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공격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3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빛소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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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는 비정한 자연의 원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양식으로 알려져 있고, 에밀 졸라는 그것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그의 장편 소설에 익숙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졸라의 단편선에 사뭇 놀랐다. 처음에는 「방앗간 공격」이 장편 소설인 줄 알고,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음 장에서 바뀌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대로 끝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갓 약혼한 도미니크와 아버지, 그리고 삶의 터전이었던 방앗간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의 운명이 가혹한 탓에 소설가가 그것을 보상해 주길 바랐으나, 전쟁은 현실에서도 그랬듯이, 평범한 자들이 영위한 터전을 앗아가 버렸다. 나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혹함에 분노했다.


 첫 번째 작품의 여운이 가시고, 내가 구매한 이 책이 단편선임을 알게 된 이후에는 조금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작품은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이었는데,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붕괴 사고가 일어남으로써 주인공은 흙더미에 깔려 생존을 갈망한다. 오늘날에는 각종 시나리오에서 많이 다루어져서 신선한 맛이 덜하지만, 터널과 기차라는 문명의 이기가 군중의 삶을 파괴한다는 소재는 꽤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의 사투를 무릅쓰고 그를 끝내 죽이는 결말은 나에게 씁쓸한 여운을 주었다. 


 이 두 작품의 비극에 비해 나머지 세 작품은 비교적 일상적이다. 그렇다고 「나이스 미쿨랭」에서 주인공이 내린 결단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폄하할 수 없다. 또한, 「샤브르 씨의 조개」에서 은밀한 일탈을 저지른 엑토르와 에스텔, 수르디 부부의 합작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은 그들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일들이었다. 에밀 졸라는 각 인물이 내리는 선택이 서로에게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 세밀하고 정감 있게 묘사한다. 때로는 차가운 사실만 전달하다가도, 따뜻한 유머를 섞기도 하다.

 

 결국 하나의 '주의'로 작가의 모든 경향을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연주의는 배경이자 지향점일 뿐이다. 에밀 졸라 역시 조금 모자라지만, 기꺼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친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반드시 혁명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소설만 쓸 필요는 없다. 작가가 행동적인 삶을 살았고,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 것은 진작에 알았다. 이 단편집을 통해 에밀 졸라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 그는 경직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작품 속에 살아 움직이는 친절한 이야기꾼이다. 때로는 마음을 쓰리게 하고, 때로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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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서거 100주기 특별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7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병덕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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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다. 카프카 문학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단순히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또는 생물체들)의 내면은 우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또는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다. 자신의 나약함이 공개되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그러나 카프카는 단단히 얼어붙은 우리의 내면을 활자라는 도끼로 산산조각내려고 한다. 경계심이 가득한 독자는 그가 지나치게 자기 안에 갇혀 있거나 현학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다. 나 역시 예전에 비해 프란츠 카프카를 위대한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파묻히기에는 아까운 작가이며,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은 「변신」이겠지만, 내 이목을 사로잡은 작품은 「유형지에서」였다. 내가 카프카를 처음 접하게 된 『심판』이나 「변신」, 그리고 이 작품의 공통점은 현대인이 겪는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왜 처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단지 주어진 부조리를 감당하고 무너질 뿐이다. 인간은 그토록 연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열심히 살아도 이유 없는 고통과 고난에, 억울한 일에 인생이 어려워진다. 그제야 자신의 삶이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가 자신의 판결조차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교는 재차 말하고 나서 마치 탐험가에게 질문에 대해 자세한 이유를 덧붙이려는 듯이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그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판결 내용을 직접 체험하게 될 테니까요." (p.218~219)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방문한 탐험가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죄수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기구를 개발한 사령관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억압 아래 수없이 희생 당한 죄수들을 본다. 마지막 순간에는 장교 본인이 그 기구의 희생자가 된다. 찝찝함이 잔뜩 남는 이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가 죄책감 때문에 자결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쩌면 사령관은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야 진정으로 기구가 완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판결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분명히 죄수인 것은 맞다. 누구나 그 끔찍한 기구 안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닐까?


 이는 「변신」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실한 세일즈맨인 그레고리가 어느 날 아침에 벌레로 변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직장 상사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버림 받고 점점 쓸모없어지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죽음을 모두가 반기는 그런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작가는 후반부의 서술을 통해 그러한 인간 실격이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인은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다. 마지막 작품인 「굴」은 동굴 안에 은둔을 선택한 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외부의 침입과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고 거부하는 신경질적인 모습은 '사생활'을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만약 사정이 그렇다면, 왜 나는 망설이고 있으며, 왜 나는 그 침입자를, 어쩌면 나의 굴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가능성보다 더 많이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의 굴을 못 본다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니, 성찰을 통해 비로소 그 굴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도 전혀 없을 것이다. 나와 굴은, 내가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고요하게, 고요하게 이곳에 정착할 수 있을 테고, 자제하려고 애쓸 필요도, 온갖 의심에 맞서 입구를 열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을 정도로, 서로 매우 긴밀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어떻게든 나는 결국은 아주 분명히 아래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짓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p.771)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간 밑바닥에 깔린 내면을 정교한 언어로 포착하는 작가들을 보면 참 신비하다. 일반적인 사람은 편린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느낌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때로는 광기처럼 보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불안을 보고한다. 물론 그것이 정신이상자의 수기처럼 보인다면,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핍을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치유가 안 될 수도 있는 병이지만, 그래도 더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 끝이 비루한 죽음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상처와 낙심을 겪을지라도 존재의 최선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카프카가 내리는 결론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는 인간에 내재한 갈망과 슬픔을 파악하는 데에 능통했지만, 정작 우울을 해결할 해답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거나 폄하하지는 않겠다. 그 정도만 해도 잘한 거야, 카프카. 그가 쓴 작품들이 대부분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비인간의 시점으로 쓰인 이유는 언제나 그가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대, 멋진 삶을 살았다. 생전에 빛을 못 보아도, 꾸준히 그 길을 걸어준 것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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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공책 1 - 도리스 레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창비세계문학 73
도리스 레싱 지음, 권영희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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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창작자들이 '틀'(frame)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자신이 쓴 작품이 어떠한 잣대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신이 공정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조지 오웰이 썼듯이,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편의적으로 해석된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이념 갈등과 성별 문제에서 자유롭고 싶어도, 그저 특정 소재와 단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틀 안에 놓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은 『금색 공책』에서 많은 문학적 실험을 펼쳤기에 자신의 작품이 여성 문학으로만 간주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시류에 편승하는, 특정 독자층에게만 호소하는 여성 문학보다 폭넓은 사유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진입 장벽은 높아졌고,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필요한 배경 지식도 많아졌다. 그래서 독자들은 편의적으로 『금색 공책』을 여성 문학의 경전으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틀 안에는 다섯 권의 공책이 있다. 검은 공책, 빨간 공책, 노란 공책, 파란 공책, 그리고 내부의 「금색 공책」이 그것이다. 각 공책은 주제도 현저하게 다르다. 파란 공책에서 스크랩 형식으로 한국전쟁을 재구성하고, 동시에 메카시즘과 핵전쟁 위기를 수집하는 부분에서는 일종의 광기가 느껴진다. 상상이 되는가? 자신이 알게 된 모든 지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닥에 쌓아 두는 것도 모자라, 벽면을 가득 메우도록 신문 기사를 붙여 넣는 애나의 모습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일부 모습으로 누군가를 존경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집념 어린 부분, 연약한 부분, 심지어 남들에게 절대 드러내지 못할 부끄러운 결함까지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모든 공책을 다 읽었을 때, 애나를 정상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없는 아량으로 또는 동질감으로 배려한다고 해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이 여자의 연약한 모습이다.


 실로 도리스 레싱은 『금색 공책』에서 대단한 실험을 했다. 주인공 애나 울프는 작가의 표상이거나,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에서 레오폴드 블룸의 의식을 실시간으로 해체하여 분석했듯이, 각 권에 산개하여 담긴 애나 울프의 정신을 낱낱이 파헤친다. 엘라는 공산주의자이자 작가로서 당시 세계에 팽배했던 이념적 갈등에 맞서면서 영국의 사회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삶에 중요한 문제는 연인인 폴이 자신의 생리혈 냄새를 맡을까 염려하는 것이고, 섹스를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고 싶지만, 정작 침대 옆에 앉은 사람의 마음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어 노심초사한다. 작가는 야속하게도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표제를 달지만, 결코 애나와 몰리는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작가뿐만 아니라 모두가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면, 더 진실된 관계를 쌓으면, 더 열심히 노력하면, 다른 이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소득과 능력을 갖추면 특정한 틀에 억압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다. 시대 정신은 그토록 짙고 깊숙이 깔려 있기에, 이념과 성별이라는 '이것이냐, 아니냐'로 갈리는 이분법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을까? 변화하는 시대의 파도를 거스를 수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 작중 배경이 되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사상의 대립은 팽배하고, 성별 갈등은 오히려 악화된 듯하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겠다는 정신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는 어느새 다름을 용납하지 못한다. 방향을 잃은 양성 평등 운동은 성별의 차이를 빌미로 차별과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 이 병약한 시대에 우리는 기꺼이 틀 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자신이 틀 안에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시야를 갖출 수 있다.


 번역을 맡으신 교수님께 작은 후일담을 들었다. 도리스 레싱에 대해 정말 많이 읽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던지, 이 책의 번역이 결코 손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의 이해는 큰 무리가 없었다. 번역에 정답은 없으니 이것이 최고라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긴 분량 속에서 편집이 일관되고 오타도 거의 없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요즘 나오는 책들 중에 눈에 거슬리는 오타가 꼭 하나씩은 있더라). 2권 분량의 소설을 읽는 동안, 참 즐거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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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벤허 (190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그리스도 이야기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 월리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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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한 지인이 선물해 주어서 읽게 된 책이다. 소설로 읽으면서 나의 몇 가지 오해가 깨졌다. 아주 어렸을 적에 『벤허』를 만화책으로 보았을 때, 벤허와 메살라의 대립과 전차 대결이 주로 강조되었고, 결말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 티르자의 문둥병을 나사렛 예수가 치유한 후 가족이 감동적인 재회를 맞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사화 영화가 1959년인 것을 감안해도, 적어도 20세기에 출판된 줄 알았는데 1880년 작품인 것도 놀라웠다. 주요 영문학 작품의 목록과 출판 시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대중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이 소설을 몰랐던 것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외적인 분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벤허』의 큰 줄기는 유다(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것을 극복하는 여정이지만, 또 다른 줄기가 뻗어나가고 이것은 결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이 책의 부제인 '그리스도 이야기'가 그렇다. 작품 초반부터 작가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장치를 마련한다. 벤허의 통쾌한 복수를 바라는 이들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대체 언제 메살라를 만나서, 그에게 이 치욕과 분노를 돌려줄 것인가? 동시에 독자는 로마의 압제하에 놓인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을 보며, 이 부당한 상황을 타개할 존재를 간구하게 된다.


 바라는 대로 벤허는 메살라와의 대결에 승리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청년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다.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로마였으나, 그는 더 이상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바라지 않는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평생 예언을 믿어 왔던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제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결말은 벤허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그가 흘린 피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함으로써 끝난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마무리는 통쾌한 복수도, 감동적인 가족의 재회도, 인물들의 완벽한 치유와 성장도 아니다. 오히려 이 다사다난한 인간사의 주인공은 한 분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미국의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와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죄를 대속하시는 것, 그리고 이후의 여정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본 십자가 사건이 조금 더 색다르고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끝없이 자신을 내세우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십계명의 한 구절도 지키지 못하고, 성경의 첫 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 놀라운 사랑만이 등장인물들을 감도는 복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인과율의 노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 받아야 하고, 잘못을 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행위가 타인의 권리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망각한다. 나에게 해악을 끼친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똑같이 보복해야 한다는 집념에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 끝없는 복수와 증오의 고리가 각 개인을 구속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한다. 만약 벤허가 메살라를 향해, 그리고 로마를 향해 불 같은 증오로 맞섰다면,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 체제에 순응한 것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전이되기 마련이다. 복수에는 관용이 없다. 증오에는 자비가 없다. 나는 그저 모두 안에 잠재된 사랑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리 기술과 지식이 늘어나도 개선될 수 없는 이기심이 사랑으로 치유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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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가 오리지널인줄 알았늣데 원작소설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1880년대 작품인데 5-60년대 나온 을유나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수록 안된것으로 보아 영화에 비해 소설은 큰 인기가 없었나 보네요.
 
대심문관의 비망록 -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소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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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반드시 시대를 반영한다. 제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작가의 삶에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는 그가 창조한 세계에 그대로 투영된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과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의 비망록을 보고 있자면, 포르투갈이라는 내가 한때 동경했던 나라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으나, 힘을 갖지 못하면 섬과 같이 고립되어 버리는 나라, 제국주의의 무력으로 시대를 호령한 적 있으나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국가, 모든 개혁과 혁명에 대해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포르투갈의 지성들이 바라보는 조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그들의 적대적인 비평가가 우려했던 사항들 그대로이다. 나는 『대심문관의 비망록』을 통해 길을 잃은 포르투갈의 현실을 엿본다.

 

 제목은 엄밀히 말하면, 대심문관의 매뉴얼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유명한 에피소드 탓인지, 또는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 때문인지 비망록이라는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독자를 매혹한다. 그러나 진술을 들어 보면, 종잡을 수 없는 화자들의 회고가 마치 강압과 고문에 의해 강제로 서술된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침표 없이 끝없이 늘어지는 문장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사는 화자들의 정신 상태가 하나같이 온전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의 수기를 배껴 쓰는 느낌도 받았다.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세계관 속에 인물들의 이야기가 녹아들면서도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를 쉽게 정리하기 힘들었다.


 주요 화자로 등장하는 주앙, 티티나, 파울라, 밀라,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흉인 프란시스쿠는 모두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파시즘은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파괴했다. 시장에 거주하는 여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무고한 이들이 학살 당하고, 고문을 겪어야 했다. 올바르지 못한 자들에게 쥐어진 권력은 그토록 잔혹하게 사람들을 무너뜨린다. 인상 깊은 서술자는 호메우인데, 그는 정신지체를 앓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그것이 꽤나 담담하게 진술되고 있어서 기괴한 인상을 준다. 이밖에도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학대와 고통을 진술하는 이들의 기저에 있는 고통이 전달된다. 그러면서도 악행을 저질렀던 프란시스쿠 역시 비참한 말로를 보내는 것을 보고 왜곡된 시대 정신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지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각 나라는 저마다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포르투갈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전역을 휩쓰는 사상의 대립과 증오의 물결을 통과해야 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상처 받고 결핍이 있는 자들의 처절한 사투였다. 나는 그런 상황일수록 시대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문제인가? 나를 범죄자 취급하고, 폭행하고, 고문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이다.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는 것이 그토록 나쁜 일인가? 정확한 판단은 역사가 한다고 하지만, 그 말은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판결하고 처벌하는 20세기 최대의 사상 전쟁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판단이 어렵다.


 결국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선 시각을 가져야 한다. 안투네스는 시대 정신에 굴복한 자들의 비망록을 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지녀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적대자들을 용납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아야 하니까. 우리가 그토록 고되게 쟁취한 민주주의 본질은 결국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한다"가 아닌가?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상대를 통제하고 비난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을까? 그 정도로 지금의 사회는 성숙한가? 만약 이 대답이 망설여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은 역경을 거쳐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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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30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진국인 유럽도 17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종교전쟁과 영토전쟁 그리고 각 국가별 내전이 있어서 힘든 시기를 보낸적이 있다고 하지요.그런데 이웃 스페인 내전은 무척 유명한데 포루트갈은 어떤 아픈 역사가 있었는지 세계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당최 나질 않네요ㅜ.ㅜ

starover 2025-11-05 11:07   좋아요 0 | URL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글에서는 살라자르라는 독재자가 통치하던 시절(1932~1968)을 다루고 있어요. 프란시스쿠는 그의 심복으로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소설에서는 ‘파시스트냐 아니냐‘가 주요한 이념적 갈등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