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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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일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것과 관련된 편견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사회가 점차 개방적이고 다양화되면서 이러한 편견을 풀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는 ‘퀴어(Queer)가 대표적인 예이다. 퀴어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동성애는 정신 질환이 아니라 ‘성적 지향’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다르거나 다수의 의견에 위배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하지 못한다. 동성애를 향한 편견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에이즈(AIDS)의 확산 원인으로 동성애자들이 그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 편견의 논리는 이렇다. 동성애자는 변태 성욕자이고, 문란한 성행위를 즐긴다. 에이즈는 문란한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성적 지향은 단일한 주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거나 유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젠더퀴어(genderqueer)는 변태성욕자, 성도착증, 비정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그런데 이성애 중심 젠더 이분법은 젠더퀴어를 변태로 여기게 만든다. 젠더퀴어를 질병으로 여겨 교정하려는 사회의 압박은 건강한 사람을 정신적 · 신체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조선의 퀴어》는 누락되고 묻혀왔던 1920~30년대 조선의 ‘퀴어한’ 존재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1920~30년대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가 더욱 강화된 암흑기로 불리지만, 잡지 등 활자매체의 활성화와 서구문화의 대량 유입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시기였다. 이 시기에 서구의 성과학 지식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서구의 성과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번역된 성과학 관련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의 신문과 잡지는 ‘변태성욕’, ‘반음양(半陰陽: 인터섹스), ‘동성연애’와 관련된 사례들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1920~30년대 조선은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전통적인 성 도덕의 금기 사항이 무너지고, 동성애,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 남장 또는 여장), 키스 등 다양한 성 문화가 범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0~30년대 조선은 ‘퀴어한 시대’가 아니었고, ‘변태성욕자의 시대’였다. 당시 ‘변태성욕’ 기사는 대중의 관음증적 욕망을 부추기는 추측성 가십이었다. 신문은 남색과 범죄를 연결 짓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조선의 퀴어》의 저자 박차민정은 변태성욕을 범죄로 규정하는 선정적인 기사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속에 반영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 즉 퀴어를 ‘위험한 성적 타자’로 취급하는 담론의 형성 과정을 조명한다. 조선 말기에 남색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지 않았으며 남색 풍습이 있었다. 남색은 남성들의 출세를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출셋길이 없는 자는 미동(美童)이 되면 손쉽게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남색은 ‘불법 성행위’로 간주하였다.

 

가부장 ·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일탈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아 왔고 비난받고 있다. 기생 출신의 강향란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기 위해 짧은 머리로 남자 행세를 했다. 당시 남성 지식인들은 전통을 파괴하고 근대화를 추종하는 몰지각한 행위라며 그녀에게 비난을 쏟아부었다. 식민지 정부는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싱을 식별하고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여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감시했다. 국가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기이하고 낯설고, 사회적 질서에 벗어난 ‘퀴어한 존재’들이다. 퀴어를 처벌하는 통치 권력, 그리고 퀴어를 바라보는 근대 조선인들의 관음증적 시선은 ‘권력의 판옵티콘’[주]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퀴어를 성도착증 환자나 범죄자로 만드는 ‘투명한 권력’이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투명한 권력’은 신문, 병원(성과학)이라는 거대한 감시망을 만들었고, 이 강압적인 거대 권력은 퀴어를 ‘이방인’처럼 감시하고 처벌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조선을 기점으로써 퀴어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구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퀴어의 사소한 몸짓도 ‘변태’,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차별을 감수하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의 퀴어》는 철저히 잊힌 ‘변태들’을 조명하여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사회에서 오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야기한다. 신문에 남게 된 ‘변태들’은 오해받고 소외된 소수자의 진실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주]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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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7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27 16:27   좋아요 0 | URL
하필 요즘같이 더운 날에 외근이 잦아져서 며칠은 바쁘게 지냈어요. 너무 더워서 에어컨 바람을 많이 쐬었더니 손가락에 통증이 생겼어요. 에어컨 찬바람 많이 맞으면 관절에 통증이 생긴다네요... ㅠㅠ 그래서 한동안 북플에 접속하지 못했어요.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한결 여유롭네요.

매년 제 생일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책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작년에 제가 책 선물을 드리지 못했잖아요. 다음 달에 적립금 받으면 바로 기프티북 보내 드릴 테니 읽고 싶은 책 한 권 미리 정해두세요. ^^

2018-07-27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27 16:44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ㅎㅎㅎ 올해 여름은 시험 공부하기가 힘든 계절인 것 같아요. 너무 더워도 건강이 안 좋아지고, 찬바람을 많이 쐬어도 건강이 안 좋아지니까요. 이러면 컨디션 조절하기 힘들겠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

2018-07-27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8-07-28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영향도 크겠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LGBT에 대한 가장 극렬한 혐오를 조장하는 건 교회같습니다. 가장 전근대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것이 주류개신교잖아요..
예전에 한국사를 읽다가 몸종과 애인관계가 되었던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 봉씨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고 조선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남한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성적취향은 자기 결정이죠. 성적취향보다 개인의 인성이 문제인데 일이 터지면 늘 일반화를 해서 더더욱 혐오를 조장하는 것 같아요.

cyrus 2018-07-29 21:06   좋아요 0 | URL
‘특이한 성적 취향=비정상=성소수자‘로 연상되는 편견의 논리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합니다.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게이의 항문 섹스가 에이즈 전염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성애자의 항문 섹스에 대해선 침묵해요.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신매매의 초기 형태는 전쟁에 패한 나라의 군인이나 여성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는 경우였다. 패전의 대가를 노동력으로 계산해 치른 것이다. 전쟁은 역사적으로 남성이 일으켰지만, 살아남아 그 피해를 온전히 떠안는 것은 여성이었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호메로스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15)

*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도서출판 숲, 2009)

 

 

 

전쟁에서 여성은 전리품으로 취급된다. 군사주의는 여성을 제멋대로 선취하고 여성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인식하면서 착취했다. 전쟁 때마다 되풀이됐던 적군의 사기를 누그러뜨리려 상대편 여성을 납치하고 성폭행하는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집단 강간을 통해 패전국의 남성은 자국 여성을 보호하지 못한 수치심을 느끼며 승전국의 남성은 이들을 ‘정복했다’는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한다. 여성을 짓밟은 고대 군사주의의 실상을 보여준 작품이 에우리피데스(Euripides)『트로이아 여인들』이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가 멸망한 이후에 트로이 왕비 헤카베와 딸 캇산드라,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에게 덮친 비참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트로이가 함락되자,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 모두 승자의 노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헤카베는 오뒷세우스의 여종으로, 캇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첩으로,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의 첩이 된다. 헬레네는 고대 영웅들만큼이나 유명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남성 영웅들의 세계를 장식한 ‘트로피’에 불과하다. 트로이 전쟁의 가장 큰 명분은 납치된 헬레네를 되찾는 것이었고, 헬레네와 직접 관련이 없는 국가들은 각자의 승리와 전리품을 얻어내고자 했다.

 

 

 

 

 

 

 

 

 

 

 

 

 

 

 

 

 

 

 

 

 

 

 

 

 

 

 

 

 

 

 

 

* 마디스 레디커 《노예선》 (갈무리, 2018)

* 김진묵 《흑인 잔혹사》 (한양대학교출판부, 2011)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 (백산서당, 2012)

* 장 메이에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사, 1998)

 

 

 

근대에 들어서는 아프리카 등지의 흑인이 미국이나 유럽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강제 매매 형태였다. 유럽과 신대륙을 점령한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흑인 노예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준 살아있는 ‘상품’이었다. 흑인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가장 큰 목적은 노동력 확보였다. 따라서 남자 노예의 몸값이 훨씬 높았다. 여성 노예들이 백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게일 루빈 《일탈》 (현실문화, 2015)

* 니키 로버츠 《역사 속의 매춘부들》 (책세상, 2004)

* [절판] 번 벌로, 보니 벌로 《매춘의 역사》 (까치, 2002)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이 인식하는 인신매매의 형태도 달라진다. 19세기 미국과 유럽의 반 매춘 활동가들은 ‘매춘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를 비판하면서 매춘과 인신매매를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금욕과 도덕주의를 강조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매춘부들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이때만 해도 성병에 걸린 매춘부를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게 한 성병 방지법이 있었고, 국가는 매춘부에게 일방적으로 성병 검사를 강요했다. 스위스 출신의 목사 토마 보렐은 강제 매춘의 실상을 보고하는 책을 펴냈는데, 그의 책은 <유럽의 백인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소개됐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도 매춘과 인신매매 반대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미국의 반 매춘 활동가들이 사용한 수사적 비유가 바로 ‘백인 노예’였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 특히 유대인을 인신매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인신매매 공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의 기운이 와전되며 거대한 분노의 줄기로 증폭됐다.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난민 공포’의 형성 과정과 유사하다. 불확실하거나 심지어는 조작된 유언비어(가짜 뉴스)가 난민들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심을 자아내듯이 ‘백인 노예’는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미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줬다. 반 매춘 활동가들은 유언비어를 이용해 인신매매와 매춘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페미니스트였던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Emma Goldman)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게일 루빈(Gayle Rubin)은 각각 『The White Slave Traffic(백인 노예 매매)와 『The Traffic in Women(여성 거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전자는 1910년에, 후자는 1975년에 나왔다. 이 두 편의 논문의 공통점은 제목에만 있는 게 아니다. 골드만과 루빈이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도 비슷하다. 두 사람은 인신매매와 매춘의 개념을 왜곡하면서 혼용하는 반 매춘 활동가들의 입장에 반대한다. 루빈에 따르면 인신매매의 위험성을 강조하여 매춘을 공격하는 방식은 매춘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매춘이 ‘성노예를 강요하는 인신매매’로 오해하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춘을 비난하는 반 매춘 활동가들의 입장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의 입장과 만나게 된다. 루빈은 이 두 세력의 기묘한 만남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골드만은 백인 노예 담론을 비판하면서 성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여성의 성적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매춘부의 입장을 존중했다.

 

 

 

 

 

 

 

 

 

 

 

 

 

 

 

 

 

 

 

* 이소희 엮음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골드만과 루빈의 입장은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매춘 또는 성매매(혹은 성 노동)를 둘러싼 페미니즘 내부의 오랜 논쟁에 기름을 부을 만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성매매 여성들은 ‘피해자’인가, ‘노동자’인가? 자발적 성매매를 허용해야 하는가? 성매매방지특별법에 따르면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행한 자를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성매매를 시키는 인신매매 조직이 있을 거고,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근절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매매방지특별법을 생각한다면 루빈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성매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매매 합법화 정책이 인신매매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매매에 반대하면서도 성매매 여성의 인권 보호에 힘쓰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그러나 일부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의 동정ㅈ적인 시선에 반대한다. 자신들을 ‘성노동자’ 또는 ‘성판매 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피해자 위치의 성매매 여성’ 담론은 성을 판매하는 여성을 적극적인 경제활동 주체, 즉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 부르는가, 누가 부르느냐는 문제는 중요하고 민감하다. 이름 자체로 존재가 가시화되기도, 은폐되기도 한다. ‘창녀’, ‘갈보’, 그리고 ‘걸레’는 성판매 여성을 ‘순결하지 않고, 불결한 존재’로 만드는 차별적인 표현이다. 매춘 또는 성매매 대신에 ‘성 노동’, ‘성판매’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여전히 성매매에 대한 입장이 불명확하다. 한때 성매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루빈의 의견을 살펴보니 너무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급한 일반화는 복잡한 여성 문제를 단순하게 만든다. 또 여성 문제에 관련된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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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7-2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 남자 노예(흑인)의 몸값을 그의 치아 상태를 보고 정한다는 대목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같은 사람끼리 어떻게 그런 취급을 할 수 있는 건지 경악할 일이에요.

cyrus 2018-07-23 17:13   좋아요 0 | URL
흑인노예는 ‘상품’이었어요.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고를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치아와 눈동자였어요. 노예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거예요. 노예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노예의 몸 구석구석 살폈습니다. 노예 입장에선 수치스러운 일이죠.

AgalmA 2018-07-22 1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환치해 이미지 세탁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 내가 어쩌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내 장기매매도 허용해야죠. 내 장기 자유 결정권!
매춘 행위는 성적 자유, 자기 결정권을 내세울 사안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고자 하는 남성(더러 여성도?)들의 욕망에 기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워요.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을 통해 얻는 자기 성취, 만족, 가치가 대부분의 성매매에서 얼마나 나올 수 있는지. 생활의 어려움 등을 호소하며 노동으로 봐 달라고 한들 매춘으로 금전적 이득을 보려는 게 옹호할 만한 것일까요. 그것을 둘러싼 카르텔, 폐해가 부정적인 건 또 어쩌고요.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점을 강조한다 해도 그건 타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착취적인 복속이 있지 않나요. ‘자기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죠. ‘상품‘이 되고 ‘전리품‘이 된 역사의 변종이 될 뿐입니다. ‘연예계 스폰서‘ 같은 걸 보세요. 더러 호스피스적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성매매도 있지만 예외적 상황이 전체를 포괄하기도 옹호하게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 도덕이나 윤리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 성매매 저변에 깔린 건 무시하고 ‘노동‘이라는 표면만 보라는 논점을 가진 이들에 불만이라 한 마디 남겼습니다.

cyrus 2018-07-23 17:38   좋아요 1 | URL
저도 성매매가 범죄로 악용되고, 변질되는 것에 우려합니다. 저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여성운동에 배제하는 쉴라 제프리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성매매 반대 입장에 찬성합니다. AgalmA님이 말씀하셨듯이 제프리스는 장애인을 위한 성매매도 반대합니다.

그런데 성매매 종사 여성 전체를 불법적인 존재로 규정하면, 이에 따른 문제점도 생깁니다. 노동시장에 소외된 여성(가정폭력을 겪은 여성, 미혼모, 나이 든 여성) 및 성소수자들은 생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종사합니다. 그들을 ‘범죄인’으로 취급한다면 생계에 타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성매매를 그만 두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창녀’, ‘범죄자’로 한 번 낙인찍히면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성매매 대신에 ‘성노동’, ‘성 판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성매매 자체를 반대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매매 문제는 성매매 자체를 없애면 끝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매매 문제를 논할 때마다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는 배제됐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성매매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galmA 2018-07-26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장기 매매 이야기를 한 게 우스개 비유로 가져온 건 아닙니다. 장기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내세우는 게 경제적 사정입니다. 진짜 오죽하면 대체하기 어려운 장기까지 팔까 싶기도 하죠.
성 매매 경우도 이게 아니면 어렵다는 문제를 늘 가져 오는데요. 다른 일을 배우도록 사회 지원을 받아도 성매매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 많죠. 사회적 멸시나 비판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다른 걸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한 번 시작하면 그 상태로 돌아가기 쉽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순환, 대물림이 진짜 문제죠. 물론 세부적이고 개인적인 여러 문제를 다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생계를 내세워 너무 쉽게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요. 극도의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을 보조할 사회적 기반이 약한 건 인정합니다. 그러니 이런 여러 문제 때문에 공창제 같은 의견도 나오는 것일 테고요. 문제를 해소할 여러 사회적 기반 조성이 되어야지 성매매 찬성쪽으로 가는 건 쉬운 선택입니다.
자발이냐 비자발이냐 개인의 자유로 돌리는 것도 너무 편한 논리입니다. 내 의지로 다른 이들의 성욕을 채워 주고 돈을 받는 게 말은 되지만 전면적 공감과 수용을 이끌 논리는 아니니까요. 상부상조가 이럴 때 쓰라는 말은 아니잖아요.

power_lifter 2020-08-1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되게 잘쓰셨습니다만, 전쟁은 남자가 일으키고 피해는 여자가 입었다는 구절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정확히는 소수의 남자들이 일으켰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게 정확한 말입니다. 남성의 경우 지배계층을 제외하면 전쟁에서 총알받이나 고기방패 취급당하고 전쟁이 아니더라도 육체적 노동이나 온갖 폭행을 받아왔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가 더 가혹한 처사를 당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여자가 더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있습니다.
 
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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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끔찍한 사건이 삶을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몸도 마음도, 심지어 사랑까지도. 이별과 죽음은 예상했던 것일지라도 언제나 기습처럼 심장을 찌른다.

 

사야카는 사물에 말 거는 신기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왼손 엄지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어린 딸 미치루는 사별한 전 남편 사토루의 빈자리를 덮어주고 위안을 주는 존재이다. 어느 날, 사야카에게 옛 연인 이치로의 편지가 찾아온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의문의 편지와 함께 시작된다. 이치로는 왜 사야카의 집 마당에 자라는 히비스커스 나무가 있는 곳을 파려고 하는 걸까? 이 나무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이치로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토루라는 이중의 상실에 처한 사야카가 풀어내야만 하는 수수께끼이다.

 

외로움, 정신적 상처, 그리고 죽음을 이야기했던 요시모토 바나나. 이번 신작 서커스 나이트에서 그녀는 기억을 매개로 사람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바나나는 상처와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무게 중심은 상처보다는 치유 쪽에 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서로의 관계와 인연 속에서 잊힌 추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등단 때부터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바나나는 상실의 상처, 그 슬픔을 이겨나가는 신비스러운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왔다. 사야카는 사토루가 심은 히비스커스 나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포용하면서 죽음을 긍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얻는다. 히비스커스 나무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삶의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삶의 거친 물살 속에 휩쓸려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 새겨진 조각이다. 사야카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히비스커스 나무를 통해 과거와 현재, 자신과 세계를 포용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용기와 힘을 얻는다. 바나나는 치유의 힘을 지닌 자연에 향한 경외감을 사뭇 진지하게 표현한다.

 

사야카에게 기억이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함께 성장하면서 고통을 안겨주며 때로는 위로하고 행복을 선사하는 절친한 친구 같은 것이다. 작가는 그녀의 입을 빌려 슬프지만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과 행복의 순간이 뒤죽박죽 엉켜있는 추억은 마음의 상처를 헤집어 쑤시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이 된다.

 

서커스 나이트가 주는 느낌은 이러하다. 무언가 부족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꽉 찬 느낌. 바나나는 독자들이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썼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으며 서정적이지만 신파는 아니다. 그녀의 작품이 늘 그렇듯이 소설은 삶에 대한 진지한 교훈을 전달하기보다는 인물들이 과거의 아픔을 회복하는 과정을 사분사분하게 보여준다. 독자들이 서커스 나이트를 읽으면서 평소 잊고 있었던 섬세한 감정의 움직임을 다시 느꼈으면 좋겠다. 한 번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질 때 이 책을 접하게 되면 왠지 모를 공감과 함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다.

 

 

 

[주] 《서커스 나이트》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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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한권 읽은것같아요 사이러스님 역쉬 글이~

cyrus 2018-07-21 13:10   좋아요 0 | URL
줄거리를 너무 많이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책의 가장 중요한 장면만 골라 언급했습니다. ^^;;

카알벨루치 2018-07-21 13:30   좋아요 0 | URL
전 요즘 스포노출에 대해 신경을 끄고 글을 적는데...이랬다 저랬다 하네요!
 

 

 

 

헤르메스(Hermes)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이다. 날개 달린 모자로 유명한 그는 유창한 능변으로 신의 소식을 인간에게 해석해 준다. 그래서 헤르메스에서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이 나왔다.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은 메르쿠리우스(Mercurius)다.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고 한다. 수성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성이다. 수성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고, 1초에 48㎞의 공전 속도로 행성 중에 가장 빨리 움직인다. 신의 소식을 빨리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수성에 ‘머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머큐리는 수은을 뜻하기도 한다. 연금술사들은 수은이 ‘빠르게 흐르는 은’이라고 생각했다.

 

 

 

 

 

 

 

 

 

 

 

 

 

 

 

 

 

* 헤르메스 호 트리스메기스토스 《헤르메티카 Hermetica》 (좋은글방, 2018)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 [절판] 앨리슨 쿠더트 《연금술 이야기》 (민음사, 1995)

*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연금술 : 현자의 돌》 (시공사, 1998)

* 쿠사노 타쿠미 《도해 연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0)

* 하니 레이 《도해 근대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2)

 

 

 

헤르메스는 연금술사의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알려진 뱀의 지팡이(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엉킨 모습)는 치유와 독, 건강과 질병, 연금술의 용해와 응고 등과 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의 힘을 상징한다.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을 얻기 위해 수은과 유황을 추출한다. 이 두 가지 물질은 ‘현자의 알’이라는 밀폐된 구형 플라스크에 담는다. 플라스크에 헤르메스의 도장을 찍는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여 전설상 인물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 약칭 ‘트리스메기스토스’)를 ‘연금술의 시조’로 추앙했다. 이런 신비주의적 학문을 ‘헤르메스 사상’이라고 부른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삼중으로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하는 연금술은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 알렉산드리아에서 크게 발달했다. 알렉산드리아로 온 그리스인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 토트(Thot)와 헤르메스를 동일시했다. 토트 역시 헤르메스처럼 지혜로운 신이었으며 신들의 서기(書記)였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거의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신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가 3226년 동안 지상에 군림하면서 36525권의 책을 썼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파괴되어 사라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썼다고 하는 42권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헤르메티카》는 기원전 3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경에 익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이 문헌이 손실된 헤르메스 문서와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헤르메스 문서의 일부로 알려지게 되면서 연금술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엔네아데스 (천줄 읽기)》 (지만지, 2015)

* [절판]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선집》 (누멘, 2009)

* 조규홍 《플로티노스 :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전달한 사상가》 (살림, 2006)

 

 

 

 

《헤르메티카》는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자신의 친아들 타트(Tat)와 제자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 가르침을 전수하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반인반마 종족(Centaur, 켄타우로스)인 케이론(Chiron)에게 의술을 배워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헤르메티카》는 총 열네 권이다. 제15권은 남아있지 않고, 제16권부터 18권까지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썼다. 보통 연금술은 마법, 비밀 의식, 신비주의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르메티카》는 각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신비주의와 고대 점성술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도 반영되어 있다. 《헤르메티카》의 알쏭달쏭한 글 속에 플로티노스(Plotinos)신플라톤주의,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신 이외에 그 무엇도 선하지 않으니 신 자체가 항상 선이라. 그런즉 선은 모든 운동과 생성의 실체로다. 선이 가진 에너지는 정지된 상태요 부족함도 넘침도 없으며 지극히 완전하나니, 모든 필요를 채우는 원천이요 만물의 원인이로다. 만물의 공급자가 곧 선이니, 그는 완전하며 항시적인 선이로다.

 

(《헤르메티카》 제6권, 61쪽)

 

 

헤르메스 사상에 심취한 연금술사들은 신이 만든 우주와 이 세상의 모든 물질 전부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즉, 모든 물질의 기본은 ‘제1질료’라 할 수 있다. 이 ‘제1질료’가 물질의 형태를 바꿀 수 있으며 훗날 연금술의 기본 원리가 된다. ‘제1질료’ 개념은 플로티노스의 ‘하나(hen)’ 개념과 유사하다. 플로티노스는 세계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로 시작되어 샘물이 솟아 흐르듯이 다양한 존재, 즉 만물이 생성한다고 봤다. 이처럼 세계의 생성 과정을 물의 흐름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플로티노스의 주장을 ‘유출설’이라고 한다. 플로티노스를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본질을 ‘신학’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이 세계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직자들은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빛에서 신성(神性)을 찾으려고 했다. 빛은 곧 ‘선(善)’을 의미했다.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들의 생각과 시도는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때론 신비스러운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학문 사상의 발전을 앞당기기도 했다. 《헤르메티카》는 연금술과 고대 철학의 관계를 이루는 접점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문헌이다. 사실 연금술사들은 자신을 현자, 즉 ‘철학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연금술 문서를 해독하여 궁극의 불로장생약인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문서를 잘 읽어보면 ‘현자의 돌’과 같은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 문장에 고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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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 학문의 대표선수는 바로 신학이었죠.

그외의 학문들은 곁다리 수준이랄까요.

근대 인문과학의 기수들도 여전히 중세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 까요.

금을 만들겠노라는 연금술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쓴 걸 보면 말이죠.

cyrus 2018-07-20 18:08   좋아요 0 | URL
천재인 뉴턴도 평생 연금술에 매달렸어요.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게 그들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에요.
 
리뷰 쓰는 법 -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낀 것의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박숙경 옮김 / 유유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때부터 의미를 캐내고 전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는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리뷰 쓰기는 독자의 독서 체험을 공유하게 해주고 다양한 관점에서 책을 읽게 해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아름다운 말로 상찬하는 리뷰도 좋지만, 가차 없이 비판하는 리뷰를 읽는 재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주로 전업 작가, 기자, 도서평론가들이 쓴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른다. 리뷰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오랫동안 언론매체나 학술지에 실린 리뷰를 ‘서평’이라 부르고, 서평을 쓰려면 전문 작가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 독자는 서평을 쓸 수 없는 걸까? 독자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리뷰를 즐겨 쓰는 독자들은 자신이 쓴 글에 큰 의미(리뷰도 ‘서평’이다)를 부여하지 않는다. 책을 소신껏 소개한 리뷰를 썼는데도 독자라는 위치 때문에 ‘내 리뷰도 서평이다’라고 말을 꺼내지 못한다.

 

리뷰는 무엇보다 독자를 위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리뷰에 소개되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글쓴이가 상정한 독자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독자를 위한 리뷰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써진 리뷰의 효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 리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리뷰와 서평의 공통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독자도 ‘서평’이라 불릴만한 리뷰를 쓸 수 있다. 《리뷰 쓰는 법》리뷰와 서평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가와사키 쇼헤이가 추구하는 리뷰의 목표는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책의 등장에 압도당하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리뷰가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여 ‘좋은 책’을 돋보이게 한다.

 

리뷰를 쓸 때 ‘재미있다’, ‘재미없다’, 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책을 평가한다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리뷰는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를 쓰려면 객관적으로 책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책 어디가 재미있는지를 알려주고, 왜 재미없는지를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위해 ‘지침’을 제공한다. 리뷰는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책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알린다. 쇼헤이는 ‘비평으로서의 리뷰’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비평’이라는 단어도 많이 보인다. 그렇다면 리뷰도 비평인 셈이다. 저자가 비평 쓰기를 알려준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리뷰 쓰기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리뷰와 서평은 다르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의 가치를 발굴하여 그것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글쓰기 과정은 비평 쓰기의 원점이다. 따라서 리뷰가 비평과 같은 글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책을 명확히 관찰하면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 · 문화적 가치를 전달한다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도 ‘서평’이라 부를 수 있다.

 

책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시대인데도 자연스럽게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온 · 오프라인 공간은 여전하다. 그러나 리뷰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독자들은 굳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 독자 리뷰는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여전히 리뷰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뷰 쓰는 법》은 리뷰의 역할과 가치, 그리고 누구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리뷰 쓰는 법》을 읽으면 리뷰와 서평의 의미를 더욱 잘 알게 된다. 《리뷰 쓰는 법》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진다. 리뷰는 누구나 책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독서 문화를 고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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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7 16:21   좋아요 0 | URL
아마추어도 전문가 뺨치는 독후감을 쓸 수 있어요. ‘리뷰, 서평은 전문가가 쓰는 것’, ‘독후감은 일반 독자, 아마추어가 쓰는 것’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생각에 반대합니다.

stella.K 2018-07-16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같은 리뷰 쓰기의 대가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넌센스야.
근데 난 좀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긴 해.
점점 리뷰 쓰는 게 자신없어지고 있어.
리뷰에는 채찍을 필요없고 당근이 필요한데 당근을 주는 곳이 없구나.ㅠㅋ

cyrus 2018-07-17 16:22   좋아요 0 | URL
리뷰를 매일 쓰다보면 ‘어떻게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써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8-07-16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 서평 - 독후감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 진다고나 할까요.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 만으로도 독후감
쓰기의 매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리뷰는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부담 없이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cyrus 2018-07-17 16: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독후감에도 책을 평하는 글쓴이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후감을 쓸 때 느낀 점을 쓰라고 가르치지, 책을 비판하는 입장을 쓰지 못하게 해요. 책을 비판하는 생각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잖아요. 비판적 감상문도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18-07-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자만의 리뷰론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cyrus 2018-07-17 16:30   좋아요 0 | URL
네, 사람들마다 리뷰의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이가 생각한 리뷰의 정의에 공감하면 거기에 맞춰서 리뷰를 쓰면 됩니다. ^^

sprenown 2018-07-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쓰기도 결국은 글쓰기의 욕망,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책읽고 나서 느낀점과 생각을 남에게 보이면서 자기만족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가끔씩 슬럼프가 오더라도 꾸준히 써야겠다는 마음이지만,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일에 치이게 되면
이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강요하는게 아닌데...애정결핍인가? 이것도 중독성이 있더군요^^.

cyrus 2018-07-17 16:35   좋아요 1 | URL
저는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인정 욕구’ 그리고 ‘자아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족 또는 인정 욕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을 글의 주제로 삼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요. 이러한 글쓰기 또한 ‘인정 욕구’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