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 바스커빌 가문의 개 펭귄클래식 69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217] 바스커빌 가의 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두 권 이상으로 구성된 시리즈를 완독했던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전 6권), 그리고 황금가지에서 출판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전 9권)와 까치에서 출판된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뤼팽 시리즈(전 20권). 단 세 작품뿐이다.  이 세 작품을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권도 읽고 싶어질만큼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해서 언급하면 글이 더 길어질 것이고, 이번 글의 주제와 무관하니 제쳐두겠다.)

셜록 홈즈. 추리소설 매니아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안 읽어 본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영국의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이다. 그를 마주하는 범인들, 그리고 그의 절칠한 동료 왓슨 박사와 친분이 있는 형사들도 허를 찌르는 뛰어난 추리력은 유명하다. 사건 해결에만 흥미를 가지는 독특한 취향에다가 언뜻 '차도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탐정은 세계 모든 독자들을 매료시켰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홈즈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모인 '셜록키언' 이라는 모임까지 탄생할 정도이다. 셜록키언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셜록 홈즈가 나오는 모든 작품을 완독하는 것은 기본이며 작품에 나오는 모든 세부적인 사항과 정보는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1) 명탐정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살았던 집 주소는?    

 2) 셜록 홈즈의 형의 풀네임은?

 3) 왓슨 박사가 첫번째로 결혼한 부인의 이름은?   

 4) 홈즈와 범죄의 제왕 모라어티 교수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폭포의 이름은? 

내가 만들어낸 문제들이지만, 셜록키언이 될려면 아마도 이런 세부적인 내용들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첫번째,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살았던 집 주소는 셜록키언이라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세부사항이다.  

그리고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명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를 확립시킨 획기적인 작품이다. 코난 도일 이전에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추리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잃어버린 편지> 등에 나오는 오귀스트 뒤팽이 최초로 명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이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셜록 홈즈와 비교하면 재미와 흥미 면에서는 약간 뒤쳐지는 감이 있다. (재미있게도 셜록 홈즈의 시리즈의 첫 이야기인 장편소설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의 추리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그리고 셜록 홈즈에게는 간사하고 잔인한 흉악범들을 잡아내는 착한 영웅 이미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셜록 홈즈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셜록 홈즈가 있었기에 이를 변주한 새로운 추리소설 시리즈의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훔치는 범죄자이면서도 자신보다 악한 무뢰배들의 물건들을 훔치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베푸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괴도 아르센 뤼팽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추리소설 시리즈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바랐던대로 '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의 추리 대결' 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세기의 라이벌에 대한 내용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중의 하나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악당들 앞에서 승승장구하는 명탐정 덕분에 수입이 짭짤했던 코난 도일에게는 르블랑의 이런 작품 구성에 반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서 발표 당시, 셜록 홈즈가 아닌 Herlock Sholmes, 즉 헐록 숌즈(에를록 솔메)라고 표기를 하였다. 사실, 셜록 홈즈 이름의 알파벳 철자 Sherlock Holmes 에서 'Sh' 와 'H' 을 서로 바꾼 것이다) 

     

 

  셜록키언들이 뽑는 최고의 사건, [바스커빌 가문의 개] 

수많은 셜록 홈즈의 시리즈 사건들 중에서 셜록키언이 최고의 사건으로 뽑는 작품으로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이다. 물론, 다른 사건들도 내용상에서 이 작품에 뒤쳐지지 않을만큼 재미있고 훌륭한 내용의 작품들도 꽤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서 쓴 소설이라서 몇 몇 작품의 사건들은 누구나 다 맞출 수 있고, 지금도 추리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던 고전적인 트릭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연극, 영화와 TV 드라마 등으로 각색한 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품에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이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무서운 괴물로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개의 정체를 밝히려는 셜록 홈즈의 활동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장르는 추리소설이지만, 작품 분위기는 고딕소설을 연상시킨다.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작품 속 배경인 영국의 다트무어 지방 풍경의 묘사는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깊게 몰입시키게 만드는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뛰어난 두뇌라고 자부하는 천하의 셜록 홈즈가 수수께끼의 범인에게 제대로 뒷통수 맞기도 한다. 다른 작품의 사건에서도 헛다리 짚는 홈즈의 모습이 여러 번 나오지만 이런 구성은 독자들에게 작품 속 범인과 홈즈와의 팽팽한 두뇌 대결에 대한 흥미를 더욱 고조시켜주고 있다. 

  

 

  유령을 믿지 않는 홈즈, 유령을 믿는 코난 도일   

 

     

이제는 루피가 해적왕이 되는 결말을 보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 , ,  

코난, 도대체 언제 쿠도 신이치로 돌아올거니?

 

셜록 홈즈라면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착한 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직접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홈즈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모티브로 하여 탄생된 일본의 만화가 아오야마 고쇼 원작의 만화 <명탐정 코난>에 등장하는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처럼 마음씨 착하고 모든 사건에 관심이 있는 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이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에 대한 전말을 다 듣고난 뒤, 본인 스스로 허접한 사건이라고 판단하면 그 사건 해결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습관이 있다. 잔인하면서도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수법을 사용한 살인 사건이라면 홈즈의 눈빛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만큼 어떤 사건에 맡느냐에 따라서 홈즈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으로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홈즈가 선호하지 않는 사건 1순위이다. 다른 시리즈 작품들의 초반부에서도 홈즈는 왓슨 박사나 의뢰인들에게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드러나고 있다. [바스커빌 가문의 개]의 사건 의뢰인으로 등장하는 제임스 모티머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사람이 아니며 악마일 수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홈즈는 그의 입장에 대해서 의뢰인에게 면박을 주고 있다. 

 

   
 

 " (전략)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그 지역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간 담이 큰 사람이 아니고는 밤에 황야 지역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  

" 그럼 과학으로 단련되신 박사께서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믿으시나요? "

  홈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제가 지금까지 벌였던 조사는 모두 이 세계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악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악마에 도전하는 일은 너무 지나친 야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개의 발자국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건 인정하시죠? "

 " 전설에 등장하는 개도 실제로 존재하니까 사람의 목을 물어뜯었겠죠. 그렇지만 악마 같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   

 " 박사님은 이제 초자연주의자가 다 되셨군요. 모티머 박사님, 말씀해 보십시오. 그런 생각이라면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지금 박사께서는 찰스 경의 죽음을 조사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제게 그 일을 맡아달라고 말하고 계시잖습니까? " 

- <바스커빌 가문의 개> 남명성 역, p 43 -
  

 
   
 
 
이 대화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이성적인 인식으로 바라보려는 홈즈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개가 정말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면 홈즈는 이 사건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셜록 홈즈를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은 홈즈의 인식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코난 도일은 한 때 심령술에 심취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요정들의 존재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문제의 사진.  
결국, 이 사진은 조작된 것은 판명되었다.
지금으로 봐도 사진 속 요정이 가짜라는 것이 티가 나는데 
코난 도일은 이 사진 속 요정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리고 요정들이 촬영된 흑백사진이 어느 잡지에 게재되면서 코난 도일은 이 사진 속 요정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코난 도일의 관심은 셜록 홈즈 시리즈 작품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는 [서섹스의 흡혈귀] [기어다니는 남자] 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통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 등장하고 있다. [서섹스의 흡혈귀]에는 사건 의뢰인은 밤만 되면 아기에게 다가와 흡혈하는 부인의 행동을 목격했으며 [기어다니는 남자] 에서는 평범해보이는 대학교수가 밤만 되면 원숭이처럼 행동한다. 여기서도 홈즈는 사건의 의뢰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자신이 맡는 사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되지 않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코난 도일의 흔적들  
 
[바스커빌 가문의 개]의 사건 의뢰인으로 나오는 제임스 모티버 박사는 초자연적인 현상, 사이비 과학, 미신에 대한 맹신의 오류를 범하고 마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유명 추리소설가도 생각의 오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코난 도일이 헛된 현상에 불과하는 심령술에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추리작가로서의 명성에 약간의 흠집이 남게 되었지만 세기의 명탐정으로 불리우는 셜록 홈즈의 명성만큼은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셜록 홈즈 시리즈 집필에 큰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미스터리한 사건과 트릭들은 지금 읽어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출간된 추리소설들과 일본과 한국에 수많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는 만화시리즈 <명탐정 코난>과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도 코난 도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탐정 쿠도 신이치는 정체불멸의 괴한(진 & 워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하게 되는데 괴한들은 자신의 범죄 조직단에서 만들어진 아직까지 실용되지 않은 캡슐을 신이치에게 먹이게 함으로써 신이치는 초등학생의 신체로 변하고 만다. 약 한 알 먹고 주인공의 신체가 변화하는 장면은 요즘 과학 이론은 설명 불가능한 일이지만 앞에서도 소개한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단편인 [기어다니는 남자] 의 설정과 유사하다. (여기서 작품 설명까지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직접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이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6기 - 베이커가의 망령 (2002년 작)

 
그리고 꼬마가 된 쿠도 신이치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에도가와 코난'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책장에 꽂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보고나서 정한 것이다. 쿠도 신이치가 제일 존경하는 탐정이 셜록 홈즈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코난 6기 극장판 <베이커가의 망령>에서는 셜록 홈즈가 살았던 19세기 말 런던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명탐정 셜록 홈즈, 그리고 그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셜록 홈즈 이외에도 아가사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에큘르 포와로와 미스 마플,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형사 등 각기 다른 개성만점을 가진 명탐정과 수많은 사건들이 세상에 등장하였다. 사실,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과 같으 하드보일드파의 탐정들을 제외하면 셜록 홈즈는 다른 명탐정보다 성격이 차가운 냉혈한이며 사건이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사건을 맡는다. 그래서 다른 탐정들보다도 지극히 개인적인 면이 강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면 상대방의 무지를 비꼬기도 하면서 잘난 척도 한다. 그리고 여성을 은근히 무시하는 까칠한 남자이며 코카인 중독자이다. (유일하게 홈즈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도리어 천하의 머리 좋은 홈즈에게 한 방 먹인 여배우 아이린 애들러를 제외하고 말이다. 홈즈는 이 여인에게만은 존경 어린 칭찬을 하기도 한다)  홈즈와 동거동락하면서 매 작품들마다 홈즈에게 은근히 무시당하는 왓슨 박사는 대인배인 것이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기는커녕 머리만 아파오는 사건 이야기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거나 개성이 강한 탐정의 이야기를 원하는 추리소설 매니아들 그리고 classics한 분위기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단순하고 유치해보이는 것에서도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 정도는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 윗 글에 제가 만든 셜록 홈즈 문제의 답입니다. 답이 궁금하시다면,  
   밑에 드래그를 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런던 베이커가 221B, 셜록 홈즈 시리즈에 자주 언급되는 주소입니다.  
 
 2) 마이크로프트 홈즈,  
     홈즈의 형도 머리가 좋은 편이며 정부의 중요한 관리로 등장합니다.  
      ex) [브루스파팅턴 호 설계도]에서 첫 등장, 그 후 몇 편의 작품에서도 조연으로 등장.
       
 3) 메리 모스턴,  
     장편소설 [네 개의 서명]의 사건 의뢰인으로 등장하여 이 만남을 계기로  
     왓슨 박사와 결혼하여 생활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으로 죽게 되어서  
     왓슨 박사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됩니다. 참고로 왓슨 박사는 작품 속에서  
     결혼을 세 번 한 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4) 라이헨바하 폭포,  
     ex) <셜록 홈즈의 회상록> 중 [마지막 사건]. 코난 도일은 이 작품에서 홈즈를  
     죽게 함으로써 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홈즈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하였으나,  
     독자들의 끊임없는 연재 요구를 이기지 못해서 <셜록 홈즈의 귀환>에 수록된  
     [빈집의 모험]에서 홈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0-11-2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만 읽고,
나머지는 장르소설 마니아 답게 가지고는 있지만,
띄엄띄엄 읽은 것보다 안 읽은 게 더 많아요.
황금가지보다는 까치가 더 잼나여~^^

한때는 셜록키언을 꿈꿨던 것도 같은데...
요즘은 더 잼난 책들이랑 탐정이 넘쳐나는지라~ㅠ.ㅠ

다이조부 2010-11-21 21:38   좋아요 0 | URL

셜록키언 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데 재미 있네요 ^^

cyrus 2010-11-22 12:27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렸을 때 홈즈에 미쳤을 때 셜록키언을 꿈꿨답니다.
한 번 우연히 TV에서 영국의 셜록키언에 대한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홈즈 코스튬은 기본이고,,^^;;
모든 작품 내용과 홈즈의 특징뿐만 아니라 모든 시리즈에 나오는
왓슨 박사, 형사들, 관련인물들 심지어 범인들에 대한 세부정보까지
알고 있어야하더라고요. 아마도 100번 넘게 읽어야 가능한 것이겠죠.^^;;

비로그인 2010-11-2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상하게도 이쪽 장르의 소설은 손이 가질 않더라고요.
어릴땐 그래도 좀 읽은 듯 싶은데..
<신의 지문> 을 읽고 그런 쪽으로 설명하는 책쪽으로 기울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후후 그나저나 셜록키언 되려면 쫌 힘들겠다는.. ㅋ

cyrus 2010-11-22 12:28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에 나오는 추리소설이 별로 땡기지 않더라고요.
왠지 읽게 되면 머리가 아플것도 하고요^^;;

2010-11-22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2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2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1-22 13:44   좋아요 0 | URL
편하시는 발음대로 불러주시면 되요.
대부분 사이러스라고도 하는데,, 사실 저도
이게 정확한 발음이 뭔지 모른답니다.

원래, 초딩때 읽었던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에서
시루스의 철자를 cyrus라고 알고 있어서,,, (외국어 실력이 형편
없답니다.^^;;) 닉네임을 cyrus이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키루스라고 부르더군요. 실제 네이버 사전에 키루스 검색하면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이름입니다.

그래서 maggie님이 편하실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잘못 불렀다고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비로그인 2010-11-22 15:28   좋아요 0 | URL
영어식으로는 사이러스....원래대로 읽으면 키루스라고 나오더군요.
저도 얼른 검색해봤죠.
헤헤~~난 키루스님이라고 불러야겠다, 그럼~~

stella.K 2010-11-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루스님은 펭귄 클래식 마니아가 되셨나 봐요.
저도 추리 소설 별로 안 좋아해서 뭐라 비교하는 게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저는 홈즈 보단 루팡이 더 재밌게
읽히더라구요. 몇해 전 홈즈 시리즈 중 두 권을 얻어었는데
결국 못 읽고 사이판에서 도서관 운영하는 친구에게 보냈지요.

알라딘 인용구 글박스 기능이 안 좋은가 봐요.
저도 처음에 사용했다 고생 좀 했는뎅...ㅠ

cyrus 2010-11-22 13:37   좋아요 0 | URL
루팡 시리즈도 홈즈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사실은 지금 펭귄클래식 공식 온라인 카페에서
리뷰 대회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쩌다보니 펭귄클래식 책들이
서재에 올리고 있는거랍니다. 혹시 펭귄클래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카페에 한 번 들려보세요. 거기서도 고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모여있답니다. 간혹, 그 곳에서 제가 아는
알라디너도 만나기도 하고요^^

그리고,, 인용구 박스,, 이거,, -_-;;
간혹 이런 문제가 발생한답니다. 글 외면상 보기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삭제해서 다시 쓸쑤도 없고요.

starover 2010-11-2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로 추가했어요!

cyrus 2010-11-22 21:03   좋아요 0 | URL
갑작스러운 댓글에 누군가 했더니 그 분이었군요.
<왕자와 거지> 리뷰랑 제임스 조이스 리뷰 보고 알았습니다.^^
여기서 만나게 되서 반갑습니다.^^

starover 2011-01-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키루스 님의 리뷰에 굴복했습니다.

cyrus 2011-01-21 20:49   좋아요 0 | URL
굴복했다뇨,, 저도 그리 잘 쓴것도 아닌데요 ^^;;
 
한밤이여, 안녕 펭귄클래식 51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396] 한밤이여, 안녕

 

 Episode

1941년 4월 18일, 영국의 우즈 강 풍경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우즈 강 주변에는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A 소년과 그의 4명의 친구들은 우즈 강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자전거 타기에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A 소년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가다가 멈추면서 우즈 강변 쪽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저기 강에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가고 있는데, 저거 뭐지? "  

A 소년과 나머지 일행들도 타던 자전거를 멈추고, 친구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강변 쪽으로 일제히 고개가 향했다. 그 친구 말대로 강변에는 시커먼 물체가 강 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A는 강 위의 물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의문의 물체를 뚫어지게 쳐다본 A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 야,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거,,, 저거 사람 시체 같은데,,, "  

A의 말에 친구들도 다시 한 번 그 문제의 물체를 주시하였다. 그러자 이들도 이제서야 사람의 시체인 것을 아는 순간, 놀랐는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시체를 본 순간 느낀 충격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채 한 명은 바로 경시청으로 신고하였고 나머지 동료들은 떠내려가고 있는 시체를 건져냈다.  

소년들이 건져낸 시체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시체의 상태를 봐서는 익사한지 20일이 되었다. 죽은 여자가 입고 있는 코트 주머니 안에 무언가 가득하게 채워넣었는지 불룩하였다. 코트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수많은 돌덩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갑자기, 시체 발견 현장에 얼굴이 빨개진 채 흥분으로 가득한 사내가 시체 쪽으로 달려왔다. 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형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억누르면서 사내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레너드 울프 씨, 혹시 이 여자가 당신이 찾았던 실종되었던 아낸가요? "  

  " 네, 맞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실종 신고했던 제 아내, 맞습니다. "   

4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찌고 있는 잔디밭에 시체가 되어 잠 자듯이 누워 있는 사내의 아내, 그녀는 바로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였다. 죽기 20일 전, 3월 28일. 울프는 자신의 서재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버린 차가운 주검이 된 채, , ,   경시청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생전 그녀가 평소에 앓고 있었던 우울증세로 인한 자살로 판명내렸다.   

 

 

  버지니아 울프 vs 진 리스  

만약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진 리스<한밤이여, 안녕>을 읽고 난 뒤,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성(性)과 문학성이 동일한 이 여성 작가를 반겼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바닥에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진 리스가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 독자들과 여성 비평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들이 보기에는 진 리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너무 나약하고 암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나로서도 무기력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의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면서도 쉽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 리스는 울프보다 먼저 8년 전에 태어나, 영국 내에서 여성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작가 '진 리스' 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한밤이여, 안녕>은 1939년에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2년 전이다. 울프는 분명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여성 작가와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정신질환 증세가 그녀를 괴롭혔으며 그 정신적 고통의 순간에서도 울프는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막간>을 집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시기였다.

버지니아 울프와 진 리스, 이름만 들어도 두 사람 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문학 역시 비슷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남성 작가들이 지배하는 문학사들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면서 여성 작가들을 재평가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력에 눌러 있었던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각인시켜준,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이라는 비평문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울프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진 리스도 '여성'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한밤이여, 안녕>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작품 속 여주인공인 샤샤라는 인물을 통해서 남성 사회에 억압받고 있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작품 속 샤샤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져 있으며 온통 불안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질환자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심한 정신질환과 우울증세를 보여왔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에게 논란만 남긴 문제의 결말 

<한밤이여, 안녕>의 결말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소설 속 샤샤는 전체적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괴물' 같은 남자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방이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방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샤샤의 방은 남성을 믿지 않는 그녀의 폐쇄적이고 어둡기만한 성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굳건하기만 했던 샤샤의 성격은 결말에 다다르게 되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다.외로운 그녀에 먼저 다가간 르네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재회하기를 고대하던 르네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소설 전반부에서 샤샤가 기피했던 흉측스러운 모습의 사내가 들어온다.(!) 그녀의 방에 들어온 사내는 샤샤는 한 침대에 누우면서 소설은 막을 내리게 된다.  

샤샤가 남자들에 대한 강박적인 혐오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결말에서는 자신이 싫어했던 사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만다. 이런 결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엇갈려져 있다. 남성들로 가득한 사회에 희생당한 여성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의견과 지금까지 겪었던 남성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을 벗어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아를 다시 얻게 된다는 재탄생이라는 긍정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울프의 방 vs 샤샤의 방

앞에서도 버지니아 울프가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다는 문학적 가정에 대해서 살짝 언급했지만, 그녀가 쓴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이라는 존재의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울프는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 샤샤와 작품 속 결말을 비관론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문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인 저평가에 대해 예로 들면서 남성 사회에서 부당한 입장에 처한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울프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또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와 같은 여성 문학가들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입(Money)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여성의 공간, 즉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인 샤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방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 사회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울프가 말하고 있는 자유로운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샤샤의 방은 오직 세상의 남성들에 대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이고 답답한 공간일뿐이다.   

   
 
 "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 "  방이 내게 묻는다.  " 그래? 안 그래? "  
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여성용 큰 침대와 그 맞은편으로 남성용 좀 작은 침대. 세면기는 커튼에 가려져 있다. 방은 꽤 큰 편이다. 싸구려 호텔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내 코를 스친다. 호텔 밖에 자갈을 박아 포장한 좁은 도로는 가파르게 경사져 올라 몇 개의 계단과 만나게 되어 있다. 막다른 길이다.  
 
 - p 9 -  
 
   
   
 
작품의 첫 시작 부부인 샤샤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방에 대한 묘사이다. 샤샤의 방이 의인화되어 샤샤에게 물어보는 첫 문장은 샤샤의 성격이 폐쇄적인 강박 증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방이 샤샤에게 방의 상태를 물어보고 있지만, 이것은 샤샤의 독백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방의 외부에는 '막다른 길' 이라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막다른 길' 은 넓은 세상 앞에서 개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샤샤의 순탄치 않은 삶을 예고하고 있다.
 
   
 

 " 나가세요, 나가요. "  살바티니가 말한다. " 나가라니까. "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가봉실로 들어간다. 이 방은 사용하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사용되는 경우는 위층의 방들이 손님들로 가득 찼을 때다. 나는 문을 잠가버린다.

 - p 34 -

 
   

자신의 방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뛰어들어 샤샤는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지만 남성에 대한 기피와 혐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결국, 샤샤는 업무 중 실수로 인해 같은 사무실에 일하는 남성 직원으로부터 싸늘한 시선과 말을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한 충동적인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샤샤는 밀폐된 공간으로 숨게 된다. 그곳이 바로 인적이 드문 회사 내의 가봉실이다. 가봉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버리는 모습은 자신을 향한 남성들의 따가운 눈총과 언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자세이다.  

  

 

  검은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마는 샤샤  

여성은 '아름다움' 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이며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남성들보다 민감한 편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사고 싶어하고, 입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넘어서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여성' 이라는 정체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려는 심리적 본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들은 이쁜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한다.  

샤샤는 우연히 옷 가게에서 보게 된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검은 드레스' 는  샤샤가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나는 그 까만색 드레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미치게 화가 날 정도로 나느 그 옷을 갈망한다. 그걸 손에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질텐데.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페론 부인이 그 옷을 나를 위해 보관해 주도록 청하면 어떨까? ......  을 꼭 구할 거라고. 그 옷을 살 돈을 반드시 구할 거라고.  

- p 39 -

 
   

하지만, 샤샤는 이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만다. 남성들의 시선을 꺼려하고, 자신의 존재에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에게는 당연히 검은 드레스를 살 수가 없다. 샤샤에게는 여성의 정체성이 이미 상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당에 아름다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샤샤가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에게는 드레스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샤샤에게 당장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주어져있었다면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여 입는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전과 같은 남성에 대한 기피증이 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샤에게는 자신의 수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과 연결되었던 사무실 일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던 당시 유럽의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읽기가 쉽지 않았던 진 리스의 소설

긴 글을 마무리하자면, 진 리스 작품의 결말를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남성의 세상에서 희생당한 여성이라고 비관론적인 해석 쪽으로 손을 들고 싶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헌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해서 울프의 입장을 빌어서 ' 내 생각은 이렇다' 고 말하기에는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리고 <한밤이여, 안녕>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어서 쉽게 읽혀지는 것도 아니라서 제대로 읽지 못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샤샤의 삶과 작품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글의 마무리를 <한밤이여, 안녕>의 생뚱맞은 결말처럼 마무리짓고자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무척 예민한 성격과 정신질환을 달고 살아야했지만 어렸을 때 의붓 오빠로부터의 성추행과 아버지의 죽음 등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그녀의 마음의 병을 악화시켜버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지금보다 미치지 못했다. 울프는 평생 다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기성사회 내에서는 그녀의 활동에 대한 시선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제임스 조이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작품을 쓰는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울프는 같은 문학적 기법을 구사하는 '여성' 작가가 아닌 제임스 조이스를 뛰어넘는 '문학' 작가가 되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녀의 자살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기성사회를 넘어서지 못한, 불행한 페미니즘 작가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진 리스 역시 남성 위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밤이여, 안녕>이 영국 BBC방송에 극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문학적인 활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왕립 문학학회 특별회원으로서의 활동과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작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두 여성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은 같았으나, 이들이 걸어야했던 여성으로서의 삶의 길은 너무 엇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에서 보고 있을 울프로서는 진 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위의 Episode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출판번역가 박중서 씨의 글을 토대로 제가 나름 소설 형식으로 꾸민 것입니다. 울프의 죽음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55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0-11-2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The Hours로 버지니아 울프를 엿봤던거 같아요.
'디 아워스'를 시작으로 델러웨이 부인,자기만의 방...정도 읽었던 거 같아요.

cyrus 2010-11-22 12:20   좋아요 0 | URL
울프의 소설들 어떤가요? 울프의 소설을 발표 연도순으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작품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나무꾼님^^

꽃도둑 2010-11-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어요. 처음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었던 게 아마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을 거에요. 버지니아 울프가 뭐지?.. 그러다 어느 날 <델러웨이 부인>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죠. 그때의 느낌이란...의식의 흐름...참으로 낯설고 꼼꼼하게 그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하는데 좀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던 기억이 나네요...근데 진 리스 작가는 처음 접하네요. 사이러스 님 리뷰 덕분에 흥미로운 책 하나 얻고 가네요..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0-11-22 12: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시를 읽고나서부터 울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 리스도 울프와 동시대의 여성 작가인데 이 사람도 그 당시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나름 시련을 겪었던 작가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쉽게 읽혀지지도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꽃도둑님 같은 여성 독자분들에게는
진 리스의 작품의 내용이 공감되실겁니다.

지금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이 펭귄클래식시리즈로 나온
<한밤이여, 안녕>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전 2권)이
소개되었습니다. 참고로 <사르가소 바다>는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혹시 <제인에어>도 읽어보셨다면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보시면 좋을겁니다.

굿바이 2010-11-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어쩐일인지 친구와는 다르게 저는 참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3기니>가 있는데 다시 한 번 꺼내볼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1-22 13: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읽어봤는데,, 글 형식이 비평문이다보니 딱딱한 느낌 때문에
힘들었답니다^^;; 특히 제가 읽었던 <자기만의 방>이 굿바이님께서
언급하신 <3기니>와 함께 수록된 민음사 문학전집 판본이었는데,,
<3기니>와 함께 읽었을 때 고생 좀 했었습니다. 분량도 두꺼웠고요^^;;

비로그인 2010-11-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작가의 일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당차던 그녀가 돌을 쥐면서까지 물속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있었는데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죠..

치열한 내면, 용납하지 않는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리고 아무도 몰랐을 그녀만의 아픔들.

음.. 오늘 cyrus님의 글을 읽으며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걸음을 걸었던 또 다른 작가를 만나고 갑니다. 왠지 말없이 찡끗 ^^ 웃음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ㅋ

cyrus 2010-11-26 16:2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이 언급하신 <어느 작가의 일기>가 버지니아 울프가 생전에
기록했던 일기문인가요? 진 리스의 작품이랑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나서부터 울프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일기라면 그녀의
내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을거 같습니다.^^
 
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139] 감정 교육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  

 
   

 

  플로베르에게 살짝 굴복당한 뻔하다 

   " 이 책에 굴복한다. "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카프카의 문학은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카프카는 플로베로의 세밀한 묘사를 모방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플로베르의 문학은 사실주의에 속하는데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사실감 있게 묘사하려는 필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정말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에도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그가 얼마나 꼼꼼했는가 하면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이 작가에게 주말에 놀러가자고 권하자 플로베르는 새 작품을 쓰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자신들끼리 유흥을 즐겼고 일요일에 플로베르의 작품 집필 정도 확인 차 집으로 찾아갔다. 플로베르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작품이 완성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두툼한 원고를 읽어본 친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전에 읽어본 내용과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낀 것이었다. 한 친구는 플로베르에게 며칠 전에 읽어봤던 그 내용과 똑같다고 지적하였으며 주말동안 뭘 했는지 물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은 주말에 작품 집필하는데 바쁘다고 그러더니 내용이 고치지 않은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의 반응에 오히려 본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플로베르가 하는 말,   

 "고쳐진게 없다니. 이 친구야. 어제 이 문장 부분의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가 다시 쉼표로 바꾸었다네. "       

문장의 부호 하나 넣는데에도 사실적 표현을 위한 그의 몰입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주말동안 문장 부호 하나를 넣는데 집에 틀어박혀 고심을 한 작품이 아마도 <감정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플로베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명작 <마담 보바리>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두 권짜리 <감정 교육>을 읽는 내내 그의 세밀한 묘사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작품 한 편이라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플로베르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음을.) 1권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카프카가 왜 플로베르의 작품에 굴복했는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의 파리  vs <감정 교육> 플로베르의 파리 

<감정 교육>은 파리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어느 청년이 욕망과 허영의 도시인 파리에서 겪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장관이 되기를 꿈꾸는 청년 프레데릭 모로는 자신보다 연상이며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아르누 부인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파리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소속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성에 집착하고 권태에 빠진 상류층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은 부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르누 부인에 대한 사랑도 점차 식어만 갔다. 결국,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은 과거의 사랑에 대한 확인만 한 채 헤어지고 600여 페이지 소설도 마무리짓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길고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통해서 1840년대 파리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표 시기는 다르지만 프랑스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굵직한 대혁명 뒤의 프랑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19세기 초반의 파리를 묘사하고 있다면 플로베르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를 포함한 19세기 중반까지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다. 시기와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사회진출을 꾀하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다.  

발자크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플로베르는 그의 사실주의적 문학을 영향 받지는 않았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의 대단한 집중력과 관찰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 프레데릭의 삶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구상한 것이다. 그러니 플로베르의 파리는 정말 사실적이면서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본인이 말할 정도로 자신이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사회는 순전히 그가 창조한 파리이다. 즉, '발자크의 파리' 인 것이다. 발자크가 묘사한 파리는 무미건조한 파리와는 다르게 생동감 있어 보이며 <고리오 영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플로베르의 작품보다는 쉽게 읽혀진다. (발자크의 작품을 읽어본 다른 이들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었을 때 술술 읽혀져나갔다) 

서로 다른 사실주의 문학을 구축해서인지, 두 작품의 결말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냑크는 부에 대한 욕망을 가득한 '진흙투성이' 파리 사회를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낙심과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 

결말에서는 파리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찬 포부를 드러나고 있다. 발자크는 라스띠냑크의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어둡고 칙칙한 파리의 기성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라스띠냑끄의 도전은 발자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당시 파리의 열악한 현실을 비추어 보면 허무맹랑하다.  그래서 플로베르의 파리와 작품의 결말은 발자크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프레데릭은 부조리한 파리 사회를 목도하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제일 좋았다고 중얼거리면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이런 프레데릭의 모습은 혁명 이후의 세대들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집고 바꾸기 위해서 가슴 속에 뜨거운 혁명의 열정을 뿜어내지만 혁명를 지나간 이후에는 이들 역시 혁명 이전의 기성 세대들처럼 순응적이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되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만약 이 작품을 보들레르가 읽었더라면 

혁명 발발 이후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의 재회 장면은 혁명의 열정이 식어가는 혁명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은 재회를 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아르누 부인에 대한 프레데릭의 사랑은 1권 속 모습과 대조적이다.  아르누 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면서 속으로는 실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누 부인은 예전과 다른 프레데릭의 변화된 감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부산 떨면서까지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려고 하고 있다. 프레데릭이 자신 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거 아닌지 괜한 걱정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프레데릭은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워보려고 하지만 이전처럼 뜨겁지가 않으며 금방 사그라진다. 식어버린 부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당혹스러웠는지 담배 한 개피를 물어본다.  

   
 

  프레데릭은 아르누 부인이 몸을 내맡기고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자 그 어는 때보다도 더 강하며 격렬하고 미칠 듯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 반감이랄까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제지했다. 하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신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끌어내리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 <감정 교육> 2권,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윤진 역, 펭귄클래식, p 338 -

 
   

작품에서는 사소한 장면이지만 당혹스러움에 담배를 피우는 프레데릭과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아르누 부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에 쉽게 변해지고 무미건조해지는 인간과 그런 인간의 습성에 두려워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예전과 달라진 프레데릭의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르누 부인이 떠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에게 전해주는 모습은 딱하기만 하다. 젊음의 상징인 까만 머리카락을 전해줘도 프레데릭의 감정은 이제는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인간의 모습에 대한 알레고리는 <감정 교육>이 발표된 해인 1869년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쭈글쭈글한 노파는 누구나 좋아하고 환심을 사려 하는 이 귀여운 어린애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노파처럼 그렇게 연약하고, 그녀처럼 이도 머리털도 없는 귀여운 것을. 
 그래서 노파는 아이에게 다가가 웃어주면 좋은 얼굴 표정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니는 이 늙어빠진 착한 여인이 어루만져 주는 데 겁이 나 발버둥치며 집 안이 떠들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착한 노파는 다시 그녀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우리 불행한 노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것들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어린것들을 무서워하는구나! "  

 - <파리의 우울> [노파의 절망]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역, 민음사, p 27 -

 
   

<감정 교육> 그리고 <파리의 우울>은 1869년, 같은 해에 암울하기만한 파리를 예리하게 묘사한 글을 발표했지만, 보들레르는 이 유명한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미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이 세상에 나오기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플로베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파리의 모습을 플로베르라는 동시대의 작가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높게 평가한 유일한 문학가일 수도 있다. <감정 교육> 발표 당시 문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아르누 부인은 보들레르의 글에 나오는 노파처럼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순진무구했던 프레데릭은 저 꼬마처럼 늙어버린 아누르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레데릭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 드러난 프레데릭의 감정들은 다양한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기성 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이 되어서 사회에 대한 환멸과 안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프레데릭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세대들에게도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프랑스 문단이 플로베르의 날카롭게 파리의 실상을 새긴 <감정 교육>을 외면했던 것은 혁명 이후 보다 나은 세상이 도래되지 않았다는 환멸감과 자신들도 모르게 삶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습성에 물들어 있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0-11-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기전에 적어도 플로베르정도는 읽어줘야 할텐데...
보들레르는 고사하고 김광규만 읽었다나 어쨌다나~~~

근데,플로베르에서 보들레르를 떠올리시다니...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상상력도 대단하십니다여~^^

다이조부 2010-11-14 08:18   좋아요 0 | URL

딴지걸자는 건 아니지만 ^^

저는 세상에 죽기 전에 뭔가 해야 할일, 20대에 꼭 해야 할 일 이런

규정이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것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ㅋ

아무튼 그래서 플로베르 와 보들레르 를 남은 생에서 읽지 않는다고 해서

뭐 그닥 후회는 안할듯~ 한동안 김광규 시집을 틈틈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언급한 두 명의 외국유명시인의 시를 접하지 못한건 몰라서 모르겠는데

생전에 김광규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인생이 더 시시했을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하하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시집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말로만 죽기 전에 읽자고 그러지, 그렇다고 너무 연연하게
두지 않습니다. 예전에 문학 작품 읽기를 소홀히 해서
삶도 바빠지는만큼 조금이라도 열심히 읽자는 차원에서 정한 것이랍니다.
뭐 죽기 전에 다 못 읽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책들이고,
안 읽었다고 그렇게 후회하는 점도 없고요^^


비로그인 2010-11-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기 구석에 있는데,, 오늘밤 다시 끌어 안아 봐야겠습니다. 물론 Cyrus님의 글도 생각해보면서 말이지욥 ^^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읽는데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름 생각거리가 많았던 플로베르의
작품인거 같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감정교육>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학생시절의 정의감을 잃고 속세에 물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90년대부터 우리나라 소설에 나오는 후일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프랑스 고유무술 사바트의 고수가 나오는 것이죠.

cyrus 2010-11-14 20:32   좋아요 0 | URL
자이트님은 격투기를 해보신 적이 있어서 그 장면이 기억이 남았군요^^
이 작품 읽으면서 1840년대 파리가 크게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1권에는 부패한 왕정에 대해서 젋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 간혹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14 23:3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문학사는 연변에서 나온 것이라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적인 관점이 강한데, 1848년 혁명을 그린 가장 사실적인 작품으로 <감정교육>을 꼽더라구요.

아...그런데 사바트는 발차기 전문이라 저는 못합니다.저는 오른쪽 골반을 다쳐서 오른쪽 무릎을 많이 올리거나 비트는 동작을 못해요.

cyrus 2010-11-14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격투기는 남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스포츠이지만,
무엇보다도 몸 관리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blanca 2010-11-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과 정말 비슷한 구도군요.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플로베르는 예전에 보봐리 부인을 참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망설여졌어요. 감정교육은 꼬옥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cyrus님 말씀 들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0-11-14 23: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다음 플로베르의 작품으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마담 보바리>를 읽으려고 하는데, 망설여지네요ㅎㅎ
그래도 blanca님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예전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두 권짜리 작품들도 완독하실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무턱대고 덤벼든 감이 있었답니다.^^;;

starover 2010-12-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이러스 님은 짱임.

cyrus 2010-12-11 16:1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으하님^^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370] 영원(蠑蚖)과의 전쟁

 

 

   
 

「왜요?」
「거기 악마들이 있어요. 선장님. 바다 악마들이죠.」
「바다 악마가 뭐요? 물고기?」
「물고기는 아니고요.....
혼혈은 잠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악마에요. 심해의 악마. 바티크 사람들은 <타파>라고 부릅니다. 타파.
그 악마들이 모여서 자기네 마을을 이루고 산답니다. 잔 채워드릴까요?」

- 『도롱뇽과의 전쟁』p 24 -

 

 

 

 국내에서는 생소한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

체코에서 이름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대부분은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를 언급할 것이다. 체코라는 나라는 예전에 '체코슬로바키아'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었다. 그래서 예전의 국명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1993년에 정식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음에도 2001년까지 체코를 '체코슬로바키아' 라고 불렀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사실은 알게 된 것은 2001년에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가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했던 당시 체코와의 평가전을 치뤘을 때 알게 되었다. 그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5:0으로 대패하여 거스 히딩크는 그 이후로 '오대빵' 감독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체코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는 체코라고 하면 앞에서 언급한 두 명의 문학가와 한 때 세계적인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던 축구선수 네드베드 밖에 생각이 안난다.   

이번에 읽은 <도롱뇽과의 전쟁> 덕분에 카렐 차페크라는 체코의 걸출한 문학가를 알게 되었다. 이 작가 역시,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문학가이지만 체코 국민들에게는 카렐 차페크에 대한 애정이 무척 각별할 정도로 '국민작가'급의 대우를 받았으며 지금도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생전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로봇>이라는 희곡이 있다. 그의 동생이며 역시 작가인 요제프 카페크와 공동으로 집필하였는데 그 동생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용어 '로봇(Robot)' 를 처음 만들고 사용한 인물이다. 로봇은 robota라는 '일한다' 라는 뜻의 체코어에서 유래되었는데, 형인 카렐이 동생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인지라 지금까지도 '로봇' 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카렐 차페크라고 알고 있다. 지금도 네이버 백과사전에 '로봇' 을 검색하면 카렐 차페크가 만들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카렐 차페크는 백과사전 편찬자들에게 잘못된 내용을 검토할 것을 종용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카렐 차페크가 쓴 작품들이 번역되긴 하였으나,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서 그런지 절판된 책이 많다. 그는 짤막한 동화 작품집으로도 유명한데 절판 상태이다. (<어느 의사의 길고 긴 이야기><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가 있는데, <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에도 '어느 의사의 길고 긴 이야기' 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나마 절판된 작품들은 최근에 지만지고전천줄에서 철학소설 3부작 시리즈 중 두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으며 사실 <도롱뇽과의 전쟁> 은 2001년에 두산동아에서 출판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SF소설이 아니다 

<도롱뇽과의 전쟁>을 어느 장르라고 쉽게 말하기 힘든 작품이다. 카렐 차페크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는 '로봇' 용어 창조 이외에도 이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SF소설이 아니다. SF소설을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과학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미래의 과학 수준을 예상하여 전개되는 장르이다. 물론 <도롱뇽과의 전쟁>을 읽어보면 SF소설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도롱뇽이 인간처럼 말을 하고,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도 인간처럼 문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새로운 종족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내용 중간에 도롱뇽에 대한 연구논문과 학술적인 자료를 발췌한 기록들을 삽입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게 되면 과학소설이면서도 SF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SF소설에는 과학의 미래, 과학의 진보에 수반되는 사회생활의 변화에 대한 문제점들을 다루는데 <도롱뇽과의 전쟁>은 인간처럼 행동하는 도롱뇽을 작품에 등장시키켜 단순히 과학이 진보된 미래를 비판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는 과학이 지배된 사회 비판은 미시적인 내용일 뿐이다. 이 작품은 과학, SF소설이라기보다는 진지하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사회비판적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제2의 종족, 도롱뇽 

이 작품 줄거리는 '자본주의' 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반 토흐 라는 선장은 바닷가에서 우연히 진주조개를 잡는 도롱뇽들을 발견하게 된다. 도롱뇽들에게는 자신들이 잡은 진주조개로 아름다운 빛깔로 둘러싸인 진주들을 채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본 반 토흐 선장은 도롱뇽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한 몫 잡아보기 위한 사업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그 후로 인간처럼 행동하는 도롱뇽들의 정체는 조금씩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롱뇽들은 인간들에게 직접 접근하여 말을 걸기도 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진주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구상된 반 토흐 선장의 사업 계획은 점차적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간다. 기업가들은 노동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도롱뇽들을 노동자원으로 투입시킨다. 노동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수중 건설사업에 도롱뇽들이 사람 대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도롱뇽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서 전쟁터에도 동원하기도 한다.

한 때 깊은 수심속에서 살았던 미지의 동물에서 인간 덕분에 문명의 사다리에 타고 올라간 도롱뇽들은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제2의 종족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인간들에게 불평등과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도롱뇽들은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언론 매체를 장악, 통제하였으며 인간에게서 배운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만든 폭탄으로 의도적으로 대홍수를 일으켜서 인간들을 도발하기도 한다. 이 때부터 인간 대 도롱뇽이라는 자신들의 생존권이 달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작품 시작부터 등장하는 아름다운 진주 하나가 인류과 도롱뇽은 서로 피를 보게 되었다. 진주는 아주 값비싼 귀금속 중의 하나이다. 도롱뇽들이 진주를 많이 캐내기 위해서, 그리고 힘든 노동에 도롱뇽들을 투입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들을 제공하는 반 토흐 선장이나 기업가들의 모습은 과거 식민지 국가가 많았던 때에 성행했던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연상시키게 한다. 플랜테이션은 사업가들이 자본과 기술을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하게 했던 농업방식이다. 식민지 나라를 다스리던 유럽 열강들이 자주 이용하는 사업 방식이었는데 훗날 유럽 대륙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 열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에 산업혁명이 불기 시작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공장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특히 값싼 노동력인 동시에 그 당시에 인권이라고는 가지지 못한 상태였던 빈곤층들을 자신들을 위한 일꾼으로 써먹기에는 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빈곤층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으로 기업가들에게 착취당하였다. 이 때부터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와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빈곤층 노동자들은 공장 내의 기계 보급이 두려웠다. 자신들이 기계의 등장으로 고용되지 않을까봐 그들은 게릴라로 공장에 급습하여 기계를 부수는 난동을 펼치기도 했었는데 이를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한다.  

<도롱뇽과의 전쟁>에도 도롱뇽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자 인간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자리가 빼앗길까봐 총파업을 강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롱뇽들을 살해하는 등 극단적인 일도 발생하게 된다. 기계를 파괴하려던 18세기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만능 노동자였던 도롱뇽들을 죽이려고 했던 작품 속 노동자들은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등장하게 된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사상 뒤에 가려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물질적 탐욕이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만들게 된 원인이 되었다. 작품 초기에 배에 타고 있던 진주잡이들이 봤던 시커먼 바다의 악마들은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인류가 만들어낸 골칫덩어리 악마인 것이다.  

 

 

 

  첫 번째가 비극, 두 번째는 코미디, 그러면 세 번째는...?  



칼 마르크스는 "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코미디이다. " 라고 말하였다.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희극적인 행적이 담겨져 있다. 인류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던 자본주의의 역사가 비극이라면, 아마도 역사에 대한 코미디는 이 작품일 것이다. 인류 대 도롱뇽으로 점철되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차페크는 코미디로 희화화시키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굉장히 슬픈 사람이라고 하였다. 작품 속 마지막에는 에필로그 형식으로 차페크가 작가로 직접 등장하여 작품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차페크는 자신의 작품을 극단적으로 구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미래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흥분과 분노를 억누른 채 종이에 이 글을 꾹꾹 눌러가면서 썼을 것이다. 그는 인류의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킬줄 아는 문학적 광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래에 대한 차페크의 생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다음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즉 세 번째 경향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과거와는 별반 다를게 없다. 지금도 자본이라는 수단 하나가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까. 하늘 위에서 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차페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10-11-1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쿤테라에 이어 보흐밀 흐라발을 추가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덕분에 차페크도 추가합니다.

cyrus 2010-11-10 13:39   좋아요 0 | URL
보흐밀 흐라발이라,, 반딧불이님 덕분에 또 한 명의 체코 작가를
알게 되었네요^^ 제가 읽은 작품 말고도 <호르두발><별똥별>이라는
소설이랑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에세이가 출판되었는데,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대부분 나머지 작품은 절판 상태입니다)
저도 아직 안 읽었지만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읽어보려고 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1-1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SF로 분류되어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님의 리뷰를 보니 얼른 읽고 싶어져요.
4대강과 김탁환만 읽고 바로 봐야겠어요.

리뷰 좋아요.
그리고 오늘은 리뷰랑 댓글 박스 사이의 간격이 얼마 안떨어져 있어서 좋아요~^^(속닥)

cyrus 2010-11-10 17:03   좋아요 0 | URL
사회비판적인 소설이면서 그렇게 내용이 우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장하신 책이 두산동아에 출판된 것이라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것도 읽어보세요. 이번에 나온 작품이
완역판이라네요. 그리고 나무꾼님이 언급하신 김탁환이
이번에 나온 소설 작품을 말씀하신거지요? 저도 그 책 급땡기던데,,
즐거운 독서 하세요. 나무꾼님^^

노이에자이트 2010-11-1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코 출신 유명인은 그래도 몇 명 알겠는데 슬로바키아 출신은 정말 얼른 생각이 안 나는게 현실이지요.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유화운동과 반스탈린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이었고, 그 시절 서기장도 슬로바키아 출신인 두브체크였는데...하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갈라진 지금 슬로바키아는 체코에 가려져 인지도가 낮은 나라가 되어버렸지요.

cyrus 2010-11-11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체코슬로바키아라고 알고 있었고, 저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도
체코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겠군요. 이런 사례와 유사한 것이
유고슬라비아도 몇 년전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고 개명된 것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된 것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조금씩 국외 정세들도
알아야할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1 18:23   좋아요 0 | URL
아...그렇던가요? 제 주변엔 슬로바키아는 몰라도 체코는 거의 다 알더라구요.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나 밀란 쿤데라 덕이지요.여행사에서도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동유럽 중에선 체코를 제일 많이 간다고 하네요.하지만 슬로바키아는 모르던데 그건 아마 체코슬로바키아 시절부터 줄여서 체코라고 했던 버릇때문일 겁니다.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어를 쓰더군요.

슬로바키아 출신들이 자유화 운동의 선두에 섰는데 정작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후로 외국인들은 체코는 알아도 슬로바키아는 모르게 되었으니 묘하게 되어버렸지요.



유고슬라비아는 내전 이후 몇개로 갈라졌는지 어지러울 정도라서...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저번 월드컵 땐 슬로베니아 선수단을 계속해서 아나운서가 슬로바키아라고 한 일도 있습니다.
 
보물섬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163] 보물섬

 

 

 

  추억의 애니메이션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만화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연휴 때만 되면 TV에서 흘러나오던 추억의 만화영화. 

그렇다. 모든 이들에게는 <보물섬>으로 알려진,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데자키 오사무(1943~   )가 그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원작보다도 유명한 만화이다.  

  
데자키 오사무 

나도 이전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만화 <보물섬>이 데즈카 오사무의 명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름만 약간 비슷할 뿐 다른 사람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보물섬> 이외에도 국내 애니메이션 팬들이라면 아는 <허리케인 죠><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린 만화가이다.  이름 때문에 간혹 <우주소년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1928~1989)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데즈카 오사무 역시 '신 보물섬' 이라는 만화를 제작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푸른 바다 위의 카리스마, 실버

 


데자키 오사무 <보물섬>의 짐 호킨스

 
데자키 오사무 <보물섬>의 존 실버  

원작이 나온지 오래되었어도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만화에서는 실버는 악역이면서도  

사나이다운 기질이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초등학생 때 만화 속 실버를 본 순간, 

그의 매력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 , ,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설날인지 추석인지 모르겠지만(분명한 건 학교 가지 않은 공휴일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만화 <보물섬>을 TV로 보게 되었다.  만화 <보물섬>이 TV판과 극장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만화 한 편에 소설 줄거리 전체를 담고 있으니 극장판일 것이다.  

이 만화를 보셨다거나 소설 원작을 읽어보신 분들은 줄거리를 아실 것이다. 우연히 주인공 짐 호킨스는  빌 선장으로부터 얻게 된 보물지도를 얻게 되면서 지주 트렐로니, 스몰렛 선장과 의사 리브지 선생, 그리고 요리사로 가장한  해적 존 실버 등과 함께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모험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야기 결과는 밝히지 않겠다. 솔직히 원작 <보물섬>을 읽기 전에는 본 지 오래 되어서 나도 이야기의 결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결말이 궁금하시면 한 번 원작을 읽어보시길. 그러면 잊혀져있었던 추억들이 오롯이 기억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인 나는 이 만화를 보면서 존 실버라는 인물이 인상적이었다.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악역 캐릭터이지만 주인공인 짐 호킨스에게만 선의를 베푸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만화 속의 존 실버는 바다에서 살고, 바다에서 죽는 사나이였다. 이런 실버의 남성다움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주인공 짐 호킨스도 그의 성격에 매료되어 이야기 중반에 보물을 찾기 위해서 그와 함께 동행하기도 한다.  만화 원작가 데자키 오사무는 실버를 매력 있는 악당으로 그렸는데 온갖 위험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모험과 남자다운 기질이 있는 용감무쌍한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인 어린 남자아이들에게는 존 실버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14년 만에 다시 가 본 <보물섬> 

만화 <보물섬>을 본 지 14년이 지난 지금,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을 읽게 되었다.  사실 만화로는 보았을 뿐, 원작으로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데자키 오사무는 스티븐슨의 원작을 토대로 만화를 제작하였지만, 소설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만화에는 짐 호킨스를 따라다니는 새끼 표범 '뱀부' 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뱀부 사진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저작권 문제 및 포스팅 불가 설정 사진이 많아서 못 구했다. 하지만 이 글 제일 위의 사진을 잘 보면 작은 새끼 표범이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바로 '뱀부' 이다)  만화를 본지 너무 오래 되어서 원작 줄거리와 만화 줄거리를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설명한 이 차이점 외에는 소설과 만화 영화는 큰 차이가 없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보물섬>에는 영국의 판타지 소설가 겸 시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활동한 머빈 피크(1911~1968)의 삽화를 볼 수 있다. 딱히 그의 삽화가 잘 그렸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 스티븐슨이 살고 있을 당시 발간된 초판본의 삽화를 보는 것처럼 복고풍이 물씬 느껴져서 작품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머빈 피크 역시 실버를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과거를 숨기면서까지 음모를 꾸미는 간사한 악역으로 그려내고 있다. 

  


 

머빈 피크가 그린 소설 원작 속 실버,  

실버 팔 위에 있는 새는 실버의 영원한 동반자인 말하는 앵무새 플린트


원작에서도 실버는 짐 호킨스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짐 역시 그의 성격에 동화되기도 한다.  소설에서도 실버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악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런데, , ,  너무 오랜만에 '보물섬' 에 가본 탓일까?  아니면 14년 전의 동심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어쩌면 1883년에 쓰여진 영국 작가의 소설과 원작 소설이 발표된 지 95년 뒤에 만든 일본인의 만화가 주고 있는 느낌과 인상이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 때 나의 우상이었던 실버는 만화에서 봤던 성격이 호탕한 멋진 사나이가 아니었다.  

    

 

  실버는 사이코패스이다 

실버는 과거에 플린트 선장의 해적단에서 키잡이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플린트 선장이 숨겨 놓은 보물을 찾기 위해서 스몰렛 선장의 배인 히스파니올라 호 의 요리사로서 탐험에 참가한다. 실버는 동료 선원인 핸즈와 딕에게 자신이 꾸미고 있었던 계획들을 알려주고 자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제안한다.  사과를 보관하는 나무통 안에서 자고 있는 짐은 우연히 이들의 음모를 엿듣게 된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 호의 사람들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트렐로니와 스몰렛 선장. 리브지 선생은 그가 이번 모험에서 가장 믿을만한 선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를 신뢰하고 있다.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들의 착각은 실버의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보물이 있는 해골섬에 도착한 후, 실버는 자신들의 동료 선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실버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에는 실버와 그의 일행들은 히스파니올라 호를 점령하게 되고 스몰렛 선장 일행은 간신히 도망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통나무집으로 피신하여 실버 일행들과의 피말리는 전투를 하게 된다. 

주위에서는 신뢰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평범했던 사람이 내부에 숨기고 있었던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과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어두운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은 실버가 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면 실버의 사이코패스적 특징을 드러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스몰렛 선장이 말했다. " 여기 지도가 있는데, 여기가 그곳인지 좀 봐주게. "   

  지도를 받아 드는 키다리 존의 눈이 이글거렸지만, 종이가 새것인 걸 알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은 우리가 빌리 본즈의 궤짝에서 찾아낸 지도가 아니라 지명, 높이, 수심 등을 빠짐없이 그대고 베낀 복사본이었다. 다만 빨간 X표시들과 글귀는 없었다. 실버는 무척이나 약이 올랐을 게 분명했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자제력이 강했다.   

 (중략) 

 나는 존이 저 섬을 안다는 사실을 태연스레 털어놓는 데 놀랐으며, 존이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은근히 두려웠다. 물론 존은 내가 사과 통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럼에도 나는 존의 잔인함, 이중성, 힘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가 내 팔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 <보물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최용준 역, 열린책들, p 122~123 -  

 
   

실버는 보물이 묻어 있는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도를 보지만 아무도 표시되지 않은 복사본인 것을 알게 되자 무척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평상심을 유지한다. 그런 모습을 본 존에게는 실버라는 사람이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악당 실버는 주위 사람들이 신뢰하게 만들 정도로 선량한 선원인 척 행동을 한다. 

   
 

 키다리 존은 무리들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느라 분주했는데, 그 모습만 보면 세상에 저렇게 반듯한 사람이 또 없을 듯싶었다.  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욕적이고 정중했고, 누구에게나 싱글벙글거렸다.  명령을 받으면 그 누구보다 힘찬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당장 목발을 짚고 일어났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면 선원들의 불평을 감추려는 듯 연신 노래를 불렀다.  

 - <보물섬> p 136 -

 
   

 

사이코패스 인간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에 무감각하므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꾸민 반란이 수포로 돌아가 궁지에 몰리게 된 실버는 오히려 반란이 단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필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영국으로 귀국하여 반란 죄로 처형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두렵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결말에 다다를수록 이전에 스몰렛 선장 앞에서 보여준 착하고 부지런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내뱉으면 숨기고 있었던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실버에게는 일차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죽인다. 한편, 짐 호킨스에게는 칭찬과 존경 어린 말을 하면서 사나이다운 좋은 성격을 보여주지만, 보물을 손쉽게 찾기 위해서 짐 호킨스를 꾀기 위한 사탕발림뿐이다. 주인공 짐 호킨스는 위험한 일에도 용감한 행동을 펼치는 인물이지만 너무 착한 게 흠이다. 실버의 이중성을 알아차리고 있음에도 그는 실버의 달콤한 말에 솔깃해 실버의 일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Blue Psycopath, John Silver

사이코패스는 범죄자로만 국한되는 정신의학적 용어가 아니다. 직장 같은 사회 공동체 집단에서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사이코패스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어느 산업심리학 연구 내용에 의하면 영국의 최고경영자들의 인격적 특성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사이코패스의 특성과 일치하였으며, 임원으로 승진하는 대상자들 가운데 3.5%가 사이코패스임을 증명하였다. 남다른 지능과 포장술 등으로 주위 사람들을 조종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속한 조직과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사람을 '화이트컬러 사이코패스' 라고 한다.   

<보물섬>에 등장하는 실버는 과거에 플린트 선장 밑에서 일할 때도 '위험 인물' 로 낙인 찍혔으며
히스파니올라 호의 모험에 참가하면서도 자신의 반란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바다 위의 사나이가 아닌 사이코패스, 즉 Blue Psycopath였다.   

어렸을 때 만화를 보던 이들에게는  '바다 위의 멋진 사나이' 로써 실버 같은 남자를 동경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 집단에 해를 끼치는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실버의 이런 행동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착한 짐 호킨스가 단순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서 실버의 가면에 매료된 것만은 아니다.  호킨스의 착각은 지금, 어디선가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범행을 드러날 수 있는 사이코패스를 옆에 두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조심하도록 하자,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는 악마가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ndolphin?Redirect=Log&logNo=2006014964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0-11-0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 위 사진 밑에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사람이라던가,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라던가...
그래야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요?

종종 책으로 읽을땐 멋진데 영상으로 보면 별로이거나,
영상으론 멋진데 책으론 힘들거나...그런 경우가 종종있어요.

전 장르소설은 참 좋아하는데,장르소설이 시각화되면 (꿈에 나타날까 두려워)못 보는 위인이예요~

cyrus 2010-11-05 14:09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말씀대로 다시 그 문장을 봤는데,, 이상하네요^^;;
글 표현법을 더 배워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화로 먼저 접하고나서
책을 읽으려고 하니,, 별로이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데즈카 오사무와는 다른 사람이로군요.<보물섬> 같은 소설은 정말 어른이 되어 완역판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0-11-06 21: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완역판을 읽기 전까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봤던 아동문학전집의 <보물섬>과 이번에
나온 완역판에서 약간은 내용에 차이가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