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런데 나랑 비슷한 정치적 성향이 있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진보 성향을 까는 글에 이런 댓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노동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귀족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옹호하는 사상을 만든 것 자체가 우습다고. 그 말 속에는 현실에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마르크스 사상을 완전히 깔보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우리나라 보수는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는 진보를 무시한다. 아니, 그냥 마르크스가 쓴 책을 읽어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다. ‘마르크스=북한’,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김정은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다.

 

나는 마르크스 사상을 진득하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보수라고 내 입으로 말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사상을 완전히 폐기해야 할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사상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무조건 하나의 생각 방식으로만 본다고 해서 그대로 100% 완벽하게 일치하고 딱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기준을 강조하는 생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어리석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세상을 달리 보는 생각과 의견이 많아야 한다. 비록 내 생각과 의견과 다르다고 느껴지면 건전한 공론을 통해 개진하면 된다. 자꾸 내 생각과 말이 맞는다고 우기면서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무조건 까고 보는 태도는 무식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불통의 자세이다. 이러니 보수가 꼴통 소리 듣지. 물론 진보도 보수를 헐뜯어서 맞짱으로 되갚아주는 것도 좋지 않다.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려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그가 믿는 생각이 어떤 건지 제대로 공부하고, 내 비판 의견이 상대방과 같은 진영을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솔직히 마르크스가 공장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상을 무시하는 발상은 유치하다. 그 페친은 엥겔스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마르크스 사상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저런 발상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알고 있어도 마르크스 사상을 지적하기 위해 또 이런 생각을 하겠지. 공장 사장 엥겔스도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다니 어이가 없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왜 노동자를 도우려는 사상을 만들었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 노동자의 목소리도 무시한다. 일단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찬찬히 검증하면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엥겔스 같은 사장이 나오면 귀족노조에 굴복한 어리석은 경영인 또는 종북 좌파로 욕 엄청나게 먹었을 것이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욕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음 글은 『자본론을 읽다』를 쓴 양자오의 칼럼이다. 유유출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관리자님께 허락을 받고 블로그에 공유한다.

 

 


마르크스는 평생 공장들에 들어가 노동자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가 평생의 힘을 다해 노동자를 위해 발언하고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역사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의 좋은 벗 엥겔스는 맨체스터 방직 공장의 사장이었고, 마르크스는 당연히 엥겔스를 통해 공장 제도와 그 제도를 지탱하는 자본주의 작동 논리를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엥겔스의 협력이 없었더라도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대우와 처지를 명백히 인식하는 데 자신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일찌감치 자기 사상의 핵심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소외'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외란 주인과 노예 관계의 역전이다. 혹자는 다소 중립적으로 목적과 수단 관계의 역전이라고도 말한다.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고, 심지어 목적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본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노예가 거꾸로 주인의 머리를 타고 올라앉아 주인을 부리는 것이다.

 

생산 관계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의 소유자, 공헌자이지만 그들 자신은 노동의 성과를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일종의 소외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노동은 원래 삶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인데, 노동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해서 노동에 필요한 노동력만을 제공하는 거라면, 노동력 재생산의 일환일 뿐이라면 그 또한 일종의 소외다.

 

소외로부터 출발했지만 아직 혁명 수단을 설계하지 않은 청년 마르크스는 매우 낭만적인 꿈을 꾸었다. 모든 사람이 노동하고 노동으로부터 존엄과 대가를 얻으며, 일하지 않는 귀족이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 없는 사회, 그러나 모든 사람의 노동이 생활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삶의 대부분의 정신과 정력은 낚시, 음악 감상, 플라톤 읽기에 쓰는 사회. 이러한 노동과 생활 사이에서 건강한 수단과 도구의 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퇴락했다. 마르크스 또한 유행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이유의 일부는 마르크스 자신의 통찰이 빚은 결과다. 지나치게 불공평한 노동과 자본가의 관계는 노동자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폭력과 파괴도 불사하게 하여 몸에 덧씌워진 압제를 벗어나게끔 한다. 자본가 측은 이렇게 하면 잠시는 이윤을 확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전체 생산 모델이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국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중재 역할을 해서 파괴적인 혁명을 피하고자 각가지 제한을 만든다.

 

기본노동시간과 기본임금은 이러한 고려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다. 노동자가 원한다 해도 국가는 매주의 노동시간을 제한하여 그들이 일정 시간 쉬고 삶을 누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착취하지 못하도록, 노동자가 긴 시간 노동해도 필요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본임금을 줘서 그들이 쉬면서도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추게 해야 한다.

 

노동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노동을 목적으로 삼으면 사는 것이 그저 계속 노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사람들은 크게 탄식할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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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5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말씀해주셨어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견해로 무조건 잘못이라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기도 해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이덕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데서 더 심해지고, 사람의 재앙은 항상 남을 업신 여기는 데서 생겨난다고요. 그리고 덕분에 양자오저자의 칼럼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되었어요.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5-01-06 13: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 의견과 생각을 말하기가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특히 온라인은 더 심해요. 요즘 인터넷이나 SNS으로 정치 동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만 맞다고 생각해요.

하양물감 2015-01-06 0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적성향을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다. 섣부른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싸움으로 번지더라구요.
제대로 표현하기위해선 제대로 알아야겠지요.

cyrus 2015-01-06 13:3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여기에 언급하기가 망설였어요. 나름 두 입장을 공정하게 바라보려고 하는데 저도 좀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