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 동안 주말마다 글을 썼다.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공부 못하는 애들이 집에서는 공부가 안된다며 독서실에 가는 것처럼두번이나 호텔방을 잡고 글을 썼다. 밤새 글을 쓰고,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해 뜨는걸 봤을 때는 뿌듯하기 까지 했다. 일요일 오후에 혼자 호텔에서 나올 때는....'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습격 당했다. 그 때 마다 철저하게 무기력했다. 도대체 내가 뭘하고 있는거지?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 봤다.웃고 떠들며 손 잡고 걸어가는 활기찬 연인들. 외로움이란 놈한테 감전 당한 듯 크게 흔들리면, 며칠 동안 우울하곤 했다.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계속 쓰면 곧 한권의 책이 된다....는 생각에. 내겐 너무도...간절히...'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그렇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글쓰기에 올인했다. 주말이면 커피빈이나 스타벅스, 집 앞 던킨도너츠에 죽치고 앉아 웃고 떠드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주말' 속에서 혼자 글을 썼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은 노트북을 들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경쾌했고,그렇지 못한 날은 갑갑하기도 했다. 그리고.....지난주 금요일. 그 동안 써온 원고 30꼭지를 출판평론가인 P선배에게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내밀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한 꼭지, 두 꼭지 보여 주며 어떠냐고 물어본 적은 있지만 그 동안 쓴 원고 전체를 누군가에게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전문가에게. " 주제별로 묶었어요. 이동하시는 시간이나 짜투리 시간에 읽어봐 주세요. "만나자 마자 멋 부려 제본한 원고를 불쑥 내밀었다. 용감하게! 그리고는 신나게 웃고 떠들며 맥주를 마셨다. 시험 끝나고 술 마시는 대학생처럼 즐겁게.토요일이 가고, 일요일이 가고, 월요일이 가고..... 슬금슬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P선배의 침묵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바쁜가? 아님 원고가 너무 허접해서 뭐라 해줄 말이 없는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월요일부터 울산에서 6시그마 교육을 받으면서, 산포, 분산, 비정규분포.... 이런 뻣뻣하고 드라이한 단어들을 들으면서, 열심히 듣는 척 강사가 하는 말에 가끔 고개도 끄덕이고 낙서도 하면서,머리 속은 온갖 상상과 불안, 걱정, 후회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P선배의 평가가 어떤 건지, 그게 궁금하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시간이 갈수록 내 원고에 대한 '자기 검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내 트레이드 마크인 무식함과 무모함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도대체 네 글의 정체는 뭐야? 글들은 또 왜 그렇게 밋밋해? 너 같으면 돈 주고 그런 책을 사겠어? 어떻게 그런 허접한 원고를 읽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지?어떻게 충분한 자기검열도 없이, 남한테 원고를 보여 줄 생각을 했지? 얼굴이 하루에도, 아니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화끈거렸다. 술 먹고 크게 실수한 다음 날 같이 마셨던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부끄럽고 쩍 팔렸다. P선배에게 메일이 오지 않았나 강의 중간중간에 뻔질나게 메일을 확인하다가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P선배는 원고를 읽어보고 있다고, 해줄 얘기가 많다며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P선배는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지적할 부분은 이미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꺼예요." 그렇다. 정말 뼈 저리게 느끼고 있다. 누군가 내게 그 원고를 봐 달라고 했다면, 입 바른 말 자~알 하는 성격에 혹독하게 씹었을 꺼다. 좀 더 가혹한 자기검열의 시간을 갖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겠다.아니 무식하게 덤비며 쓰기 전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를 명확히 해야겠다. 6시그마의 첫 단계는 "Define"이다. 프로젝트의 목표와 범위를 설정하고, 기대효과를 구체화하는 단계다. Define 단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목표와 범위가 명확하지 않으면 측정도 분석도 할 수 없고, 당근 개선을 할 수 없다. 내 글쓰기도 Define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저 책을 쓰고 싶다는 의욕만 앞서서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썼다. 그러다 보니 갈팡질팡하는, 정체가 애매한, 두리뭉실한 글들을 대량 양산했다. 쌩뚱 맞게도, 이번 6시그마 교육의 깨달음은 내 글도 Define을 다시 해야 된다는 거다. p.s) 그러나 저러나....P선배에게는 정말 부끄럽고, 또 미안하다. 어떻게 그런 허접한 원고를 읽어 달라고 불쑥 내밀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식하고 뻔뻔하다. 어떻게 P선배를 다시 보나....ㅠ.ㅠ 사실 내 삶의 원동력, 파워 엔진은 무식함과 용기였다. 그래서 한참을 힘들어 하고도 무뇌아처럼 또 다시 연애를 하고, 속 쓰려서 하루 종일 골골 거리고도 저녁이 되면 또 다시 술을 마시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저질렀다. 요즘....좀 지친다. 내 스스로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안전 빵' 인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헬멧도 쓰고 무릎 보호대도 하고 안전하게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정말, 이 시점에서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데.....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