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작가의 작품, 작가와 관련된 각종 문헌 등을 한 번에 모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일이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이십 년 전에 이미 소수의 장르문학 마니아들은 절판된 번역본들을 찾아내 그것에 대한 기록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남겼다. 하지만 이 귀중한 기록의 일부는 삭제되거나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예전 기록의 정보가 갱신되는 피드백(feedback)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언젠가는 주목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기에 열심히 아카이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새로 지은 아카이브의 이름인 ‘Good Bad Literature Archive(줄여서 GBLA)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유심히 본 독자들(생소한 사진작가에 대한 글을 진지하게 읽은 분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카엥의 삼촌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엥의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슈보브 가는 작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슈보브(George Schwob, 1822~1892)는 일간지를 직접 만들어 운영한 작가였고, 이 일을 물려받은 사람이 카엥의 아버지 모리스 슈보브(Maurice Schwob, 1859~1928)다.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모리스의 동생이자 카엥의 삼촌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마르셀 슈보브를 소개한 항목이 있다.

 

작가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외국 작가 이름을 표기하는 것이 제일 난감하다. 이 글에서는 ‘마르셀 슈보브’라고 썼지만, 이름의 표기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르셀 슈웝’, ‘마르셀 슈워브’라고 쓰기도 한다.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 2001)

 

 

 

 

마르셀 슈보브에 대한 설명이 있는 유일한 책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이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장르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 책만 한 요긴한 자료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슈보브는 ‘복잡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학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정도로 고전 문학 작품에 해박했다.

 

 

 

 

 

 

 

 

 

 

 

 

 

 

 

 

 

 

*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민음사, 2016)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

* [품절]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기린원, 2008)

 

 

 

슈보브는 거의 잊혀 있던 중세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6년에 슈보브는 자신과 친한 문인들과 함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무대 위로 올렸다. 189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살로메》는 성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비록 원작을 수정한 것이지만, 슈보브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공연이 열릴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살로메》는 꽤 오랫동안 공연 금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 김경란 《프랑스 상징주의》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 [품절]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

 

 

 

 

슈보브의 소설은 ‘상징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상징주의 문학은 이성을 동원한 논리적인 분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논리와 이성에 반발한 상징주의 작가들은 주관적인 정서를 중시했으며 현실 도피에 가까운 꿈과 이상, 환상과 이지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재미있게도 슈보브는 프랑스어와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환상과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11살에 보들레르(Baudelaire)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을 처음 읽고 난 이후부터 환상 문학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포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포의 글 속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포의 시를 상징주의 시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 [절판, No Image] 정태원 편역 《공포특급 5: 세계편》 (한뜻, 1996)

 

 

 

 

슈보브가 쓴 작품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총 세 편이다. 작품을 소개하면서 평하는 방식은 지난주에 쓴 글 「잊힌 작가: M. P. 실」에 썼던 것과 동일하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1. 미라 만드는 여인

Les embaumeuses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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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사막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형제는 리비아의 사막을 건너다가 자매로 보이는 두 여인을 만난다. 두 여인의 환대에 받은 형제는 그녀들이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형은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연결된 구멍을 발견한다. 그는 구멍으로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여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끔찍한 장면을 본 형은 날이 밝으면 이 집을 떠나기로 한다. 형이 목격한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건지 동생은 두 여인 중 한 명과 동침한다. 다음 날이 되자 동생은 나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형은 동생의 죽음에 새벽 2시까지 계속 울다가 혼절한다. 나중에 깨어난 형은 동생의 시신과 두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 형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발견한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는 두 여인의 손에 의해 미라로 만들어지는 죽은 동생을 목격한다. 공포에 질린 형은 동생을 죽인 여인들을 저주하면서 도망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김중현 《프랑스 문학과 오리엔탈리즘》 (아모르문디, 2012)

 

 

 

이 단편소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서 동양 여성은 ‘타자’이며 멸시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판타지가 덧입혀진다. 서구의 상징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서구 작가들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미지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로 그렸다. 그들은 『미라 만드는 여인』에 나오는 형제처럼 동양과 아프리카를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라 만드는 여인』처럼,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서사 있다. 비(非)서구에 속한 나라를 ‘문명 이전의 세계(『미라 만드는 여인』에 묘사된 리비아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라 제조법이 성행하며, 마술을 부리는 마녀들이 존재하는 나라)’로 설정함으로써 서구를 유일한 문명으로 만드는 ‘서구 우월적인 사고’를 전제한 서사이다.

 

 

 

 

 

2. 열차

Le train 081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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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특급 5: 세계편》에 수록

 

 

 

장르문학에서 작가들이 많이 쓰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는 ‘분신(doppelgänger)이다. 『열차』는 공포 문학 또는 환상 문학에서 자주 묘사되는 ‘불길한 제2의 자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원제는 ‘081호 기차’다. 소설의 화자는 파리, 리용,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180호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이다. 화자의 형은 배에서 일하는 운송선의 기관부이다. 마르세유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화자는 죽을 각오로 기차를 운행한다. 자신이 운행하는 기차에 탄 손님 중에 콜레라 보균자가 있을 것이고,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기차가 파리에 도착하면 콜레라가 더 확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평소대로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운행하는데, 맞은편 철로에 ‘081호 기차’가 180호 기차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다. 화자는 081호 기차에 타고 있는 기관사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081호 기차 객실 안에 있는 형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에 빠진 화자는 180호 기차 객실로 달려간다. 그곳에 콜레라에 걸려 죽어 있는 형을 발견한다.

 

081호 기차는 180호 기차의 분신이다.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분신을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 『열차』에서는 분신이 예고한 대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은 분신을 직접 목격한 화자가 아니라 동생이 운행하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던 형이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분신 서사를 살짝 비튼 전개가 좋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옥에 티’라면 죽은 형의 형수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내 형수는 인도차이나 여인이다. 그녀는 아몬드 씨처럼 위로 올라간 눈과 황색 피부의 소유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왠지 묘한 느낌을 준다.

 

(정태원 옮김, 192쪽)

 

 

인도차이나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모두 이르는 말이다. 화자는 뜬금없이 형수의 외모를 언급한다. 여기서도 ‘동양 여성’의 매력을 상상하게 만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3. 잔인한 블랑슈

Blanche la sanglante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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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기욤 드 프라비는 폭군이다. 그는 귀족의 열 살짜리 딸 블랑슈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맞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욤 드 프라이가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소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블랑슈다. 이 소설에서 블랑슈는 ‘순진무구한 악녀’로 묘사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 살짜리 소녀가 왜 잔인한 악녀가 되었는지 소설을 직접 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소설을 본 독자로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데 진짜 재미가 없다! 이 지루한 소설이 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 마르셀 슈보브 《The King in the Golden Mask》 (Wakefield Press, 2017)

 

 

 

마르셀 슈보브의 소설이 몇 편 더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은 있다. 2016년에 대산문화재단이 지정한 ‘2016년 외국문학 번역지원’ 리스트에 슈보브의 단편집 《황금 가면을 쓴 왕(Le Roi au masque d’or)(1893)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주] 『미라 만드는 여인』이 수록된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단편집의 번역이 완료되면, 문학과 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나온다.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나? 나온다고 해도 잘 팔리지 않겠지만, 이왕이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번역본이 영영 나오지 않게 되면 대산문화재단이 준 지원금을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다. 번역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출간일이 늦어도 좋으니 번역지원금을 헛되게 쓰지 않도록 슈보브의 단편집을 번역해주길 바란다.

 

 

 

 

[주] 울리츠카야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 등 번역지원」 (연합뉴스, 201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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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사진 공부를 해서 여러 사진 작가들
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역시나 세상은
넓더라는.

다시 한 번 싸이러스 브로의 뛰어난 정보력
에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대산문화 재단 번역 지원 프로그램에까지
마수를 ㅋㅋㅋ

cyrus 2019-07-17 11:36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와요. 작가의 삶을 설명한 글은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조했어요. 영어 독해 능력이 딸려서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즉,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stella.K 2019-07-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인으로 일간지를 발행하디니 대단하다.
내용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울나라는 품절 절판된 책들이 넘 많아.
나도 궁금하긴 하다.

cyrus 2019-07-17 11:40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 중에 출판연도가 오래된 것은 헌책방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없는 희귀 템이에요. 그런 책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도서관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는데요, 종종 관리가 안 되어 있으면 책 상태가 좋지 않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 syo님이 도서관 서고에 있는 오래된 책을 빌리려고 했는데, 사서가 그 책을 못 찾았다고 하네요. 검색하면 서고에 그 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정작 사서가 확인해 보니 책이 없었던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