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5시쯤에 팀 회의를 했다.
팀장은 무척이나 회의를 좋아한다.
회의 횟수로는 단연 "짱".
communication 기술로는 "삐꾸".

중요한 착각도 하고 있다.
자신은 "open mind" 라나? 

이건 정말.....치명적이다.

그 흔한 공주병.
좋다.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즐겁게 살 수 있으니까. 가끔 "따"가 되더라도.

그 흔한 왕자병.
좋다. 컴플렉스에 쌓여서 베베 꼬인 것 보다 100배 낫다.

그런데..... "open mind"라는 착각은
주위 사람들을 멍들게 한다.

주위에서 보기엔 귀를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파도 
사오정 수준이 겨우 될 것 같은데 
"open mind"라니...

울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 난 항상 열려 있는 사람이야."

차라리 태평로 노숙자 아저씨가
"난 식물과 대화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게 보다 설득력이 있을 거 같다.   
 
어제 팀 회의에서 난 "투명인간"이 되었다.

정보공유를 한다며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팀장이 말했다.
"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우리 사업부에 05년 과장 진급 대상이 5명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5명 모두가 진급할 수 있도록 상무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말 왜 하지? 그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지?
역시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본론은 뒤에 나왔다.

" K 대리의 경우, 내후년 진급대상입니다.
 그 동안 내년 진급 대상자들 우선으로 고과를 주느라 K 대리는 항상 C를 받아 왔습니다.
 고과가 계속 나빠서 이대로는 내후년에도 과장 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OOO상 수상자로 K대리를 추천, 선정되었습니다.
  OOO 수상자는 상금 500만원과 특진을 하게 됩니다. "

사람들 뜨악한 표정.
잠시의 침묵....

" 모두 다함께 축하해 줍시다."

힘 없고 뜨악한 박수..... 짝짝짝. 

동료가 상을 받으면 기뻐해 줘야 한다.
암..... 내 일처럼 기뻐야 줘야지.
그런데..... 난 투명인간인가?

난 영광(?)의 OOO상 수상자인 K대리와 호봉이 똑 같다.
즉, 나도 06년 진급 대상자다.
05년 진급 대상자가 5명인 덕분에 나도 쭈~욱 C를 받아 왔다.
그런데 K 대리에게 OOO상을 주고 특진까지 시키면 나는 뭐지?

나는 고과 C를 비타민 C를 선물 받듯이 감사하게 받으며
K대리를 K과장님으로 불러야 하는가?
나는 울 회사 영업사원 중 유일한 여자다.
고로 나는 쭈~욱 C를 받다가 시집가면 된다는 건가?

어제 회의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뚜껑 열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찍 퇴근했다.
오랜만에 수경이를 만났다.
대화 중에 수경이가 말했다.

수경 : 야. 내가 니 홈페이지 맨날 들어간다.
       근데....너... 글들 진짜 솔직하더라. 너네 팀장이라도 보면 어쩌려구?
       회사 사람들 안 들어 오냐?
수선 : (머쓱하게) 뭐....친한 사람 몇 명 들어오긴 하는데....
       몰라....

그렇다. 모른다.
open된 공간인 만큼 아무나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과가 더 이상 나빠질 수는 없다. 우하하.

분노, 허탈함, 부끄러움... 이런 저런 감정들이 
엄마가 제사 음식 남은걸 처리하기 위해 끓이는
잡탕찌개처럼 막 섞여 있다.

지진과 해일로 55,000명이 죽고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삶의 기반을 잃었다.
이 와중에 "No Problem!"을 되풀이 하는 Dina를 욕하며,
아픔을 함께 나누자고 외치던 수선.

그들의 그 엄청난 아픔 보다
나의 고과에 더 연연해 하며
팀장의 만행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이중성이여....

상상 속에서 난 팀장과 상무님에게
온갖 깐죽 거리는 말들을 하며
속 시원하게 따지고 안녕이라고 말한다.

현실은?
도저히 일할 기분이 안 들어서 오전 내내 태업을 하다가
답장해야 할 수 많은 메일과 발표 준비에
꼬리를 내리며 일을 시작한다.

어제 난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리고....이렇게 한 해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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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2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만행이로군요. 그의 처사!

자기 입으로 오픈 마인드 외치는 사람치고 정말 오픈 마인드인 사람

못 봤어요.

고과 C를 비타민 C 받듯이...

수선님의 유머는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kleinsusun 2004-12-2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하도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다리가 다 저려요.

답장을 기다리는 메일들이 밀려 있는데 정말 일하기가 싫어요.

화내면 저만 손해겠죠? 기운 내야쥐.아자!


세벌식자판 2004-12-29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그래도 글을 마음껏 쓰시다가 그분(?)들이 다 보면 어떻하시려구...

기분 푸세요. 저는 [내 서재] 챙겨 쓰다가 혹시나 주변 사람들과 관계있는 글을

쓰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던데...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여기를 자주 들락거리진

않을까 하구요.



아무튼 기분 푸세요~~~

kleinsusun 2004-12-2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벌식 자판님, 감사합니다.

근데요..... 은근히 그분(?) 들이 봤으면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ㅋㅋ

야클 2004-12-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수선님답게 Cool하게 웃고 새해 맞이하세요.  ^^

다른데 가시더라도 대한민국직장들이 다 그렇고 그렇지 않겠어요? ^^

 




kleinsusun 2004-12-29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 또다른 그색히.....

맞아요. 어데가나 그색히가 있죠. 허무한 웃음.ㅋㅋ

바람돌이 2004-12-3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인사도 안하고 댓글만 한 두번 올린 것 같은데 쩝... 어쨌든 안녕하세요. 님의 글은 항상 생기가 넘치네요. 이렇게 열받는 상황을 얘기할 때도요.

일반회사생활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저에겐 수선님의 생활글을 보는게 거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수준이예요.

전 학교에 있는데 학교라는 공간이 인간관계면에서는 1차 집단의 특징을 많이 보이죠. 아이들과는 오로지 1차집단, 동료들과는 구분지어서 1차집단과 2차집단으로 분류.

여기도 사람사는데라 님이 말하는 그런 사람들 많지만 또 좋은건 승진에 관심을 끊을 수 있다는거죠... 거기에 관심끊고 살면 내 할말 다하고 맘에 안드는 사람 형식적인 관계 유지하고 그러는게 가능하다는게 저같이 어리버리한 사람에겐 좋은곳인것 같아요. 학교는 약간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 들때가 많죠. 그리 새로운 일들이 많지는 않거든요. 일상의 반복이죠..

오늘 수선님의 글을 보니 세상이 전쟁터라는게 새삼스럽게 실감나네요

힘내세요. 세상이 치사해도 뽄대나게 이기세요. 세상이 아무리 치사해도 난공불락은 아닐거예요

kleinsusun 2004-12-3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당! 바람돌이님의 말을 들으니 힘이나요!!!

세상이 치사해도 "뽄대나게" 이기세요. 네, 항상 당당하게! "뽄대나게!" 살겠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구요? ㅋㅋ 넘 재미있는 표현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아침 항상 그렇듯이 겨우 일어났다.
부시시 눈을 뜨고 물을 마시러 나갔는데,
엄청난 해일로 다 떠내려간 태국 해안을 보고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엄청난 지진과 해일,그렇다...대재앙이 일어났다.
갑자기 Dina가 생각났다.
Dina가 무사할까?

어제 이스라엘 거래선인 Dina가 미팅을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막바로 오는게 아니라 푸켓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어제 아침에 도착하는 거였다.
Dina는 2주일간 크리스마스 휴가를 푸켓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데,
하루 시간을 내어 한국에 와서 미팅을 하고 당일 저녁에 푸켓向 대한한공 직항을 타고 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즉, 무박 출장(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해서 일을 하고,당일 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빡센 출장), 보통 체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 싱가폴에 무박 출장 갔다가 몸이 망가진 적이 있다.)
Dina 아줌마(49년생이다) 참 억척스럽다.
그렇게까지 해서 올 필요 없다고 말렸는데 꼭 오겠다고 했다.

어제 아침,
TV에서 그 괴물 같은 파도를 보았을 때,
Dina가 생각났다. 무사할까?

출근했는데 Dina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다.
대한항공에 전화해보니 비행기는 떴다고 한다.
약속시간은 11시 30분.
만나기로 한 플라자 호텔까지 걸어가면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로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두리번 거렸다.
곧 Dina가 큰 소리로 날 불렀다.
" Susan ! "
우리는 hug를 하며 인사를 했다.
Dina는 걱정했던 바와 전혀 다르게 아주 유쾌한 표정이었다.
가족들은 무사하냐고 물어봤다.
자기 가족들은 다행히 해변 바로 앞 호텔이 아니라
해변에서 상당히 떨어진 호텔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Dina는 "No Problem!"을 연발했다.
그런데.....Dina의 " No Problem!" 을 듣고 있자니 참....기가 막혔다.
사실 화가 났다. Dina가 Buyer만 아니었으면 화를 냈을 꺼다.

No Problem이라니....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수천명이 실종되고
수백만 명이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날렸는데,
가족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폐허가 된 해안에서
가족들의 시체를 찾고 있는데....

자기랑 자기 가족이 무사하다고 그렇게 "No Problem!"을 연발할 수 있을까....


사무실에 오고 나서 상무님한테 인사를 할 때도,
팀장님하고 식사를 할 때도,
무사하냐고 물어보면,
오늘 푸켓에 다시 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계속 " No Problem!"이라고 대답했다.

1월 2일까지 계속 푸켓에 있으면서 휴가를 "즐긴다"고 했다.
그 엄청난 재앙의 한 복판에서 휴가를 즐기겠다니.....
가서 봉사활동이라도 하던지....
그 너무 멀쩡한 표정에 화가 났다.

어제 미팅이 끝나고 Dina는 다시 대한항공 직항편으로 푸켓에 갔다.
실종된 가족들을 찾으러 가는 망연한 사람들 외에 텅 빈 비행기를 타고.....

뉴스를 봐도 화가 난다.
2만명이 넘게 죽었다.
수천명의 실종자들에,
스리랑카나 인도 같은 못사는 나라에서
침수지역에 콜레라나 말라리아가 돌 수 있는걸 생각하면
실제로 사망자는 3만명이 넘을 꺼다.
이 판에 한국인 관광객 소식만 계속 전하는,
일본 관광객은 몇 명 죽었는데 한국은 피해가 덜하다고 말하는 태도.

나만 무사하면,
내 가족만 무사하면,
내 나라만 무사하면 No Problem인가?

정말 화가 난다.

Dina 아줌마!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아줌마 가족이 무사하다고 해서 "No Problem"이 아니예요.
아줌마의 휴가도 중요하겠지만,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휴가를 "즐기지" 마세요!

이 엄청난 재앙.
스리랑카,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말레이지아, 방글라데시....
못사는 나라에서 일어난 남의 일이 아니예요.
수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고 울고 있어요.
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시체를 못 찾아 눈물을 삼키고 있어요.
한 순간에 삶의 기반을 모두 날려 버린 가난한 아시아 여자들이 울고 있다구요.

Dina 아줌마,
"No Problem!" 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파도가 집어 삼킨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해요.
Dina,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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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4-12-2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읽고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 왈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만남이 없는 세계다. 당구공처럼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접촉만이 있을 뿐....

"No Problem"까진 많이 생각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준다해도 다시 그곳에서 휴가를 즐기겠다니 이건 정말 아니네요

님 말대로 그곳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일이라도 뭘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네요

kleinsusun 2004-12-2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어제 다시 푸켓으로 가는 Dina를 보고 씁쓸했어요.

나만 무사하면, 내 가족만 무사하면, 내 국가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

Dina와 그 가족들이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길 바래요.

No Problem!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야클 2004-12-2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네요. 점심 먹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해주기 보다는 파도의 높이나 해일의 속도 같은 것만 화제에 올린걸 보면요. 저도 또다른 Dina였나 봅니다.

kleinsusun 2004-12-2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은 항상 저를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지난번엔 전갈인지 개구리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또 다른 Dina라 반성하시고.....

저도 "No Problem"에 발끈해서 Dina를 비난만 했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네요. 부.끄.러.움.

로드무비 2004-12-28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나를 만나는 장면에서 박수를 짝짝짝 쳤는데......

그런데 수선님, 세상의 참혹한 일들은 도무지 종류가 끝이 없는 것 같지 않아요?

이런 종류의 참사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말여요.

kleinsusun 2004-12-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도대체 왜 이런 참혹한 일들이 끝 없이 일어나는건지....

그것도 그 가난한 나라들을 그렇게 풍지박살 내면 어떻하라는건지...

스리랑카에 가 본 적이 있어요. 그 아름다운 나라가 지금쯤 얼마나 멍들었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을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파요.

icaru 2004-12-2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은 그렇지만.... 참.... 이상하지요~ 희귀병은 가난한 집 치료비를 댈 수 없는 사람이나 아이들에게 잘 생기고... 수해나 물난리도 해마다 겪는 사람들이 또 겪고....이런 자연 재해도...꼭 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자주 많이 닥치는 것만 같아서요...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도...답답하고..슬프네요...

2004-12-28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4-12-2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미국인 관광객이 몇명 죽었다, 일본인 관광객이 몇명 죽었다 하며 자기나라 사망자 수만 챙기고 있기에, 스리랑카,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10개국 이상에서 당한 "재앙"은 너무도 커요. 콜레라나 말라리아 까지 돌면..... 정말 가슴이 아파요.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여자와 남자,양성간의 소통되지 않는 벽은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성별에 따라 구분되어 교육된, 사회적 규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때, 내 가사 성적은 "가"였다.
수,우,미,양,가에서 제일 꼴찌인 "가".

다른 과목도 다 그랬냐구?
난 내신 1등급이었다.

즉, 국영수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과목은 다 "수"였다.
그런데 왜 "가사"가 그 모양이냐구?

가사는 내 선택 과목이 아니었다.
난 제 2외국어(독일어)를 선택했고,
학력고사 때 가사 시험을 칠 필요가 없었다.

고3때 우리 반에서 독일어를 선택한 애는 5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 50명은 모두 가사를 선택했다.

독일어 시간에 50명은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거나 다른 공부를 했고,
가사 시간에 5명은 아예 나가 있었다.
그것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학교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물론 친절한 선생님의 배려에 감사하며 학교 독서실에서 실컷 떠들었지만...

가사가 선택 과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중간고사,기말고사는 봐야 했다.
다른 애들은 벼락치기라도 해서 대충 시험을 봤다.
하지만 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 하기가 싫었다.

남자애들이 공업인지 기술 시간에 뭘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과서를 본 적도 없으니까...

지금은 교과 과정이 어떻게 바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가사"라는 과목의 교과내용은 참으로 허.접.했.다.
왜 그런걸 배워야 하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저고리 만들기, 바느질의 종류,
탕평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아닌 것은?,
무슨 음식을 만들 때 순서를 번호로 나열하시오 등등.

이런걸 왜 배워야 할까?
누가 저고리를 만드나?
일 년에 몇 번 입어 보기도 힘든 판에...

중학교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때는 교과 이름이 "가사"가 아니라 "가정"이었다.

중3 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바로 그 "가정" 선생님이었다.

" 너 일어서! "
" 그 뒤에! "
" 그 대각선 뒤에!"
하며 애들을 일으켜 세워서 질문을 하면, 애들은 공포에 떨며 대답을 해야 했다.

나도 호명을 받았다.

선생님 : OOO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 말해봐!
수선 : ( 곤란한 표정을 짓다 씩 웃으며) 가스렌지, 냄비, 국자, 앞치마....


애들이 웃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선생님은 너무 화가 나서 내 머리통을 출석부로 때렸다. 별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허접한 과목을 배우는 것 까진 좋다고 치자.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여자만 배워야 하는가?

난 어릴 때부터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들도 와이셔츠 단추 떨어지면 자기가 달 줄 알아야 하고,
밥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왜 "가정", "가사"는 여자만 배우는가?

저고리 만들기, 버선 만들기, 조각 이불 만들기...
이런 쓰잘 데 없는 내용 다 빼고,
단추 달기, 간단한 음식 만들기, 못 박기, 형광등 갈아 끼기 등
이런 실용적인 가사/기술 통폐합 과정을 만들어서 여자, 남자 같이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정말, 진정 중요한 것은
비타민 A는 어떤 식품에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 C는 어떤 식품에 많이 들어있고
이런 게 아니라,
"가사"는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할 타고난 책임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가 분담해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먹기 싫다고 하는데도 밥 차려주고,
당신은 화장품 하나 제대로 못 사면서 공부도 안하고 또 못하는 아들을 위해 과외비는 아낌 없이 쓰며,
그저 공부만 잘하라는 말을 듣고 자라서
'여자는 원래 가족들에게 희생하는 존재구나'
생각하는 남자 어른이 되면,
한 가정의 불행이 시작된다.

여자와 남자,
개성과 취향과 개인의 능력을 떠나
항상 성에 따라 먼저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역할을 교육하고
그 역할과 사회적 책임, 금기에서 벗어나면 비난을 하고....
이런 속에서 전통적인 여자의 집합에도, 남자의 집합에도 속하지 못하는 성적 소수자들은 평생 고통을 받고....

<아주 작은 차이>는 30년 전에 독일에서 출판된 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을 사는 한국 여자들의 상황과 너무나 똑같다.

인터넷 서점에 있는 <아주 작은 차이>의 독자서평들을 읽어보니,
여성학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숙제로 책을 읽고 쓴 독후감들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 일상에서 겪으면서도,
어머니의 모습에서 보고 느끼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현실에 놀라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부부나 연인이 함께 읽고 얘기를 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알아야 배려할 수 있고, 그래야 더 행복할 수 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아들은 태권도장에 보내고,
딸은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이런 전형적인 틀 속에 아이들을 가두지 말고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

특히 딸들에게도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꼬~옥 가르켜 줬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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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4-12-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학교에서 가정과 기술 과목이 통합되어서 '기술 가정'이라는 과목으로 가르칩니다. 님의 말대로 남자애들도 간단한 바느질과 가사실습은 해야되고 여자애들도 간단한 못박기 이런건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거죠. 그나마 학교교육과정이 좀 나아졌다고 할까요

로드무비 2004-12-2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도 가정 실기 시간은 쥐약이었죠.

바느질을 해도 이상하게 우글우글 울고......

그래서 괜히 나는 살림에 무능한 인간이다, 하는 이상한 굴레 만들어 씌우고......

이 책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어봐야 하남유?^^

kleinsusun 2004-12-2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술 가정"이 생겼군요.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당.바람돌이님!

p.s) 제가 까불 때 즐겨 부르는 노래가 트로트 변조 "바람돌이" 랍니다.(만화주제가)ㅋㅋ

kleinsusun 2004-12-2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한번 읽어보세요!

로드무비님은 결혼도 하셨고, 또 엄마시니까 저랑 또 다른 느낌을 받으실꺼예요.

만약 읽으신다면 들려주세요!


날개 2004-12-2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평소 생각하던 바를 글로 옮겨주셨군요..^^* 저는 어렸을때 기술이 너무너무 배우고 싶었다구요..ㅎㅎ

딸, 아들 둘을 키우면서 최소한 남자일, 여자일 구분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가정에서 암만 애써도 밖에서 받는 영향은 어쩔수가 없으니... -.-;;;

음.. 근데 요즘은 딸, 아들 구별않고 태권도와 피아노를 다 시키는 부모들이 더 많습니다..ㅎㅎ

야클 2004-12-2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사"는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할 타고난 책임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가 분담해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다. -



충분히 공감하며.... 또 쬐끔(?) 찔리는 부분 반성해봅니다. 요즘은 몇년 다르게 사고방식도 바뀌니까 곧 나아지겠죠. 저만해도 꽤나 많이 바뀌어 가는 걸 느끼니까요. ^^


kleinsusun 2004-12-2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태권도나 쿵후, 어린이 야구팀 같은 운동을 했으면 참 좋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배운건 피아노(디따 오래), 서예, 미술 이런 정적인...너무도 정적인.... 날개님 같은 멋진 엄마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날개님 멋져요!

kleinsusun 2004-12-23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설날에 엄마 많이 도와 드릴꺼죠? ㅋㅋ

로즈마리 2004-12-23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가사에서 점수가 깎였었는데..^^ 동질감..ㅋㅋ

icaru 2004-12-2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했었어요...이 책은 부부나 연인 동성이 아닌 성이 다른 친구와 함께 읽고 이야기해 볼 여지가 많다는...

marine 2005-02-14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고리 만들기, 지금 생각해도 손이 바르르 떨립니다 치마 만들기는 실제로 천 떠서 만들고 어렵지 않아 체육 시간에 체육복 갈아 입을 때 이용했는데, 이 놈의 저고리 만들기는 부직포로 1/4 크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치수 재기도 어려웠어요 가사 책에 2.5cm로 나오면 이걸 1/4로 나눠야 하는데 자에 소수점은 0.1 단위로 있잖아요 게다가 부직포는 왜 그렇게 잘 찢어지는지... 정말 짜증나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아주아주 유명한 우화가 있지.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

전갈이 개구리한테 업어서 강을 건너 달라고 했다.

전갈 : 업어서 강을 건너줘.난 헤엄을 못치쟎아.
개구리 : 싫어. 니가 나를 물면 난 죽어.
전갈 : 내가 너를 물면 나도 물에 빠져 죽는데 내가 왜 널 물겠니?
개구리 : ( 잠시 망설이다 끄덕인다) 그렇긴 한데.....
전갈 : 절대 너를 물지 않아.

이렇게 해서 개구리는 전갈을 업고 헤엄을 친다.
그 때, 개구리는 죽을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독이 온 몸에 퍼진다.

개구리 : (죽어가며) 너 왜 이러는거야? 이제 너도 죽는거야.
전갈 : 어쩔 수 없어. 난 전갈이니까.

이런 유명한 옛날 이야기.
근데..... 이런 우화의 "진실" 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한국이건 아프리카건, 칠레 어떤 산골 마을에서도, 심지어 토성에서도 변함 없이 존재한다.

존재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전갈을 탓할 수 없다.
전갈은 전갈이니까....

존재의 속성을 간과하고,
"설마 나를 물지는 않겠지.그럼 자기도 죽는데..."
하고 "상식"에 근거해서 생명을 건 개구리가 바보다.

그렇다.
멍청한건 존재의 속성을 간과한 개구리다.
개구리는 바보다.

전갈은 자기의 본성에 저항할 수 없다.
자기를 파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본성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는 전갈들이 있다.
전갈한테 물리고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하는건 바보 짓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말한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라고....
왜 나는 보이는데 너한테는 안 보이냐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 전갈 감식기" 이런건 나오지 않는다.
"인간 전갈 감식기" 보다는 AIDS 백신이 먼저 나오고,
암 치료제가 먼저 나오고,
차라리 타임머신이 먼저 나올꺼다.

그러니....
"전갈" 을 알아보는 눈을 기를 수 밖에.
자기자신을 방어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공간에 전갈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전갈한테 물린다.
개구리처럼 치명적인 독성에 한방에 죽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항체"가 형성된다.
이럴 땐 나중에 한방에 당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항체"를 만들어준 전갈에게 감사해야 한다.

절대 하면 안되는 실수는,
전갈을 용서하는 거다.

전갈에게 물리는 실수야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갈에게 물리고서도 죽지 않았다고 해서 전갈을 용서하면 안된다.
그러면 전갈은 슬슬 강도를 높혀가며 당신을 문다.
죽을 때 까지....
그것이 전갈의 본성이다.

전갈은 개구리를 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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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심장합니다. 근데 도대체 내가 전갈인지 개구리인지... -_-;

파란여우 2004-12-2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단순무식한 여우에게는 어려운 은유입니다. 저도 야클님처럼 제 정체가 전갈인지, 개구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런 여우였군요..^^

글샘 2004-12-21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갈에게 한 방 쏘이셨군요? ^^ 잘 보세요. 진짜 전갈이었는지... 아니면, 전갈로 변장한 파리떼였는지...

kleinsusun 2004-12-2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야클님과 여우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생각은 못해 봤었는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다 좋을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떤 사람에게 전갈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죠.

그래서....전갈과 개구리는 서로 안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플레져 2005-01-10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왜 지금 봤죠? ㅎㅎ

저는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 들은 이야긴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전갈인지 개구리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거라 믿지만...^^;;

별자리가 전갈자리인 남자도 조심하세요. 아주 아픈 사랑을 주거든요 ^^


kleinsusun 2005-01-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자리가 전갈인 남자요? 네...주의 하겠습니다.

전갈 조심! 한번 만난 이상 대부분의 전갈들은 진드기로 변신해요.ㅋㅋ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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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미는 책방 나들이다.
2주 전인가? 반쪽 영업을 하던 진솔문고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좋아하던 서점이었는데 아쉽다.

오프라인 서점에 들러 시간 가는줄 모르고 책구경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온라인 서점을 돌아 다니며 독자리뷰도 읽고 흘러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근무시간에 잠시 쉬고 싶을 때,
여유가 생겼을 때,
나를 제외한 우리팀 사람들은
인터넷 신문, 주식, 아파트 시세를 본다.
그런데 나는....
온라인 서점을 헤엄쳐 다니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알라딘을 헤엄치다 만난 책이다.
예전 부터 한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던 책인데,
마일리지까지 30% 주기에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이 책, 너무......재.미.있.다.

이 책은 16세기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치열한 삶을 살다간 14명의 여성을 잊혀진 역사 속에서 불러온다.

신사임당,송덕봉,허난설헌,이옥봉,안동 장씨,
김호연재,임윤지당.김만덕,김삼의당,풍양 조씨,
강정일당,김금원,바우덕이,윤희순


현모양처의 대명사,
체 게바라가 면 티셔츠 모델로 추락하듯이
가구 브랜드 이름으로 전락한 신사임당.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천재 허난설헌.

이렇게 피상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외에 눈에 익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안동 장씨.
많이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난다구?

97년, 이문열 아저씨가 허접한 소설 한 권으로 세상을 시끌시끌하게 했던 <선택>, 바로 그 <선택>의 주인공이다.
<선택>을 읽고 이문열 아저씨한테 말하고 싶었다.

" 아저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신문에 쓰세요. 아저씨 그런거 좋아하쟎아요. 역사 속 인물까지 불러 와서 이런 소설 쓰시지 말구요!"

세 명의 저자 중 안동 장씨편을 쓴 조혜란.
글의 시작 부분에서 조혜란의 고민이 물씬 묻어난다.

혹여 죽은 자가 말이 없다고 하여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임의대로 빌려오고 싶어졌다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죽어 말 못하는 존재를 빌려 누군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한다면 이는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정부인 안동 장씨의 삶에 대해 쓰려고 마음먹으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죽은 자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17세기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안동 장씨가 밟았을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다.안동 장씨 부인은 일반인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쏟아내면서 그녀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되었다.
(p122)

이문열 같은 어마어마한 문화권력이 비틀어 놓은
안동 장씨의 삶의 궤적을 바로 펴는 일, 복원 시키는 일,
명예를 찾아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문열 아저씨!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신문에 쓰세요!)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도 비범했던>을 쓴
세명의 저자들은, 잊혀졌거나 또는 왜곡된 이미지로 고정된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의 궤적을 꼼꼼히 쫓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문열에 의해 엄하게 형상화된 안동 장씨.
조혜란이 복원한 안동 장씨는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안동 장씨는 친정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친정 식구들을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안동 장씨는 이렇게 친정 식구들을 데려다 집을 지어주고 살 도리를 마련해주었으며,친정 조상들의 신주도 옮겨 모셔다가 봄가을로 정성스레 제사를 올렸다.그 뿐만 아니라 시집 장가 보내는 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모두 챙겨주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요즘에도 시집간 여성이 친정 새어머니와 더불어 동생 넷을 데려다가 함께 길러주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하는 일에 남편이나 시댁의 동의를 얻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그런데 장씨 부인은 이 일을 해냈다.한두 해에 끝날 일들이 아니었으니,분명한 의지와 주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p131)

우리가 "현모양처", "이율곡의 어머니"라고만 알고 있는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다.
신사임당은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신의 의사나 의지가 없이 남편만을 따르는
그런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동계만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했다.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나 있습니다.그러니 또 무슨 자식을 더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겠습니까?

.....(중략)

사임당이 어진 아내의 전형이라면, 그 어진 아내란 자신의 판단대로 말하고 행동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때로는 남편에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도 있는 여성인 셈이다.
(p31)

또한 신사임당을 "이이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천재적인 "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신사임당은 그녀 혼자만으로도 입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굳이 아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정서적 감응력이 풍부한,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현실적인 구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줄 알았던,예민하면서도 다정다감했던,그림에 있어서 천재를 발휘했던 그녀를 그녀로 존재하게 하라.

조선 여성들의 삶의 실상을 밝히는 고전 여성문학을 공부하고,
이런 책을 써서 잊혀지고 왜곡된 먼저간 이들의 삶을 복원시키는 세명의 저자 박무영,김경미,조혜란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제 이 책을 한 선배에게 선물했다.
그 선배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만나길,
그래서 신사임당을 가구 이름이 아닌,
말 없는 현모양처가 아닌,
그저 이이의 어머니가 아닌,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낸 한 주체적인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길,
무엇 보다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신선한 시선의 역사 text에서 만나는 엄.청.난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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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솔문고가 문을 닫았군요. 점심시간때 가끔 가던곳인네. 아쉽네요.새로 생기지는 못할망정...

로드무비 2004-12-1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이문열 아저씨 ㅋㅋ

추천하고 갑니다.

책읽고 리뷰 쓰는 것이 휴식의 일환인 수선님.^^

kleinsusun 2004-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등학교 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런거 읽으면서 이문열 아저씨 좋아했었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아저씨"라는 호칭이...

야클님, 로드무비님 편안한 일요일 보내세요!


로즈마리 2004-12-2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야 겠네요. ^^

kleinsusun 2004-12-20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안녕하세요!

님의 서재에 방금 다녀왔어요.

김영하의 <검은꽃>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김영하 소설은 <검은꽃>빼고 다 읽었는데, <검은꽃>은 사둔지가 한참인데 읽는걸 자꾸 미루고 있어요. 왠지 실망할 것 같은 예감에...멕시코 이민사가 김영하의 소재로 넘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로즈마리님의 리뷰를 읽으니 두려움이 더 현실적으로 변하네요.ㅋㅋ 앞으로 자주 들릴께요! 좋은 한주 보내세요!

icaru 2004-12-2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깜찍한 리뷰예요~! 유쾌하게 읽고 갑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