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태어나서 처음 "하숙집"에 가봤다.

신촌에는 하숙집이 많다.
물론 내가 학교 다니던 10년 전에는
원룸, 원룸텔, 오피스텔 이런게 거의 없었던 만큼
하숙집이 훨~씬 많았을 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하숙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같은 과 동기중에도 하숙하는 애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하숙집에 놀러갈 만큼 친하지 않았다.
학교 앞에 하숙집은 허름한 호프집, 소주방 만큼이나 많았지만
내겐 "다른 세계" 나 다름 없었다.

이틀 전, 엉뚱한 기회로 하숙집에 가보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대학가 하숙집에 가볼 기회는 영원히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오랜 친구 James가 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맨날 "My life is so boring." 하더니 일상의 권태를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쌩뚱 맞게 서강대 한국어학당 가을학기를 등록했다며
테러 경계로 삭막한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신촌에서 하숙집을 구해야 한다며 도와달라고 해서
이 미칠듯한, 찜질방 같은 더위 속에 학교 앞 하숙집을 보러 갔다.

소개 받은 하숙집 아줌마는 "수정 사우나" 앞에서 전화하라고 했다.
그곳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을 때
반바지에 쓰레파를 질질 끈 아줌마가 나타났다.
"덥지?"로 인사를 건넨 아줌마를 따라 몇걸음 걸으니
첫눈에도 하숙을 치려고 날림으로 지은 것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붉은 벽돌로 조잡하게 쌓아올린 빌딩.
좁아 터진 현관에는 열 켤레 넘는 구두, 운동화들이 마구잡이로 엉켜 있었다.

"들어와! 3층 방이 비어있어."
(그러고 보니 그 아줌마는 처음부터 반말을 썼다!)
아줌마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한층에 방이 5개씩 있어."

방과 방 사이의 복도는 어찌나 좁은지
마주한 방문이 동시에 열리면 부딪힐 것만 같았다.

지붕은 도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한낮의 지글거리는 태양을 스폰지가 물을 빨듯 쭉쭉 빨아 들이는지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았다.

"이 방이야."
아줌마는 열쇠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바둑판만한 창문이 있는 좁은 방에는
썰렁한 침대만 하나 휑하니 놓여 있었다.

"화장실은 어디 있어요?"

아줌마는 그 자리에서 팔을 뻗어 옆 문을 열었다.
" 한 층에 하나씩 있어."

화장실에는 칠이 다 까진 변기 하나, 세면대 하나,
초라하게 늘어진 샤워 꼭지 하나가 있었다.
유쾌하지 않은 냄새도 훅~밀려 왔다.

"밥은 어디서 먹어요?"

아줌마를 따라 1층에 내려가니 뜻밖에 4인용 식탁이 있었다.
"열다섯명이 다 여기서 먹어요?"

아줌마는 뭘 이렇게 모르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들 마다 먹는 시간이 틀리니까."
돌아 가며 먹는다기 보다는
거의 애들이 밥을 안 먹는거 같은 분위기였다.

방 하나에, 아침/저녁 식사 포함해서 한달에 40만원이라고 했다.

"네...다른데 둘러 보고 연락드릴께요."
하고는 신발을 구겨 신고 나왔다.

근처 하숙집들도 다 비슷비슷한거 같았다.
하숙을 치려고 급하게 쌓아올린,
"최대 인구 수용" 단 하나의 건축미학(?)으로 지어진 조잡한 빌딩들.

어떻게 학교 바로 앞에 이렇게 하숙집들이 많은데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을까?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산게 아닐까?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일주일 전, 동아리 동기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 수선아, 넌 아직 과천 사니? "
한 동기의 질문에 집이 너무 멀어서 독립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이 지방이라 1학년 때 부터 하숙,자취를 전전했던 동기 두명이
목소리를 높히며 말렸다.

" 얘가 정말 뭘 모르네. 집 떠나면 고생이야.
결혼을 해야지. 니 나이가 지금 몇살이냐? "

난 그냥 자주 듣는 말이라 씩 웃으며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반가운 애들을 만나서 그런지 소주가 달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틀 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 학교 앞 하숙집에서 신발을 구겨 신고 나오면서,
한귀로 흘렸던 동기들의 말이 귀에서 윙윙 거렸다.

내가 정말 뭘 모르는구나,
뭘 모르고 살았구나,
아니....알 수도 있었는데 귀 막고, 눈 가리고 편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마구 몰려 왔다.

3년 전인가?
도서관에서 공선옥의 <피어라 수선화>를 읽다가 덮어 버린 적이 있다.
도저히 불편해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비슷한 느낌이 더위와 뒤섞여 몸에 착착 달라 붙었다.

너무 늦게 철이 드는걸까?
아무 생각 없이,
통역이나 하면 되지...하고 찾아간 학교 앞 하숙집의 잔상을 쉽게 떨어낼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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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8-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의 친구는 이대 앞에서 하숙하는데 반찬없이 밥만 주고 45만원이래요. 게다가 밥도 하루에 한 번만 해서 애들이 다 밥을 락앤락같은데다가 쑤셔담아서 쟁겨두기때문에 학교 끝나고 오면 밥도 없다나 뭐라나. 아줌마한테 항의했더니 애들이 밥을 잘 안 먹어서 한 번만 하면 된다고 그러더래요. 다른 대학가들보다 신촌 쪽이 하숙이 비싼거 같더라구요.

kleinsusun 2006-08-17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하숙하는게 장난 아니군요. 싸지도 않은데 말이예요...
집이 멀다고 투덜투덜 했었는데, 제 방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2006-08-1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1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8-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하숙은 오래할게 못되는거 같아요. 전 해보진 않았지만. 독립을 못할거면 지금 있는 아늑하고 깔끔한 제 방이 좋아요. 어여 독립을 해야돼. 나가 살아야돼.

kleinsusun 2006-08-1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학교 다닐 때 집이 멀다고 툭하면 투덜투덜했어요. 하숙하는 애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늦게 가도 부모님한테 혼 안나니깐....제가 너무...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ㅠㅠ

바람돌이 2006-08-1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저런 하숙집 다 없어졌는줄 알았더니 아직도 있네요. 저 학교 다닐때는 하숙하는 애들은 그래도 지방 유지쯤 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고 대부분은 저런 방에서 자취를 했었지요. 그 자취방을 내 방처럼 드나들면서 얻어먹고 얻어 자고 하는 대신에 집에서 반찬이니 김치니 이런거 훔쳐다 날라주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근데 그 때는 딱히 누구도 그런 하꼬방 같은 곳에서 산다고 가난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힘들다거나 뭐 이런 생각 안했던 것 같아요. 서로가.... 뭐 제 주변에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

kleinsusun 2006-08-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요즘은 있는 집 애들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에 산데요.ㅠㅠ
후배의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원룸에 전세로 사는 애들이 많더라구요.
"최대 인원 수용"을 위해 조악하게 지어진 하숙집들을 보니 화가 났어요.
요즘엔 하숙집 아줌마의 정...이런게 없는 거 같아요. 하숙도 기업형. 다 빌딩이 하나씩이더라구요.

LAYLA 2006-08-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배한명이 요즘 하숙방이 너무 덥다고 중도와서 삽니다.
아침에 나와서 밤 10-11시에 돌아가요
심지어 집이 너무 덥다고 찜.질.방 가서 자더라구요
찜질방보다 더 더운 하숙방?ㅠㅠ

kleinsusun 2006-08-1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님, 찜질방 보다 더 덥다는 말...정말 뻥이 아니예요.
제가 간 방은 꼭대기라 그런지 정말 숨이 턱턱 막히게 더웠어요.ㅠㅠ
그나저나...방학이 다 끝나가네요. 즐거운 방학이었어요?^^

nada 2006-08-1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숙집도 하숙집이지만 그 친구 분이 멋지네요.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를 배우러 바다를 건너 오다니요! 근데 환경에 비해 가격이 세긴 세군요..ㅠ.ㅠ

kleinsusun 2006-08-1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결국 하숙 얻기를 포기하고 James는 "원룸텔"에 입주했어요.
3평 정도 되는 작은 방에 책상, 침대, 화장실 있는 그런....럭셔리 고시원 같은...
잘 적응할지 걱정이 되네요.

잉크냄새 2006-08-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그냥 자주 듣는 말이라 씩 웃으며 소주를 마셨다. --> 공감....
대학교때 친구들 하숙집이 생각나네요. 전 누나집에서 다녀서 하숙집에 대한 경험이 없지만요...

moonnight 2006-08-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저도 하숙집에 가 본 경험이 없네요. ^^; 옛날 과동기 중 타지방에서 온 애들은 자취를 많이 했던 거 같구요. 그애들 집에도 놀러가본 적 없는 거 보면 예전의 전 참말로 혼자 놀았던 거 같군요. (쓰고보니 뭐, 지금도 그렇군요. ;;;) 그나저나 그 정도의 환경에 한달에 40만원! 허걱. 정말 비싸요. -_-;;;;

kleinsusun 2006-08-1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공감하시는구요.^^
근데...잉크님 댓글을 보니 갑자기 시그마가 생각나요. 이번주 휴가 끝나면 또 독촉 받겠네요.ㅠㅠ 시그마가 무서버요!!!

달밤님, 네...그런 환경에 40만원은 정말 비싸요. 그나저나....전 언제 독립하죠? ㅎㅎ

2006-08-19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달 2006-08-2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집 떠나면 고생이예요. 고등학교 다닐 땐 빨리 독립하고팠는데, 막상 독립하니까 집이 무지무지 그립더라구요. 흑 ㅠ 이제 또 다시 학교로 가야되는데, 걱정이예요.

비로그인 2006-08-2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셜록 홈즈가 살던 베이커 가의 하숙집은, 정말 꿈의 공간이군요. 물론 환경과 시공간, 국가, 모든 것이 다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