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8
제인 오스틴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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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인 오스틴을 오랫동안 오해했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이성과 감성』,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여러 시기에 걸쳐 그녀의 작품을 읽었건만, 정작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는 오스틴의 작품 주제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의 가치를 담지 못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소위 말해, "이게 왜 명작이야?"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설득』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가 염원했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연애 결혼, 즉 연인의 사랑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의 관점에서, 현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었고, 상상력이 뛰어났는지 보게 된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상속권은 장자에게만 있었고, 여자는 결혼하지 못하면 집안을 전전하며 가사를 보필하거나 가정교사를 일을 하며 하녀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결혼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고, 사랑에 이끌려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 또는 상호 간의 계산으로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스틴 역시 선택해야 했다. 청혼을 받았을 때, 그것을 택하고 당대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사랑 없는 결혼을 거절하고 어려운 길을 갈지. 그녀는 후자를 택했고, 친척의 집안일을 도우며 일부 못된 이들의 천대를 견뎠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모두가 감정이 아닌 의무로, 사랑이 아닌 계산으로 결혼을 하던 시기에 자신들의 감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남녀의 로맨스는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현대식 로맨스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게 뭐라고 그렇게 대단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바로 그 해묵은 질문이 제인 오스틴을 위대한 작가로 만든다. 놀라운 상상력을 내세우지 않고,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힘, 우리가 시시콜콜한 대화로 여기는 장면들 하나하나조차 그녀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각색하고 수정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로 제인 오스틴을 읽었다면, 큰 오산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근대식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 부드러운 힘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혁명이 좋았다. 현 시대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다소 급진적인 변화로 체제를 무너뜨리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부당함에 침묵하기보다는 그것에 치열하게 맞서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본질은 끝없는 투쟁과 불안이다. 『설득』에서 앤과 웬트워스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지만, "불안과 걱정이라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는 결말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현실은 동화나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운 기득권이 탄생하고 그들은 또 다시 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번에는 다르겠지?'라고 기대해도, 세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불안은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드러운 힘을 의지한다. 누군가는 막연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르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 바람이 당장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점진적으로 나아질 것을 믿는다. 나에게 남은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부드럽다. 그 단어에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도,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사랑 앞에서 녹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지도 않다. 사랑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는 문학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작품도,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욕망을 지적하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인간 본연이 지닌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도 귀중하다. 제인 오스틴은 바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혹자로부터 오해를 받았지만, 결국 그녀가 옳았음이 드러났다. 당대의 다른 연애 소설이나 정사보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로맨스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설득력 있는 까닭은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해도가 탁월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번째 작품인 『이성과 감성』과 『설득』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귀족 가문의 개인사가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 또한, 여성 작가로서 시대의 불합리함과 불평등한 입지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시선조차 품어냈다. 남성의 결점을 특별하게 과장하지도 않았고, 여성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오스틴의 대담함과 솔직함은 이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만들었다. 요컨대, 제인 오스틴은 소수의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면서도 시대적 흐름을 놓치지 않아 당대의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단과 약점을 균형감 있게 조명해 어느 시대의 독자라도 불편함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작품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그 대신 타인을 위해 헌신한 오스틴 자신의 삶이다.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우연히 좋은 작품 한 편을 쓰는 사람은 참 많다. 그런데 왜 그 재능이 오래 가지 못하는가? 왜 좋은 삶을 살아내는 작가는 이토록 부족한가? 이제는 알고 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가진 것도, 현 시대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쓴 글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 소설가가 지닌 메시지가 미약해 보여도,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리고 메시지와 삶이 서로 통한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 부디 사랑의 의미를 축소하지 않기를. 사랑을 그저 남녀 간의 이끌림이나 육체적 욕망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문학은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이미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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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 진리 (포켓북) 베스트 라이브러리
존 R. 스토트 지음, 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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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나에게 그분은 '가장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만한 분이었다. 숱한 종교들과 철학에서 기어코 결점을 발견해내는 나의 성정은 기독교를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믿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믿음은 보답 받을 것이고, 만약 죽음 너머가 허무에 그친다 해도 그게 살아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내세우며 나의 얄팍한 믿음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사랑으로 나를 깨뜨리신 이후, 얼마 전 그분이 나를 끝내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 후, 진정한 믿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나 납득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았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은 내가 도달한 이 지평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성도들이 목도한 곳까지 왔음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세상은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중한다. 현재 펼쳐진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끈질긴 사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끝내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부인할 수록 참 생명을 얻고, 자신을 드러내려 할 수록 사망에 가까워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존 스토트도 동감한다: "진정한 자기 부인은 진정한 자기 발견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어떤 이들은 과학 기술과 온갖 사상이 시대를 이끌고,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시대적이고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전하는 것에 위축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참된 복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식은 넘쳐나도 진리는 제한되어 있다. 모든 것이 영상과 텍스트로 변환되어야 하는 시대에, 언어가 담을 수 없는 사랑의 가치는 너무나 왜곡되고 축소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돈과 사회적 지위가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삶의 근본적인 결핍이 보인다. 하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헤매고, 인생의 정답을 찾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하루 속의 작은 불친절과 불운에도 절망하고,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체념한다. 이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은 똑같은데, 분명 그들이 나보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왜 나의 마음은 이토록 여유가 넘치고 그들의 마음은 메말라 보이는가? 거기에는 한 가지 정답만 남아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부활하심을 영접하고, 그 사실을 삶으로 전파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업을 신실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어떠한 불안과 위기도 나를 뒤흔들 수 없다.


 비난과 경멸과 원망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가난과 실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주제에 한가한 소리를 한다고, 세상의 경쟁 속에서 낙오한 자의 비겁한 자기 변명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불쑥 튀어나오곤 하니까. 그러나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영원한 가치가 있는가? 돈을 많이 번다고, 불멸의 명예를 얻는다고 해서, 원하는 사랑을 얻는다고 해서, 간절히 염원했던 꿈을 이뤘다고 해서, 그로 인한 기쁨이 무한했다면, 세계는 이렇게 고통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성경에 적힌 복음을 더 이상 과소평가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과 논리와 언어를 초월하여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바꿀 힘이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철저히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은 진정 내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는 명령에 도저히 순종하지 못한다. 어쩌다 친절함을 베푸는 것은 가능해도, 마음 속의 우물은 금방 메마르고 만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죄는 사랑의 반대편에 선 모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나 자신도 확신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범죄와 폭력과 증오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오해하고, 자신의 이해 범위로 축소시킨 인간의 잘못이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창세기에 묘사된 인류의 타락과 뱀의 머리를 밟을 자에 대한 예언, 동정녀에게 나신 메시아와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려 언약을 성취하신, 그 영원히 찬양받아 마땅할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사랑은 납득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먼저 죄에 가려져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사실은 읽기에도 거북한 정보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에만 자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우리의 작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다. 만일 심판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위해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그분의 사랑의 위대함을 한 번만이라도 접하게 된다면, 우리가 행할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분을 어찌 부인하거나 거절할 수 있겠는가? (p.191)

 

 그러므로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랑의 실마리라도 맛본다면, 그 자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비가 이해되고, 전에 누리지 못한 감격이 그 이에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 해도 세상을 더욱 사랑하여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 없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드러나는 결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조롱해도,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 가치이며, 피조물인 인간과 절대적으로 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통로이다. 그 사랑을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와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겠다. 나로부터 나오는 미약한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겠다.


 이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섭리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묵상들을 모두 나누고 싶으나, 진리는 본래 언어를 거치는 순간, 진리가 아니게 된다. 주를 모르는 자들이 기독교를 '역설'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도저히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을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러한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까. 올바른 복음은 오직 말씀으로만, 그리고 말씀을 드러내는 삶으로만 전해질 수 있음을 신뢰하며, 나는 이제 당당히 이 길을 걸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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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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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요지경이라는 말을 체감하는 것은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된 이후였다.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될 때마다 나의 이해도가 참 보잘 것 없음을 느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사회로 나가면서 나의 인간 관계는 복잡해졌고 그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은 많아졌다.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살아갔는지 놀랍다. 왜 그토록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과 반드시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쩌면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퀴즈쇼』의 등장인물들이 퀴즈를 맞추는 일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정답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회자의 물음에 순발력과 정확성을 발휘하여 정답을 맞추면, 내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킬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은 승자의 영광을 정당하게 차지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부와 명예를 취한다.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하나의 '쇼'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도무지 쓸모 없다고 여겨졌던 잡다한 지식과 평소에 허비했던 시간에 수집했던 정보들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순간, 사람들은 전례 없는 짜릿함과 성취감을 맛본다. "내 인생에 헛된 순간은 하나도 없었구나! 나의 방황과 실패도 이렇게 결실을 맺는구나"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도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불화와 음모와 폭력을 외면한 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과 이름인 '이'와 '민수'를 사용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설정한 까닭은, 그가 겪었던 기묘한 사건들이 사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금 대상을 좁히자면,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나서도 인생의 정답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퀴즈쇼』의 줄거리는 달콤한 환상과 같다. 대학원을 졸업했으나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짠내 나는 고시원 생활을 하는 이민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인터넷 채팅방에서 벌어지는 퀴즈 대결이었다. 그는 옆방 여자의 선의에 힘입어 퀴즈 프로그램 피디를 진행하는 서지원과 교제한다. 그녀는 부유하고, 여유도 많고, 사랑이 넘친다. 또한, 이춘성의 제안을 받아 약 세 달간 '회사'에서 퀴즈쇼 출전을 위한 시간을 보내며 잠깐이나마 성취감과 돈을 얻는다. 그곳을 극적으로 탈출한 후에 그는 평범하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 옆방 여자, 서지원, 회사, 이 모든 것은 이민수의 노력보다는 순전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만 반복한다. 김영하 작가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청춘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려는 듯 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청춘은 정말로 바보 같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인생을 낭비하고,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젊음은 실로 젊은이에게 주기에 아까운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정말로 완고해서, 아무리 충고를 듣고 고통을 겪어도 그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작가도 그 사실을 아는지, 『퀴즈쇼』에서 젊은이의 삶을 고스란히 담되 어떠한 조언이나 교훈을 이끌어낼 의도는 추호도 없다. 거듭해서 실패하는 이민수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여기고 보라는, 무언의 떠밀기만 느껴진다. 그것에 대해 젊은 독자는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한다. "나는 이 사람과 달라"라는 부인 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공감 속에서, 대개는 더 쉬운 길을 고른다. 그리고 창작자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서지원을 통해, 어떤 길을 택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의 청춘이 어리석은 이유는 언제나 정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자가 없을 뿐이다. 정해진 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계는 이춘성이 구현한 불완전한 퀴즈 지옥(나는 이민수가 다녀온 소사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보다 이유가 중요하고, 결과보다 과정이 의미 있으며, 성공하는 법보다 실패를 극복하는 법이 삶을 살아가는 데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모든 청춘이 그 해답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고시원의 옆방 여자처럼 끝내 찾지 못한 이들도 있다. 나는 어떤 교훈도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가 주면 좋겠다. 남아 있는 기회가 있기에, 우리는 젊음을 낭비할 권리가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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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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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줄곧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에 매료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고, 『페스트』가 그랬으며, 『율리시스』가 그랬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군상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그 공간은 모순적으로 나를 매료한다. 나는 도시에 살기를 원치 않으면서 도시에 살기를 선택한다. 도시의 체계에 대해 늘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뒤에는 각종 추악한 범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만족한다. 현재로부터 약 100년 전에 묘사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속 베를린의 모습은 서울 내지는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이 고전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주인공 프란츠는 분명 선한 인물은 아니다. 전과가 있고, 출소한 이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의 주변 인물인 라인홀트나 미체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되는 범죄자들 역시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이 모든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화려한 조명의 도시 아래에 그림자가 필연적이라는 듯,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작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이 묘사하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성경 구절과 한낱 유행가가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가 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한다.


 역사 의식에 대한 생각을 빼놓을 수 없다.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4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프란츠 비버코프의 행적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감과 가난에 고통 받았던 독일 자체를 연상시킨다. 서술자가 프란츠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듯이, 되블린은 독일의 과오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어딘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나 피조물의 범죄를 지켜보는 창조주처럼, 프란츠의 범죄와 고통과 심판에 대해 작가는 냉정하게 그 흔적을 따라간다. 소설 내에서 전쟁에 대해 언급되는 장면은 많지 않아서 현대의 독자는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쟁의 여파가 모든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작중의 모든 인물은 패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소설가는 광고나 유행가 등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인용하여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징은 '도살장'이다. 도축되고 싶지 않아 저항하는 이들, 그러나 제사의 순서대로 정결하고 기계적으로 도축되는 가축들이 묘사된다. 어쩌면 작가는 도시 속의 인간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올라왔지만, 그래 봤자 먼저 도축될 뿐이라고. 도시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억압하는 자와 차별 받는 자를 모두 품어주는 이유는 그것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정하기 때문이라고. 분명 인간 속에는 한 도시, 한 우주와 같은 무수한 가능성과 생각이 있지만, 한낱 칼날 앞에 스러질 뿐이라고.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도시가 아니라면 사람들 틈에서)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가? 타인을 살해하고 난봉꾼처럼 살아가는 프란츠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가축과 같은 존재인가? 살아가도 된다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작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인용해 본다.

 고인들에게 명복이 있기를. 베를린에서는 1927년에 사산아를 제외하고 4만 8782명이 죽었다.

 4570명은 결핵으로, 6443명은 암으로, 5656명은 심장병으로, 4818명은 혈관 질환으로, 5140명은 뇌졸중으로, 2419명은 폐렴으로, 961명은 백일해로 죽었고 어린아이들 중 562명은 디프테리아로, 123명은 성홍열로, 93명은 홍역으로 죽었으며 그 밖에 3640명의 영아가 죽었다. 총 출생 수는 4만 2696명이다.

 죽은 사람들은 공동묘지의 자기 무덤에 누워 있고, 묘지기는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다. (p.609)

 지금도 이 도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그만큼 죽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숫자로 집계된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도시와, 저마다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운행되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데, 나의 삶은 전혀 변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그 신비함에 다시 한 번 잠잠해진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의 거창한 다짐과 행적은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이들에게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며, 죽음이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 일과 같이 일상적이다. 생명과 죽음, 쾌락과 고통, 편리와 불편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가?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나에게 언제나 질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단지 선택하라고. 도시를 구성하는 통계 속의 인간이 될 것인지, 그 마음 안에 도시 전체를 품는 자로 살아갈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기에 적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와 책임은 내 삶에 고스란히 드러날 따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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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니콜라 (양장) 꼬마 니콜라 1
르네 고시니 글, 장 자끄 상뻬 그림, 윤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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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 니콜라』의 내용은 대단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에 전율을 일으키는 서사도 없고, 이야기가 남기는 교훈도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있다. 때로는 짖궂기도, 더러는 순수한 그들의 사소한 여정이 이 두꺼운 책을 가득 채운다. 에피소드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기에, 나는 일상을 살아가며 꼬마 니콜라와 그의 유쾌한 친구들이 벌이는 이야기들을 가볍게 엿볼 수 있었다. 마치 프랑스의 어딘가에 이 장난꾸러기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작가는 이토록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헤아렸을까, 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어른들은 자꾸 자신의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직업이 교사든 그렇지 않든, 친자식이든 처음 보는 아이든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참 가혹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낼 권리가 있다. 물론 니콜라와 친구들이 벌이는 행적이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언제나 용인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면 학교 폭력 등의 사유로 처벌 받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제는 금지된 체벌로 그 대가를 치르긴 하지나 말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른들이 세운 기준과 가치관은 편향적일 때가 많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의견의 차이로 싸워도 서로의 말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인다. 중재하는 자가 나서면, 씩씩거리다가도 금새 잠잠해지곤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한쪽의 의견이 꺾일 때까지 도무지 굽히질 않는다. 그 양상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니콜라, 알세스트, 아냥, 외드, 조프루아와 같은 아이들이 없다. 있다 해도 금방 낙오되거나 변하고 만다. 개인의 다름을 존중해주지 않는 분위기와 성적이 '좋은 아이'의 기준이 되어버린 교육 현장에서 꼬마 니콜라의 재기발랄한 일탈은 처벌의 대상일 뿐, 그를 인정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가상의 인물이기에 너무 잣대가 느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니콜라처럼 학교에서 꼴찌를 밥 먹듯이 해도 위축되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용인할까? 부모든 교사든 어떠한 조치를 취해서 친구들과 분리하거나 그 아이를 '치료'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니콜라보다 어린 나이부터 아이들은 교육 시스템 속에서 획일하게 양산된다. '공부'라고 불리는 입시 제도에 대부분 순응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니콜라가 학급 친구들과 벌이는 말썽들과 좌충우돌한 여름방학의 시간들은 공부가 아니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눈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모든 과정이 곧 공부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그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한 가지 길로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기에, 마침내 부모의 간섭에 벗어났을 때 다시 그 미숙한 행동을 반복한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할 줄 알았지만,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배우지 못했다. 성공하라는 강요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만,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난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 세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니콜라와 같이 순수했던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시간을 돌려받지 못할 만큼 험난하게 발전해 온 시대의 결과이리라. 대한민국의 처참한 교육 현실에 대해 통탄하지만, 이것조차 최선의 결과일 수 있었다. 그 치열한 교육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지금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그 마음은 스스로 되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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