식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음울한 현실을 사랑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러시아의 신선한 공기가 그리워지고 돌리와 조카들이 여름을 보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병이 나은 키티는 집으로 돌아오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모스크바에서 경험한 쓰라린 일은 한낱 추억에 불과할 뿐이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주신 응원의 꽃다발. 



 김훈 작가는 <<자전거 여행>>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무명의 쓰는 사람인 나도 흉내낸다. 

 이 책을 팔아서, 이 책을 팔아서......  ......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눈물은 두 자매의 소통을 연결하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윤활유와도 같았다. 눈물을 쏟은 후, 자매는 그들의 마음을 차지한 문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를 이해했다. - P275

그러는 사이에 봄이 왔다. 애타게 기다리게 하거나 속이는 일 없이,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다 즐거워하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다정한 봄이었다. - P331

그는 집 안에 있고, 집에서는 벽돌도 주인을 돕기 마련이다. - P373

언제 어느 때든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녀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라고. - P405

난생처음으로 그는 가장 지독한 불행,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맛본 것이다. (경주마 프루프루 사고로 잃은 뒤) - P432

그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보고 있어. 저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어떤 걸까. --그에게 필요한 건 거짓과 체면 뿐뿐이야. - P448

그녀는 바렌카를 보면서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평온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티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키티는 이제야8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 P483

그녀는 위선과 오만 없이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경지를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실히 느꼈다. --그녀는 이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 괴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빨리 상쾌한 공기 속으로, 러시아로, 예르구쇼보로 가고 싶었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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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쁜 꽃다발 선물받으셨군요. 새 책과도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이번 책도 베스트셀러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많이 알려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크아이즈님, 좋은 밤 되세요.^^

2021-10-11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만에 외출했다. 

볼일만 보고 들어오기엔 넘 아까운 한나절.

가까운 곳, 여울님은 전시회 중.


고요한 시선, 시선들

오래 머물렀다. 

불친절한 결기가, 더욱 친절해 보이는 

초겨울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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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12-1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울 님 전시회로군요 !!!

다크아이즈 2020-12-10 19:59   좋아요 0 | URL
아, 곰발님도 좋아하실 테마 같았어요.

라로 2020-12-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울 님이 누구신지 몰라요. 차 색이 예쁘네요. 차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

여울 2021-12-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챙겨드리질 못했네요. 프레이야님이 알려주셔서 건너왔네요. 따뜻한 차 함께할 수 있길요. 올핸
 
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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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안나 카레니나>>를 올려야겠다. 우선 1. 스티바의 불륜으로 소설을 시작하는데 그것으로 안나의 불륜을 예고하는 셈이다. 키티를 둘러싼 레빈과 브론스키의 삼각 구도에 안나가 보태지는 형국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운명적 만남이 그려진다.




연애사가 아닌 당대의 생활 다큐로 읽힌다. 주인공은 안나일지 몰라도, 1부부터 주제 의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 인물은 레빈으로 소개된다.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애정과 신에 대한 합일적 태도만으로도 톨스토이가 반영된 인물이다. 레빈의 영지는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와 유사하며, 형의 죽음이나 키티에게 청혼하는 장면 등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레빈은 스티바와도 생각이 다르고 자신의 두 형제와도 생각이 다르다.




그 외 가치관이 다른 수많은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사연과 생각을 지니고 있다. 여러 캐릭터를 통해 톨스토이는 전쟁, 농민, 부정부패, 종교, 신념, 결혼 제도 등등 당시 러시아가 직면해 있던 문제를 톺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철학적이고 사상적 문제를 구체적인 소설 내용을 통해 제시한다.




일상의 기록들도 지나칠 수 없다. 개인의 경험, 사적 관계, 색깔, 냄새, , 소리, 움직임, 질투와 사랑 등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순간의 기록들이 톨스토이답게, 시시콜콜하면서도 방대하다.




회자되는 첫 문장을 번역본끼리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옛날에는 그런 열정도 있었는데, 이젠 만사 귀찮고 버겁다. 노안 때문에 돋보기 없인 한 글자도 읽거나 쓸 수 없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마술을 제대로 맛 볼 수 있다. 러시아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각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통해 작가 자신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모르긴 해도 이런 일련의 방식들이 당대 유럽 작가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의 시작이 톨스통이 같은 러시아 작가들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




키티 장면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의 결혼 문제 조망을 한 것도 1부의 잔잔한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덤으로 사회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안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재미도 맛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이분적 사고, 이를 테면 도시는 사교적이고 쾌락적인데 비해 시골은 목가적이며 도덕적이라는 설교풍에 묘하게 설득되기도 한다. 이 외 열정과 감정에 충실한 안나와 정돈과 밋밋함이 미덕인 카레닌의 갈등도 1부부터 전개되기 시작한다.

단숨에 읽을 게 아니라 몇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깊이 읽는 게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

 

 

 

등장인물

*스테판(스티바) 오블론스키 - 공작, 안나의 오빠, 바람 피워서 여동생인 안나가 중재 위해 친정을 방문하게 됨, 명예와 쾌락을 중시

*다리야(돌리) 알렉산드로브나 - 스테판 오블론스키의 예민한 아내

*안나 카레니나 - 오블론스키의 여동생, 카레닌의 아내, 브론스키를 사랑함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 부유하고 멋진 페테르부르크 터전인 백작, 안나와 애정 행각



*콘스탄친(코스챠) 드미트리치 레빈 - 고지식한 시골 영지 생활하는 노총각 귀족, 키티에게 구혼함, 자존감 부족하나 자의식 강하고 보수적이고 신념에 차 있음

*카체리나(키티) 알렉산드로브나 - 슈체르바츠키 가의 셋째딸, 돌리의 여동생, 브론스키를 사랑하나 안나에게 뺏기고 레빈의 사랑을 거절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코즈니셰프 - 레빈의 동복형, 레빈이 모스크바 왔을 때 이 형 집에서 머뭄, 유명 작가이자 지식인



*니콜라이 이바니치 레빈 - 레빈의 친형, 브나로드(v narod민중속으로, 농민계몽)

*마리야 니콜라예브나(마샤) - 니콜라이 내연의 처, 사창가 출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 - 안나의 남편, 우유부단하고 착함

*페트리츠키 - 브론스키 친구, 육군 중위

*쉴리톤 남작부인 - 페트리츠키 애인



*벳시 - 사교계 여성, 안나 이종사촌, 브론스키가 안나를 만나려고 연줄을 댄다

*세르게이(세료쟈) - 안나의 아들

 




 

1부 줄거리(스포일러 잔뜩)


스테판 오블론스키(스티바) 공작네 집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사흘 전, 가정교사였던 프랑스여자와 바람피운 것을 아내 돌리가 알게 되었다. 돌리는 남편과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선언한다.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스티바는 돌리가 쓸데없이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한창 잘 나가는 스티바에 비해, 다섯 자녀의 어머니에다 집안 관리자로서 삶에 찌든 돌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하인들 보기에도 두 사람의 별거가 임박하다.




사흘 째 아침, 스티바가 면도하고 있을 때 여동생 안나가 온다는 전보가 온다. 사람들은 다음날 도착하게 될 안나가 부부를 중재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다. 스티바는 진보 성향의 신문을 훑어본다. 다수당의 견해를 대변하는 그 신문은 그의 기질에 맞다. 두 아이가 들어오자 그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어 내보낸다.




스티바는 사과하기 위해 아내의 침실로 들어간다. 돌리는 친정으로 가려고 짐을 싼다. 그녀는 야위었다. 건강미와 신선함을 발산하는 남편을 훑어본다. 스티바는 겸손하고 불쌍해 보이려 하지만 돌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의를 받는 남편의 그런 품성이 역겹기만 하다. 스티바는 용서를 구한다. 한 번의 실수로 9년의 행복을 망칠 수는 없다며 아내를 설득한다. 돌리는 사랑을 원하지 동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화를 낸다. 스티바는 그녀가 마음을 돌릴 거라 생각한다.




스티바는 모스크바 모 관청의 최고책임자이다. 내각 고관인 그의 매제 카레닌이 주선해줬다. 농땡이였기에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스티바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불알친구 레빈이 찾아온다. 사려 깊고 진중한 레빈은 영지 관리도 좋아하고 농장일도 좋아한다. 도시생활을 경멸한다. 서로 다르지만 둘은 가깝다. 레빈은 돌리의 막냇동생 키티를 좋아하는데, 키티에게 고백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다. 평범한 레빈은 키티를 완벽녀로 착각한다. 그녀 옆에 서면 주눅이 들지만 구애를 하고 싶다.




레빈은 이복형 코즈니셰프 집에 머문다. 레빈과 달리 형은 사상가이자 작가로 러시아 정세에 민감하다. 코즈니셰프는 레빈의 친형인 니콜라이가 모스크바에 왔었다고 말한다. 니콜라이는 재산을 탕진했고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신분 낮은 사람들과 살고 있는 니콜라이를 레빈은 얼른 만나고 싶지만 키티가 있을 만한 곳으로 마차를 몬다.




레빈은 동물원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난다. 키티만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키티의 가벼운 농담에도 진지해지는 스스로에 낯을 붉힌다. 키티 어머니는 레빈이 맘에 들지 않지만 집에 초대한다. 어머니 태도에 미안해진 키티는 다정한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 미소에 레빈은 빠져나오지 못한다.




스티바는 레빈을 데리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고급 식당에서 스티바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레빈은 그 분위기가 역겹고 부자연스럽다. 레빈은 시골 사람들을 옹호하고 도시인들은 쾌락만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쾌락이 문명의 목적이라고 스티바가 응수한다. 레빈이 동서가 된다면 기쁘겠다고도 말한다. 영리하고 연줄 좋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백작 브론스키 역시 키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레빈은 창백해진다.




일부일처제 신념인 레빈은 스티바의 바람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바는 삶의 다양성을 설파하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일과 생각이 목적과 일치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스티바와 헤어진 레빈은 키티네 집에서 보내게 될 저녁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한다.




18세의 키티, 그녀의 부모는 셋째 딸 혼사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늙은 공작인 아버지는 레빈을 더 좋아하고, 공작부인은 장교 브론스키를 맘에 두고 있다. 키티 역시 박력 있는 브론스키가 더 맘에 든다. 혼자 응접실에 있던 키티에게 레빈이 청혼을 하지만 조심스레 거절한다. 브론스키가 다른 손님들과 함께 도착하는 것을 보고 레빈은 좋은 기회가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키티는 절망 서린 레빈의 눈빛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래층에서는 브론스키에 맘을 둔 부인을 나무라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린다. 불행한 언니 돌리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거라며 공작은 푸념한다.




사치스럽고 세속적인 브론스키는 순진한 키티에게 눈길을 주지만 결혼하고픈 마음은 없다. 어머니를 맞으러 간 역에서 누이동생을 마중 나온 스티바를 만난다. 청혼을 거절당한 레빈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브론스키는 정복자가 된 것 같다.




브론스키는 안나 카레니나를 어머니로부터 소개받는다. 어머니와 안나는 기차간에서 친구가 된 사이이다. 여덟 살 아들을 둔 안나의 매혹에 브론스키는 금세 빠져들고 만다. 노무원이 기차 바퀴에 깔린 사고를 목도한 안나가 애석함을 표하고 브론스키는 안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을 쾌척한다. 안나는 그 사고에 불길한 징조를 느낀다. (이 장면은 마지막 안나의 죽음과 겹치며 복선 역할을 한다.) 마차 안에서 안나는 브론스키가 키티와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스티바로부터 듣는다.




시누이 안나의 친절에 돌리는 위로를 받는다. 언니네 집을 방문한 키티는 열정과 성숙한 매력을 풍기는 안나를 좋아하게 된다. 안나는 브론스키에 대해서 들은 덕담을 얘기해주면서도 자신을 의식해서일지도 모를 브론스키의 돈 쾌척은 키티에게 하지 않는다. 저녁 후 브론스키가 들르지만 그들과 합류하지는 않는다. 키티는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안나도 의아한 그의 방문에 심란해진다.




이튿날 저녁 무도회. 키티는 브론스키의 청혼을 내심 기대한다. 수수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안나는 매력이 넘친다. 사랑스런 자신의 눈빛에도 브론스키가 반응이 없자 키티는 수치심을 느낀다. 안나와 춤추는 브론스키. 안나에게 완전히 넘어간 표정을 지은 브론스키를 보며 키티는 깊은 절망을 맛본다.




키티네 저택에서 씁쓸하게 나온 레빈은 형 니콜라이를 찾는다. 레빈은 자신의 영혼이 진실과 선의로 가득차도 사회가 업적만을 보는 것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결핵으로 야윈 니콜라이는 사창가에서 만난 마샤와 함께 산다. 비참한 그들 모습에 착잡해진 레빈. 귀가 중 마중나온 마부로부터 레빈은 영지의 따뜻한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개운해진다. 형이나 도우면서 잠시의 열정을 자책하며 결혼은 포기하기로 한다. 자신의 영지야말로 레빈에게 전 세계이다. 일찍 여읜 어머니는 그에게 성스러운 이미지로 남아있는데, 미래의 아내 역시 어머니 같아야 한다. 레빈에게 결혼은 인생 중대사인데 아내 자체보다는 가족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으면서 레빈은 행복감에 젖는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피해 이튿날 모스크바를 떠나고 싶어 한다. 안나는 무도회에서 키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돌리에게 고백한다.




아들과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차 안에서 안나는 안심한다. 브론스키를 생각하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음 정거장에서 바람을 쐬는데 브론스키가 나타난다. 그녀를 쫓아왔다는 브론스키를 잊고자 하지만 여행 내내 안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중 나온 남편의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보인다. 귀가 큰 것까지 눈에 거슬리고 귀가해 만난 아들조차 덜 사랑스럽다. 하지만 아들을 쓰다듬으며 위안을 얻는다. 일상을 다시 꾸리면서 안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한다.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거는 카레닌. 그의 모토는 서두르지 않고 쉬지도 않고이다. 안나는 카레닌에게 브론스키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는다. 진실한 남편을 마음속으로 옹호해본다.




브론스키가 친구들이 기다리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다. 브론스키는 쾌활하고 활기 넘치는 이 세계가 좋다. 친구인 쉴리톤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부정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 재산을 차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부대에 출두하기 위해 제복으로 갈아입는 브론스키. 안나를 사교계로 연결해줄 벳시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참조))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문학동네) - P13

자유주의가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가 그의 생활 방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가정생활은 스테판에게 별 만족을 주지 못했고, 그에게 거짓말과 허위를 강요했다. /자유주의파 사람들은 종교가 그저 야만적인 부류의 국민들을 위한 굴레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승의 삶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내세에 대한 무시무시하고 과장된 말들을 읊조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27

자네는 순수한 성격이라 인생 전체가 순수한 현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자네는 공무 활동을 경멸해. 자네는 행위와 목적이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 P99

세상에는 모든 행운을 두루 갖춘 경쟁자를 만났을 때 그 즉시 상대방의 장점을 모두 외면하고 단점만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그 행복한 경쟁자에게서 무엇보다 그에게 승리를 안겨 준 장점들을 발견하려 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데도 그에게서 좋은 점만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레빈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 P115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사람이고 때로는 남을 불쾌하게도 해. 하지만 때로는 매우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지. 그는 대단히 순수하고 진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야. - P134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들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흘러넘쳐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 P138

내일 열릴 만찬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밤 9시 반에 친구 집에 들렀다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전혀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모든 사람에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누구보다 이상하고 불길하게 느낀 사람은 바로 안나였다. - P169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야. 정직하고 선량하고 자신의 분야에서서도 뛰어나지.’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마치 남편을 비난하며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남편을 옹호하려는 듯. ‘하지만 그의 귀는 왜 저렇게 이상할 정도로 툭 튀어나온 거야! 아니면 이발을 해서 그런가?’ - P248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뿜어져 나오던 생기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지금은 그녀안의 불꽃이 꺼져 버렸거나 어딘가 멀리 숨은 것처럼 보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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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0-12-07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 님하고 같은 책 읽자고 하고서 어느 무더운 여름에 땀 찔찔 흘리며 안나 카레리나 읽던 생각이 나요. 속옷 바람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책. ㅎㅎㅎㅎㅎㅎ

다크아이즈 2020-12-10 17:2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저도 진작에 다 읽었어요.
일주일에 한 편씩 정리해서 올릴게요.
속옷 바람으로, 수박 쪼개면서 편하게 먹어야 제 맛?!
 





  1. 저녁 먹고 나면 식곤증이 몰려온다. 잠깐 한숨 붙이고 일어나면 열시 반쯤. 더 이상 잠 들지 못한다. 이제 밤을 꼴딱 새기만 하면 된다. 몇 달째 이어지는 나만의 루틴. 밤 새 할 일은 쌔고 쌨다. 글쓰기 프로젝트 수행도 하고, 읽은 책 리뷰도 정리하고, 새 책도 고르고, 사념에 시달리기도 하고.  




여섯 시, 사과와 토스트 각 한 조각을 차려서 침대 머리맡에 가져간다. 남편이 아침 먹는 그 때가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남편 말에 의하면) 매번 자신이 사과를 다 먹기도 전에 나는 벌써 골아떨어진단다. 출근 배웅 같은 건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대개 일어나면 열시 전후. 코로나 때문에 바깥 활동을 하지 않기에 늦잠이 가능하다. 어제도 밤을 꼴딱 샜다. 토요일이라, 정시에 출근용 아침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침실로 갈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7시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전화 한 통에 잠을 깼다. 




  지인이 잠깐 내려오란다. 책 몇 권을 드리기로 했기에 부은 눈은 안경으로 가리고, 떡진 머리에다 (잠옷 위에) 파카를 걸친 채 부랴부랴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인의 양 손에는 큰 김치통이 들려 있다. 김장을 했단다. 당장 먹을 맛보기용 김치까지 김치통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다. 내 몰골을 보더니, 눈치까지 빠르셔라. 긴 말 하지 않고 후딱 사라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코로나를 들먹이며 자주 만나지 못한 내 여유없음이 부끄러웠다. 




  집에 올라와, 달리 인삿말이 생각나지 않아 '살림 거덜 낼 일 있냐'는 핀잔 섞인 카톡을 보냈다. 김치통은 안 줘도 된다, 는 무심한 다정의 답 톡이 왔다. 이럴 땐 부러 김치통을 비워 급히 되돌려주지 않는 게 예의다, 라고 혼자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김치통 김치가 익어가고 김치통이 빌 때까지 유쾌한 숙제를 지니게 되겠지. 무엇으로 빈통을 채워 되돌려줄까 미소 짓는 숙제.     






2. 급히 우체국에 들러 알라딘 님들에게 책을 보냈다. 다정한 안부도 이쁜 말들도 넣지 못했다. 받는 분들은 이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첫날, 책 알림 글에 <좋아요>를 눌러준 몇 분께도 보내드렸다. 주소가 안 맞아 못 보낸 한두 분께는 다음 주 내로 다시 보내드리겠다. 책을 보내드렸기 때문에 책 안내글은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비공개로 돌렸다. 








3. 북플에서 8년 전 오늘의 글이라면서 글이 뜬다. 내 옛글은 거의 클릭하지 않는다. 이건 이상한 경험인데, 옛날 글을 보면 지금은 저처럼 못 쓸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때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이 덜 절실하기 때문에 글이 잘 되지 않는다는 심정이랄까. 그때도 힘들게 썼지만 지금도 쓰는 게 힘들다면 굳이 짊어지고 갈 필요가 있을까, 늘 그런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쓰기를 멈추진 못한다. 




  너무나 좋아하는 알라디너 한 분께 책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더니 재미있는 덕담을 해주셨다. 내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솔직히 뜨끔했다. 어쩔 수 없이 에세이를 쓰지만, 언제나 내겐 에세이가 더 어렵다. 자기 검열, 문장의 밀도, 진솔함, 인품 등등 에세이에서는 살피고 따지고 신경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시중에서는 붓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류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 장르는 아무나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기질상 소설이 딱이다. 감추지 않아도 되고, 다 드러내도 되고, 비틀어도 되고, 불편해도 되고... 소설의 강점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나 스스로 소설에서 의미를 찾고 거기에서 힐링이 되는 부류이다.

 


  그 님께 2년 뒤에는 제 소설을 만나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다. 응원해주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니 계속 쓰는 일만 남았구나. 장편이 될지 소설집으로 묶을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4. 알라딘에서 몇몇 지인을 사귀고 좋아하게 된 데에는 <올리브 키터리지> 덕이 크다. 알라딘 하기 전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몰랐다. 이렇게 '아련 돋고' 저렇게 가슴 저미는 작가라니! 그 책을 프레이야님이 선물해줬는데, 첫 챕터 약국, 만 읽고 바로 빠져 버렸다. 왜 그 책을 선물해줬는지 알 것 같아 마구 껴안아주고 싶었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원서로 읽고 낭독으로 듣는 라로님과도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났을 때, 언니, 올리브 키터리지 몇 번이나 들어도 좋아요. 언니도 들어 봐요. 했는데 너무 슬펐다. 까막귀가 원서 히어링이라니. 그 정도는 될 거라고 단정 짓는 라로님의 순정을 나는 미워할 수가 없다.) 그 두 분과 친한 오기 언니와 세실님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지금은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게다가 알라딘 말고도 여러 소셜 매체가 있으니 그쪽으로 옮겨 탄 이도 있다.) 난 다른 곳은 하지 않으니 소통하려면 싫으나 좋으나 알라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옛글들을 보면서 십 여년이 되어 가는 그때가 다들 알라딘 시절의 피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몇몇 터줏대감 빼고는 모르는 분들이 더 많다. 알라딘을 꿋꿋이 지키는 몇 분들, 진짜 존경스럽다. 한결 같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각설하고, <올리브 키터리지>는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소설이다. 독서회에서 이 책을 권했을 때, 열광하는 이는 한 분도 못 봤다. 앨리스 먼로 작품을 더 쳐주는 눈치였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시리즈로 방영된다고 언젠가 라로님이 말했다. OCN인 것 같았다. 넷플릭스에는 안 올라와서 무지 서운하다. (지금은 되는지 모르겠다.) 혹, 올리브 키터리지 한국어로 방송되는 매체 아시는 분 덧글 달아 주시면 감사. 유튜브에 감질맛나게 올라오는 것 이 년 전인가, 본 적 있는데 그것만 봐도 눈물 날 것 같더라. '강' 부분이었던가. 



  어쨌든 <다시, 올리브>가 나왔다니 얼씨구나 지화자다. 바구니에 담고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시도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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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2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를 사 놓았어요. ‘약국‘이란 작품을 팟캐스트로 열 번쯤 들은 게 생각나서요.
들을수록 좋거든요.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에서 들었는데 단편이라 전문을 읽더라고요. 이 책에 있어요.
다른 작품도 하나씩 읽어 볼 참이에요. <다시 올리브>는 아직...ㅋ

다크아이즈 2020-12-06 16:34   좋아요 0 | URL
우리 소설에도 올리브 키터리지 같은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읽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많이 부러운 건 사실이지요.

라로 2020-11-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어깨 힘 빼고 쓰시는 글 같아서 언니가 더 가깝게 느껴져요~.^^;; 가끔은 이런 글 올려주세요!!
음, 제가 그렇게 눈치가 없고, 늘 제 생각만 해요.ㅠㅠ 그러고 보면 프레이야 님은 정말 센스 만점!! 그런 점은 늘 배워야 하는데,,, 저는 배워도 배우는 그 순간,,,천성이니 다른 분들의 이해를 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ㅠㅠ
[다시, 올리브]는 자꾸 생각하면 [올리브 키터리지]보다 더 좋기도 해요. 아마도 제가 점점 늙어지고 있다는 것이라서 그런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더 그럴까요? 저는 올 오월에 한 번 읽었는데 여유가 생기면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어쨌든, 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드시나요? 우리 건강 잘 챙겨요, 언니!!!!!!!

다크아이즈 2020-12-06 16:35   좋아요 0 | URL
힘 자체가 아예 없어요. ㅋ
개인적인 글이 아니면 힘이 들어가게 보이나 봐요. 그치요?
한 세상 설렁설렁 살고 싶다오.

2020-12-01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1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12-0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OCN에서 하나요? 하면 봤을텐데...

오늘 책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다크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쓰느라고 또 보내시느라고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겠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책 많이 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다크아이즈 2020-12-06 16:38   좋아요 0 | URL
ocn에서 한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지금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넷플릭스를 하니, 없더라는ㅠ
스텔라님, 천천히 잠 오실 때 읽어주시어요.

2020-12-03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7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4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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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리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을까. 하고 싶은 얘기들은 잘나가는 작가들이 선점해 버렸다는 부러움만이 나의 몫.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날들이 부끄러워지는. 저릿한 풍경 속에 아릿한 상처의 회고전이 펼쳐지누나. 


     

  균열된 진실 앞에서 자책하는 자아 -구멍

  코요테의 울음소리에 견주는, 파국을 맞고 말 존재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성찰 - 코요테, 

  중년 부부의 간극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아술 - 아술,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 함부로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변명 이전의 존재 증명에 관한 이야기, 타인은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몰라야 하는) 삶의 한 부분, 이 자체가 삶이 되어야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이야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망나니짓을 한 형 주변에 함께 하던 나, 직접적 가담이 아니라고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강가의 개들 무리에서 나는 무죄한가. 과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면을 건드리는 자책의 울림 - 강가의 개

  이질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무모함이 주던 아찔하고 아련한 청춘의 외출 회고 -외출

  누구보다 소통을 원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그렇지만 소통하고 해야하는) 존재들의 향연, 먹먹하고 따스한 이야기 - 머킨

  가족의 기원과 현재, 아버지(엄마) 부재에서 오는 불협화음이자 가꾸기 힘든 씨앗 같은 버겁고 슬픈 가족상 - 폭풍우

  무거운 아픔이 아주 가까이 예견 된지도 모른 채 꿈결처럼 터치해보는 신혼의 꿈 - 피부

  레즈비언 엄마를 목도한 열세 살 소년의 저릿한 관찰기,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슴으로 와 닿던 그 시절의 비밀 한두 개는 누구에게나 있다. -코네티컷




 

<간단 줄거리>

<구멍> 버지니아에 살던 어린 시절, 이웃 친구 탈이 맨홀에 빠져 죽은 일을 회상. 깍은 잔디 봉지를 맨홀에 빠뜨려 (호기심도 발동)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만류에도 탈은 사다리를 내려간다. 펜실베니아로 이사 후, 십 년 뒤 탈의 형에게서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편지가 온다. 답장을 썼지만 나는 보내지 못한다. 탈을 구하려다 소방관 두 명도 죽었다. 탈의 부모님은 장례식장에서도 내게 별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때 말을 걸어왔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내 꿈속에서 잔디 봉지를 빠뜨린 건 탈이 아니라 나다.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 또 다른 꿈에서는 녀석더러 맨홀로 내려가 보라고 부추긴다. 이 모든 진실을 말하더라도 내 꿈의 나머지 부분 -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코요테> 실패한 다큐 감독 아버지를 둔, 수영을 좋아하는 딸인 나. 변호사인 엄마는 아버지와 별거 중이나 마찬가지지만 아버지의 재능을 믿으며 사랑하고 있다. 작품을 찾아 떠돌이 신세인 아버지가 예고 없이 돌아오던 날 엄마는 전직 공군 조종사였던 로펌 대표인 데이브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일탈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지하실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아버지는 데이비드의 결점에 대해 얘기하며 단순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단순하게 보인다고 경고한다. 엄마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은 아버지는 텍사스로 다시 떠난다. 그 시절, 엄마랑 데이브가 남긴 와인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유일한 친구인 베트남 남자애 차우랑 코요테 소리를 듣는다.

외출한 엄마를 기다리려 부엌에 내려갔는데 뜻밖에 아버지가 계신다. 아직 텍사스로 떠나지 않았고, 엄마에게 편지를 전해주라고 내민다.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아버지의 부재를 나는 엄마 탓으로 돌린다. 경제력만 좀 더 나을 뿐인 데이브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베트남전 때 데이브가 동남아에 주둔했던 얘기를 할 때, 차우 삼촌이 정글에서 살해된 걸 떠올리며 사람 죽여 본 일 있느냐는 말로 데이브를 자극해, 나와 데이브 사이는 더 멀어진다.

아버지는 떠나지 않았고 시내 모텔에 있었다. 엄마와도 연락을 하는 사이였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아버지를 엄마 사무실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엄마와 데이브의 친밀한 모습을 목도한다. 나더러 이 상황을 설명하기를 보채고 충분히 봤는지를 확인하는 아버지. 당신 계획에 나를 끌어들이는 아버지와 한편이 되고 싶지 않다. 코요테 소리를 듣는 밤, 엄마가 울며 돌아온다. 그날 엄마 회사로 돌아간 아버지는 데이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 버전 정도는 엄마의 회상마다 다르다. 그 이후 몇 년 간 아버지를 본 적 없고, 아버지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나로섡 아버지 자의도 아님을 이해하고, 죄책감을 갖는 엄마도 탓할 마음이 없다. 다만 완성된 아버지 유일의 영화를 못 본 게 맘에 걸린다. 안전금고에 보관된 그 필름은 영혼과 육체의 밀접성에 관한 거란다. 엄마가 본 시각적으로 가장 놀라운 영화란다.





<아술> 아술은 우리집에 묵는 교환환생인데 동성인 라몬을 만나고 있다. 아내는 대학에서 강의 중이고 아술과 친하다. 하지만 라몬에게 데려다 주는 일을 내 담당이다. 동성 남자애 만나는데 태워다주는 걸 알면 아술 부모는 어찌 생각할까. 나는 아내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고 아내는 아이를 원한다. 자식처럼 교환학생을 들이자는 것도 아내의 뜻이었다. 아내와는 재혼이다. 아내는 면직당할까 봐 불안한 나날이다. 아술은 대마초도 하는 것 같다. 어느날 차안에서 아술은 라몬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술을 위로해주기 위해 아내는 그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간다. 라몬을 제외한 파티도 계획한다. 우리를 위해 받아들인 아이인데 그 아이를 위해 우리가 있는 꼴이 되었다. 나는 아술의 대마초를 꺼내 피운다.


아내의 자리를 위협하는 동료 그레이든 리어의 특강은 독보적이다. 불안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지만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술이 친구들과 술 파티를 하고 있다. 난장이 된 집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아내가 놀랍다. 초대받지 못한 라몬의 전화를 받고 아술이 보고 싶어 한다며 오지랖을 떤다. 아술의 방에서 남은 대마를 떼어 뼛속까지 들이켠다. 마흔 여섯 나이의 희극적이며 비극적인 주책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 아내를 의심한 적이 있다. 노교수와 친한 아내를 질투했다. 라몬이 찾아오고, ‘둘 사이에 뭐 있죠?’라고 말한 아술의 친구 말에 옛날 생각이 떠올라 나는 아내를 찾으러 마당으로 나간다.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아술과 울부짖는 아내와 사라진 라몬. 아술은 자신이 실수로 넘어졌다며 라몬을 변호한다. 구급차가 오고 대마초로 약간 혼미한 상태에서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누가 라몬을 초대한 거냐고 말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술에 대해 그의 부모와 통화할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아내를 꼭 껴안는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몇 분을 보낸 후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기말 시험지를 유일하게 제출한 계기로 나는 로버트 교수와 친하게 되었다. 캠퍼스 근처 한국 식당 위층 아파트에 있는 로버트 아파트로 나는 초대 받는다. 내게는 나중에 남편이 된 의대생 남자친구 콜린이 있다. 로버트와 친해지자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하지만 별로 게의치 않는다. 우리의 대화가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로버트는 아파트 열쇠까지 준다.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돌아온 저녁 콜린을 안심시키고 나를 단속하듯, 나는 기숙사에서 콜린과 첫사랑을 나눈다.


로버트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아파트에서 만난다. 더 이상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밀한 사정들을 나눈다. 콜린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로버트에게는 가능했다. 로버트를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시간들. 교칙에 위배되는 이런 시간을 은밀한 기쁨으로 환원시킬 줄 아는 대화들. 바깥으로 술을 마시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로버트와 나란히 앉게 되고 술기운을 빌려 로버트의 손을 잡는다. 그 무난하지 않은 모습을 콜린에게 들킨다. 이후 지금껏 콜린과는 그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로버트와 만나 열쇠를 돌려주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키스를 한다.


콜린과는 결혼 후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 부양자로 비서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한달에 한두 번쯤 로버트와 편지 교환도 했다. 수련의 콜린은 바쁘고 잠자리는 점점 줄고 나는 피임 사실을 숨겼다. 로버트가 수련의 생활을 끝나가던 해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콜린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밤, 나는 뜰로 나가 통곡한다. 콜린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콜린과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가급적이면 로버트로부터 먼 곳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다. 콜린이나 로버트 똑같이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웠다고 믿는다. 로버트가 채워준 일부는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동안 콜린과는 유산, 파산 등을 겪었다. 로버트와의 비밀을 콜린에게 말하면 그는 내면화하고 나를 미워할 순 있겠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을 것이다. 죄의식을 덜기 위해 진실을 밝힌다면 모든이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로버트와의 그 시간이 떠오른다. 그와의 사랑을 위해 옷을 벗고 그의 침대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아내의 집으로 갔을 것이다. 바깥의 또래 학생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어려 보였다. 결국에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강가의 개> 더그형은 망나니다. 꼴에 미셸이라는 여자친구도 있다. 우리는 동네 쓰레기 폐기장을 배회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강가에서 자란 길 잃은 개들을 보곤 했다. 강에서 놀던 여자애들의 꼬임에 그쪽 남자애들에게 죽도록 물속에 처박힌 적도 있다.

형과 트레이는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수면 각성제를 먹여 캐리 휴버의 음모를 민 적도 있다고 소문난 형. 대학시절, 나는 그때 일을 떠올려 에세이를 썼다. 다음날 아침 캐리는 뒤뜰에서 벌거벗겨진 채 깨어난다. 파티가 열리던 저녁 우리 넷(, 더그형, 미셸, 트레이 형)은 강가에서 술을 마셨다.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미셸을 다른 남자 무리에게 빼앗긴 더그형. 형은 두 번이나 청혼 거절당했고, 좀 전 그 강가에서 세 번째 청혼을 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우리는 벤슨 씨네 파티장으로 쳐들어간다.



어른들이 떠난 파티장, 캐리 일행과 합류한다. 형은 기분이 좀 풀린 것 같다. 뒤뜰에서 트레이형이 캐리 선배가 완전히 뻗어 있다고 말한다. 소문이 점점 왜곡되는 것 말고는 일상은 별 변화가 없다. 가끔 캐리 선배가 생각나긴 한다. 고향에 오지나 않는지 이곳을 전부 잊었는지. 그녀에게 그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편지라도 쓰고 싶다.

형은 버지니아로 떠나게 되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오토바이를 형은 내게 선물로 준다.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뒤 나는 그걸 타지 않게 된다. 지금 나는 스물 여섯 살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법 죽었지만 형은 거기 안 속한다. 그 시절을 나는 여자친구에게 말하곤 한다, 형 일당이 술에 취해 남의 차를 박살내고, 이웃이 항의하면 엄마는 배상을 한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나는, 흠집난 차 주변에서 내가 유리 파편을 털어내고 쓸기 시작한다. 차 주인이 나와서 말한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이 말은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른다.





<외출> 아미시의 집단생활촌 여자아이들과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쯤 고속도로 쉼터에서 데이트한다. 별 볼일 없는 출신의 나와 테너는 우리 구역에서는 인기가 있을리 없다. 아미시 여자애들도 우리가 자신들과 다른 환경의 아이들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 만난다. 여자애들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다. 레이철은 아미시 아이답지 않게 매력 있다.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에 아버지는 일흔살이란다. 두 구역 사이에 패싸움이 자주 일었는데, 아미시의 아이작 킹은 밀리지 않는 포스를 자랑한다. 아미시도 도시화 바람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사람들이 떠나간다. 레이철도 그 생활을 지겨워한다.


어느 밤 우리집에서 파티가 열린 날, 맥주 열두 캔을 마시고 해롱해롱해진 우리 사이에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어쩐지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예감. 두 주만에 테너와 레이철을 만나러 가지만 현장감독을 하는 아이작을 만난다. 그들 구역을 침범한 우리에게 악의가 없음을 알고 아이작은 들판으로 되돌아간다. 간만에 레이철을 만나 데이트를 한 뒤 데려다 줄 때, 패싸움에서 끝까지 버티는 아이작을 대면한다. 숫자에서 밀린 아이작은 피투성이가 되어 마차에 실려 간다. 아이작은 육 주 후 뇌혈전으로 죽었고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지금 아미시들은 거의 떠났다. 레이철이 살던 곳에는 쇼핑몰과 상점이 들어찼다. 아미시 복장을 한 사람들은 한낱 어릿광대가 되어 관광객과 사진이나 찍는 신세로 전락했다. 스물아홉이 된 지금, 레이철을 생각한다. 높은 철로 다리를 건너며 데이트하던 그때, 발아래를 보지 않았던,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그 대책 없음과 눈먼 행동에 몸이 떨려온다.

 




<머킨> 센터에서 후천성 난청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는 린의 아버지 앞에서 남자친구 역할(머킨)을 하곤 한다. 중산층 이웃인 린다는 딸 조지아와 산다. 린은 양성애자이고 네 살 많은 동성애인 델핀이 있다. 델핀은 좀 까다로운 성격이다.


주말마다 나는 아이들이 커피숍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도록 도와준다. 무대에서 버벅거리는 호세의 상황 같은 것을 린은 불편해한다. 어떻게 매일 마음을 다독이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린은 우울해지지 않느냐고 내게 묻곤한다. 나로선 행복한 일인데. 내 여자친구 로런은 작가인데, 오 년을 함께 살다 바람나서 떠났다. 그 즈음 이사온 이웃이 린이다. 린은 내가 떠날까봐 염려한다. 낭송시를 연습하는 호세, 나는 부재하는 사람/목소리 없는 입, 이런 시를 연습하는 호세를 보면 슬픔이 인다. 로런에게서 나를 원망하는 편지가 온다. 연락하지 말라는 그녀에게 나는 마리화나에 취해 메일을 보낸다. 유치한 자기방어가 스민 그것을 보낸 걸 후회하며 삭제한다. 그녀의 답신은 없다. 린이 부럽다. 린에게 남편이 바람 피워 이혼했을 때 화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결혼을 깨는 건 두 사람이고 자신은 그 둘 중 하나라고 답한다.

린의 아버지와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린의 머킨으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취소되었단다. 대신 델핀과 헤어졌는데, 이유가 나 때문이란다. 차안에서 린이 나이차만 아니라면 우린 결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열 살 어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손을 뻗어 잡을 수도, 길가에 차를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녀는 내게 키스하겠지.


자바하우스 앞, 린이 보모에게 전화하는 동안 나는 낭송회가 끝날까 조바심을 낸다. 통화를 끝낸 그녀가 팔짱을 낀다. 호세가 연단을 향해 걷는다. 환호성이 울린다. 안쪽을 들여다보며 나는 그녀를 꼭 껴안는다. 호세의 낭송을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허락하는 한 그녀와 함께 이 순간을 느낀다는 사실. 우리 둘은 다만 멀리서 지켜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폭풍> 나는 언제나 누나 편이다. 약혼자인 리처드 없이 파리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누나를 마중한다. 스페인에서 둘은 싸웠다. 기차역에서 리처드는 소지품이 든 배낭을 둔 채 사라져버렸단다. 그해 여름 엄마의 새 남편인 톰과 나, 예비 누나 부부가 모여 결혼 축하를 하기로 했는데 허사가 되어버렸다. 리처드는 스페인 어디에 발이 묶여 있고, 톰은 발 부상으로 병원에 있고,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폭풍까지 몰려오고 있다. 고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의사 리처드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외국에 버려진 채로 있다는 건 맘에 걸린다. 누나도 사귀기에 편한 사람이 아니기에 누나를 만나는 남자들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다.


엄마는 톰과 병원에 있을 것 같단다. 누나의 현 사태에 대해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테니스광인 톰은 혼합복식 경기를 하다 다쳤는데 엄마 탓이라고 비난했단다. 밖을 보니 폭풍우가 친다. 하지만 익숙한 공간에서 느끼는 향수 같은 것이 올라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릴 적 여러 풍경들. 잠시 후 누나 방 앞에서 우는 소리.

다음날 아침 리처드와의 상황을 알게 됐는지 아래층에서 엄마의 고성이 들리고 엄마의 차가 빗속으로 나선다. 휠체어를 탄 톰은 수영장 근처를 왔다갔다 한다. 누나와 나는 톰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기 퇴직한 채 소명처럼 테니스에만 몰입하는 톰은 엄마의 돈을 보고 붙었다고 누나가 말했다. 엄마에게 기생하는 처지면서 혼전합의서까지 챙기던 사람이다. 엄마는 옆쪽 포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내게 근본적으로 슬픈 여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여인. 기쁨보다는 실망이 많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


오후 늦게 낯선 남자의 전화를 받지만 잡음 때문에 리처드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 누구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 일은 얘기하지 않는다. 폭풍의 눈이 지나가고 전기가 나가버린다. 리처드 걱정에 그 집 부모님께 연락해볼까 싶지만 누나는 거절한다. 교장 선생 출신답게 톰이 훈수를 두려하자 누나가 말한다. 발가락 하나 부러졌다고 망할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발가락이 아니고 복사뼈라고 톰이 응수한다. 누나의 방에서 당신이 미워, 라는 울부짖음이 들린다. 톰에게 하는 말인지 리처드에게 하는 말인지. 누나의 분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속에 서서히 자라난 것이다.


저녁 시간, 누나는 전화로 친구들에게 리처드 흉을 보고, 톰은 일기예보를 듣고, 엄마는 촛불 밑에서 책을 읽는다. 술 취한 톰과는 별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데 줄곧 테니스 얘기만을 하기에 관심이 없다고 솔직히 말한다. 톰은 나를 자기 친아들로 생각한다며 테니스를 쳐보라며 다정하게 군다. 다음날 아침 전기가 들어오고, 다시 리처드에게서 전화가 오고 누나가 테라스로 나가 통화를 한다. 톰은 아직도 자기의 부상을 엄마탓으로 돌린다. 리처드 걱정을 하는 엄마더러 누나가 말한다. ‘엄마가 진짜 걱정해야 될 사람은 저라고. 그 자리에서 엄마는 톰이 투자에 실패해서 결혼식 비용을 댈 수 없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한다. 톰더러 얼마나 날렸느냐고 물어보지만 엄마와의 일이라며 딴전을 피운다. 그날 저녁에 약혼 축하 자리가 될 터였는데 엄마는 톰을 부축해 차를 타고 나가버린다. 음식이 차려져도 먹을 사람이 없다. 누나와 나는 술에 취하기로 한다. 누나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사람이라며 나를 추켜세운다


누나는 내게 진실을 알려준다. 리처드에게 차였으며, 그날 리처드는 돈과 여권을 챙겨 좀 떨어져 지내보자고 말했단다. 더구나 용서를 빌며 내일 돌아온다고 말했단다.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란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남녀 관계, 더구나 리처드는 둘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단다. 누나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누나를 감싸 안는다. 오래전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며 언덕 아래, 아버지 차의 전조등 불빛을 보며 누나가 미소 짓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 그 불빛,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 (, 너무 좋은 소설이닷!)

 



<피부> 클로이와 나는 스물 셋 신혼. 꿈결인 듯 카펫에 누워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생각한다. 일 년 뒤, 우리가 서명함으로써 포기한 아이에게 지어줄 수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게 될 것을 모른 채.



 

<코네티컷> 그 여름 퇴원한 아버지는 코네티컷 연안 섬, 가족 별장에서 지냈다. 우리는 코네티컷에서 엄마가 물려받은 집에서 지냈다. 몇 주에 한 번씩 페리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곤 했지만 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해져갔다. 수술 집도 중 정신이상이 생긴 아버지. 내가 열 세 살 때 일이다. 엄마는 잠시의 침체기라 말하지만 어쩌면 아버지의 회복에 가장 먼저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집근처 사립학교에 다녔고(기숙사 생활하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누나는 일등을 놓친 법이 없었지만 나는 평범했다. 일찍 귀가하는 재능은 있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후 이웃 벤틀리네는 발길이 뜸했는데, 그날따라 벤틀리 부인이 엄마 손을 잡고 있었는데, 우정 이상의 친밀감이 느껴져 나는 놀란다. 짐작건대, 뒤쪽 테라스에서 남몰래 포옹하면서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 같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인 70년대가 오고 있었으니 세간의 이목에 들키기를 바랐을지도. 그때까지 가장 가식이 없었던 여자였던 벤틀리 부인이, 훈계하고 야비했던 여자로 느껴진다.


그간 둘은 친했지만 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랬는데 이번 열정적인 포옹을 목도하고 보니 (비록 내가 열세 살이긴 해도) 단순한 위로의 포옹이 아님을 알겠다. 엄마는 벤틀리 부인이 집에 들렀다는 얘기를 내게 하지 않았다. 외로이 섬에 계신 아버지. 누나에게 엄마의 일탈을 말해도 웃어넘길 게 뻔하고 도리어 일러바칠지도 모른다. 엄마에 대한 내 환상은 그 둘 사이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비도덕적이었을 것이다.

학습 능력이 못 미치는 나 때문에 엄마가 학교에 호출되었다. 면담 후 기대하는 위로와 달리 엄마는 차를 벤틀리네 쪽으로 몰았다. 부인을 껴안고 흐느끼던 엄마는 차안으로 돌아와 말한다. “우리 모두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십오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둘이 확실히 연인이라는 걸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연서, 사진, 한밤의 통화들. 엄마가 벤틀리 부인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외모에서 오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을 게다. 우리집에서 파티가 있던 날, 이웃이 다 모였는데 벤틀리 부인은 오지 않았다. 벤틀리 씨도 거의 아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아저씨 위상이 아버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벤틀리 부인은 곧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 때문에 파티에 오지 못한 것. 낙담하는 엄마는 밖으로 나가 눈이 붓도록 울었다. 대접이고 뭐고 빨리 이웃이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 벤틀리씨는 레즈비언 아내를 둔 걸 하소연하며 엄마 앞에서 흐느낀다.


벤틀리 씨가 떠난 뒤에 벤틀리 부인이 찾아와 그녀의 사랑인 엄마를 만난다. 벤틀리 부인으로서는 허구의 연인,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대상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이들(저 자신을 포함해서)을 위해서 나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떠난다. 아버지처럼 떠난 사람이 되었다. 다시 부인을 본 적 없지만 가끔 맨해튼 주소로 익명의 편지가 오던 것은 기억한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섬으로 갈 때, 엄마는 뉴욕에서 주말을 보내고 왔는데 넋 나간 표정으로 보아 그들 관계가 끝난 걸 확신했다.


벤틀리 부인이 찾아왔던 그밤 엄마의 대화를 기억한다. 안 가도 돼요. 가지 말고 문제를 해결해요. 부인이 나간 뒤 엄마는 울었고 나는 엄마를 향해 걸어갔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저 내가 자리를 피해주기만을 바랐다. 몇 년 뒤 섬에서 아버지는 돌아왔다. 아버지는 벤틀리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아버지는, 차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그럭저럭 사시는 것 같다. 엄마는 책도 읽고 산책을 하며 아버지 상태를 살피며 일상에 빠르게 적응해간다. 나로선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 떠오른다. 저 먼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 갈 것이라고 믿는 듯, 간절히 서 있던 엄마의 모습.


45나는 때로 내가 꾸는 꿈 속에서으 진실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꾸는 꿈 속에서 구멍에 잔디 봉지를 빠뜨리는 것은 탈이 아니라 나라고.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고., 한번은, 내가 녀석에게 내려가보라고 부추겼다고. 그것이 진실이에요, 라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구멍 - P45

87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렇게 몇 분여를 보낸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뒤로 돌아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아술 - P87

92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빛과 물질에 - P92

106우리를 매신한 스러진 배신한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빛과 물질에 - P106

125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이다.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내가 거의 십 년 동안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빛과 물질에 - P125

154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 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란다." -강가의 개 - P154

174나머지 우리들처럼 -내 부모님이 그러는 것처럼, 테너가 그러는 것처럼, 내가 그러는 것처럼 -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그가 미웠다. -외출 - P174

180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외출 - P180

215그들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게 허락하는 동난 그녀를 곁에 안고, 그곳에 린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머킨 - P215

234세월이 지나면서 누나의 기분을, 그 변덕스러운 기질을, 누나의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분노를 이해하게는 됐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월을 지나면서 천천히 누나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가꾸기 힘든 씨앗, 우리 가족의 상담 치료사는 그걸 그렇게 불렀다. -폭풍 - P234

240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 누나와 내게 건넨 책들에는, 부모 중 하나가 죽게 되면 그 자식들은 절대 아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것이 누나의 경우라고 이해했고 가끔은 어머니의 경우라고 이해했다. --더 물러졌고, 어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폭풍 - P240

245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해져버리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폭풍 - P245

249나는 우리가 막 서명함으로써 포기한 아이에게 지어줄 수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피부 - P249

274안 가도 돼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지 말고 문제를 해결해봐요. 벤틀리 부인은 울고 있었다. 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코네티컷 - P274

277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서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코네티컷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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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2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책이에요. 다 좋았어요.

다크아이즈 2020-12-06 16:43   좋아요 0 | URL
역시, 페크님!
구멍은 강열하고, 빛과 물질은 아련하고,
소설 읽는 시간이 젤 햄볶습니다.

stella.K 2020-12-0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다가 포기했어요.
제가 원래 미국문학은 편차가 심해요.ㅠ

다크아이즈 2020-12-06 16:4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그래요.
책이란 호불호가 넘나 극명하니까요.
젊은 스텔라님껜 안 어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멍, 같은 작품이나, 폭풍, 같은 작품을 누군가 쓴다면
기꺼이 또 읽을 것 같아요.

2020-12-06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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