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에 안과에 다녀왔다. 내 눈에 문제가 있어서 간 건 아니다. 어머니 대신에 갔다. 올여름에 부모님이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고, 조기에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었다. 정밀 검진을 받은 이후로 어머니는 정오 12시, 자정마다 안약을 넣고 있다. 한 달 전에 받은 안약이 거의 다 떨어져서 안과에 가서 새 안약을 처방받아야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가 허리를 삐끗해 집에서 쉬어야 했고, 내가 대신 안과에 가게 됐다.
점심시간을 피하고 오후 2시경에 안과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진료 및 처방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 3시까지 안과 의사가 수술하는 시간이라서 안약 처방을 받으려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폰 보조 배터리를 챙겨올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까웠다. 다행히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줄 녀석이 있었다. 책이었다.
그런데 안과에 비치된 책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어른이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문고의 절반은 아동용 책이었다. 아동용 책의 상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90년대에 나온 위인전, 동화책이 많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한 번쯤은 스쳐서 만났을 법한 책들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1984년에 나온 여성 잡지의 부록도 꽂혀 있다는 사실이다. 헌책방에 있을 만한 책들이 안과에 있다니. 어머니가 다니는 안과는 의료서비스가 좋아서 환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안과는 환자나 손님의 문화 활동을 위한 서비스가 부족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사의 진료 및 처방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안과의 책장은 안과를 찾는 손님이나 안과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볼 품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 크리스티안 뒤셴, 카르멩 마루아 《시루스 박사 1》 (비룡소, 1998)
그래도 낡은 책장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을 수 있는 책은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읽은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 박사》 1권이었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백과사전이긴 한데, 여러 분야를 항목별로 담고 있는 기존의 백과사전과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의 질문에 시루스 박사가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대화체 형식의 백과사전이다. 책은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부터 12권까지 다 읽어본 적이 없다.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주1].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말하는 백과사전’이다. 시루스 박사는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1권의 뒤표지에 시루스 박사의 별명이 적혀 있다. 별명이 많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골키퍼’, ‘말문이 막힌 부모님들을 위한 구원 투수’, ‘지쳐 버린 보모를 위한 시간 도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기억력(을) 증진(하는) 책’, ‘선생님의 오른팔’ 등이 있다.

시루스 박사의 ‘비밀 무기’는 ‘펜티엄급 지식과 푸근한 마음’이다. ‘펜티엄’이라…‥. 90, 2000년대에 인텔(Intel)을 먹여 살린 CPU 상표명 아닌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시루스 박사는 어린이들의 어떤 질문에도 성실하고 진지하며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다. 그는 어머니 같은 푸근한 마음으로 어린이의 호기심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박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이들의 질문에 절대로 ‘모른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삶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의 《소피의 세계》(현암사)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현암사, 2015)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 소질은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이 소질을 공유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평생 아이처럼 섬세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고까지 해도 좋을 것이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란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인 소피가 어느 날 발신인 없는 의문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발신인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하면서 소피에게 철학을 가르쳐준다. 소설은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풀어나가는 식으로 전개되면서 문명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뿌리를 알려준다.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소설은 철학의 장벽을 낮춰 우리의 삶에 가까이 끌어들인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에서 1991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4년 독일에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루스 박사》는 1995년 캐나다에서 나온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루스의 교육》 (한길사, 2015)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로파에디아》 (주영사, 2012)
‘시루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이끈 키루스(Cyrus) 왕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고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은 자신의 책 《키로파에디아(Cyropaedia)》에서 키루스를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했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의 원통’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했다. 《시루스 박사》의 저자 크리스티안 뒤셴(Christiane Duchesne)은 어려서부터 키루스라는 이름을 좋아해서 자신의 분신인 박사의 이름을 ‘시루스’라고 정했다고 한다. 키루스는 라틴어 발음이고, 영어식 발음은 ‘사이러스’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cyrus’를 ‘사이러스’라고 발음한다. 크리스티안 뒤셴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원어 발음을 따른다면, ‘시루스 박사’가 아니라 ‘키루스 박사’ 또는 ‘사이러스 박사’라고 해야 한다. ‘시루스’는 독일식 발음이다[주2].

이미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 닉네임은 《시루스 박사》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2010~2011년에 알라딘 서재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남겼을 때, 닉네임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닉네임의 유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책에 나오는 시루스 박사처럼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필명을 ‘cyrus’로 정했다. 《시루스 박사》의 편집부의 말에 따르면 박사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라고 한다. 탈모를 겪는 ‘스피드왜건’인가. 그나저나 나도 탈모가 진행 중인데, 20년이 지나면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가 되겠군. 흠좀무. 역시 이름이나 닉네임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것 같다.
[주1] 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까치, 2018)
[주2] 참고: 네이버 독일어사전, ‘시뤄스’를 빠르게 발음하는 것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