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 - 여성의 생물학과 건강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
그라지나 자시엔스카 지음, 김학영 옮김 / 글항아리사이언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피트니스 센터는 운동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수영장, 사우나, 라운지 등 여러 가지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런 곳에서 열심히 운동하면 몸이 더욱 건강해질 것만 같다. 우리나라에서 ‘피트니스(fitness)는 흔히 ‘체력’ 또는 ‘건강 상태’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피트니스는 원래 ‘적합성’, ‘적응도’를 뜻하는 단어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적합성과 적응도는 어떤 개체가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적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성질 또는 적응하는 능력을 뜻한다. 사실 진화론에서 ‘적응’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원문은 ‘adaptation’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적응해 진화된 모습으로 지구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 살아왔다.

 

그렇다면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진화해온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생물인가? 왠지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승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인간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이 진화상 가장 성공한 존재라는 당연한 믿음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아남은 인간은 성공의 축배를 들 자격이 없다.

 

진화는 늘 예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변하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다. 아직도 당신이 진화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진화’를 ‘진보’의 동의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진화가 모두 진보는 아니다. 다윈이 생각한 진화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다윈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하는 일관된 과정인 것처럼 설명했다. 이러한 진화의 의미에 대한 오해는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만든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가 퍼지면서 시작됐다. ‘적자생존’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사회학자가 제시한 진화론이 생물학자 다윈이 제시한 진화론(자연 선택과 성 선택)을 완전히 제쳐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적자생존을 뜻하는 원문에 ‘fittest’가 들어 있다. ‘적자(適者)’는 ‘적당한 사람’ 또는 ‘적합한 사람’을 뜻하지만, 종종 적자생존을 ‘약육강식’의 동의어로 보는 사람들은 ‘적자’를 ‘환경에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강력하고 우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믿음 탓에 대부분 사람은 환경 적응도가 높은 강력한 존재는 반드시 살아남으며 그렇지 않은 존재, 즉 환경 적응도가 떨어지는 존재는 퇴보하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고 오해한다. 적자생존 이론은 인간을 ‘진화에 성공한 고등 생물’로 등극시켜준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지금도 다윈주의자들은 ‘진화=진보’라는 잘못된 등식을 해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진화=건강’이라는 등식도 해제해야 한다. ‘진화=건강’ 등식을 믿는 사람은 현대인이 과거 선조들보다 몸이 더 튼튼하며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건강’과 진화적 ‘적응도(fitness)’는 동의어가 아니다.  (10쪽)

 

 

저자의 말이 맞다. 진화는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진화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겪어야 하는 경험이다.

 

《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은 여성의 몸과 생식(reproduction) 활동을 진화생물학 관점으로 설명한 책이다. 흔히 생식을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해서 자손을 낳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생식을 ‘번식’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너무 단순한 설명은 생식의 의미를 협소하게 보게 만든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여성의 생식은 임신과 출산까지 보는 것이 아니라 ‘출산한 아이를 돌보는 일’까지도 포함한다. 여성의 몸은 자손의 출산과 양육에 초점이 맞춰진 채 진화해왔다. 그러나 여성이 아이 한 명을 낳고 키우기 위해 할당할 수 있는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다. 여성은 생식과 생존,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진화한 여성의 몸은 건강 상태가 나빠지기 쉽다. 따라서 저자는 여성에게만 특정 질환(자궁암, 유방암, 산후우울증 등)이 일어나는 이유를 진화의 결과에서 찾는다. 과거의 여성은 한평생 적어도 평균 잡아 3회 이상 임신을 경험했다. 임신과 수유 중에는 배란 과정이 중단되고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이 나오지 않는다. 과거 여성보다 임신 횟수가 적은 현대 여성은 여성 호르몬에 더 많이 노출된다. 호르몬에 과도하게 노출된 여성의 생식기관 세포들은 변이를 일으키고 암세포로 변형될 수 있다.

 

여성의 몸과 생식 활동을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낡은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가 아니다. 이 글에 있는 “여성의 몸은 자손의 출산과 양육에 초점이 맞춰진 채 진화해왔다”라는 문장을 보면서 내가 ‘여성을 아이만 낳는 기계’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또 여성의 몸이 건강이 나빠지기 쉽다고 해서 ‘여성은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약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혹시나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진보’를 생각하지 말고, ‘진화’의 진짜 의미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진화’에 겹쳐진 ‘진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라는 말이다.

 

우리 몸은 현대인의 생활방식보다는 과거 원시인의 삶의 방식에 맞추어져 있다. 선사시대 이래 20세기 직전까지도 보통 사람들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 끼니 걱정하고 농사짓고 아이들 키우며 고되게 살아왔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인간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너무나 빠르게 변화시켰다. 그러나 우리 몸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진화의 과정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생활습관을 원시인의 생활방식에 근접하게 맞추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며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 몸은 늘 건강한 상태로 완벽하게 유지하면서 진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이 자명한 진리를 접한 사람들은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몸에 대한 진실이 오히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삶을 행복과 성공의 필요조건으로 삼는 건강 중심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살펴보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몸’은 없다. 완벽한 몸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개념에 불과하다. 현실의 몸은 변화하는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몸(precarious body)[주]이다.

 

 

 

[주] ‘위태로운 몸’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쓴 글의 제목 ‘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을 변용해서 만든 표현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7-23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24 06:01   좋아요 0 | URL
스마트폰을 자주 사용하게 되면 목, 허리에 변형이 생긴다고 해요. 몇 십년 후에는 거북목 아닌 사람 찾기가 힘들거예요.. ^^;;

2019-07-24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3년 동안 (대구) 침산동에서 자리를 지키던 책방 ‘서재를 탐하다’가 새로운 곳에 정착했습니다. 책방은 고성로(원대동)에 있는 달성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서재를 탐하다’를 입력하면 책방의 정확한 위치와 책방의 내부 사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사진으로만 봐서는 새 책방의 내부 크기가 예전보다 넓어 보여요(제 블로그에 올린 책방 사진은 네이버 지도에 등록된 사진입니다). 얼른 가보고 싶어요.

 

 

 

 

 

 

 

 

 

이번 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진행될 일흔 여섯 번째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모임 장소는 ‘서재를 탐하다’ 책방입니다. 이번 달에 읽을 책은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여성의 진화》(에이도스)입니다.

 

 

 

 

 

 

 

 

 

 

 

 

 

 

 

 

 

 

 

*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7월의 책] 웬다 트레바탄 《여성의 진화》 (에이도스, 2017)

 

 

 

《여성의 진화》는 여성이 평생 겪는 몸의 변화와 건강을 진화의학에서 나온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진화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재 여성들이 가장 많이 시달리는 각종 질병과 질환―유방암, 자궁암, 월경전증후군 등―이 일어난 원인을 ‘진화에 적응하지 못한 몸’에서 찾습니다. 여성의 몸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급격하게 변한 주변 환경과 생활방식에 몸이 적응하지 못합니다. 진화하는 몸과 주변 환경이 서로 맞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 바로 여성들이 자주 걸리는 질병인 거죠.

 

현재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풍족하게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든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상황과 같은 거죠. 생활수준이 향상될수록 여성의 몸은 생활환경에 맞추어 변합니다(진화합니다). 그러면서 현대 여성의 초경이 앞당겨지고, 월경 횟수가 많아지고, 완경(폐경)이 늦어집니다. 현대 여성의 몸에 있는 여성 호르몬 수치는 과거 여성들보다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여성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서 유방암, 자궁암, 난소암 발병률도 높아집니다. 현재 여성들은 과거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방암, 자궁암에 걸립니다.

 

 

문과에 익숙한 독자는 《여성의 진화》가 어려운 과학 책 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단순히 ‘어려운 과학 책’이라기보다는 ‘나를 관통하는 과학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책에는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최신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원인과 잘못 알려진 정보들까지도 알려줍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희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왜 그렇게 아파했는지 이제야 알았어요. 《여성의 진화》를 읽으면 내 주변에 있는 여성(어머니, 할머니, 아내, 딸)의 몸과 건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여성의 건강권(right of health)을 보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 시대의 화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번 달 독서 모임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바로 저거든요. 독서 모임 발제를 정할 겸 예전에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봤어요. 《여성의 진화》는 내용상 두 시간 안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독서 토론을 한 달 동안 진행해야 돼요. 따라서 《여성의 진화》를 함께 읽고 싶은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 읽으셔도 돼요. 각자 관심 있는 책의 내용만 골라서 읽으셔도 됩니다. 이 책에서 꼭 정독해야 할 글은 ‘들어가는 글’과 11장입니다.

 

 

 

발제는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발제에 대한 의견을 내주실 분은 발제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는 책의 쪽수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한 발제를 중심으로 토론하지 않아도 되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1. 우리 사회에 있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기준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긍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을 줄까요?

(발제와 관련된 내용: 27쪽, 101쪽)

 

 

2. 월경과 완경은 왜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생리현상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발제와 관련된 내용: 294~295쪽)

 

 

3. 너무나도 친숙한 단어인 ‘건강’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건강하게 살면 정말 성공한 인생이고, 건강하지 못하면(만성 질환에 안고 가야할 사람, 장애인) 실패한 인생일까요? 시간이 나면 ‘여성의 건강권’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07-2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으로 좋은 독서 모임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구라서 갈 수 없지만...
응원합니다!!!

cyrus 2019-07-22 07: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북튜브(Booktube)는 ‘책’과 ‘유튜브’의 합성어로 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을 뜻한다. 이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을 ‘북튜버’라고 한다. 현재 가장 유명한 북튜브는 ‘겨울서점’이다. 겨울서점의 운영자는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펴낸 작가인 김겨울 씨다. 사람들은 이제 ‘싱어송라이터 겸 북튜버 김겨울’보다는 ‘작가 겸 북튜버 김겨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하다.

 

작년에 나온 김겨울 작가의 첫 번째 책 《독서의 기쁨》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 좀 늦은 감은 있다. 나는 다른 독자들에 비해 신간도서에 대한 반응이 둔한 편이다. 어떤 독자들은 신간 도서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 책에 관심 있다는 식으로 블로그에 소개한다. 그런데 새 책에 관심이 있다면서 정작 그 책에 관심 쏟은 것에 대한 기록(서평, 리뷰)을 남기는 독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들은 새 책이 나오는 데만 너무 관심을 보여서 책 읽을 시간이라든가 리뷰를 쓸 시간이 없던 것일까? 새 책을 소개하는 일에 몰두한 독자들의 글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 글도 장점이 있다. 신작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블로거는 신작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정보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책 소개’만 가지고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만한 건지 판별하기 어렵다. 어떤 블로거는 온라인 서점이나 출판사의 홍보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신간도서를 소개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책을 직접 살펴보면서 소개한 거 맞아요? 그렇게 책을 편하게 소개하니까 좋으세요?” 최소한 완독은 아니더라도 책을 직접 만져보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난 뒤에 독자들에게 권하고 것이야말로 책을 올바르게 소개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신간 도서 소개를 열심히 하는 블로거를 부지런하고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직접 보지도 않고, 출판사가 만든 책 홍보 문구를 베껴서 쓰는 것은 근면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사람은 부지런한 게 아니라 게으른 것이다. 그들이 정말 새 책에 관심이 많다면 당장 서점에 가서 직접 살펴보거나 책을 주문해서 훑어보는 일 정도는 해야 한다. 발품 드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신간 도서를 무조건 ‘좋은 책’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 아마도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글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 뿌듯해할 것이다. 과연 이런 사람들은 정말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책을 매개로 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일까?

 

김겨울 씨의 책을 소개해야 하는데, 갑자기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블로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앞서 말했던 것은 《독서의 기쁨》 리뷰와 전혀 무관한 입장이 아니다. 홍보, 칭찬 일색의 책 소개를 하는 블로거들이 많아지면 겨울책방과 같은 북튜브가 더 큰 인기를 얻게 될 것이다. 겨울책방에 향한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겨울책방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의 방송이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겨울책방 구독자들도 그렇게 느꼈을 거로 생각한다. 그녀의 방송을 보면 자신이 직접 구입한 책이라든가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을 만져보고, 훑어보면서 책을 소개한다. 김겨울 씨는 ‘책에 대한 애정’, ‘책을 읽는 노력’, ‘신뢰감’, 이 삼박자가 고루 갖춘 매력을 지닌 북튜버다. 이러한 매력은 그녀의 방송을 본 구독자와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한 초보 독자들의 지지를 얻게 만드는 비결이다.

 

《독서의 기쁨》을 읽으면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특히 책의 1부의 첫 번째 주제인 ‘물성(物性)은 종이책에 익숙한 독자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이책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한 번 읽고 만 책들을 다시 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만약 나와 같은 독자가 있다면, 과거에 만난 책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어느덧 그 책을 펼쳐서 읽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서의 기쁨》의 부제가 ‘책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7-17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7 17:25   좋아요 1 | URL
시청자들은 언박싱을 보면서 일종의 간접 경험을 하게 됩니다. 택배 상자를 여는 순간에 설레는 마음이 들거든거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 하고요.. ㅎㅎㅎ 언박싱을 보는 건 재미있긴 한데 이제는 식상한 소재가 되어버렸죠... ^^;;

블랙겟타 2019-07-1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이 몇년 전에 올리신 북튜버를 소개한 페이퍼를 보고 ‘겨울서점‘이라는 채널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cyrus님 덕분에 알게된.. ㅋㅋㅋ

그후로 구독도 하고 꾸준히 보다가 작년에는 책이 나왔다고 해서 책을 샀는데 1부의 주제가 물성이었나요? 웬걸? 저는 이 책을 E북으로 사버렸...;;;; (안 읽은거 티 나네요.ㅜㅜ)
다시 cyrus님 글을 통해 겨울님의 책을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하하하..

cyrus 2019-07-17 17:26   좋아요 1 | URL
책의 1부 제목이 ‘물성과 정신성’입니다. <독서의 기쁨>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 독서 슬럼프가 올 때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9-07-17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아마 북플과 인스타의 차이가
아닐까 싶네요.

인스타로는 이 책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구분이 가지 않더라구요.

읽지 않은 책을 리뷰할 수는 없을 테
니까요. 그래서 저는 디테일을 중요
하게 생각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 정
도의 디테일은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마 패스할 것 같네요 :>

cyrus 2019-07-17 17:3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이 미흡한 (작가나 역자의) 주석을 발견하게 되면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런 것도 리뷰에 써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

stella.K 2019-07-1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겨울이 싱어송라이터였구나.
이 사람은 다른 거 안하고 책 읽고 방송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부럽더군.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본인도 쉽지는 않지만.
너도 북트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콘텐츠가 확실하잖아.ㅎ

cyrus 2019-07-17 17:36   좋아요 0 | URL
대학생 시절에 자비로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대요. 방송에 나오는 김겨울 씨의 모습을 보면 책을 사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을 막 사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나름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책을 살 것 같아요.

제가 말을 능숙하게 하는 편이 아니라서 방송 체질이 아니에요.. ㅎㅎㅎ 저는 글 쓰는 일에 만족하려고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9-07-1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도 북튜버 함 도전해 보세요 ~

cyrus 2019-07-17 17:38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글 쓰는 게 편해요. 독서모임에 참석하면서 느낀 건데 글 쓰는 일에 익숙해서 그런지 내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을 말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어요.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게 편해요. ^^

blanca 2019-07-1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겨울 유튜브 꼭 챙겨봐요. 사실 이런 유튜버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좀 복잡스러운 책장도 그냥 자연스럽게 공개하는 모습도 좋아요. 외국에는 자기가 읽은 책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유튜버들이 많더라고요.

cyrus 2019-07-18 11:36   좋아요 0 | URL
북튜버하고 하면 기본적으로 자신이 읽을 책을 소개하는 일인데, 우리나라 북튜버 중 일부는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을 소개하기도 해요. 물론 출판사가 홍보 목적으로 북튜버에게 무료로 책을 제공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북튜버가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문제가 되죠.

transient-guest 2019-07-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소리부터 차분하고 뭔가 팔려는 듯 시끌법적하지 않아서 듣기 좋더라구요 예전에 이분 어학연수 다녀간 곳이 UC Davis로 추정되는데 제가 아는 곳이고 같은 UC출신이어서 그런지 괜히 반갑더라구요 ㅎ

cyrus 2019-07-18 11:38   좋아요 0 | URL
네, 겨울 씨의 목소리가 좋아요. 그 분의 독서 취향이 저랑 거의 비슷해서 그런지 방송이 친숙하게 느껴져요. ^^

여름숲 2019-07-1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겨울서점 즐겨들어요. 다방면에 걸친 좀 무거운 책 리뷰라서 좋은데 특히 철학책을 다루어주어서 더욱 좋아요.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고...무튼 묵직한 책들 리뷰라서 더 좋다는^^

cyrus 2019-07-18 11:40   좋아요 0 | URL
겨울서점을 구독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겨울 씨의 독서 취향 때문이에요. 저랑 비슷하거든요. ^^

페크pek0501 2019-07-21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체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리뷰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1) 내가 좋아하는 책일 것.
2) 내용과 관련하여 내가 할 말이 많을 책일 것.


cyrus 2019-07-22 07: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두 가지 조건에 적합한 책의 리뷰를 쓰면 술술 써나갈 수 있어요. 1번 조건에 부합되지 않은 책의 리뷰를 쓰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
 

 

 

예전부터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작가의 작품, 작가와 관련된 각종 문헌 등을 한 번에 모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일이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이십 년 전에 이미 소수의 장르문학 마니아들은 절판된 번역본들을 찾아내 그것에 대한 기록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남겼다. 하지만 이 귀중한 기록의 일부는 삭제되거나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예전 기록의 정보가 갱신되는 피드백(feedback)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언젠가는 주목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기에 열심히 아카이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새로 지은 아카이브의 이름인 ‘Good Bad Literature Archive(줄여서 GBLA)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유심히 본 독자들(생소한 사진작가에 대한 글을 진지하게 읽은 분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카엥의 삼촌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엥의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슈보브 가는 작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슈보브(George Schwob, 1822~1892)는 일간지를 직접 만들어 운영한 작가였고, 이 일을 물려받은 사람이 카엥의 아버지 모리스 슈보브(Maurice Schwob, 1859~1928)다.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모리스의 동생이자 카엥의 삼촌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마르셀 슈보브를 소개한 항목이 있다.

 

작가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외국 작가 이름을 표기하는 것이 제일 난감하다. 이 글에서는 ‘마르셀 슈보브’라고 썼지만, 이름의 표기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르셀 슈웝’, ‘마르셀 슈워브’라고 쓰기도 한다.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 2001)

 

 

 

 

마르셀 슈보브에 대한 설명이 있는 유일한 책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이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장르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 책만 한 요긴한 자료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슈보브는 ‘복잡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학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정도로 고전 문학 작품에 해박했다.

 

 

 

 

 

 

 

 

 

 

 

 

 

 

 

 

 

 

*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민음사, 2016)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

* [품절]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기린원, 2008)

 

 

 

슈보브는 거의 잊혀 있던 중세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6년에 슈보브는 자신과 친한 문인들과 함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무대 위로 올렸다. 189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살로메》는 성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비록 원작을 수정한 것이지만, 슈보브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공연이 열릴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살로메》는 꽤 오랫동안 공연 금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 김경란 《프랑스 상징주의》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 [품절]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

 

 

 

 

슈보브의 소설은 ‘상징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상징주의 문학은 이성을 동원한 논리적인 분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논리와 이성에 반발한 상징주의 작가들은 주관적인 정서를 중시했으며 현실 도피에 가까운 꿈과 이상, 환상과 이지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재미있게도 슈보브는 프랑스어와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환상과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11살에 보들레르(Baudelaire)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을 처음 읽고 난 이후부터 환상 문학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포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포의 글 속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포의 시를 상징주의 시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 [절판, No Image] 정태원 편역 《공포특급 5: 세계편》 (한뜻, 1996)

 

 

 

 

슈보브가 쓴 작품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총 세 편이다. 작품을 소개하면서 평하는 방식은 지난주에 쓴 글 「잊힌 작가: M. P. 실」에 썼던 것과 동일하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1. 미라 만드는 여인

Les embaumeuses (1891)

 

 

R

 

 

 

 

 

 

아프리카 사막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형제는 리비아의 사막을 건너다가 자매로 보이는 두 여인을 만난다. 두 여인의 환대에 받은 형제는 그녀들이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형은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연결된 구멍을 발견한다. 그는 구멍으로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여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끔찍한 장면을 본 형은 날이 밝으면 이 집을 떠나기로 한다. 형이 목격한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건지 동생은 두 여인 중 한 명과 동침한다. 다음 날이 되자 동생은 나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형은 동생의 죽음에 새벽 2시까지 계속 울다가 혼절한다. 나중에 깨어난 형은 동생의 시신과 두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 형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발견한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는 두 여인의 손에 의해 미라로 만들어지는 죽은 동생을 목격한다. 공포에 질린 형은 동생을 죽인 여인들을 저주하면서 도망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김중현 《프랑스 문학과 오리엔탈리즘》 (아모르문디, 2012)

 

 

 

이 단편소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서 동양 여성은 ‘타자’이며 멸시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판타지가 덧입혀진다. 서구의 상징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서구 작가들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미지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로 그렸다. 그들은 『미라 만드는 여인』에 나오는 형제처럼 동양과 아프리카를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라 만드는 여인』처럼,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서사 있다. 비(非)서구에 속한 나라를 ‘문명 이전의 세계(『미라 만드는 여인』에 묘사된 리비아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라 제조법이 성행하며, 마술을 부리는 마녀들이 존재하는 나라)’로 설정함으로써 서구를 유일한 문명으로 만드는 ‘서구 우월적인 사고’를 전제한 서사이다.

 

 

 

 

 

2. 열차

Le train 081 (1891)

 

 

HQR

 

 

공포특급 5: 세계편》에 수록

 

 

 

장르문학에서 작가들이 많이 쓰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는 ‘분신(doppelgänger)이다. 『열차』는 공포 문학 또는 환상 문학에서 자주 묘사되는 ‘불길한 제2의 자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원제는 ‘081호 기차’다. 소설의 화자는 파리, 리용,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180호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이다. 화자의 형은 배에서 일하는 운송선의 기관부이다. 마르세유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화자는 죽을 각오로 기차를 운행한다. 자신이 운행하는 기차에 탄 손님 중에 콜레라 보균자가 있을 것이고,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기차가 파리에 도착하면 콜레라가 더 확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평소대로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운행하는데, 맞은편 철로에 ‘081호 기차’가 180호 기차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다. 화자는 081호 기차에 타고 있는 기관사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081호 기차 객실 안에 있는 형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에 빠진 화자는 180호 기차 객실로 달려간다. 그곳에 콜레라에 걸려 죽어 있는 형을 발견한다.

 

081호 기차는 180호 기차의 분신이다.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분신을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 『열차』에서는 분신이 예고한 대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은 분신을 직접 목격한 화자가 아니라 동생이 운행하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던 형이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분신 서사를 살짝 비튼 전개가 좋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옥에 티’라면 죽은 형의 형수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내 형수는 인도차이나 여인이다. 그녀는 아몬드 씨처럼 위로 올라간 눈과 황색 피부의 소유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왠지 묘한 느낌을 준다.

 

(정태원 옮김, 192쪽)

 

 

인도차이나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모두 이르는 말이다. 화자는 뜬금없이 형수의 외모를 언급한다. 여기서도 ‘동양 여성’의 매력을 상상하게 만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3. 잔인한 블랑슈

Blanche la sanglante (1893)

 

R

 

 

 

 

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기욤 드 프라비는 폭군이다. 그는 귀족의 열 살짜리 딸 블랑슈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맞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욤 드 프라이가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소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블랑슈다. 이 소설에서 블랑슈는 ‘순진무구한 악녀’로 묘사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 살짜리 소녀가 왜 잔인한 악녀가 되었는지 소설을 직접 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소설을 본 독자로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데 진짜 재미가 없다! 이 지루한 소설이 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 마르셀 슈보브 《The King in the Golden Mask》 (Wakefield Press, 2017)

 

 

 

마르셀 슈보브의 소설이 몇 편 더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은 있다. 2016년에 대산문화재단이 지정한 ‘2016년 외국문학 번역지원’ 리스트에 슈보브의 단편집 《황금 가면을 쓴 왕(Le Roi au masque d’or)(1893)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주] 『미라 만드는 여인』이 수록된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단편집의 번역이 완료되면, 문학과 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나온다.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나? 나온다고 해도 잘 팔리지 않겠지만, 이왕이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번역본이 영영 나오지 않게 되면 대산문화재단이 준 지원금을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다. 번역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출간일이 늦어도 좋으니 번역지원금을 헛되게 쓰지 않도록 슈보브의 단편집을 번역해주길 바란다.

 

 

 

 

[주] 울리츠카야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 등 번역지원」 (연합뉴스, 2016년 12월 12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7-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사진 공부를 해서 여러 사진 작가들
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역시나 세상은
넓더라는.

다시 한 번 싸이러스 브로의 뛰어난 정보력
에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대산문화 재단 번역 지원 프로그램에까지
마수를 ㅋㅋㅋ

cyrus 2019-07-17 11:36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와요. 작가의 삶을 설명한 글은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조했어요. 영어 독해 능력이 딸려서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즉,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stella.K 2019-07-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인으로 일간지를 발행하디니 대단하다.
내용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울나라는 품절 절판된 책들이 넘 많아.
나도 궁금하긴 하다.

cyrus 2019-07-17 11:40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 중에 출판연도가 오래된 것은 헌책방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없는 희귀 템이에요. 그런 책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도서관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는데요, 종종 관리가 안 되어 있으면 책 상태가 좋지 않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 syo님이 도서관 서고에 있는 오래된 책을 빌리려고 했는데, 사서가 그 책을 못 찾았다고 하네요. 검색하면 서고에 그 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정작 사서가 확인해 보니 책이 없었던 거죠. ^^;;
 
BL진화론 -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미조구치 아키코 지음, 나카무라 아스미코 그림, 김효진 옮김 / 길찾기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달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이 요즘 관심 있는 책이라면서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제목과 앞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책 제목은 ‘BL 진화론’이다.

 

 

 

 

 

 

참고로 앞표지 그림은 지금도 연재 중인 BL 만화 《동급생》의 작가 나카루마 야스히코(中村 明日美子)가 그렸다.

 

BL은 ‘소년들의 사랑(Boy’s Love)의 약칭이다. 보이즈 러브는 남성과 남성 간의 연애를 소재로 다루는 장르이다. 기본적으로는 여성을 위한 장르이지만, 일부 남성들도 즐긴다. ‘BL’이라는 명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한때 남성 커플의 섹스 묘사가 많이 나오는 보이즈 러브를 ‘야오이(やおい)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BL 진화론》의 부제다. 이 책을 쓴 저자 미조구치 아키코(溝口 彰子)레즈비언(lesbian)이다. 그녀는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공부하던 중 레즈비언 정체성의 뿌리가 보이즈 러브의 조상인 ‘미소년 만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후로 그녀는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이즈 러브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보이즈 러브 애호가인 저자는 ‘미소년 만화’가 유행하던 1961년을 일본 보이즈 러브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저자는 미소년 만화에 나오는 남성 인물들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고 술회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상업 출판사들은 보이즈 러브 출판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이전까지 나온 보이즈 러브 텍스트들을 분석하여, 그 텍스트에 드러난 네 가지의 정형화된 특징을 발견한다.

 

 

1. 동성애를 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자신을 ‘논케(ノンケ: 이성애자, 헤테로)’라고 주장(생각)한다.

 

2. 보이즈 러브 작품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은 고정화된 남녀의 젠더 역할로 살아가고, 각각 ‘남성’, ‘여성’으로 행동하면서 섹스를 한다.

 

3. 보이즈 러브 작품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은 난교를 선호한다.

 

4. 보이즈 러브 작품에 동성 강간 묘사가 나온다.

 

 

저자는 이 네 가지 특징 모두 ‘판타지 포르노’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판타지 포르노가 반영된 클리셰로 가득한 보이즈 러브는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호모포비아(homophobia)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 일본의 일부 게이들은 보이즈 러브를 ‘실제 게이의 삶을 왜곡하는 게이 차별적인 장르’라고 비판하면서 등을 돌렸다. 1992년에 ‘야오이 논쟁’이 일어나면서 보이즈 러브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논쟁에 야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야오이’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이즈 러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일본 사회 내에서 호모포비아, 이성애 규범,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보이즈 러브도 그런 분위기를 많이 반영하여 나오게 된다. 저자는 2000년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보이즈 러브 출판 시장의 변화를 일본 사회가 ‘호모포비아, 이성애 규범, 여성 혐오를 극복’하여 ‘다양한 성 정체성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호로 본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2000년대에 나온 보이즈 러브가 실제 게이들의 삶을 최대한 반영한 서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게이들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호모포비아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이즈 러브가 계속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속에 이성애 중심주의와 여성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이즈 러브를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으로 분석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필자는 보이즈 러브를 안 봐서 저자의 입장에 대한 내 나름의 의견을 어떻게 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이 책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을 보류하기로 한다. 저자가 보이즈 러브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들은 내겐 너무 어렵고, 혼자 공부하기에는 벅차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멤버가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알겠다. 페미니스트들은 《BL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토론하기에 딱 좋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내년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다 같이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추천해볼까 생각 중이다.

 

 

 

 

[주] 원문은 “비혼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로, 우에노 지즈코와 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집인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동녘)에 나오는 첫 문장(미나시타 기류가 한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9-07-1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cyrus님 덕분에 BL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ㅋ

cyrus 2019-07-15 16:37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서는 BL보다 야오이를 더 많이 쓰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는 야요이를 고2 때 처음 알았어요. 같은 반에 야오이를 즐겨 보는 여사친들이 있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