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현의 별 헤는 밤
이명현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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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필요 없는 동심이다. 별을 보면 멋지다는 환성과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착하고 선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시골집 마당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을 쳐다보면 무수히 많은 별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때 별은 우리의 꿈이었으며 ‘저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별을 세어 보았던 사람들은 과연 그 별을 다 셀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유난히 바람이 부는 날이면 더욱 별이 반짝였던 그 시절에 별을 보며 동심의 세계에서 꿈과 희망을 그리곤 했다.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은 인간에게 신비의 대상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가다 도랑에 빠졌다.

 

옛날에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세기도 하고, 그 많은 별 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별 하나쯤은 고를 수 있었다. 누구나 별을 가져도 충분할 정도로 별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하늘의 별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 대도시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수가 줄었다. 옛날에 그 많던 별이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밤에는 별이 빛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공해로 찌든 도시에서는 별이 안 보인다고 하지만 지금도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다.

 

과학자들은 1백37억 년 전쯤 빅뱅이 있었다고 말한다. 빅뱅으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고, 수소와 헬륨이 만들어졌다. 이후 무수한 별이 등장해 현재의 우주에 이르렀다. 우주에는 1천억 개가 넘는 은하가 있다. 1초에 30만㎞의 광속으로 1백억 년을 달려야 도달하는 은하도 있다. 이처럼 우주는 상상하기 힘든 무한대의 공간이다. 지구는 그야말로 우주의 아주 작고 아름다운 자갈인 셈이다. 우리는 별을 만든 먼지 덕분에 형성된 ‘생각하는 별 먼지’다.

 

이렇게 우주 앞에 서면 생각하는 별 먼지들은 참으로 보잘것없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고향의 흔적이 남아있을 밤하늘을 바라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천문학자 이명현 씨의 표현을 빌리면 밤하늘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아버지의 아버지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는 인류의 조상까지 늘 별과 함께했다.

 

별의 수명은 인간의 일생과 비슷하다. 별도 태어나고 죽는 일생이 있고, 사람과 똑같이 모진 생애를 산다. 별은 우주 먼지와 수소 가스가 밀집해 수축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계속 밀도가 높아지면서 핵융합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이 원시별이 완전한 별이 되기 전 수만 년 동안 스스로 수축하면서 내부 물질을 분출하는 단계를 거친다. 별 내부의 수소와 헬륨을 거의 다 태우고 나면 내부의 엄청난 에너지에 의해 별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별의 크기가 커지면서 표면 온도도 내려가 푸른색의 젊은 별들이 붉은색의 늙은 별(적색거성)로 변해간다. 거대한 성운 속에서 태어난 아기별이 자신을 태우면서 성장해가고 더는 태울 것이 없어지면 여러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생명을 다한 나뭇잎이 떨어져 땅속에 묻히면 새로 돋아나는 씨앗의 좋은 거름이 되는 것처럼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하면서 내놓은 가스와 먼지 잔해는 새로운 별과 지구와 같은 행성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하늘에 반짝거리는 저 별도 영원히 빛나지만은 않다. 당대 최고의 스타(star)도 전성기 동안 크게 반짝거리다가 한순간에 사라질 때가 있듯이 별도 밤을 비추지 않은 때가 온다. 비록 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주 한가운데에 사라지면서 흩뿌려진 별 먼지는 또 새로운 별을 만들어 낸다. 생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지구의 탄생을 살펴보면 우리의 고향은 먼 옛날 태양계 근처에서 폭발해 생을 마감한 어느 별의 중심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손녀의 손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별의 중심인 것이다. 옛날부터 인간이 별을 보며, 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진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머나먼 우주 속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스트랄한 향수. 내 묘비명을 이렇게 정했다. 칸트의 묘비명을 살짝 바꿨다. 내 머리 위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엔 별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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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5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별에 관해 새로운 사항을 알게되었어요. 폭발한다는 사실과 가스와 잔해가 새로운 행성을 만든다는 이야기 참 신기하네요^^ 그리고 벌써 묘비명을 생각하시는 모습 참 멋지시네요^^ 그러고보니 별을 올려다본지가 참 오래된거 같아요. 별이 그리워지는 밤이네요^^

cyrus 2015-01-06 13:31   좋아요 0 | URL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별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인간과 별은 깊고도 오묘한 관련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5-01-0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잖아도 칼 세이건 살롱에 이명현 박사가
한 달 동안 진행한다는데 네 생각나더라.
아무래도 사는 곳이 지방이라 좀 어렵겠지?
난 장소가 집에서 가깝긴 한데 러시아워 시간 때라
그게 그거란 생각이 든다. 과학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이 책은 좀 재밌을 것 같네.^^

cyrus 2015-01-06 19:31   좋아요 0 | URL
별과 우주에 관한 에세이집에 가까워요. 어렵지 않아요. 좋은 시를 인용한 글도 있어요. ^^
 

 

 

 

 

 

 

 

 

 

 

 

 

 

 

 

 

 

 

 

내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런데 나랑 비슷한 정치적 성향이 있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진보 성향을 까는 글에 이런 댓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노동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귀족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옹호하는 사상을 만든 것 자체가 우습다고. 그 말 속에는 현실에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마르크스 사상을 완전히 깔보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우리나라 보수는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는 진보를 무시한다. 아니, 그냥 마르크스가 쓴 책을 읽어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다. ‘마르크스=북한’,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김정은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다.

 

나는 마르크스 사상을 진득하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보수라고 내 입으로 말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사상을 완전히 폐기해야 할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사상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조건 하나의 생각 방식으로만 본다고 해서 그대로 100% 완벽하게 일치하고 딱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기준을 강조하는 생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어리석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세상을 달리 보는 생각과 의견이 많아야 한다. 비록 내 생각과 의견과 다르다고 느껴지면 건전한 공론을 통해 개진하면 된다. 자꾸 내 생각과 말이 맞는다고 우기면서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무조건 까고 보는 태도는 무식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불통의 자세이다. 이러니 보수가 꼴통 소리 듣지. 물론 진보도 보수를 헐뜯어서 맞짱으로 되갚아주는 것도 좋지 않다.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려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그가 믿는 생각이 어떤 건지 제대로 공부하고, 내 비판 의견이 상대방과 같은 진영을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솔직히 마르크스가 공장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상을 무시하는 발상은 유치하다. 그 페친은 엥겔스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마르크스 사상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저런 발상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알고 있어도 마르크스 사상을 지적하기 위해 또 이런 생각을 하겠지. 공장 사장 엥겔스도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다니 어이가 없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왜 노동자를 도우려는 사상을 만들었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 노동자의 목소리도 무시한다. 일단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찬찬히 검증하면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엥겔스 같은 사장이 나오면 귀족노조에 굴복한 어리석은 경영인 또는 종북 좌파로 욕 엄청나게 먹었을 것이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욕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음 글은 『자본론을 읽다』를 쓴 양자오의 칼럼이다. 유유출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관리자님께 허락을 받고 블로그에 공유한다.

 

 


마르크스는 평생 공장들에 들어가 노동자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가 평생의 힘을 다해 노동자를 위해 발언하고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역사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의 좋은 벗 엥겔스는 맨체스터 방직 공장의 사장이었고, 마르크스는 당연히 엥겔스를 통해 공장 제도와 그 제도를 지탱하는 자본주의 작동 논리를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엥겔스의 협력이 없었더라도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대우와 처지를 명백히 인식하는 데 자신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일찌감치 자기 사상의 핵심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소외'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외란 주인과 노예 관계의 역전이다. 혹자는 다소 중립적으로 목적과 수단 관계의 역전이라고도 말한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고, 심지어 목적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본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노예가 거꾸로 주인의 머리를 타고 올라앉아 주인을 부리는 것이다.

 

생산 관계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의 소유자, 공헌자이지만 그들 자신은 노동의 성과를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일종의 소외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노동은 원래 삶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인데, 노동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해서 노동에 필요한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거라면, 노동력 재생산의 일환일 뿐이라면 그 또한 일종의 소외다.

 

소외로부터 출발했지만 아직 혁명 수단을 설계하지 않은 청년 마르크스는 매우 낭만적인 꿈을 꾸었다. 모든 사람이 노동하고 노동으로부터 존엄과 대가를 얻으며, 일하지 않는 귀족이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 없는 사회, 그러나 모든 사람의 노동이 생활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삶의 대부분의 정신과 정력은 낚시, 음악 감상, 플라톤 읽기에 쓰는 사회. 이러한 노동과 생활 사이에서 건강한 수단과 도구의 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퇴락했다. 마르크스 또한 유행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이유의 일부는 마르크스 자신의 통찰이 빚은 결과다. 지나치게 불공평한 노동과 자본가의 관계는 노동자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폭력과 파괴도 불사하게 하여 몸에 덧씌워진 압제를 벗어나게끔 한다. 자본가 측은 이렇게 하면 잠시는 이윤을 확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전체 생산 모델이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국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중재 역할을 해서 파괴적인 혁명을 피하고자 각가지 제한을 만든다.

 

기본노동시간과 기본임금은 이러한 고려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다. 노동자가 원한다 해도 국가는 매주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여 그들이 일정 시간 쉬고 삶을 누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착취하지 못하도록, 노동자가 긴 시간 노동해도 필요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본임금을 줘서 그들이 쉬면서도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추게 해야 한다.

 

노동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노동을 목적으로 삼으면 사는 것이 그저 계속 노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사람들은 크게 탄식할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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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5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말씀해주셨어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견해로 무조건 잘못이라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기도 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이덕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데서 더 심해지고, 사람의 재앙은 항상 남을 업신 여기는 데서 생겨난다고요. 그리고 덕분에 양자오저자의 칼럼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되었어요.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5-01-06 13: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 의견과 생각을 말하기가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특히 온라인은 더 심해요. 요즘 인터넷이나 SNS으로 정치 동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만 맞다고 생각해요.

하양물감 2015-01-06 0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적성향을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섣부른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싸움으로 번지더라구요.
제대로 표현하기위해선 제대로 알아야겠지요.

cyrus 2015-01-06 13:3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여기에 언급하기가 망설였어요. 나름 두 입장을 공정하게 바라보려고 하는데 저도 좀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의 남산동 헌책방에 쭈그려 앉아 몇 시간씩 낡은 책을 뒤적일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현대사를 헌책방에서 배웠고, 하늘처럼 떠받들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왜 문제 많은 독재자인지 알게 되었다. (『안도현의 발견』중에서, 104쪽)

 

 

가끔 책을 읽다가 (헌)책방에 관한 언급이 두 줄이라도 나오면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어딘가에서 만날 듯한 예감처럼. 책방에 가서 책을 뒤적거렸을 글쓴이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러면서 나도 직접 책방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필 대구 남산동이라니. 또 한번 가고 싶군.

 

 

 

 

 

 

이곳도 한때 책방이 많았다. 풍문에 들리자면 1970~80년대에 동인동(대구역 지하차도 부근에 밀집했음)과 더불어 책방 수십 개가 빼곡히 늘어설 정도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인근 학교가 개학하면 학생 손님들이 몰려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은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 거기에 알라딘 중고서점의 등장으로 사람 냄새 책 냄새가 가득했던 책방의 풍경은 많이 사라져버렸다. ‘헌책방 골목’이라는 지명만 남은 지금, 이름은 이름일 뿐 예전 그때 그 풍경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책방 안에는 오랜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곰팡이 내만 남아 있다. 책방에 잠들어버린 책들은 새 주인이 찾아와 자신을 깨워주기를 기다린다. 

 

이 문장 세 줄을 읽으면서 갑자기 궁금하게 느껴지는 점 하나. 과연 시인이 학창시절 방문했던 남산동 책방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런 사소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남산동 헌책방 골목으로 갔다. (라고 써보지만, 사실 책을 사고 싶어서 가는 거다)

 

 

 

 

헌책방 골목은 남문시장 사거리에 내려서 건너가면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제일 먼저 ‘코스모스북’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6.25 전쟁 때 이곳에서 터를 잡은 오래된 책방이다. 당시 이 일대에 고등학교가 많이 밀집해 있던 터라 서점이 장사하기에 아주 좋은 터였다. 지금 코스모스북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님은 1980년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코스모스북 1대 주인장 채해기님이 작고한 뒤인 1985년에 인수하게 된다. 책방 불황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북은 전국의 애서가들의 발길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 헌책방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온라인 판매를 병행하기 시작한 곳도 코스모스북이다.

 

 

 

 

 

코스모스북 건물 뒤로 몇 발자국 걸어가면 또 다른 책방 세 개를 발견할 수 있다. 해바라기 서점과 대도서점 그리고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월계서점이 있다. 손님의 발길이 드문 책방 특성상 평일에도 문을 닫는 경우가 있다. 어제는 해바라기 서점이 문을 열지 않았다. 찬바람이 외투 안으로 파고들어 살이 얼얼하게 느껴지도록 추운데도 대도서점 주인장님은 좁은 문을 활짝 연 상태에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주인장님 앞에는 끈으로 묶은 책들이 바닥에 쫙 깔려 있다.

 

 

 

 

 

월계서점은 이제 곧 대학에 입학하게 될 자녀(로 추정함)를 둔 중년의 여 주인장님이 운영한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무척 친절하신 분이다. 코스모스북보다 월계서점을 자주 들리는 데 그 이유가 여 주인장님이 친절한 점도 있지만, 항상 음악이 흐르기 때문이다. 여 주인장님이 선호하는 8090 가요를 들을 수 있다. 나도 8090 가요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곳에 오면 책과 음악 때문에 눈과 귀가 즐겁고 북 카페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결국, 남산동 헌책방 골목에 남아있는 책방은 총 네 곳. 안도현 시인은 커다란 빌딩이 들어서면서 사라져버린 책방들 그리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책방 네 곳 중 아무 데나 들려서 탑처럼 쌓인 책더미 사이를 뒤적거렸을 것이다. 마음 내기는 대로 들릴 수 있는 책방이 남산동에 많았을 것이다. 고작 세 줄로 표현된 시인의 책방 추억이 너무나도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지금도 입지가 불안한 책방의 현실이 안타깝다. 지금 내가 자주 가는 책장 네 곳도 몇십 년 뒤에 다시 갈 수 없는 추억으로 남으면 안 되는데. 많지 않은 애서가 손님들의 발길을 잊지 못해 사시사철 기다리면서 책방을 열고 있는 네 곳의 책방 주인장님이 무척 고마울 따름이다.

 

 

 

 

 

비록 시인의 책방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책방에 두 시간동안 확인한 끝에 아주 귀한 절판본을 발견했다. 토마스 메취와 페터 스쫀디의 『헤겔 미학 입문』(종로서적, 1983)과 에드워드 카의 『러시아 혁명』(나남, 1983)이다.

 

 

 

 

 

 

 

 

 

 

 

 

 

 

 

 

 

 

 

 

 

 

 

 

 

 

 

 

 

 

『헤겔 미학 입문』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휴머니스트, 2014)에 수록된 ‘정신의 오디세이’ 편 참고문헌이다. ‘정신의 오디세이’ 편은 헤겔의 미학을 요약, 설명하는 글이다. 이 책은 영화 ‘미인’을 연출한 여균동 감독이 서울대 철학과를 재학하고 있을 때 번역했다. 책의 1부는 토머스 메취의 『Hegel und die philosophische Grundlaegunder Kunstsoziolo 』를, 2부는 페터 스쫀디의 『Poetilc und Geschichtphilosophie I』의 일부를 저본으로 삼았다. 1980년대 당시 헤겔 미학 원서를 우리말로 읽기 쉽지 않은 시절이라서 이 책은 헤겔 미학의 호기심에 목마른 독자들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책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헤겔 미학 개론서가 많이 나오지 않은 사실이 놀랍다. 최근에 나온 헤겔의 『미학 강의』서론을 해설한 『헤겔 미학 개요』(박배형, 서울대학교출판부, 2014)이 헤겔 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론서로 가장 근접한 책이다. 

 

 

 

 

 

 

 

 

 

 

 

 

 

 

 

 

 

에드워드 카의 『러시아 혁명』은 1917년부터 1929년까지 준비한 방대한 저작물 '소비에트 러시아사'를 일반 독자를 위해 1977년에 쓴 개론서이다. '소비에트 러시아사'는 총 4부작으로 '볼셰비키 혁명'(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 '공위기간'(Interregnum, 1923~1924), '일국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 1924~1926), '계획경제의 기초'(Foundations of a Planned Economy, 1926~1929) 등으로 되어 있다.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집권하는 시기인 1920년대 러시아의 발전경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카는 소비에트의 공업화와 계획정치를 다룬 장을 알렉 노브(Alec Nove)의 『소련경제사』(창비, 1998)을 참고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1997년에 『러시아 혁명』은 새 표지로 다시 나왔지만, 알렉 노브의 책과 함께 절판되었다. 

 

 

 

 

 

 

 

 

 

 

 

 

 

 

 

 

 

헤겔 미학과 러시아 혁명. 전공자가 아닌 이상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며 자세하게 배울 수도 없을 것이다. 평범한 독자들이 시도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특히나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읽으면 요즘 '종북'으로 의심받기 딱 좋다. 1980년대에 카의 『러시아 혁명』은 불온서적으로 취급받았고,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이 32년 만에 무죄가 선고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하긴 대학생 필독도서인 『역사란 무엇인가』도 불온도서로 오명 받은 시절이 있었다. 카의 책이 최근에서야 낡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편견의 딱지에서 벗어난 건 다행이지만, '마르크스', '레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도 북한으로 떠나라고 감정 섞인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북한의 세습주의를 엄청나게 싫어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의 환상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일부 진보 세력의 태도를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이 전혀 다른 입장을 완전히 배격하기 위해 이성적 검증을 배제한 종북 프레임을 내세우는 보수 세력은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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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제가 늘 꿈꾸던 그림인데 ㅎㅎ 책속에 등장하는 거리를 걸어보고 마치 책속에 있는듯 느껴보는거. 특히나 중고서점들을 거닐며 들려주시는 이야기라 푹~빠져들게 되네요^^ 대구에 이런 헌책방이 있는지 몰랐는데 덕분에 좋은 정보 알았어요!! 네이버 검색창에 대구 헌책방해도 크게 검색되지 않더라구요. 코스모스 서점도 가보고 싶고, 80~90년대의 음악이 흐르는 월계서점도 들러보고 싶네요^^

cyrus 2015-01-04 23:17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책방이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ㅎㅎㅎ 책방 안에 들어서면 곰팡이 냄새를 견뎌야하고, 손에 먼지가 묻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겨울에 건물 안에 있어도 추워요.

대구시청 쪽으로 가는 방향에도 헌책방 몇 군데 있습니다. 저는 알라딘 중고샵에 먼저 들린 다음에 바로 그곳으로 갑니다. ^^

수이 2015-01-03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렇게 가슴이 쓰리지_ 사진 보니까 더_

cyrus 2015-01-04 23:18   좋아요 0 | URL
어떤 사진이요? 책방 건물 사진 말입니까?

수이 2015-01-05 11:59   좋아요 0 | URL
응_ 저기 지나가면서 옛날에 있었던 일 추억하니까_ :)

바람돌이 2015-01-0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 골목은 이제 어디든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네요. 예전에는 동네마다 하나쯤씩도 다 있었는데 다 어디를 갔는지 없어졌고요.... 대구의 헌책방 골목도 부산의 보수동과 비슷한 분위기네요. 부산 보수동은 요즘 그나마 관광코스 비슷하게 되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요.

cyrus 2015-01-04 23:20   좋아요 0 | URL
보수동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알려져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고, 책방조합을 구성해어 보수동 홍보에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대구의 책방 현실은 열악해요.

하양물감 2015-01-04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그곳으로 가본다는게 쉽지는 않은데 ^^

cyrus 2015-01-04 23:21   좋아요 0 | URL
제가 대구에 거주하고 있어서 버스 타면 10분 만에 갑니다.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5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찍으신 사진 올려주시니 너무 좋네요~
전 대구는 차 타고 딱 한 번 쓰윽 지나가 본 경험 밖에 없어요.
가보고 싶긴 한데 별 연고도 없고 또 머네요 ㅎㅎ

헌책방의 곰팡이 냄새와 먼지들...사실 그리 낭만적이진 않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삐까뻔쩍한 대형서점 말고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단 생각해요.
아날로그로 돌아가고 싶을때 같은 때 말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올 한 해도 cyrus님의 리뷰 기대할께요^^

cyrus 2015-01-05 19:34   좋아요 0 | URL
손님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늘 변화를 시도하는 책방 몇 군데 있어요. 현맘님이 서울에 사신다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곳에 가보면 좋아요. 책방을 운영하시는 분이 최근 책을 펴낸 윤성근님입니다. 실내 분위기가 무척 좋고,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어요. 대구에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처럼 비슷하게 운영하는 물레책방이라는 곳도 있어요. 현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그린 2016-03-20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대구헌책방 검색하다가 들어오게 되었어요.
가봐야 알겠지만 저 헌책방골목을 가면 옛날교과서도 구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때 배웠던 역사교과서를 구하고 싶어서;ㅅ;....

댓글 보다보니 대구시청쪽으로 가도 헌책방이 몇군데 있다고 하셨는데 중앙로역에 내려서 그냥 대구시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헌책방들이 나올까요? 다 없어져버린건 아니겠죠?ㅠㅠ 처음 가보는데 몇군데라도 있었으면... 헛걸음 하면 너무 슬플거같아요 ㅠㅠ

cyrus 2016-03-21 12:22   좋아요 0 | URL
방문하기 전에 헌책방에 전화로 문의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헌책방 어딜 가든 교과서가 없을 겁니다. 직접 가게에 방문해서 책방 사장님한테 교과서 있느냐고 물어보면 없다는 답변만 받을 수 있습니다.

대구시청 쪽으로 가다 보면 시청 건물 옆에 헌책방 건물 세 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헌책방 건물 두 개 있습니다.
 

 

 

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본 글이다. 옛날에 애꾸눈 왕이 있었는데, 나라 안의 유명한 화가들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다. 모든 화가는 어떻게 왕의 모습을 잘 그릴까 고민을 했다. 애꾸눈을 그대로 그린 화가들, 애꾸눈이 아닌 것처럼 정상적으로 그린 화가들 제각기 다양하게 그렸다. 그런데 임금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거짓으로 그린 것도 안 되며 애꾸눈인 자기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 또한 몹시 불쾌하다며 다른 화가를 찾았다. 많은 화가 중에 마침내 임금님의 마음에 흡족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나타났다. 그 화가는 임금의 미소 띤 옆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폐하,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폐하는 미소 짓는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왕의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여 미적 완성도를 높인 초상화를 제작한 이 화가는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대상을 진짜처럼 똑같이 그릴 줄 안다고 해서 다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대상도 아름답게 보고 묘사하는 능력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사실 초상화의 등장은 원래 얼굴 정면이 아닌 측면을 그린 것으로 시작되었다. 인물 또는 사물을 대충 나타낸 그림을 실루엣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의 색조만을 사용해 만든 이미지나 도안, 또는 물체의 윤곽이나 윤곽이 뚜렷한 그림자를 의미했다. 실루엣은 종이를 오려서 그림자 초상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던 18세기 중반의 프랑스 재무장관인 에티엔 드 실루에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그는 흰 종이 위에 검은 종이를 옆모습처럼 잘라 붙여 만든 초상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조지프 라이트  「코린토스의 소녀」  1782~1785년경

 

 

그렇다고, 실루엣을 만든 실루에트가 측면 초상화를 최초로 그린 사람은 아니다. 그 기원을 찾아보려면 미술의 역사를 더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벽에 비친 인물의 그림자 윤곽을 그린 코린토스 도공의 딸에서 측면 초상화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공의 딸은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 떠나보내야 하는 생이별의 슬픔을 견디는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훈련소로 떠나보낸 남자친구의 사진을 지갑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곰신의 처지가 되었으나 그땐 사진이 있을 리가 없다. 멀리 떠나 있어도 애인의 얼굴이 바라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도공의 딸은 애인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어 나타난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렇듯 서양의 초상화는 정면을 그리던 동양의 초상화와 달리 측면을 중시했다. 측면의 윤곽을 뜻하는 프로파일(profile)은 오늘날 특정 인물에 대한 단평이라는 뜻으로 더 알려졌다. 정면이 아닌 측면이야말로 한 사람의 특징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인식했다. 

 

모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멋있지 않은 모델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 모델을 정확하게 그리기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동화 속 궁정화가는 화가 중에 극한직업일지도 모른다. 왕은 화가가 만나게 될 모델의 ‘끝판왕’이다. 권력자의 얼굴을 늘 바라보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화가로서의 재능과 배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Mission impossible)이다. 왕이 초상화가 마음에 든다면 더 많은 명예와 부를 얻을 것이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화가의 입지는 곤란해진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  1472년경

 

 

과연 이 그림의 모델은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프란체스카는 근엄하게 보여야 할 모델을 솔직하게 그리는 데 치중한 것 같다. 관객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매부리코와 검버섯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약간 풀린 듯한 공작의 눈은 세상의 거센 풍파를 딛고 정상에 오른 권력자의 고된 여정을 말해준다. 화가가 공작을 무기력하게 그렸어도 한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자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공작 부부의 배경으로 공작이 소유한 땅을 그려 넣어 권력자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가 공작 부부를 서로 바라보는 설정으로 측면을 그린 것은 공작을 멋있게 그리고 싶은 화가의 배려이다. 공작은 마상시합 중에 오른쪽 눈을 다쳐 실명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카는 공작의 오른쪽 눈이 드러나지 않도록 왼쪽 측면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공작의 부인은 자연스럽게 오른쪽 측면으로 그리게 됨으로써 부부는 죽어서도 그림에서나마 영원히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부 초상화에 관련된 또 하나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로 마주 보는 공작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 어렴풋이 재현된다. 부부 초상화가 제작되기 전에 공작부인은 아들을 출산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가는 부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를 마주보도록 그렸다.

 

프란체스카가 못생긴 공작을 있는 그대로 그렸던 것은 오른쪽 눈을 잃고, 거의 다 늙어간 정도로 남성미가 완전히 상실된 공작의 곁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공작부인과의 고결한 사랑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찬바람같이 훨훨 들어오는 세월은 뜨거웠던 사랑 감정을 식게 한다. 이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단순히 권력과 부를 과시하려는 일종의 명예인증서라기보다는 고결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인증하는 멋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눈, 코, 입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정면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옆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옆모습은 우리의 눈을 이쪽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은근히 유혹한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콧대와 조각 같은 옆모습이 사랑받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다. 가짜 콧대와 가짜 눈으로 겉모습이 화려한 얼굴을 자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안도현, ‘옆모습’ 중에서)

 

 

어쩌면 삶의 동반자와 백년해로하는 과정에 정작 옆모습을 소홀히 여길 수도 있다.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도 늘 바라보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도 예쁘게 보인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에서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옆모습에서 진솔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정겹다. 옆모습, 옆모습, 자꾸 바라보면 시큰거린 옆구리에 사랑하는 사람의 옆구리가 있음을 가까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한, 꾸밈없고 진실한 그 옆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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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정겨운 얼굴이 좋아. 아주 미남이거나 아주 미녀보다는. 그나저나 우리 사이러스 얼른 연애를 해야 할 터인데_

cyrus 2015-01-03 20:30   좋아요 0 | URL
연애세포가 완전히 죽기 않기 위해 오늘도 글로 사랑을 논합니다. ㅋㅋㅋㅋ

댄스는 맨홀 2015-02-04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게 사랑인 것 같아요.
 

 

 

 

 

 

 

 

 

 

 

 

 

 

 

 

 

 

을미년이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는 책으로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 나온 이야기』(모비딕, 2014년)를 펼쳤다. 새해 첫날이라서 그런지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에 '점쟁이'라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경찰서장이 마이어스 부인이라는 사람의 정체를 의심한다. 마이어스 부인은 점쟁이다. 그녀의 집에 매일 십여 명의 방문객이 점을 받으러 온다. 경찰서장은 마이어스 부인이 점쟁이로 위장하는 간첩이라고 추정한다. 점쟁이의 정체가 궁금한 경찰서장을 위해서 그의 부인이 직접 점쟁이를 만나기로 한다. 경찰서장의 부인은 점쟁이에게 점을 받는 척하면서 그녀의 말과 행동을 관찰한다. 점쟁이는 카드 점으로 경찰서장의 부인의 미래를 알려준다. 올해 내로 부유한 젊은 사업가와 결혼할 수 있는데, 나이 많은 남자가 이 결혼을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경찰서장의 부인이 점쟁이에게 얘기하는 내용은 다 거짓말이다. 부인은 점쟁이에게 자신을 미혼이라고 밝혔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형사과에 소속된 경찰이라고 속였다. 즉, 점쟁이의 점괘 결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인 셈이다. 점쟁이의 엉터리 점괘는 그녀에 대한 간첩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점쟁이는 간첩 혐의에서 벗어나지만, 고용 허가를 받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다. 일 년 후, 점쟁이의 엉터리 점괘 내용대로 경찰서장의 부인은 남편을 버리고 젊은 백만장자와 결혼한다.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 코웃음 치던 엉터리 점괘 결과가 종종 진짜로 이루는 경험이 있다. 점쟁이의 실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점쟁이의 신기가 뛰어난 것일까. 절대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이다. 이 소설에서 점쟁이는 카드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경찰서장의 부인에게 알려준 점괘 내용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밝혀지자 점쟁이는 아무렇지 않은 일인 듯이 변명한다. 점이 궁금한 사람들이 듣고 싶은 내용만 알려 주기 때문에 제 일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점쟁이는 특별한 신기로 점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속내가 드러나는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가 듣고 싶은 좋은 내용만 알려주는 것뿐이다.

 

'점쟁이' 다음에 나오는 단편의 제목은 '신통력의 소유자'다. 이 소설에는 친필 글씨가 적힌 종이가 든 봉투 안에 손만 넣어도 친필 주인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맞추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 그의 신통력을 소문으로 알게 된 검사는 사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심이 가득한 검사는 자신이 직접 누군가의 친필 글씨를 준비해서 신통력이 사기임을 밝히고자 한다. 초능력자는 검사가 가져온 친필 글씨의 주인이 절대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위선자, 기회주의자,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검사는 초능력자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능력의 실체를 부인한다. 검사는 원래 범죄자의 친필 글씨를 준비하려다가 그만 실수로 자신의 친필 글씨가 있는 종이를 봉투에 넣고 말았다. 초능력자가 했던 말이 껄끄럽게 생각하지만, 그가 말한 얘기는 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잊어버린다. 그런데 검사는 초능력자가 말한 내용을 재판 변론에 써먹는다. 검사의 화려한 수사 덕분에 범죄자가 유죄 판결을 받는 데 성공한다. 

 

차페크가 쓴 두 이야기는 신통력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와 그 속임수에 믿는 자의 심리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부조리한 결말로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듣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여 점을 치는 엉터리 점쟁이, 초능력자의 엉터리 예측을 무시하면서도 그 내용을 자신의 변론으로 사용하는 검사. 가짜 신통력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나 그 속임수를 진짜 신통력이라고 받아들이는 자를 통해 인간 심리의 약점을 희화화한다.

 

이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인간도 오늘의 운세, 신년 사주를 좋아한다. 삶의 앞날을 정확하게 내다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냥 재미로 운세나 점괘를 본다지만, 내심 앞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가 무척 궁금해한다. 점쟁이가 내 성격을 정확하게 맞추면, 그가 얘기하는 내용 하나하나 다 믿고 싶어진다. 반대로 좋지 않은 점괘를 들으면 걱정한다. 점쟁이의 부정적인 점괘가 엉터리라고 부정해보지만, 여전히 점쟁이의 말을 뇌리에 박혀서 잊히지 않는다.

 

 

 

 

 

 

 

 

 

 

 

 

 

 

 

 

 

 

사주와 운세가 꼭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 심리 효과를 ‘바넘 효과(Ba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되었다. 심리학자인 포러라는 사람이 성격 진단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까닭에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포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격 검사를 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신문에 난 점성술 내용의 일부만을 고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신들의 성격과 맞는지를 평가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의 성격과 일치하다고 답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점괘는 매우 일반적이다. 그래서 점쟁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점괘가 마치 자신을 잘 나타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점괘가 정확하다고 착각한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오늘의 운세가 들어맞을 개연성은 그리 높지 않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하루 똑같은 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궤변에 불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간혹 점괘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고작 하나 맞췄다고 해서 무조건 신통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재미삼아 시간 떼우기용으로 점을 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바넘 효과를 이용해 사이비 점성술 등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상술에 이용하는 경우는 부정적인 효과다. 돈 낭비, 시간 낭비다. 점이나 별자리, 성격테스트 등을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바넘 효과가 아닌지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을 사는 것이 벌써 피곤해진다. 새해 토정비결에 나온 내용이 안 좋다고 해서 새해 첫날부터 우울하면 곤란하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많고, 피하고 싶어도 안 좋은 일은 우리 곁으로 따라온다. 운세는 운세일 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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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2학년때 여러 띠의 사람들이 모여 여행을 가던날, 부산역에 앉아 띠별 오늘의 운세를 보았는데 그날 그 내용대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희안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이후 운세를 안봅니다. 무서워서^^

cyrus 2015-01-01 23:22   좋아요 0 | URL
세상에! 운세 내용이 모두 일어나는 상황도 있군요. 저도 사실 운세 내용에 호기심은 있지만, 되도록 잘 안 믿으려고 해요. 생각해보면 운세 내용 절반이라도 제대로 맞은 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

해피북 2015-01-02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이야기네요ㅎ 예전에 제가 알던 동생이 어떤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점을보더라구요 아주머니왈 위가 안좋고 변비가 있지 뭐이런식으로 이야기하니 엄청난 점괘인듯 빠져드는 동생을보며 후에 현대인들은 다 그병이있다고 이야기해줬더니 머쩍어 하더라구요ㅋ

cyrus 2015-01-02 22:02   좋아요 0 | URL
점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요. 오히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길 것 같아요. ^^;;

수이 2015-01-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도 사실 별자리 믿는 마음이 큰데_ 쿨럭_ 찔린다.

cyrus 2015-01-03 20:30   좋아요 0 | URL
너무 믿지 않으면 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