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님,  엊그제 밤에 찍은 사진입니다.
동생 부부가 많이 늦는다고 해서 조카를 주하 방에서 함께 재웠거든요.
잘 자나 싶어 들어가 봤더니 벽에 붙여놓은 야광별을 떼어서 뺨에 하나씩 붙이고 잠들었더군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찰칵!

그런데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건 아이들 자는 모습이 아닙니다.
침대 머리맡을 지키는 원숭이 인형 보이시죠?
입가의 빙글한 미소,  1천 년이라도 그 자세로 걸터앉아 아이들을 지켜봐줄 듯한 느긋한 자세.

아이들이 뺨에 붙인 야광별이 너무 귀여워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던 것인데
이상하게 사진을 저장하고 화면으로 인화하는 순간,  아이들보다 저 원숭이 인형의 표정과 자세에 
필이 꽂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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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른두 살 때인가,  아주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어 주말을 이용, 부산의 결혼식에 참석했어요.
내 친구는 어릴 때 살짝 앓은 소아마비로 오른쪽 팔과 다리가 조금 불편했지만 너무나 예쁘고 착하고
멋진 친구였어요. 이른바 집안도 아주아주 좋았고요.
함께 미팅을 하면 남자들이 그녀에게만 시선을 집중할 정도였죠.
그런데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성당에 봉사를 나갔다가 만난 중증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었어요.
신랑의 친구들은 대부분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성당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군요.
친구가 안되어 보여서가 아니라 부러워서요.
고졸에, 도장을 파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중증장애인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그녀의 그 확신과
단호한 선택이 너무 부러워서요.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은밀한 세계가 펼쳐져 있는 거고, 앞으로 또 둘은 그 세계를
함께 펼쳐가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제가 친구들의 결혼식장에서 부러워 해본 경우는 딱 두 번이네요.
말 나온 김에 나머지 하나도 이야기하죠, 뭐,  간단하게!

제가 부케를 처음으로 받은 친군데요,  사실 그녀는 한달 전에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할 뻔했습니다.
사립학교 교장인 아버지가 정년퇴임과 함께 공교롭게 실명 위기에 놓여 부랴부랴 서둘러서 선을 봤다지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결혼을 진행, 정말 결혼을 위한 결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전 그 불성실하고 유들유들한 남자가 사실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외삼촌의 꿈에 돌아가신 친구의 엄마가 나타났답니다.
이 결혼을 중지시키라고.
그리고 내일 어떤 곳에서 연락이 올 건데 그 남자를 만나게 하라고. 그가 내 친구의 짝이라고.

꿈의 내용대로 친구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잠시 따돌리고 어떤 남자를 만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이 사람이구나!'  하는 전율이 좌악!

그런 신비한 경험이 부러웠던 게 아니라 저는 결혼식날 신부가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는 동안
미용실 구석에 기대어 서서 김지하의 <오적>을 읽던 신랑이 너무 좋아 보여서 부러웠어요.

앞에서 소개한 친구는 지금  자기 동네에서 금은방을 하면서 살고 있고요,
뒤의 친구는 고등학교 교사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좋은 남편의 현실의 무능을 감싸안으며
사느라  허리가 휘어집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게 자신의 선택이고 삶인 걸요.

이 이벤트는 사실 무슨 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좀 까다로워서 참여를 안할까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축원을 한다 해도 잠시 듣기에 좋을 뿐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제가 늘 하는 말이 있는데요.
뭐 그렇게 어마무쌍한 모습으로 사랑이 다가오는 것 같진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현실적 필요와 결단이 바로 사랑으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내가 상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순간, 그 사랑은 끝납니다.
그리고 길고 지루한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지죠.
사랑이 없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제목처럼.
그냥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느 날 또 짠~~하고 사랑이 나타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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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5-10-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쁜 분이네요,,
정말 친구분의 용기에 박수를 ,,아마그것이 사랑이겠지요,
누군가의 강요라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정말 용기잇는 분에게 앞으로 쭉 아름다운 사랑으로 오래도록행복하시라고,,,,

mong 2005-10-1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하-너무 멋지신거 아닙니까?
흥미진진한 이야기 끝에 마지막 문단에서 감동이 좌악-
추천을 부르는 페이퍼 장인 로드무비님 만세~~

urblue 2005-10-19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친구분들 얘기만 여러번째인 듯한데, 님 얘기는 언제 들려주실라나.

로드무비 2005-10-1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전 뭐 딱히 들려줄 만한 꺼리가 없네요.
그리고 친구들 이야기 쓰려고 한 게 아닌데 저 사진 올리고 몇 마디 적다보니
절로 이런 페이퍼가 만들어져 있군요.ㅎㅎ


mong님, 제가 페이퍼를 좀 잘 쓰긴 하죠.=3=3=3

울보님, 다른 사람의 눈은 소용없어요.
진짜 사랑으로 들어가면...그죠?^^

blowup 2005-10-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라 오히려 감동받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저 담담한 서술로 결국 감동받게 하시는군요. 로드무비 님. 감동추천.

2005-10-19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5-10-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로드무비님 마지막 말에 동의해요. 정말 그렇겠지요? 전 같은 장애인과 결혼 못할 것 같은뎅...그렇다고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얼룩말 2005-10-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로그인 2005-10-1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그게 내 선택이고, 내 삶인 걸요! 친구분들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히피드림~ 2005-10-1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 결혼식에만 가면 신랑신부가 측은하고 안되 보이는 걸까요? 그냥 웨딩드레스입고 환하게 웃는 신부들 보면 속으로 저게 소복인줄도 모르고 좋아하긴... 이라고 씁쓸해 집니다.^^;;;

숨은아이 2005-10-19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평생의 벗을 얻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전 초등학교 입학하는 어린이들 보면 그렇게 안쓰러워집디다. ㅎㅎ

로드무비 2005-10-1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본인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든 아니든 다 떠나서
결혼식장에서 눈물이 나오려 할 때가 많아요.
소복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님의 생각과 비슷한 듯.^^

복돌이님, 넵. 두 쌍 다 그런대로 잘살아요.^^
님도 어떤 선택을 하시게 되는 날이 있겠죠.

얼룩말님, 읽어주셔서 감사!^^

스텔라님, 사랑이라도 해보세요. 결혼은 나중 문제고...^^

나무님, 담담한 서술이라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착한 척하는 페이퍼로 비칠까봐 거시기했거든요.^^

sudan 2005-10-1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결혼 얘기보다, 사진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네요. 야광별을 띠어다가 볼에 붙이면서 저 둘은 무슨 얘기를 소근소근 나눴을까 싶어서 말이에요.

kleinsusun 2005-10-1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먼저 좋은 글, 또 "언니 같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언니가 없는데.....정말 친언니가 "잘 들어!" 하면서 들려주는 말 같아요.^^

글쿠....제가 너무 "사랑을 주세요!" 투정 부린것 같아,
"사랑 사랑" 너무 난리를 친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사랑이 없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제목처럼.
그냥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느 날 또 짠~~하고 사랑이 나타나는 거지요."

그렇죠? 사랑 없이도 자~알 살 수 있어요. 그저 2% 부족할 뿐...ㅎㅎ
로드무비님의 충고가 플레져님의 "사랑에 무심해 지시길..."과 일맥상통한네요.
파니핑크에서 23번 난닝구가 짜~안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사랑을 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사랑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겠죠? 저처럼 난리 안쳐도...ㅎㅎ

로드무비님, 좋은 상담자가 되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저도...감동추천했습니당.^^

로드무비 2005-10-1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 충고 같은 거 잘 못하거든요.
그러다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횡설수설.
총명한 수선 님께서 알아서 들어주실 걸로 믿고 썼답니다.
뭐 사랑 때문에 난리 치는 걸로 보이진 않으니 안심하시고요.
난리 치셔도 괜찮죠, 뭐.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단님, 웃긴 건 다음 날 오ㅐ 뺨에 별을 붙였냐고 물었더니
천장에서 별이 떨어져 자는 동안 붙은 거래요.
너무 깜찍하지 않아요?ㅎㅎㅎ

야클 2005-10-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 같은 사랑이 종종 일어나는군요. 잘 읽고 갑니다. 추천도~~ ^^

urblue 2005-10-1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장에서 별이 떨어져 붙은 거라구요?
아유, 귀여븐 것. ^^

로드무비 2005-10-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수단님, 귀엽죠? 헤헤~

야클님, 님은 멋진 사랑 하세요.
추천 고마워유.^^

숨은아이님 쓰신 거 아까 못 봤습니다.
전 결혼식장, 입학식, 졸업식 등 모든 인간의 행사가 눈물겨워요.
이상하게 눈물이 질금질금.
출산 이후 걸린 병!^^;;

로드무비 2005-10-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일이 좋아님, 고맙습니다.^^

플레져 2005-10-1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5-10-19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오늘 제가 너무 까부는 것 같지 않아요?
추천수와 댓글에 약간 상기.^^

국경을넘어 2005-10-2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좋은데 어제 오늘 푸~욱 깔아져서 ... 그래도 꾸~욱

로드무비 2005-10-20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술 드셨나요? 폐인촌님.
오늘은 꽤 오래 서재에 계시네요.
점심 때 맛난 거 드시고 기운 회복하시길...^^

거친아이 2005-10-2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 만땅입니다^ㅡ^ 글 참 좋네요..로드무디님도 자주 뵜었죠. (저 혼자서..)어디 학원다니시나? 알라디너 분들..글을 너무 잘 쓰시니...소녀 키보드를 뚜드리는 손가락이 부끄럽사옵니다.^^

로드무비 2005-10-2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아이님, 한참만에 보네요.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이 아줌마도 부끄럽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