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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
후카미 기쿠에 지음, 곽규환.진효아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18년 3월
평점 :
요즘 안방극장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다. 그야말로 ‘연애 예능방송’ 전성기다. 다만 기존 연애 예능방송 프로그램이 연예인과 일반인의 만남, 또는 실제 연예인 커플의 일상을 주로 관찰해왔다면, 최근 방식은 일반인 남녀들이 주인공이 돼 서로에게 관심을 표하고 ‘썸’을 타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1970년대에 공개 맞선 프로그램이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가장 많이 알려진 제1세대 연예 예능방송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의 스튜디오>다. 이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랑의 작대기’다.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고 난 뒤에 ‘사랑의 작대기’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지목하여 선택한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던진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향하고 있으면 커플이 된다. 남녀 네 쌍 모두 커플로 맺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랑의 작대기’ 모두 일치하지 않아 단 한 쌍의 커플이 맺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대기를 몰려 받는 사람이 있고, 단 한 명의 작대기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작대기’ 진행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만 선택하면 된다. 나도 그랬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의 작대기’를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봤던 사람들은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회에선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다. 모노가미가 문명사회의 이상적 결혼제도로 정착된 이래 법률과 윤리의 보호를 받는 유일한 성 행동은 부부간의 육체관계이다. 배우자의 외도는 비윤리적이고 부정한 행위로 인식된다. 간통죄가 폐지될 때까지 간통은 위법 행위로 이혼 사유가 되었고,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만약 단체 맞선에 참가한 사람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두세 명 선택한다면 이건 잘못된 행동일까?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파트너를 복수로 선택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는 여러 사람과의 다양한 관계로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혹시 ‘폴리아모리(polyamory)’ 또는 ‘폴리아모리스트’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지만, 폴리아모리는 상대방을 독점하지 않고 다자간에 사랑을 나누는 형태를 말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집단으로 활동하며 해당 집단 안에서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들은 정신적 유대감 형성에 중점을 두는 관계를 지향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함께 아이를 기르기도 한다. 폴리아모리는 독점적인 일대일 관계를 주축으로 형성된 연애와 일부일처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일부일처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연애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위계를 만들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이루려는 노력과 막힘없는 의사소통을 추구한다.
《폴리아모리 :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해피북미디어, 2018)은 폴리아모리의 탄생 배경과 폴리아모리 특유의 문화를 설명하고,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들의 다양한 삶을 소개한 책이다. 미국 같은 경우 1990년대부터 폴리아모리를 공론화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폴리아모리 비영리단체 중 하나인 ‘러브 모어(Love More)’는 1994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일본의 인류학자. 저자는 14개월 동안 미국 폴리아모리스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조사했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폴리아모리스트의 특징은 ‘백인’, ‘중산계급’, ‘고학력’이다. 이 세 가지 특징에 해당하지 않는 폴리아모리스트도 있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인종, 계층, 종교 등에 구애받지 않는 폴리아모리 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폴리아모리를 ‘스와핑(swapping)’, ‘난잡한 관계’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폴리아모리는 상호 간 합의를 통한 평등한 생활을 실천한다. 폴리아모리스트에게도 독자적 윤리가 있으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폴리아모리로 볼 수 없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여러 명의 파트너에게 자신의 교제 상황을 숨겨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숨기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폴리아모리 문화에 어긋난다. 폴리아모리스트도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교한 성 윤리 기준을 갖고 있으며 성병 혹은 임신을 피하고자 콘돔을 반드시 사용하며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폴리아모리 문화 및 생활 방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폴리아모리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한다. 폴리아모리스트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매뉴얼은 실생활에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파트너에 대한 질투, BDSM 관계 문제, 양육 문제 등)를 대처하는 지식을 제공한다.
저자가 만난 폴리아모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의 모습도 일부일처제 부부와 거의 비슷하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가끔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파트너의 행동에 질투심을 느끼곤 한다. 폴리아모리스트 부부싸움도 ‘칼로 물 베기’다. 그렇지만 그들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으며 파트너와 함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폴리아모리는 다자간의 합의를 전제로 한 사랑 방식이다.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성(gender)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사랑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인식은 근대 이후 시작되었다. 일부일처제는 근대부터 시작된 사회제도이다. 폴리아모리가 말해주는 진리는,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일처제도 그렇고 폴리아모리 역시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Trivia
* 러빙 모어의 폴리아모리 조사에 따르면 보면 폴리아모리스트이면서 동시에 BDSM 실천자인 사람의 비중은 약 30%다. (177쪽)
→ ‘보면’이라는 표현을 빼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