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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8
제인 오스틴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평점 :
내가 제인 오스틴을 오랫동안 오해했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이성과 감성』,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여러 시기에 걸쳐 그녀의 작품을 읽었건만, 정작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몰랐다. 심지어는 오스틴의 작품 주제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의 가치를 담지 못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소위 말해, "이게 왜 명작이야?"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설득』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가 염원했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연애 결혼, 즉 연인의 사랑이 발전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늘의 관점에서, 현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었고, 상상력이 뛰어났는지 보게 된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상속권은 장자에게만 있었고, 여자는 결혼하지 못하면 집안을 전전하며 가사를 보필하거나 가정교사를 일을 하며 하녀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결혼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고, 사랑에 이끌려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 또는 상호 간의 계산으로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스틴 역시 선택해야 했다. 청혼을 받았을 때, 그것을 택하고 당대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사랑 없는 결혼을 거절하고 어려운 길을 갈지. 그녀는 후자를 택했고, 친척의 집안일을 도우며 일부 못된 이들의 천대를 견뎠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모두가 감정이 아닌 의무로, 사랑이 아닌 계산으로 결혼을 하던 시기에 자신들의 감정을 충실히 따라가는 남녀의 로맨스는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현대식 로맨스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게 뭐라고 그렇게 대단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바로 그 해묵은 질문이 제인 오스틴을 위대한 작가로 만든다. 놀라운 상상력을 내세우지 않고,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힘, 우리가 시시콜콜한 대화로 여기는 장면들 하나하나조차 그녀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각색하고 수정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로 제인 오스틴을 읽었다면, 큰 오산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근대식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 부드러운 힘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혁명이 좋았다. 현 시대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다소 급진적인 변화로 체제를 무너뜨리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부당함에 침묵하기보다는 그것에 치열하게 맞서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본질은 끝없는 투쟁과 불안이다. 『설득』에서 앤과 웬트워스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지만, "불안과 걱정이라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는 결말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현실은 동화나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운 기득권이 탄생하고 그들은 또 다시 투쟁의 대상이 된다. '이번에는 다르겠지?'라고 기대해도, 세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불안은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드러운 힘을 의지한다. 누군가는 막연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르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 바람이 당장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점진적으로 나아질 것을 믿는다. 나에게 남은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부드럽다. 그 단어에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도,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사랑 앞에서 녹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지도 않다. 사랑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는 문학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작품도,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과 욕망을 지적하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인간 본연이 지닌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도 귀중하다. 제인 오스틴은 바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직접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혹자로부터 오해를 받았지만, 결국 그녀가 옳았음이 드러났다. 당대의 다른 연애 소설이나 정사보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로맨스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설득력 있는 까닭은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해도가 탁월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번째 작품인 『이성과 감성』과 『설득』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귀족 가문의 개인사가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 또한, 여성 작가로서 시대의 불합리함과 불평등한 입지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한 시선조차 품어냈다. 남성의 결점을 특별하게 과장하지도 않았고, 여성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오스틴의 대담함과 솔직함은 이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만들었다. 요컨대, 제인 오스틴은 소수의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면서도 시대적 흐름을 놓치지 않아 당대의 어느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단과 약점을 균형감 있게 조명해 어느 시대의 독자라도 불편함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작품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그 대신 타인을 위해 헌신한 오스틴 자신의 삶이다.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우연히 좋은 작품 한 편을 쓰는 사람은 참 많다. 그런데 왜 그 재능이 오래 가지 못하는가? 왜 좋은 삶을 살아내는 작가는 이토록 부족한가? 이제는 알고 있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가진 것도, 현 시대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쓴 글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 소설가가 지닌 메시지가 미약해 보여도,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리고 메시지와 삶이 서로 통한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 부디 사랑의 의미를 축소하지 않기를. 사랑을 그저 남녀 간의 이끌림이나 육체적 욕망으로 치부하지 않기를. 문학은 나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만약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감당할 사람이 없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이미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