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피하려고 ‘회피 전략’을 쓴다. 만일 공포에 당당히 맞서려 한다면 우선 당면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맞설 대상도 파악이 되지 않고, 이 무서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면, 공포의 긴장은 한없이 고조된다. 이 때 나타나는 회피 전략이 ‘희생양’을 만드는 방법이다. 공포를 분노로 바꿔 희생양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공포의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내부에서 일어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은 우선 밖에서 찾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내부에서라도 만들어 낸다. 13∼17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바로 집단적 회피 전략의 대표적 예였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18, 리커버 특별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때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사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환을 성취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어느 역사책보다 흥미진진하게 재현했다. 에코가 소설에서 재현한 시대는 ‘암흑의 중세’가 아니다. 신성함과 세속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의 중세’이다. ‘회색의 중세’는 이성과 과학의 빛이 조금씩 세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지성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였다.

 

흉작이나 천재지변, 전염병 등 갑작스런 재앙의 원인에 대해 당시 학문의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국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다. 더불어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약해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단들의 거센 도전에 부딪치면서 고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52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도록 교서를 내림으로써 이단 심문관에게 마녀사냥을 허용하고 연이어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하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베르나르도 귀(Bernardo Gui)는 실존 인물이며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단 심문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피에 굶주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녀라는 소문이 나거나 밀고가 들어오면 고문을 병행한 심문이 시작된다. 고문 방식은 다양하다. 옷을 벗긴 뒤 온몸의 털을 깎고 침으로 찌른다. 꽁꽁 묶고 채찍질한다. 매달았다가 떨어뜨리고 뼈가 으스러지게 밧줄로 죈다. 마녀사냥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다. 처음에 마을 외진 곳에 혼자 살면서 민간 처방이나 전통 주술을 행하던 노파 정도로 인식되던 마녀가 점차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이 확대됐다. 전염병이나 기근, 전쟁 등 재난이 닥쳐오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 하여 무고한 여성과 남성 들이 마녀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 [절판] 기류 미사오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 (자음과모음, 2007)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2004)

* [절판]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 (들녘코기토, 2004)

* [절판] 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소나무, 2003)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중세가 아니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악화한 시기(1560~1660년)였다. 후에 영국의 왕 제임스 1세(James I)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악마론>이라는 책을 널리 유포하여 마녀사냥과 고문을 허용했다. 제임스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찰스 1세 시대에도 마녀사냥은 계속되었는데, 1645년에서 1646년 사이에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는 사회의 불안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마녀사냥을 집행했다. 자신의 (영국 의회가 인정하지 않은 비공식) 임무에 자부심이 넘쳤던 홉킨스는 자신을 ‘마녀 색출 장군(Witchfinder General)이라고 불렀다.

 

 

 

 

 

 

 

 

그가 즐겨 썼던 고문 방식은 마녀 혐의자를 묶은 채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홉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마녀 혐의자가 물 위에 떠오르면 마녀로 판정되는 것이고, 가라앉으면 마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녀 혐의자는 익사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홉킨스의 반인륜적 고문이 얼마나 심했으면 영국 의회까지 나서서 중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홉킨스는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고, 다른 고문 방식을 생각했다. 마녀 혐의자가 자백할 때까지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걸어 다니게 하거나 송곳으로 악마의 표식으로 여기는 신체 부위를 찔렸다. 홉킨스는 고문을 이용해서 수많은 마녀를 찾아냈다고 확신했으며 자기 일에 협력할 마녀 사냥꾼을 모집,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고문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2년 만에 홉킨스의 마녀사냥은 중단되었고, 그 이듬해에 홉킨스는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마녀로 인식된 타자를 처벌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위안은 집단 전체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대 인권이 중시되며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이 촉구됐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처형식이 있는 날이면 군중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했다. 이 ‘끔찍한 볼거리’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 당시 군주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구경꾼들도 언젠가는 처형장의 눈요깃감이 될 수도 있었다. 권력은 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마녀 재판과 관련된 고문과 처형의 기록은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탄압과 인간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 사람을 희생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는 논리적 근거를 상실했고, 처형에서 비난으로 변질해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잔인함은 여전히 유지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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