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탈》 읽기’ 첫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계시는 ‘책갈이’ 님이라는 분이 모임 후기를 썼어요. 책갈이 님은 서론1장 『여성 거래 :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에 대한 내용 정리를 A1 용지 한 면에 다 채웠어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1장에 나오는 내용들이 엄청나요. 마르크스(and 엥겔스), 프로이트, 라캉,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나오고, 루빈이 네 사람이 주장한 이론을 비판합니다. 아주 깔끔하게 핵심 내용을 요약한 글이라서 《일탈》을 혼자서 읽기 시작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책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요약문을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무려 900쪽에 달하는 <일탈>의 첫 모임은 거칠게 퍼 붓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는 빗발을 뚫고도 지난주 못지않은 인원이 참석했습니다. 그만큼 푸코의 <성의 역사> 이후 가장 급진적인 성 이론 실천가로 알려진 게일 루빈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서론과 1장 ‘여성거래’를 읽고 난 대부분 참석자는 “특히, 서론이 좋았다”라는 느낌을 나눴습니다. 서론에서 게일 루빈은 <일탈>에 게재된 논문이 저자의 삶, 그녀가 살아온 시대적, 공간적 상황 속에서 어떠한 맥락에서 연구 결과가 도출될 수 있었는지를 에세이처럼 풀어놓습니다. 인종차별과 종교적 우익 성향이 지배적인 미국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게일 루빈은 남부를 지배하는 세계관과 의제에 익숙했던 자신의 태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후에도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감추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저자가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에 있으며, 위치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를 실천하는 연구자로서 저자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합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뉴라이트’의 부상과 백래시 현상, 젊은이에 대한 성적 순결을 권장하고, 낙태의 범죄화, 외설과 포르노 논쟁, 동성애 혐오 등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자신들의 이익과 상반되는 투표를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과 인종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1장 여성거래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재생산’과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두 용어는 ‘경제적 체계’와 ‘성적 체계’ 사이의 구분과 성적체계가 일정한 자율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루빈이 주장하는 섹스/젠더 체계는 단순히 생산양식의 단순한 재생산적 계기가 아닙니다.

 

 

“섹스/젠더 체계는 한 사회가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키고 그와 같이 변형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련의 제도입니다” (93쪽).

 

 

엥겔스레비스트로스가 주목한 친족체계는 섹스/젠더 체계를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대표적 형태입니다. 또, 레비스트로스는 여성 교환이 사회의 기원을 형성하고 근친상간 금기를 문화와 자연의 경계에 위치시킵니다. 나아가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적 인격(젠더)을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고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배경입니다. 결론적으로 여성 억압의 원인은 여성 교환을 통해 친족제도를 성립시키고 여성 억압을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 체계 속에 위치시킵니다. 따라서 여성교환은 섹스/젠더 체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의 무기고가 될 수 있으며 섹스/젠더 체계는 불변의 억압 장치가 아니라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재조직될 수 있습니다.

 

루빈이 꿈꾸는 페미니즘 혁명은 여성억압의 해방 그 이상입니다.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역할들의 제거, 즉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입니다. 그 꿈에는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이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도 무관합니다. 즉, 섹슈얼리티가 사회와 정치적 의제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 밀려나는 꿈입니다. 여자답다, 남자답다, 엄마답다, 선생님답다, 학생답다 등 “답다”의 구속복을 벗어버리는 꿈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탈>을 읽고 토론에 참석한 구성원 모두가 꾸는 꿈이기도 합니다.

 

다음 모임은 2장 “인신매매에 수반되는 문제”, 4장 “가죽의 위협”을 읽고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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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7-10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책들 한 데 모으면 한 사람이 못 들겠네요.

cyrus 2018-07-11 07:51   좋아요 0 | URL
월요일 모임에 안 오신 분들의 책을 포함하면 무게가 어마어마해져요.. ^^;;

2018-07-11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1 07:53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건 아니고요, 읽고 토론할만한 챕터를 선별해서 읽을 예정입니다. ^^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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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라.

그러면 그가 펼치게 되는 미학론은 적어도

나에게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 《연애대위법》, 동서문화사, 606쪽)

 

 

 

톨스토이(Tolstoy)《전쟁과 평화》는 한마디로 웅장하다. 이야기가 묵직한 데다 분량도 방대해 완독이 쉽지 않다. 《전쟁과 평화》는 귀족 사회의 허례허식, 남녀 간 사랑, 군인들의 애국심, 러시아 민중의 낙천성 등 인간의 다양한 정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다채로운 삶의 유형을 그린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 이야기 속에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있다. 아무도 톨스토이만큼 작중 인물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표현력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부터 데카브리스트(Decabrist, 십이월당원) 반란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 1820년까지 15년 동안 격동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쓰였다. 이 소설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한두 명으로 특정할 수 없다. 《전쟁과 평화》의 기본 줄거리는 네 가문의 흥망성쇠다. 볼콘스키 가문, 베주호프 가문, 로스토프 가문, 쿠라긴 가문의 일원들이 등장한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냉철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다. 그의 친구 피예르 베주호프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상주의자이다. 피예르는 표도르 돌로호프와 바람난 아내 옐렌과의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 프리메이슨 가입 이후로 그는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기분을 느낀다. 피예르는 신(神),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고민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기병 장교로 복무한 후 퇴역하여 영지를 경영한다. 옐렌의 오빠 아나톨 쿠라긴은 니콜라이의 여동생 나타샤를 유혹하는 바람둥이로 그녀와 약혼했던 안드레이 공작과 대립한다. 나타샤는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이다. 소설 초반부에 아름답고 기품 있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로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격의 변화가 나타난다. 나타샤와 쿠라긴의 염문이 알려지면서 안드레이 공작과의 약혼은 깨지게 되고, 한동안 나타샤는 실의에 빠진다. 그 후 종교에 귀의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 전투 중에 크게 다친 안드레이 공작을 만난 나타샤는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간호한다. 그녀는 피예르와 결혼하여 남편과 자식들을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아내로 살아간다.

 

《전쟁과 평화》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쉽게 읽힐 책도 아니다. 사상 최대의 인물들이 나오는 만큼 서사 구조가 산만하다. 소설에 5백 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서로 만나기도 하고 얽히기도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읽기 힘든 작품에 열광하는 걸까. 답은 책장을 넘기면서 경험하는 일반 소설과 다른 독특한 구성 방식에 있다.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만큼은 아니지만, 《전쟁과 평화》는 독특한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 또는 특정 사건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두고, 작가는 개입하지 않는다. 작가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러나 《트리스트럼 샌디》는 작가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서 두서없이 전개된다. 《전쟁과 평화》도 ‘기승전결’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탈피해 독자가 기대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거부한다. 톨스토이는 이야기 중간마다 전쟁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한다.

 

《전쟁과 평화》 3권 2부 19장은 보로디노(Borodino) 전투의 과정을 분석한 톨스토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낸 글이다[1]. 18장과 20장은 피예르와 그 주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다. 보로디노 전투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시간적 배경이지만, 전쟁사에 관심 없는 독자라면 역사적 전투에 대한 작가의 분석을 건너뛸 수 있다. 《전쟁과 평화》는 총 2부로 구성된 ‘에필로그’로 끝맺는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역사관을 주장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썼다. 이처럼 소설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내는 작가의 개입이 《전쟁과 평화》의 독특한 매력이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등장과 러시아의 승리 원인을 하나의 원인으로만 설명하는 역사적 관점을 비판한다. 그에게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합쳐져서 생긴 시대적 산물인 것이다.

 

무슨 이런 장르가 불분명한 소설이 있을까. 사실 에필로그(정확히 말하면 ‘논문’)를 읽지 않아도 소설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작가의 개입은 소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지만 다른 러시아 근대소설에서 볼 수 없는 《전쟁과 평화》만의 문학적 가치는 훌륭하다. 이 소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 군데군데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다. 피예르는 프리메이슨의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환락과 방탕 속에서 헛되이 낭비된다. 1847년 톨스토이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에 돌아와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이상적인 경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상류사회에서 방탕과 나태한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욕망, 죄의식에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결점과 자기비판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피예르처럼 지치지 않고 자신의 결점을 되돌아보면서 반성과 성찰을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톨스토이는 청년 시절부터 뼈아프게 고민했다. 《전쟁과 평화》 속에는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찾은 몇 개의 해답이 들어 있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신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이며, 이 움직임은 신이다. 삶이 있는 한, 신을 자각하는 기쁨이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커다란 기쁨이다.[2]

 

 우리는 익숙한 생활의 궤도에서 내던져지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버리지만, 사실은 거기서부터 새롭고 좋은 것이 시작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습니다. 앞길에는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있습니다[3].

 

 

피예르의 말은 톨스토이의 목소리다. 그 말 속에는 주어진 삶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려는 의지력이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인생의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 ‘현재’는 ‘살아야 할 이유’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는 삶의 의미였다. 톨스토이가 생각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선(善)이다. 그는 인간이라면 모두 이 선을 향해서 정진해야 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은 ‘사랑’이라고 했다. 각자가 자기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 즉 신과 삶을 사랑하는 선이 인생을 잘 살기 위한 힘이다. 이것이 피예르와 톨스토이가 발견한 ‘인생의 의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데 굳이 네 권짜리 두꺼운 소설을 볼 필요가 있나요?” 만약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질문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한 번은 아닌 두세 번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톨스토이는 역사와 현실 속 자잘한 삶의 체험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썼다. 무수히 얽힌 인간 관계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뛰어난 묘사력 덕분에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역사의 큰 물결 속에 흔들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톨스토이도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던 청년 톨스토이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 아니라 '톨스토이'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펼친 인생론은 적어도 이 책을 참고 끝까지 읽은 독자에게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1] 《전쟁과 평화 3》 284~291쪽

[2] 《전쟁과 평화 4》 249~250쪽

[3] 《전쟁과 평화 4》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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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7-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는 오래전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책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합니다. 번역자가 달라지만, 같은 책도 조금은 느낌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8-07-08 20:00   좋아요 1 | URL
《전쟁과 평화》는 완역본으로 읽어야 이 소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어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7-0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좋아요! 늘 미루던 이 고전을 언제쯤 읽을까 ㅎ

cyrus 2018-07-08 20:02   좋아요 0 | URL
진짜 큰 맘 먹고 시도해보세요. 정말 재미없으면 읽다가 덮으면 되니까요..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07-08 20:28   좋아요 0 | URL
러시아 소설은 왜 이리 손이 안 갈까요? 도스토예프스키도 사 놓고 먼지만 쌓이고 ㅜㅜ

cyrus 2018-07-08 20:32   좋아요 1 | URL
저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안 읽어봤어요. 늙어서 시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꼭 읽어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7-0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인디북에서 박형규 교수님 버전으로
읽어 보겠다고 하나씩 사기 시작했는데, 그만
절판되어 버리는 바람에 마저 사지 못해서
읽지 못했다는 변명을... ㅋㅋㅋ

cyrus 2018-07-08 20:21   좋아요 0 | URL
레샥매냐님이 언급한 책이 다섯권으로 된 그 책인거죠? ㅎㅎㅎ 저는 이룸출판사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 원본을 번역한 세 권짜리 책을 가지고 있어요. 문학동네 번역본은 톨스토이가 여러 번 고친 텍스트예요. ^^

2018-07-08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8 20:31   좋아요 0 | URL
저는 블로그, SNS 둘 중 하나만 등록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SNS에 리뷰를 등록하지 않은 응모자를 심사에 배제한 건 아니라고 봐요. 공지에 보면 출판사가 ‘블로그 및 SNS 주소 동시 등록, 하나라도 등록 안하면 심사 불이익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말이 없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이버 블로그에도 리뷰 등록할께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stella.K 2018-07-0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작년인가, 재작년에 이걸 영화로 봤지.
BBC에서 6부작인가로 만들었는데 나름 꽤 잘 만들었어.
근데 솔직히 톨 할배도 그렇고, 도 선생도 그렇고
둘 다 산맥 같은 존재라 넘기가 어려워.
그런 걸 넌 읽고 이렇게 리뷰까지 썼구나.
잘 썼다. 아무래도 다음 달 당선작이 될 확률이 농후해 보인다.ㅋㅋ

cyrus 2018-07-09 18:13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셨으면 원작 소설 읽기에 한 번 도전해보세요. ㅎㅎㅎ

리뷰 대회 응모글이에요. 잘 쓴 분들이 많아서 3등에 입선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ㅠ ㅠ

stella.K 2018-07-09 19:3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
그렇다면 리뷰 대회는 정말 모르겠다.
그 보단 심사위원이 다르잖아.ㅋㅋ
그게 아니어도 넌 매달 4만원의 도서구입비가
생기는대도 양이 차질 않냐? 욕심은...
난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까먹고 있었나?
아무튼 핑계낌에 잘 읽었네.
혹시 1등하면 한턱 쏴!ㅋㅋㅋ

2018-07-0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9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
후카미 기쿠에 지음, 곽규환.진효아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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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방극장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다. 그야말로 ‘연애 예능방송’ 전성기다. 다만 기존 연애 예능방송 프로그램이 연예인과 일반인의 만남, 또는 실제 연예인 커플의 일상을 주로 관찰해왔다면, 최근 방식은 일반인 남녀들이 주인공이 돼 서로에게 관심을 표하고 ‘썸’을 타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1970년대에 공개 맞선 프로그램이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가장 많이 알려진 제1세대 연예 예능방송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의 스튜디오>다. 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랑의 작대기’다.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고 난 뒤에 ‘사랑의 작대기’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지목하여 선택한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던진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향하고 있으면 커플이 된다. 남녀 네 쌍 모두 커플로 맺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랑의 작대기’ 모두 일치하지 않아 단 한 쌍의 커플이 맺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대기를 몰려 받는 사람이 있고, 단 한 명의 작대기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작대기’ 진행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만 선택하면 된다. 나도 그랬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의 작대기’를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봤던 사람들은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회에선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다. 모노가미가 문명사회의 이상적 결혼제도로 정착된 이래 법률과 윤리의 보호를 받는 유일한 성 행동은 부부간의 육체관계이다. 배우자의 외도는 비윤리적이고 부정한 행위로 인식된다. 간통죄가 폐지될 때까지 간통은 위법 행위로 이혼 사유가 되었고,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만약 단체 맞선에 참가한 사람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두세 명 선택한다면 이건 잘못된 행동일까?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파트너를 복수로 선택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는 여러 사람과의 다양한 관계로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혹시 ‘폴리아모리(polyamory)또는 ‘폴리아모리스트’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폴리아모리는 상대방을 독점하지 않고 다자간에 사랑을 나누는 형태를 말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집단으로 활동하며 해당 집단 안에서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들은 정신적 유대감 형성에 중점을 두는 관계를 지향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함께 아이를 기르기도 한다. 폴리아모리는 독점적인 일대일 관계를 주축으로 형성된 연애와 일부일처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일부일처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연애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위계를 만들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이루려는 노력과 막힘없는 의사소통을 추구한다.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해피북미디어, 2018)은 폴리아모리의 탄생 배경과 폴리아모리 특유의 문화를 설명하고,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들의 다양한 삶을 소개한 책이다. 미국 같은 경우 1990년대부터 폴리아모리를 공론화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폴리아모리 비영리단체 중 하나인 ‘러브 모어(Love More)’는 1994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일본의 인류학자. 저자는 14개월 동안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조사했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폴리아모리스트의 특징은 ‘백인’, ‘중산계급’, ‘고학력’이다. 이 세 가지 특징에 해당하지 않는 폴리아모리스트도 있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인종, 계층, 종교 등에 구애받지 않는 폴리아모리 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폴리아모리를 ‘스와핑(swapping)’, ‘난잡한 관계’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폴리아모리는 상호 간 합의를 통한 평등한 생활을 실천한다. 폴리아모리스트에게도 독자적 윤리가 있으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폴리아모리로 볼 수 없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여러 명의 파트너에게 자신의 교제 상황을 숨겨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숨기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폴리아모리 문화에 어긋난다. 폴리아모리스트도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교한 성 윤리 기준을 갖고 있으며 성병 혹은 임신을 피하고자 콘돔을 반드시 사용하며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폴리아모리 문화 및 생활 방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폴리아모리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한다. 폴리아모리스트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매뉴얼은 실생활에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파트너에 대한 질투, BDSM 관계 문제, 양육 문제 등)를 대처하는 지식을 제공한다.

 

저자가 만난 폴리아모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의 모습도 일부일처제 부부와 거의 비슷하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가끔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파트너의 행동에 질투심을 느끼곤 한다.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싸움도 ‘칼로 물 베기’다. 그렇지만 그들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으며 파트너와 함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폴리아모리는 다자간의 합의를 전제로 한 사랑 방식이다.

 

보부아르“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성(gender)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사랑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인식은 근대 이후 시작되었다. 일부일처제는 근대부터 시작된 사회제도이다. 폴리아모리가 말해주는 진리는,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일처제도 그렇고 폴리아모리 역시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Trivia

 

* 러빙 모어의 폴리아모리 조사에 따르면 보면 폴리아모리스트이면서 동시에 BDSM 실천자인 사람의 비중은 약 30%다. (177쪽)

→ ‘보면’이라는 표현을 빼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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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7-0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리아모리라.. 흥미롭습니다. 제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무래도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내 남편을 다른 사람과 쉐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부디 내 남편도 같은 생각이길 바라며 ㅋㅋㅋ

cyrus 2018-07-06 07:33   좋아요 1 | URL
폴리아모리스트도 질투심을 느껴요. 파트너가 다른 파트너를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질투하는 것이죠. ^^;;

북깨비 2018-07-06 07:55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저는 폴리아모리스트를 했다간 이 파트너 저 파트너 질투만 하다가 세월 다 보내겠군요. ㅋㅋㅋㅋ 🤣 다른 사람의 폴리아모리를 딱히 반대할 건 없지만 그래도 자녀의 양육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모노가미가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2018-07-05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6 07: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sprenown 2018-07-0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결혼제도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지만 그나마 본능과 이성의 타협의 선물이니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8-07-06 07:44   좋아요 0 | URL
결혼제도의 정착에 영향을 준 ‘본능‘과 ‘이성‘이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를 남성의 본능으로 정당화했어요.

AgalmA 2018-07-0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노가미가 쌍방의 합의이고 폴리아모리는 다자간의 합의라는 차이가 있을 뿐 어느 것이 옳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정한 합의란 게 참 어려운 문제라... 육아, 양육에 있어 모노가미가 더 사회에 안정적이라는 판단 하에 정착된 것이라고 봐야겠죠. 예전처럼 첩의 자식도 같이 사는 사회도 아니니.... 개인의 정체성↑, 유교적 가부장제, 대가족 경향이 허물어지면서 지금은 폴리아모리 가족 제도가 필요해진 시점이긴 한 거 같습니다. 여전히 남성쪽 양육 책임의식이 의심스러운 게 걸림돌 아닌지 싶군요.

cyrus 2018-07-06 08:10   좋아요 0 | URL
이 책에 폴리아모리 가족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폴리아모리 가족 유형이 다양해요. 대가족 유형이 있고, 혼자 사는 폴리아모리스트도 있어요. 폴리아모리스트의 삶도 애로사항이 많아요. 양육 문제도 그 중 하나인데요, 여러 사람이 아이를 돌봅니다. 만약 파트너 A가 자식을 돌보지 못하면 B가 대신 돌봅니다. 흑인 가족이 아이를 돌보는 방식과 유사해요. 그러니까 혈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파트너의 자식을 돌보는 거죠. ^^

페크pek0501 2018-07-0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회에 살면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습니다.

고 마광수 교수의 글이 생각나네요.
˝내가 보기에 결혼제도는 마땅히 없어져야만 할 악이다. 굳이 둘이 살려면 계약동거가 차라리 낫다. 그러나 프리섹스의 실천만이 인류를 권태와 가학의 질곡에서 구해줄 수 있다.˝(p22)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라는 책에 있는 글입니다.

cyrus 2018-07-08 17:31   좋아요 0 | URL
BDSM(속박, 규율, 사디즘, 마조히즘)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세상을 넓고 성적 지향은 다양합니다. ^^
 

 

 

 

 

 

 

<신청 방법>

 

일반인 15명 내외 (선착순)

현재 12분 신청하였습니다. 3분 신청 가능합니다.

 

참여비 : 15,000원

우리은행 : 583-362090-02-008 (김정희)

 

(★ 입금 후 문자 : 참여자 성함/연락처 ★)

 

 

로쟈 이현우 작가님이 대구 작은 책방 ‘서재를 탐하다’에서 문학 강연을 펼치십니다. 작년 11월 책방 ‘읽다 익다’와 ‘서재를 탐하다’에서 강연 이후 두 번째 방문이세요.

 

 

 

* [로쟈와 함께한 불금] 2017년 11월 25일

http://blog.aladin.co.kr/haesung/9732455

 

 

* [책 읽는 수준을 높이자!] 2017년 12월 9일

http://blog.aladin.co.kr/haesung/9762450

 

 

 

이번 강연은 로쟈 이현우 작가로부터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봅니다. 대구지역 문화공동체 [우주지감] 모임인 ‘이 작가의 책’에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2009)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2010)

 

 

 

함께 읽었던 네 작품 중 좀 더 여운이 남았던 『나를 보내지 마』, 『남아 있는 나날』 두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주실 예정이며, 함께 모인 분들과 궁금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마련됩니다. 

 

이현우 작가님은 러시아문학, 세계문학과 철학, 한국문학, 인문학 강연 등 다방면으로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 계십니다. 작은 공간을 직접 발걸음 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며, 더불어 함해 주실 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대구에 사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신청 가능합니다. 

 

  - ‘서재를 탐하다’ 책방지기 김정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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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5 06:39   좋아요 1 | URL
강연 듣고 난 이후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읽기를 시작하셔도 괜찮습니다.. ㅎㅎㅎ
 

 

 

이 시대의 흑인 여성은 위험하다. 그녀들은 인종적 억압에 성적 억압까지 중첩된 이중의 억압 속에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 흑인 여성이 처한 문제에 민족주의 문제까지 겹친다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인권 존중을 호소했던 흑인 민권 운동 조직 내부에서조차도 흑인 여성 억압은 항상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과 함께 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평등권을 획득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흑인 공동체 내부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억압인 성차별을 인식했다.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은 인종차별주의와 비슷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 [절판] 레이철 홈스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하나의 사회집단 안에서 대부분 남성은 기득권이며 통제와 지배에 집중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가 전제하는 이성적 존재기준은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남성 편향적일 수밖에 없고, 여성의 경험을 왜곡하거나 배제한다. 19세기 백인 남성 지식인의 경우 흑인 여성은 머리가 작고 당연히 지능도 낮다는 걸 입증하려 했다.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tman)은 남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끌려간 뒤 런던에서 반라의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아프리카 희귀종으로 전시됐다. 죽은 뒤에는 뇌와 생식기가 박제돼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됐다.

 

필리스 위틀리(Phillis Wheatley)는 아프리카계 흑인 출신 시인이다. 흑인 비평가들은 그녀의 시가 노예제도에 대한 저항 의식이 드러내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그녀는 시를 통해 흑인 차별 문제와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언급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자신들이 창간한 잡지에 위틀리의 시 몇 편을 공개해서 노예제 폐지 여론의 불씨를 댕겼다. 그런데 위틀리의 시집이 발표되었을 때 총 열여덟 명의 남성 지식인들이 그녀의 재능을 검증하려고 했다.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지식인 집단 또는 학문 공동체는 흑인 여성은 열등하다는 편견이 있다.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자신의 인종적 편견을 기본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준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그들만의 기준때문에 흑인 여성의 새로운 주장 또는 특출한 재능은 예외로 취급되거나 가차 없이 외면받는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백인 남성의 기준으로 설명되는 세계와 그들의 통제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드러낸다. 그러나 지식인 집단에 소속된 몇몇 흑인 여성 학자들은 흑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 지식인의 통제 방식에 동조하기도 한다.

 

 

 흑인여성 학자가 학계에서 인정하는 자격을 갖춘 이후에 흑인여성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려고 하면, 그녀는 대부분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고 폄하하는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라는 압력에 부딪힌다. 흑인여성과 같은 외부인 집단이 엘리트 백인남성을 비롯한 내부인 집단의 특권을 인식할 때, 권력자들은 외부인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외부인들이 절차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안전한외부인 몇몇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권력자들은 지식인증절차에서 대다수의 흑인여성을 배제하기 위해 소수의 흑인여성에게 지식인증제도 내부의 자리를 허락하고, 이들에게 학계와 사회 전반이 공유하는 흑인여성의 열등함을 가정하고 작업하도록 권유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419~420)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종속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구의 지식 인증체계에 종속된 소수의 흑인 여성 학자들이 흑인 여성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데 한몫했다고 지적한다. 흑인 페미니즘을 종속된 지식이라고 명명하는 그녀의 입장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한 것이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비단 흑인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로 알려진 일제 강점기에도 종속된 지식으로 변질한 페미니즘이 있었고, 여성 해방에 대한 희망을 품은 일부 여성 지식인들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

    

 

 

 

 

 

 

 

 

 

 

 

 

 

*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2016)

*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책으로보는세상, 2011)

    

 

 

 

 

 

 

 

 

 

 

 

 

 

 

 

* 김재용 외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역락, 2013)

  [이 책에서 필자가 참고한 글] 이선옥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이선옥 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0년대에 우리나라 여성 박사 1호인 김활란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 교장은 친일 잡지에 조선 여학생에게 징병을 독려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김활란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여성계 민족단체 근우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친일 인사로 돌변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가정의 개선과 부인 교화 운동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을 주도한 단체는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밖에도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의 주요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강연과 방송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옹호했다.

 

친일 문학의 내적 논리 (역락, 2013)에 수록된 여성해방의 기대와 전쟁 동원의 논리 : 여성의 친일 작품과 논설우생학과 제국주의의 성정치 : 채만식의 여인전기와 이기영의 처녀지』」는 일제 강점기 여성 지식인들이 남긴 논설을 근거로 친일 논리를 분석한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을 쓴 이선옥은 여성 지식인의 친일 행위가 여성 해방에 대한 기대감과 일본 제국주의 논리가 결합하면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김활란뿐만 아니라 시인 모윤숙, 한국 근대 여성주의 운동가로 평가받는 박인덕 등의 여성 지식인들은 여성해방론을 주장했으나 일제의 황국 신민 정책(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기회라고 파악했다. 이 세 사람의 여성해방론, 즉 페미니즘은 일제 논리에 종속된 지식으로 전락한다.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자식을 낳는 군국의 어머니를 예찬했으며 그렇지 못한 조선 여성을 열등한 여성으로 규정했다. 안타깝게도 친일 여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종속된 지식이 된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사의 오점이자 흑역사. 가끔 페미니스트는 그들이 직면해야 할 다양한 여성 억압 논리(가부장제, 군국주의, 민족주의, 계급, 인종차별주의, 성소수자 차별 등)에 자연스럽게 동조할 때가 있다.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불편하더라도 페미니즘 내부의 비판과 성찰이 요구되어야 한다. 여성 운동가, 페미니스트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은 여성 운동의 분열을 조장하여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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