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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2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남경태 님이 작고하셨군요! 53세밖에 안됐는데...안타깝네요..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14-12-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젊은데... 안타까워요! ㅠ

무해한모리군 2014-1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젊으신 분이신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쉽싸리 2014-12-25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진행한 `타박타박세계사` 가끔 듣곤 했는데요...이젠 추억으로 남겠네요...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 카렐 차페크 희곡 10대를 위한 책뽀 시리즈 4
카렐 차페크, 조현진 / 리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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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형 로봇은 인간과 어느 정도로 닮아야 할까. 위에 있는 사진을 보라. 얼핏 보아서는 그저 쌍둥이 같지만 두 사람(?) 중 하나는 로봇이다. 어느 쪽이 로봇일까. 사진 속 진짜 사람은 일본의 로봇전문가 이시구로 히로구시다. 그가 만든 로봇의 이름은 제미노이드(Geminoid)이다. '쌍둥이'를 뜻하는 어원 'gemin-'과 '인조인간'이라는 뜻의 'android'를 결합한 말이다. 실제로 이 로봇은 그의 얼굴 윤곽부터 피부색, 머리카락, 턱수염과 눈썹처럼 미묘한 부분까지 똑 닮았다. 키도 자신과 똑같이 재현했다고 한다.

 

시력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우리는 이 사진 속에 로봇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 풀린 듯한 눈동자, 어색한 표정 같은 미세한 차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보면서 두렵고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위화감으로 인한 호감도 하락을 로봇 공학자들은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부른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로봇,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 구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희곡에서였다.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체코어로 노동, 혹은 노역을 의미하는 'Robota'라는 단어에서 a자를 빼 만든 신조어다.

 

로숨은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처음으로 만든 발명가이자 해양생태학자다. 그는 직접 로봇을 만들어서 무신론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이때 만들어진 로봇은 인조인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로숨의 아들이 노동하는 로봇을 만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로봇 산업이 시작된 것이다. 로숨 부자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고, 로봇 회사의 이름으로 언급될 뿐이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의 사장인 해리 도민의 목표는 인간을 대신하는 값싼 기계 노동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서막에서 로봇을 묘사하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는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은 인간과 구별하기 위한 영혼 없는 기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라디우스와 헬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극중 장면 (70쪽)

 

 

 

희곡의 배경은 로봇이 노동자로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사회이다. 그러다가 점점 로봇은 노동을 통해 지능이 형성되고, 반항정신을 가지게 된다. 라디우스라는 이름의 로봇이 처음으로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몇몇 인물들은 점점 인간에게 반항하는 로봇을 경계하고 무서워한다. 그렇지만 도민은 로봇 생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1막에서 로봇 생산을 중단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은 도민의 아내 헬레나다. 그녀는 처음부터 로봇이 인간처럼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한다. 로봇 생산을 중단하는 것만이 인간과 로봇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막에서 로봇에 의해 인간이 멸망하는 불행한 조짐을 느낄 수 있다. 로봇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민과 로봇 회사에 소속된 일행들은 로봇 사업의 성공을 기념하는 향연을 펼친다. 도민의 다음 목표는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른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결국, 로봇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간 전복을 꾀하는 라디우스와 그가 이끄는 로봇들의 저항에 파괴된 도민의 로봇 회사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 갈등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차페크가 이 희곡 작품을 통해 단지 맑시즘을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 단계대로 피지배자, 노동자였던 로봇은 지배자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하는 로봇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로봇은 세상의 고아(Rabota)가 되고 만다. 자신들을 만들어 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로봇들은 유일한 생존자 알뀌스뜨에게 로봇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로봇과 인간의 싸움에서 과연 로봇이 최종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해 끝없는 욕망과 오만으로 인해 인간은 로봇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봇은 인류의 시대를 종식함으로써 자신들의 복제품을 더 이상 만들어질 수가 없게 된다. 로봇와 인간, 이 둘 중 누구도 세상의 승자라고 단번에 정하기 어렵다. 승자는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류가 자초한 과학의 암울한 비극을 예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록 희곡은 로봇이 득세하는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차페크는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남자 로봇 쁘리무스와 여자 로봇 헬레나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로봇은 아담과 하와가 되어 폐허가 된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부활을 알린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인간형 로봇을 끊임없이 개발한다. 로봇이 인류의 미래에 '대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짐을 들어 나르는 일꾼이 된다거나 하는 잡무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기대다. 물론 군사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이는 묘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로봇이 너무 인간과 닮게 되면 사람들은 정체성에 도전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지금은 가벼운 조크로 여길 수도 있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고, 인간이 로봇으로 오해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차페크의 결말이 너무 안이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희곡 작품을 읽는 독자 혹은 무대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열린 결말 같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 로봇의 후예들은 휴브리스(Hubris)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 체코어 Robota는 ‘노예’, ‘노역’ 이외에도 이리저리 떠돌면서 갈 곳 없는 고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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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25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봇 스스로는 인간한테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또한 로봇인간으로 진화해나가리라는 것은 생명의 진화사를 살펴보면 필연적일 것 같습니다. 인간과 로봇은 공진화 혹은 융합진화해갈 것 같아요. 인간성, 인류의 도덕과 윤리 개념도 인간 의식의 확장/진화와 함께 진화하리라고 봅니다. 인간과 로봇의 미래를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네요.

qualia 2014-12-25 11:21   좋아요 0 | URL
‘로그인’ 상태에서 위 댓글을 써서 올렸는데, ‘로그아웃’ 상태로 입력이 되더군요. 제가 댓글 작성할 때, 알라딘에서 설정한 로그인 시간을 초과했나봅니다. 그래서 작성자가 익명으로 표기되더군요. 그래서 다시 로그인해 익명 처리된 댓글을 지우고, 댓글을 새로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yrus 2014-12-25 16:26   좋아요 0 | URL
qualia님,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카렐 차페크 평전>도 같이 읽었어요. 그 책에 차페크의 작품을 해설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차페크는 로봇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이야말로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의 해석이라고 여길 정도로 작품 결말에 드러난 자신의 희망을 믿었다고 합니다. qualia님의 의견처럼 인간과 로봇의 공진화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글에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낙관적인 미래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집 구판 표지 찾기

 

 

 

 

 

 

 

아직 아옌데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조선인님이 묘사한 책 표지가 어떤 건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옛날에 나온 책 표지 디자인은 요즘 나오는 책에 비하면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것도 있습니다. 책방에 가면 그런 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나오는 책의 구판이라도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사는 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온라인 중고서점 위주로 조선인이 찾으려는 『영혼의 집』을 찾아봤습니다. 북아일랜드와 북코아 그리고 알라딘 중고샵(온라인)을 참고했습니다. 검색해본 결과, 총 다섯 권이 나왔습니다. (민음사판 제외) 이 다섯 권 이외에도 아옌데의 소설이 다른 출판사 또는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집』 설영환 역 / 삼진기획 (1985년)
『영혼의 집』 최승자 역 / 둥지 (1991년)
『영혼의 집』 박영조 역 / 창현문화사 (1993년)
『영혼의 집』 이경욱 역 / 상원 (1993년)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김소영 역 / 지리산 (1993년)

 

 

 

1. 『마음의 집』 설영환 역 / 삼진기획 (1985년)

 

 

 

 

 

 

 

 

2. 『영혼의 집』 최승자 역 / 둥지 (1991년)

 

 

 

 

 

 

 

 

3. 『영혼의 집』 박영조 역 / 창현문화사 (1993년)

 

 

 

 

 

 

 

 

 

 

 

 

4.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김소영 역 / 지리산 (1993년)

 

 

 

 

 

일단 검색하면 책 제목은 나옵니다. 출판사와 역자 이름까지 확인할 수 있어요. 이제부터 여기서 조금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표지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책 표지를 공개하지 않은 판매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지 하나 찾는 데 검색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온라인 중고샵이나 책방 사이트의 단점은 바로 이겁니다. 구매자가 원하는 책 표지를 직접 눈으로 100%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죠. 심지어 구매자가 올린 책 표지 사진도 100%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진을 믿고 책을 사다가는 전혀 다른 표지의 책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애서가 여러분들, 서점이나 책방을 자주 애용해주세요!)

 

결국, 이 다섯 권의 책 중에 딱 한 권만 빼도 표지를 확인했습니다. 유일하게 표지를 확인하지 못한 책이 1993년에 상원이라는 이름의 출판사에서 나온 『영혼의 집』입니다. 혹시 조선인님이 찾고 싶은 미지의 『영혼의 집』이 상원에서 나온 책이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비록 비블리아 고서당의 시오리카 씨처럼 책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중에 책방에 가게 되면 조선인님이 언급하신 『영혼의 집』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만약에 찾게 되면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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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4-12-23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감사합니다. 알라딘의 시오리카씨. 그 책 표지를 못 찾아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

2014-12-23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12-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언제 영화화된 적이 있었나 보군.
왜 난 못 봤지?
비오리아 고서당이 그런 내용이었나?ㅎㅎ
한번 읽어보고 싶군.^^

cyrus 2014-12-23 22:21   좋아요 0 | URL
저 때문에 누님도 책 제목이 오타가... ^^;; 책 제목이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사실 아직 이 책 안 읽어봤어요. 방금 전에 책을 검색해봤는데 시오리카씨가 여주인공이더군요. 전 남잔 줄 알았어요.. ㅎㅎㅎ

stella.K 2014-12-24 12:0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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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주. 여성인권선언문을 작성한 그녀는 ‘미친 사람’으로 비난받았다. 시민혁명과 공화정의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지 155년 만이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단지 ‘남성권’의 선언이었고, 박애의 이념은 자매를 제외한 형제애였던가.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루소조차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정치는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에겐 문턱이 높았다.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성참정권의 역사는 겨우 100년을 헤아린다. 스위스 여성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1971년까지 기다렸다. 여성의 한 표는 거저 쥐어지지 않았다. ‘피의 투쟁’을 거쳤다. 어쩌면 인종과 신분의 벽보다 더 험하고 거친 차별의 강을 건너야 했다.

 

무리를 이룬 펭귄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고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첫 번째 펭귄처럼 구주는 인권에서 제외된 여성 중에 제일 먼저 차별의 강을 건너 넘으려고 앞장섰다. 왕정과 공화정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 구주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녀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구주의 눈에는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은 여자들을 쏙 뺀 반쪽짜리 내용에 불과했다. 그녀는 남자들의 세상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있는 여성들의 생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과 여성 시민의 인권 선언’은 성적 평등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위대한 팸플릿이었다. 여기에 포함되는 ‘여성’은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 딸, 누이들이었다.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고, 딸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제안했다. 또 미혼모들이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의 제안과 주장은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적인 내용이다. 그녀의 인권선언에 나오는 제안은 1975년에 법으로 제정되었다. 재미있게도 1970년대 프랑스는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1971년에 프랑스 여성 지식인 343명은 낙태를 했음을 선언하는 일명 ‘343선언’에 참여했다. 이때만 해도 낙태만 해도 징역형을 받았다. 미혼모도, 성폭행으로 임신한 여성들도 낙태하면 죗값을 치러야 했다. 343선언에 동참했던 여성 지식인 중에 보부아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의 익숙한 이름도 있다. 결국, 여성의 낙태권 주장은 법에 수용되어 1975년부터 시행된다. 여성 해방 운동의 거센 물결 덕분에 구주의 제안은 180여 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에 의한 먼지를 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 해방 운동론자들 중 그 누구도 구주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들은 잊힌 조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보부아르마저도. 소외된 여성의 권익을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낸 ‘페미니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보부아르가 고스란히 받았다. 20세기의 역사는 또 한 번 구주의 이름을 외면했다.

 

구주는 보부아르보다 가장 먼저 페미니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보부아르가 쓴 『제2의 성』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에서 인식하는 여성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 한정된다. 이러한 서구 중심적 페미니즘은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다. 반면 구주는 여성의 문제를 좀 더 포괄적인 접근으로 바라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인이나 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사회 운동과 더불어 주장의 폭을 넓혀가는 구주의 페미니즘은 사회적 계급과 인종에 기반을 둔 한계를 극복하려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조류와 유사하다.

 

프로이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구주는 다들 깊이 잠든 이른 시간에 깨어난 여성이다.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울타리 속에 갇힌 여성들은 오랫동안 깊은 수면에 빠져야만 했다. 구주는 여성들을 몽매하게 만드는 잠에서 깨어나는데 성공했지만, 울타리 밖에 남성들이 득실한 세상에 홀로 발을 내딛는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사생아로 태어나 16살에 결혼을 하지만, 아들 하나 낳고 과부가 된다. 그 후로 파리 사교계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세간의 관심과 남성들의 구애를 한몸에 받게 되지만, 구주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과부로 산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혼하는 순간, 또다시 ‘부인’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남성들의 사회적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구주는 사방이 꽉 막힌 그곳에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차별의 울타리를 부수어 잠든 여성들을 깨우는 일이 사회적 평등을 위한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 여성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문맹이 많았다. 구주도 글을 쓸 수 없었지만, 문맹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자기 생각을 비서에게 받아 적게 했다. 

 

구주는 자신의 과감한 생각이 사회에 실현하기 위해서 단두대에 오를 위험을 감수했다. 불평등한 구조와 억압을 깨트리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하고 필요한 것이 여성의 삶 속으로 정치를 가져오고 정치 속으로 여성이 들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구주는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불평등한 삶을 바꾸고 싶었다. 자유, 평등, 우애를 주장한 남성들은 그녀의 떳떳한 목소리가 거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어서 구주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구주의 정의감은 구시대적인 남성들에 의해 영원히 눈을 감았다. 구주의 죽음은 곧 남성들의 승리였다. 차별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성들은 여성참정권을 가지는 데 무려 100년 동안 잠들어야만 했다.

 

남성들의 역사(History)에 의해 잠든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 최근에 그녀의 존재가 재평가받게 되면서 드디어 구주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알 수 있는 책이 이제야 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구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동참하고, 그녀의 실천적 페미니즘을 본받아야 한다. 여성의 권리 회복을 주장한답시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보이는 옹졸한 페미니스트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 이제 잠에서 깬 구주다. 적어도 구주의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

 

 

 

※ 글 마지막 세 줄의 문장은 구주의 여성 인권선언서 일부 문장을 차용했음.
원문 :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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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14-12-2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제목이 정말 기발하네요 ㅋ

cyrus 2014-12-23 22:22   좋아요 0 | URL
쓸데없는 개드립이에요. ^^;;

바람돌이 2014-12-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담아갑니다. 저도 모르던 인물이네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

cyrus 2014-12-23 22:25   좋아요 0 | URL
책은 작가가 소개하는 구주의 생애와 구주가 남긴 글이 몇 편 수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정희진씨의 해제도 실려 있어요. 정희진씨가 구주를 아주 쉽게 소개하고 있어요. 읽어본다면 책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

감은빛 2014-12-23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어 기쁘네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cyrus 2014-12-23 22:27   좋아요 0 | URL
독자들이 이런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
 
칼데콧 컬렉션 칼데콧 컬렉션 1
랜돌프 칼데콧 지음, 이종욱 옮김 / 아일랜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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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의 쓸데없는 궁금증 하나. 부모는 자녀를 위한 그림책을 어떤 기준으로 고를까? 그림만으로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운 책? 아니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책? 그림도 좋지만, 교훈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감동으로 다가오는 책을 고를 수도 있다. 요즘 아빠와 엄마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외국 작가의 그림책이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외국 작가의 그림책을 읽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고작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외국 그림책이라면 디즈니 만화뿐이다. 미키 마우스, 아기사슴 밤비, 곰돌이 푸, 신데렐라 등 디즈니가 만든 고전만화의 일부 장면을 그림책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그림책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이유가 또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책의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자 글자 대신 그림만 있는 책만 읽었다. 어머니는 한글을 완전히 뗀 아들이 그림책만 읽는 것이 지적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 싶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글자가 많은 아동 문고나 위인전을 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사준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처음에 그림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림만 보는 독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어머니는 반강제적으로 글자로 된 책을 읽게 했다. 어머니가 강요하는 독서 때문에 잠시 독서의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림에 집착하는 습관을 잊지 못해 엉뚱하게 오락실의 게임에 빠졌다. 거의 밤늦게까지 오락실에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 거대한 화면에 가득 채운 역동적인 그림과 눈을 자극하는 색채는 책의 존재를 완전히 잊게 해줄 정도로 나를 유혹했다.

 

요즘 아이들의 눈은 책보다 기계 속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많아졌다. 내가 어렸을 때 독서를 방해했던 것이 TV, 오락, 비디오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성능이 좋은 기기들이 하나씩 우리 일상에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가장 친숙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TV를 많이 보는 아이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스마트폰만 온종일 보는 아이다.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보다 큰 스마트폰을 꼭 쥐면서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한다. 아이들은 집에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간다고 아이들을 집에 혼자 놔두고 갈 수 있다. 예전 아이들이라면 집에 혼자 있다는 공포감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혼자 집에서 놀 수 있다. 오히려 집에 어머니가 없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 그림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순수한 동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림책 몇 권만 읽어도 전혀 무섭지 않고,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집에서 혼자 노는 재미를 알고 있을라나.

 

만약에 내가 부모라면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자식이 책을 좋아하도록 어떻게 가르칠까? 정답이 없겠지만, 우선 그림책을 읽도록 권할 것이다.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걸로. 그리고 아이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좋을 것 같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의 행동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부모처럼 똑같이 따라 한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제일 좋은 방법이 부모와 자식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 간의 친밀감이 더욱 향상되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독서의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미래의 자식과 함께 읽게 될 그림책을 장만하게 된다면 『칼데콧 컬렉션』을 꼭 살 것이다. 랜돌프 칼데콧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활동한 그림책 삽화가이다. 칼데콧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해 동안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칼데콧 상’을 수여하고 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모범이다. 그림 한 컷에 달랑 글자 한 두 줄만 있거나 아예 글자가 없는 것도 있다. 글자가 없는 책이라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칼데콧은 오직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칼데콧의 그림은 누구나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려고 그림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묘사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칫 단순하게 느껴지는 선 하나만으로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케치를 많이 했던 경험 덕분에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칼데콧 상을 받았고, ‘그림책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모리스 센닥은 칼데콧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칼데콧의 그림책이 “글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이 말하고, 그림이 없는 곳에서는 글이 말한다. 마치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고 평가했다.

 

 

 

 

 

 

 

칼데콧의 그림책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더 읽고 싶어진다. 그림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다음 장면에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예스러운 그림 속에 세련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칼데콧이 묘사한 동물과 인물의 표정은 생생하다.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있는 동물과 인물은 독자 앞에서 살아서 숨을 쉰다.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위협하는 개가 무서워서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운 채 겁에 질린 고양이의 표정을 보라. 이런 재미있는 묘사는 그림책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눈웃음 짓는 강아지의 표정만 봐도 강아지의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칼데콧은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드는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아이가 읽을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눈에 최대한 맞추도록 했다. 글자에 익숙하지 않아 그림이 편한 아이부터 글자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영국에 자란 아이들의 귀에 익숙한 전래동요, 구전민요, 동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짧고 반복되는 문장이 많은 편이다.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그림의 만남. 이런 단순한 조합은 그림책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빽빽한 활자로 이루어진 책만 읽어서 색다른 독서를 원하는 독자라면 칼데콧의 그림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이 무겁고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애서가라면 이런 책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길 것이다. 심심할 때 가끔 읽어 볼 수 있다. 아니면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같이 읽어도 좋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에 익숙한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그림책을 좋아할지 모르겠다. 영국 전래동요를 낯설게 느껴진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 요즘 아이들의 취향에 맞을지 의문이다. 유명한 외국 그림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것만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폴 아잘은 “어린 시절에 처음 읽은 책과 처음 본 그림에 의해서 자기 나라의 지난 역사와 전통의 훌륭함을 알고 강한 조국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책과 그림의 추억은 가슴 깊은 곳에 차고 들어 일생 동안 간직하게 된다”고 말했다. 외국 그림책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접하는 그림책이 외국 작품이 훨씬 많은 현실에서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른도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 아직도 다 큰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 모습이 수준 낮게 보이는가. 가끔 어른도 그림책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속에 소중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부모와 아이가 그림책을 같이 읽으면 그 추억이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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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대는 분명 멋진 아빠가 될 거야~
우리집에는 칼데콧 그림책 딱 한권인데 찔린다;; 근데 지민이가 많이 좋아해. 요 시리즈 장바구니에 쏘옥 담아놔야지. :)

cyrus 2014-12-21 10:29   좋아요 0 | URL
누나도 이 그림책을 만족스러워 할거예요. ^^

바람돌이 2014-12-21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모든 종류의 그림책들을 다같이 읽었는데 어른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딱히 일치하진 않더군요. 그리고 딸랑 둘뿐인 녀석들 역시 그림책 취향이 전혀 다르더이다. ^^

cyrus 2014-12-22 20:46   좋아요 0 | URL
역시 경험자의 말씀은 유익합니다. 아이의 취향이 부모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부모 취향이 따른 책을 아이에게 권한다면, 아이들이 책을 멀리할 것 같습니다. ^^


해피북 2014-12-21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대단한 내공이 느껴지신다 했더니 역시그랬네요 ^^ 저는 동화책을 고를때 그림의 조화로움 과 색채를 주로 보는거 같아요. 조금 날카롭거나 어두운 색깔보다는 밝고 화사한 그림책을 선호하는데 아이들에게 읽어줄때도 시각적 효과가 있고 집중력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덕분에 이런 동화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과 복사해서 색칠놀이도 하고 이야기도 만들고 해도 좋을거 같네요^^ 더불어 야나님 말씀처럼 좋은 부모님이 되실거 같다는데 공감합니다^^

cyrus 2014-12-22 20:50   좋아요 0 | URL
그저 책을 좋아하지 알고 보면 헛똑똑인데요. 내공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늘 독서를 통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재 이웃분들의 건전한 비판과 의견도 귀 기울이려고 합니다. 해피북님 말씀도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라서 그림책을 고르는 부모의 심정이 무척 궁금했어요. 사실 이런 궁금증을 가진 미혼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