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미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도구들
이소영 지음 / 모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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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 탄탄한 화가라면 재료와 도구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화가들은 당대 최신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앞선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다. 미술사의 여러 거장은 그럴듯한 그리기 방식만을 만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직접 선정하면서 이용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다.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가》서양 미술사를 빛낸 진정한 조연들에 대한 책이다. 화가가 주연이라면 화가들이 사용한 재료와 도구가 조연이다. 대부분의 미술사는 주연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화가들이 즐겨 썼던 미술 재료와 도구를 통해 미술의 흐름을 읽어나가도록 한다. 화가들은 특별한 재료와 도구를 가진 것이 아니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인간은 불을 도구로 사용하여 다른 동물들과는 차별된 지점을 갖게 되고 인류로서 살아가게 된다. 인류학자들은 불을 사용하여 요리하며, 인류가 크게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불의 이용은 인류의 먹을거리 행태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뿐만 아니라 불은 동굴에서 사는 인간에게 ‘그림 그리는 방식’을 안겨주었다.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미술 도구는 ‘불’이었다. 구석기 시대 인간들은 불빛을 조명 삼아 동굴 벽화를 그렸다. 화려한 유채색은 아니지만, 동굴 벽화에서 발견되는 붉은색과 갈색도 그림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채색 안료는 붉은색 황토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인류 최초의 그림 쇼베(Chauvet) 동굴 벽화를 비롯한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 등 고대 구석기 시대 벽화는 대부분 곱게 간 황토로 만든 안료로 그려졌다.

 

 

 

 

 

 

유화가 나오기 전에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물감은 템페라(tempera)였다. 안료에 달걀노른자 등을 섞어서 만드는 템페라는 중세 이후에 유행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최후의 만찬』은 템페라로 제작된 작품이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빨리 마르는 것이 장점이지만, 이 때문에 색이 매우 불투명하고 강력해 계속 그림을 그려도 섞이지 않는다. 달걀은 템페라 물감의 중요한 재료였다. 책의 저자는 템페라를 ‘부엌에서 태어난 물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역사적인 물감을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화가가 아니라 ‘부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템페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여성들은 날마다 부엌에 가서 달걀노른자와 안료를 섞는 지루한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화가들은 템페라 그림의 장단점을 보완한 이후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제작한다. 이로써 목제 패널화, 판화, 캔버스에 그린 유화 등이 출현하게 된다. 기하학적 원근법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회화는 사진과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광학 장치, 즉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 기초하고 있다. 렌즈와 거울을 사용하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무 상자 형태로 발전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18세기에 이르러 화가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화가들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쓴다. 물감의 쓰임새도 다양하다. 손바닥이나 발바닥, 물건 등에 묻혀 꾹꾹 찍기도 하고, 문지르거나 뿌리기도 한다. 신문지, 모래, 돌멩이, 심지어 고철 기계 등 그림을 그리거나 공예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일상생활 속의 모든 것들이 다 ‘미술’이 된다. 헤겔(Hegel)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순간 예술은 끝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종말’을 ‘예술가들의 해방’으로 해석했다. 지금도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것을 예술로 변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주3].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생활하는 시대에도 예술가들은 우주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 것이다. 팝 아트(Pop Art)의 거장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는 나사(NASA)의 초청으로 아폴로 11호 발사대에 접근할 수 있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사가 추진하는 유인 우주 탐사 계획 ‘아폴로 프로젝트(Apollo Project)에서 인류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새롭게 도약하는 희망의 증거를 발견했고, 아폴로 프로젝트를 주제로 한 연작 석판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라우션버그는 나사가 제공한 수백 장의 우주 사진을 이용했다.

 

우리 사회는 변화에 관대하지 않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 너무 지나치게 바꾸려고 한다면서 다소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변화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능사일까. 변화를 지향하지 않는 세상에서 창조라든가 예술이라든가 하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그렇지만 ‘얼리 어답터’인 예술가들은 변화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미의식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찾아보거나 이것저것 다 사용해볼 것이다.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료와 도구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주1] 로잘린드 마일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동녘, 2005)

 

[주2]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부키, 2017)

 

[주3] 아서 단토 《일상적인 것의 변용》 (한길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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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0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적인 것의 변용, 을 생각하니 예전에 책에서 보았던 변기가 생각나네요. 변기로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줬지요.

cyrus 2018-11-09 12:12   좋아요 1 | URL
똥도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 적이 있어요. 이탈리아의 예술가는 캔에 담은 자신의 똥에 ‘예술가의 똥’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했어요. ^^;;
 

 

 

영국의 정령(spirit)의 나라다. 정령이 탄생한 배경이 된 고대 켈트인(Celts)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각 지방마다 특색을 갖춘 정령들에 대한 전설이나 민담이 전해진다. 기원전 6세기경 켈트인이 유럽에서 건너와 브리타니아(Britannia) 섬, 즉 현재의 영국에 정착했다.

 

 

 

 

 

 

 

 

 

 

 

 

 

 

 

 

 

 

* 박영배 《켈트인, 그 종족과 문화》 (지식산업사, 2018)

* 크리스티안 엘뤼에르 《켈트족》 (시공사, 1998)

 

 

 

카이사르(Caesar)가 기원전 55년에 브리타니아를 원정하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다시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후 400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4세기 후반 게르만인(Germanen)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로마군이 밀려났고, 이 기회를 틈타 게르만인의 일파인 앵글인(Angles)과 색슨인(Saxons)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섬에 사는 켈트인을 정복하고 거기에 왕국을 세우는데 그 나라가 지금의 영국, 즉 잉글랜드이다.

 

 

 

 

 

 

 

 

 

 

 

 

 

 

 

 

 

 

 

*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기》 (사이, 2005)

* [절판] 리처드 루드글리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뜨인돌, 2004)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서양 신화는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그리스 로마 신화다. 반면 로마인과 게르만인의 압박으로 밀려난 켈트족 신화는 낯설게 느껴진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 《갈리아 전쟁기》에서 켈트인들을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으며, 바지를 입은 야만인들’로 묘사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만들어진 서구 주류 역사의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야만인, 즉 바바리안(barbarian)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바르바로이(barbaroi)’에 있다. 이 말은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립적인 말이 그리스와 로마를 침략한 일군의 다른 민족들을 가리키게 되면서 야만 · 폭력 등의 부정적인 의미가 덧붙여졌다.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뜨인돌)《켈트인, 그 종족과 문화》 (지식산업사)는 켈트인이 로마 못지않은 훌륭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켈트인의 문화적 수준은 로마보다 높았다. 켈트인 사회는 여성과 노약자를 존중할 정도로 권위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바바리안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시각에 의해 왜곡된 단어이다. 그리스 · 로마인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야만’이라는 이름의 울타리에 가뒀다.

 

 

 

 

 

 

 

 

 

 

 

 

 

 

 

 

 

 

 

 

 

 

 

 

 

 

 

 

 

 

 

* 이케가미 료타 《도해 켈트 신화》 (AK커뮤니케이션즈, 2014)

* 모리셰 료 《켈트 신화 사전》 (비즈앤비즈, 2014)

* 조지프 제이콥스 《켈트족 옛 이야기》 (현대지성사, 2003)

* 다케루베 노부아키 《켈트. 북구의 신들》 (들녘, 2000)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이 성공하면서 갈리아는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켈트인은 자치권을 잃었지만, 켈트의 문화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켈트 신화와 켈트 문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미국의 축제 기념일로 알려진 핼러윈(Halloween)은 고대 켈트인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20세기 이전 서구 문학의 대문호들에게 영감을 줬다면, 상대적으로 환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색채가 짙은 켈트 신화는 게르만 신화와 함께 20세기 판타지 문학에 상상력을 제공했다. 서구 판타지 문학에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마법사들은 켈트족의 드루이드(Druid) 사제들의 모습에서 유래한 존재이다. 흔히 ‘서양의 요정’으로 많이 알려진 엘프(Elf), 난쟁이와 거인족도 켈트 신화에 기대고 있다. 켈트 신화에는 싸움에서 패한 대지의 여신 다누(Danu)의 일족이 도망가서 새로운 낙원을 만들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종족’, 즉 요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요정을 믿지 않는 어른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

(책읽는귀족, 2016)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켈트의 여명》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켈트 신화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살았던 ‘게일인’ 신화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살았던 ‘브리튼인’ 신화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켈트 신화가 낯설어서 선뜻 읽기가 망설여진다면, 정령이나 요정이 등장하는 아일랜드의 구전 민담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eats)는 게일인 신화와 민담을 수집하여 고대 켈트인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정령과 요정은 단순히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요즘은 요정 이야기나 신화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되지만, 그 속에는 먼 과거에서 긴 시간을 거쳐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풍습,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이 녹아들어 있다. 신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서양 문화의 표준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두게 되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켈트인이 호전적인 민족이라서 켈트 신화에 그들의 잔인한 본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묘사된 신들은 난폭하거나 잔인하며 교활하거나 방탕하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축적된 인류의 신화를 ‘문명’과 ‘야만’으로 분류하고, 다른 민족의 신화와 그 속에 담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든 이분법의 아류이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오만한 문명’의 고약한 버릇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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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0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좋아하는 용정과 전설 민담이야기네요.님이 적었듯이 앵글인과 색슨인(합쳐서 앵글로색슨족-현재 잉글랜드의 주류)가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거거살던 켈트인들을 스코틀랜드로 쫒아냈지요.현재는 영국인이지만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앵글로색슨족과 켙트족들은 현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나위어 피터지게 싸웠는데 비록 잉글랜드과 스코틀랜드를 병합했어도 민족이 틀려선지 지금까지도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추구하는것 같네요.
참고로 바바리아하면 저는 코난(아놀드 슈왈츠제니거가 나온 영화-원작소설도 있음)이 생각납니다.

cyrus 2018-11-07 12:12   좋아요 0 | URL
호전적인 야만인 이미지를 대중에게 부각시킨 결정적인 영화가 <코난 더 바바리안>이지요. ^^

syo 2018-11-0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 박사님이시다..... 모르는 게 없으시다지?!

cyrus 2018-11-07 12:15   좋아요 0 | URL
박사님은 무슨... ㅎㅎㅎ 몇 주 지나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내용, 기록했던 내용들 다 잊어버립니다. 글에 썼던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독서모임을 자주 참석하려고 해요.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

카알벨루치 2018-11-07 12:1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는건 말로 표현해야 기억이 남는게 맞아요~ㅎㅎ

카알벨루치 2018-11-0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시루스 박사 존경삘!

cyrus 2018-11-07 12:16   좋아요 1 | URL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책에 있는 내용을 요약, 정리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정리한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

페크pek0501 2018-11-07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을 응원합니다. 짝짝짝!!!

cyrus 2018-11-09 12:1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지난주 토요일에 안과에 다녀왔다. 내 눈에 문제가 있어서 간 건 아니다. 어머니 대신에 갔다. 올여름에 부모님이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고, 조기에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었다. 정밀 검진을 받은 이후로 어머니는 정오 12시, 자정마다 안약을 넣고 있다. 한 달 전에 받은 안약이 거의 다 떨어져서 안과에 가서 새 안약을 처방받아야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가 허리를 삐끗해 집에서 쉬어야 했고, 내가 대신 안과에 가게 됐다.

 

점심시간을 피하고 오후 2시경에 안과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진료 및 처방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 3시까지 안과 의사가 수술하는 시간이라서 안약 처방을 받으려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폰 보조 배터리를 챙겨올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까웠다. 다행히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줄 녀석이 있었다. 책이었다.

 

그런데 안과에 비치된 책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어른이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문고의 절반은 아동용 책이었다. 아동용 책의 상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90년대에 나온 위인전, 동화책이 많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한 번쯤은 스쳐서 만났을 법한 책들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1984년에 나온 여성 잡지의 부록도 꽂혀 있다는 사실이다. 헌책방에 있을 만한 책들이 안과에 있다니. 어머니가 다니는 안과는 의료서비스가 좋아서 환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안과는 환자나 손님의 문화 활동을 위한 서비스가 부족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사의 진료 및 처방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안과의 책장은 안과를 찾는 손님이나 안과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볼 품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 크리스티안 뒤셴, 카르멩 마루아 《시루스 박사 1》 (비룡소, 1998)

 

 

 

그래도 낡은 책장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을 수 있는 책은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읽은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 박사》 1권이었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백과사전이긴 한데, 여러 분야를 항목별로 담고 있는 기존의 백과사전과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의 질문에 시루스 박사가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대화체 형식의 백과사전이다. 책은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부터 12권까지 다 읽어본 적이 없다.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주1].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말하는 백과사전’이다. 시루스 박사는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1권의 뒤표지에 시루스 박사의 별명이 적혀 있다. 별명이 많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골키퍼’, ‘말문이 막힌 부모님들을 위한 구원 투수’, ‘지쳐 버린 보모를 위한 시간 도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기억력(을) 증진(하는) 책’, ‘선생님의 오른팔’ 등이 있다.

 

 

 

 

 

 

시루스 박사의 ‘비밀 무기’는 ‘펜티엄급 지식과 푸근한 마음’이다. ‘펜티엄’이라…‥. 90, 2000년대에 인텔(Intel)을 먹여 살린 CPU 상표명 아닌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시루스 박사는 어린이들의 어떤 질문에도 성실하고 진지하며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다. 그는 어머니 같은 푸근한 마음으로 어린이의 호기심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박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이들의 질문에 절대로 ‘모른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삶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소피의 세계》(현암사)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현암사, 2015)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 소질은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이 소질을 공유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평생 아이처럼 섬세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고까지 해도 좋을 것이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란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인 소피가 어느 날 발신인 없는 의문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발신인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하면서 소피에게 철학을 가르쳐준다. 소설은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풀어나가는 식으로 전개되면서 문명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뿌리를 알려준다.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소설은 철학의 장벽을 낮춰 우리의 삶에 가까이 끌어들인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에서 1991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4년 독일에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루스 박사》는 1995년 캐나다에서 나온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루스의 교육》 (한길사, 2015)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로파에디아》 (주영사, 2012)

 

 

 

‘시루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이끈 키루스(Cyrus)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고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은 자신의 책 《키로파에디아(Cyropaedia)에서 키루스를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했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의 원통’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했다. 《시루스 박사》의 저자 크리스티안 뒤셴(Christiane Duchesne)은 어려서부터 키루스라는 이름을 좋아해서 자신의 분신인 박사의 이름을 ‘시루스’라고 정했다고 한다. 키루스는 라틴어 발음이고, 영어식 발음은 ‘사이러스’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cyrus’를 ‘사이러스’라고 발음한다. 크리스티안 뒤셴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원어 발음을 따른다면, ‘시루스 박사’가 아니라 ‘키루스 박사’ 또는 ‘사이러스 박사’라고 해야 한다. ‘시루스’는 독일식 발음이다[주2].

 

 

 

 

 

이미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 닉네임은 《시루스 박사》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2010~2011년에 알라딘 서재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남겼을 때, 닉네임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닉네임의 유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책에 나오는 시루스 박사처럼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필명을 ‘cyrus’로 정했다. 《시루스 박사》의 편집부의 말에 따르면 박사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라고 한다. 탈모를 겪는 ‘스피드왜건’인가. 그나저나 나도 탈모가 진행 중인데, 20년이 지나면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가 되겠군. 흠좀무. 역시 이름이나 닉네임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것 같다.

 

 

 

 

[주1] 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까치, 2018)

 

[주2] 참고: 네이버 독일어사전, ‘시뤄스’를 빠르게 발음하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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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1-0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너무 찰떡닉네임이다.....

cyrus 2018-11-05 17:00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망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이 닉네임을 계속 사용할려고 합니다. ^^

stella.K 2018-11-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득이나 눈이 안 좋은데 책까지 좋으면 눈이 더 나빠질 것 아니니? 그냥 그렇게 생각야지 뭐. 사이러스는 영어식 발음 아닌가? 난 시루스가 좋던데...ㅋ
그런데 탈모가 진행중이라고? 걱정되겠다. 관리 잘 해라.ㅠ

cyrus 2018-11-05 17:02   좋아요 0 | URL
아버지가 원형 탈모에요. 다행히 저는 원형 탈모는 아닌데, 이마 부위의 머리카락이 점점 많이 빠져요.. ㅠㅠ

카알벨루치 2018-11-05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박사님 !!!! 시루스 박사님 ㅎㅎㅎ

cyrus 2018-11-05 17:04   좋아요 1 | URL
저는 ‘카알벨루치‘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

카알벨루치 2018-11-05 18:41   좋아요 0 | URL
이야기 들어보면 웃으실껄요 ㅋㅋ

cyrus 2018-11-06 12:03   좋아요 0 | URL
뭔가 재미있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정말 궁금하네요.. ^^

포스트잇 2018-11-0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루스보다는 시루스라고 불러야겠네요, 박사님ㅎㅎ

cyrus 2018-11-06 12:02   좋아요 0 | URL
시루스 박사님 말고 ‘시루스 아저씨’라고 불러주세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8-11-07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젊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탈모라니요... 글자를 너무 봐서 그런 게 아닐까요? 책 읽을 때나 글 쓸 때.

이름이나 닉네임이 운명을 만든다면 저도 닉네임을 다르게 하고 싶군요. ㅋ

cyrus 2018-11-09 12:15   좋아요 1 | URL
탈모는 젊은 시절부터 진행된다고 합니다. 두피가 훤하게 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진 건 아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머리카락이 한 두 개씩 빠질 때마다 걱정됩니다. ^^;;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 - 관심에 집착하는 욕망의 심리학
미치 프리스턴 지음, 김아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독서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참석하면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 요즘은 모임 내에서 자기소개할 때 나이와 직업이 아닌 ‘관심사’를 얘기한다. 한 번은 내 소개할 때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독서모임 지인 한 분이 나를 ‘알라딘 파워 블로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파워 블로거는 아니라고 말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이 든 것은 파워 블로거라고 불릴 만한 기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당연히 파워 블로거는 인기가 많다. 하루 평균 블로그 방문자 수, 이웃 수, 포스트의 ‘좋아요’ 수, 댓글 수 등이 많으면 파워 블로거로 볼 수 있다. 내 블로그의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100~150명이다. 가끔 200명 이상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구글의 검색 로봇 작동으로 인해 방문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나오는 경우일 수 있다. 현재 내 블로그를 즐겨 찾는 이웃 수는 1655명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많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파워 블로거라고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스럽다. 2년 전부터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웃을 잘 받지 않는 편이고, 자체적으로 이웃 수를 줄이고 있다.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관심사를 알리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이웃들의 글만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게 됐고, ‘좋아요’ 수와 댓글 수는 일 년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들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리 혼자가 편한 사람이라도 인기에 향한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블로그나 SNS를 계속하면 친밀감뿐만 아니라, 자기 현시 욕구나 ‘자신의 좋은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감정 욕구도 생긴다. 블로그와 SNS는 인정의 욕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자신의 사진이나 글을 봐줄 사람이 없다면 블로그와 SNS는 무용지물이다. 이 두 매체는 타인에게 자신을 전시하는 행위, 그리고 이에 동참하는 타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결합은 곧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블로그 활동에 푹 빠져 있었을 때, 내가 알라딘에서 인기가 많은 줄로만 알았다. 시간을 지난 뒤에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난 착각이었다.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는 내 과거 속의 착각을 되돌아보게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인기와 타인의 인정을 얻고 싶은 인간의 심리와 그 원인을 치밀하게 밝힌다. 저자는 2001년 예일대 교수 시절에 ‘또래 집단에서의 인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열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누구나 인기를 원한다. 우리가 인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뇌의 반응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정말 어렵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호감을 사고, 박수를 받는 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적극적으로 다가왔더니만 오지랖 부린다며 싫어하고, 그냥 조용히 지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왠지 상대방의 무심한 반응에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렇듯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입맛에 맞게 나를 바꾸거나 ‘대화 좀 하자’는 식으로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다. 결국, 우리는 혼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타고난 욕망은 우리 삶에 지속해서 영향을 준다.

 

그런데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면 행복할까? 인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만하고 폭넓은 인간관계의 척도를 SNS상의 ‘좋아요’ 수치나, 자신에 대한 언급 즉 ‘태그’를 통해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정을 받아야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는 셈이다. 저자는 인기를 ‘지위(status)‘호감(likeability)으로 나누어 인기의 속성을 분석한다. 지위형 인기는 누구나 원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호감형 인기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게 만든다. 호감은 함께 하면 즐겁거나 친근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저자는 호감형 인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지위형 인기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졌거나 영향력이 높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위형) 인기를 향한 욕망을 조절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해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인기 없는 이유를 남 탓으로 돌린다. 상대방을 손쉽게 통제할 정도로 지위를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서열화한다. ‘인간관계의 서열화’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과도하게 지위를 통해 자기 존재 증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들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불쾌감을 주는지 깨닫지 못한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뇌는 타인을 우등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분류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은 ‘호감’이다. 인간관계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혼자 끙끙 고민하는 대신 이 책을 읽어보자. 어떤 유형의 인기를 추구했는지, 호감을 얻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따라 어떻게 삶이 변화했는지 추적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기의 강력한 영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알려준다. 블로그와 SNS은 갈등과 변화 대신 안정과 평안만을 갈구하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에게 최적화된 공간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삶 전체가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느끼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은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친구’와 ‘추종자’만 남아 있는 거울로 이루어진 온라인 공간은 우리의 뇌를 취하게 한다. 과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 Trivia

 

 

리뷰 제목은 타니가와 니코(谷川ニコ)의 만화 제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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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02 17:07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 접속해서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못하더라도) 책 얘기만 해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느낌이 나지 않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알라딘의 ‘늙다리’가 된 것 같네요.. ㅎㅎㅎㅎ

독서모임 활동하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 보면서 책 얘기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영감을 얻거나 좋은 책을 알게 돼요. ^^

오후즈음 2018-11-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사실 인기 많은것보다 진짜 소통할수 있는 몇이 더 소중할수 있긴합니다

cyrus 2018-11-04 17:3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신뢰감을 느낄만하고,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레삭매냐 2018-11-02 22: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기가 있고 싶고 좋아요~를 백개
받고 싶습니다.

이웃도 사양하지 않고 받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
이 들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책
읽고 독후감 쓰고를 반복한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서모임에 나가서
신나게 떠드는 게 이제 유일한 삶의 낙
이 되어 버렸네요.

cyrus 2018-11-04 17:42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은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진행되니까 모임에 자주 오는 분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게 느껴져요. ^^

북프리쿠키 2018-11-0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셀 할부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첫째는 좋아서, 둘째는 자랑하고 싶어서 ^^; 라고 이야기 했네요.
때로는 부질없는 일들을 하며 사는 게
인생 아닌가 합니다.ㅎㅎ
파워블로거 맞습니다. 맞구요^^

cyrus 2018-11-04 17:48   좋아요 1 | URL
러셀 옹의 말씀이 제가 생각한 것과 비슷하네요. ㅎㅎㅎ

저는 남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성격이라서 ‘아싸형 독서‘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제 알라딘 서재 블로그 이름이 ‘개썅마이리딩‘입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책이 뭔지 알고, 잘 고르는 인싸형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파워블로거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

카알벨루치 2018-11-0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런 담론은 너무 좋은 듯합니다 진짜~ㅋㅋ담론까진 아닌가 ㅎㅎ

cyrus 2018-11-04 17:50   좋아요 1 | URL
담론은 아니더라도 평소에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을 터놓고 얘기하는 건 좋은 일이에요. ^^

stella.K 2018-11-0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알라딘 파워 블로거. 재미있는 소개야.
근데 그거 사실 아니니? 빼기는...
그래도 자기 소개는 좀 계발할 필요는 있겠어.
좀 없어 보인다. 알라딘에서는 있어 보이는데. 이상하지? ㅋㅋ

예전에 나도 하루 조회수 그 정도는 됐는데
북플 생기고 나서 급격히 줄어들어서 아예
조회수 카운터 제거해 버렸잖아.
나름 그게 내 인기도를 반영했었는데 말야.ㅠ

cyrus 2018-11-04 17:57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알라딘 블로그 있다고 얘기 안 해요. 알라딘은 아는데, ‘알라딘 서재‘, ‘북플‘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걸요. 북플은 책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세상이
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마을 같아요.. ㅎㅎㅎ

블로그을 기반으로 한 ‘서재‘에서 SNS형 ‘북플‘로 바뀌면서 글 쓰는 스타일, 글 선호도도 달라졌어요. 이제는 사진 위주의 게시물이나 일상을 주제로 한 글을 좋아하죠. 저처럼 오로지 책 얘기만 하는 사람의 글은 재미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없어요. ^^;;

꼬마요정 2018-11-0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제 맘대로 책 읽는 타입이라 정말 아싸형 입니다. 사실 글도 잘 못써서 북플이 그냥저냥 기록장이 되어버렸지만요. 북플 하면서 긴 글 쓰기가 어려워졌어요. 폰으로 하다보니 글이 길어지지가 않아요ㅠㅠ 밀린 리뷰가 너무 많아요ㅠㅠ

글구 cyrus님 알라딘 파워 블로거 맞지 않나요? ㅎㅎㅎㅎㅎㅎ

cyrus 2018-11-05 11:48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 열군데 가서 ‘cyrus’가 누군지 물어보면, 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ㅎㅎㅎ
 

 

 

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피하려고 ‘회피 전략’을 쓴다. 만일 공포에 당당히 맞서려 한다면 우선 당면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맞설 대상도 파악이 되지 않고, 이 무서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면, 공포의 긴장은 한없이 고조된다. 이 때 나타나는 회피 전략이 ‘희생양’을 만드는 방법이다. 공포를 분노로 바꿔 희생양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공포의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내부에서 일어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은 우선 밖에서 찾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내부에서라도 만들어 낸다. 13∼17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바로 집단적 회피 전략의 대표적 예였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18, 리커버 특별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때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사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환을 성취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어느 역사책보다 흥미진진하게 재현했다. 에코가 소설에서 재현한 시대는 ‘암흑의 중세’가 아니다. 신성함과 세속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의 중세’이다. ‘회색의 중세’는 이성과 과학의 빛이 조금씩 세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지성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였다.

 

흉작이나 천재지변, 전염병 등 갑작스런 재앙의 원인에 대해 당시 학문의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국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다. 더불어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약해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단들의 거센 도전에 부딪치면서 고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52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도록 교서를 내림으로써 이단 심문관에게 마녀사냥을 허용하고 연이어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하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베르나르도 귀(Bernardo Gui)는 실존 인물이며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단 심문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피에 굶주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녀라는 소문이 나거나 밀고가 들어오면 고문을 병행한 심문이 시작된다. 고문 방식은 다양하다. 옷을 벗긴 뒤 온몸의 털을 깎고 침으로 찌른다. 꽁꽁 묶고 채찍질한다. 매달았다가 떨어뜨리고 뼈가 으스러지게 밧줄로 죈다. 마녀사냥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다. 처음에 마을 외진 곳에 혼자 살면서 민간 처방이나 전통 주술을 행하던 노파 정도로 인식되던 마녀가 점차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이 확대됐다. 전염병이나 기근, 전쟁 등 재난이 닥쳐오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 하여 무고한 여성과 남성 들이 마녀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 [절판] 기류 미사오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 (자음과모음, 2007)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2004)

* [절판]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 (들녘코기토, 2004)

* [절판] 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소나무, 2003)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중세가 아니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악화한 시기(1560~1660년)였다. 후에 영국의 왕 제임스 1세(James I)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악마론>이라는 책을 널리 유포하여 마녀사냥과 고문을 허용했다. 제임스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찰스 1세 시대에도 마녀사냥은 계속되었는데, 1645년에서 1646년 사이에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는 사회의 불안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마녀사냥을 집행했다. 자신의 (영국 의회가 인정하지 않은 비공식) 임무에 자부심이 넘쳤던 홉킨스는 자신을 ‘마녀 색출 장군(Witchfinder General)이라고 불렀다.

 

 

 

 

 

 

 

 

그가 즐겨 썼던 고문 방식은 마녀 혐의자를 묶은 채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홉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마녀 혐의자가 물 위에 떠오르면 마녀로 판정되는 것이고, 가라앉으면 마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녀 혐의자는 익사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홉킨스의 반인륜적 고문이 얼마나 심했으면 영국 의회까지 나서서 중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홉킨스는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고, 다른 고문 방식을 생각했다. 마녀 혐의자가 자백할 때까지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걸어 다니게 하거나 송곳으로 악마의 표식으로 여기는 신체 부위를 찔렸다. 홉킨스는 고문을 이용해서 수많은 마녀를 찾아냈다고 확신했으며 자기 일에 협력할 마녀 사냥꾼을 모집,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고문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2년 만에 홉킨스의 마녀사냥은 중단되었고, 그 이듬해에 홉킨스는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마녀로 인식된 타자를 처벌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위안은 집단 전체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대 인권이 중시되며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이 촉구됐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처형식이 있는 날이면 군중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했다. 이 ‘끔찍한 볼거리’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 당시 군주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구경꾼들도 언젠가는 처형장의 눈요깃감이 될 수도 있었다. 권력은 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마녀 재판과 관련된 고문과 처형의 기록은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탄압과 인간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 사람을 희생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는 논리적 근거를 상실했고, 처형에서 비난으로 변질해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잔인함은 여전히 유지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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