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시민 불복종 수록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홍지수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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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전 문학을 읽을 때의 큰 장벽 중 하나는 배경지식이다. 저자가 살았던 시대 혹은 저자가 추구했던 가치관을 모르고서는 그가 작품에서 하는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월든』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펭귄클래식은 외국 비평가의 해설을 번역하는데, 여기에는 소로가 초절주의자(육체와 경험을 초월하는 영적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자 기존 종교의 경직된 교리가 아니라 각 개인의 직관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러한 흐름을 놓쳤을 때 소로의 주장은 오늘날에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될 확률이 높다. 그의 언행이 귀농을 예찬하거나 소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해설을 보고 나서야 그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은 분명 소로와 소통하는 데에 있어서 난관이 된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월든』의 독서 경험은 충분히 값지다. "세상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내지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물론 노예제도를 거칠게 비판하는 모습은 통찰력이 빛나기도 한다. 또한,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몇몇 장면에서 21세기의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문장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 의미가 있으려면, 결국 사회 안에서 어떻게든 참여해야 했다. 이웃들의 도움을 빌리면서, 숲속에서 홀로 살아가며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현실 도피라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하니까. 나 역시 다소 뜬구름잡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소로는 자신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도리어 그러한 모습이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결국 도시 속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는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월든 호수를 감상할 여유가 없다. 초절주의니 뭐니 그런 사상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대신, 소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만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문학가로서 공감하는 대목이 있다. 「독서」 장에서 그는 "문학은 단순히 캔버스나 대리석으로 표현되지 않고 삶의 호흡 자체를 깎고 다듬어 만들어진다. (…) 고전이 독자를 일깨우고 격려할 때 독자는 거부감 없이 자신의 상식으로 고전을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전을 본 적도 없는 이들이 고전을 잊자고 말한다"는 구절을 남긴다. 고전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오늘날,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고도의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고전 작품(문학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 분야에서의 명저도 마찬가지다)이 그저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그것보다 우수한 책들이 나오고 있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저자의 평생의 노력과 치열한 고민이 담긴 고전의 빈자리에, 가볍게 소비되는 일회용 서적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 장르가 무엇이던 간에, 책은 그저 상품으로만 소비되는 지금이다. 이러한 현실에 탄복하며 소로의 문장에 동감했던 기억이 난다.


 고독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소로의 평가는 어떨까? 당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소로에게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에 대해 소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켜 외로움을 느끼게 하려면 어느 정도나 떨어뜨려야 하오?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가깝다 해서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니라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우리는 SNS나 메신저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주변인 혹은 초면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라면, 길거리에 나가자마자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을까? 오히려 외부적 활동에 몰입할수록, 돌아오는 공허함만 더 크다. 심지어는 연인을 만난다 해도 그 고독함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한다. 고독의 이유에 대해서는 소로와 조금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물리적 거리나 사람의 수가 고독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소로는 아마 자연물과의 소통을 통해 외로움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의 글들을 뜯어 보면, 소로가 월든 호수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렬하게 비판하던 그가 봄철의 다람쥐나 얼음이 녹는 호수의 정경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그는 자연에서 거니는 것의 이점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보기보다 돈도 별로 들지 않고 충분히 살아갈 만하다고 설득한다. 독자가 거기에 납득이 되든 그렇지 않든 그가 자연에 진심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을 음미하면, 우리가 휴양림이나 대자연 안에 속했을 때 느끼는 평온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것만으로 『월든』 은 충분한 힘을 가진 고전이다.


 작품의 말미에는 그의 대표작인 「시민 불복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짧은 글도 매우 인상적이었고, 배울 점도 있었으나 이번 리뷰에서는 큰 줄기인 『월든』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미국 정부와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은 21세기 한국에도 유효함을 말하고 싶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고전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사는 사회를 통찰하고 비판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다. 그러한 비평에 대해 누군가는 "그러는 당신은 깨끗하냐?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완벽하냐?"고 물으며 어떻게든 치부를 찾을 것이다. 그러면 보통 비평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것에 대해 소로는 초연한 길을 택한다. 그는 비판받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것 역시 나의 일부라고 받아들인다. 다만 사람들을 비판하는 모습도 나의 일부이니, 이것도 존중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나는 그의 사상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존중한다. 세상이 이렇게만 흘러가도 참 살 만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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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촌 귀족 한국셰익스피어학회 작품총서 1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남장현 옮김 / 동인(이성모)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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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셰익스피어가 읽고 싶은 순간이 있다. 희극과 비극과 역사극의 어느 중간에 있는 무엇인가, 언어의 실험장과도 같은 책이었다. 연극에 구현되는 것까지 감안해서 번역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연극의 장르가 참으로 역사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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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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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을 일종의 동굴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그 안의 진실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상이라는 동굴 속에서 문학이라는 빛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내가 이 소설에 매료된 것은 센터에 순응할지 반항할지 결정해야 했던 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 자체보다는 시시각각 독자에게 말을 거는 서술자 때문이었다.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주제이다. 내가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마찬가지의 주제를 다루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눈먼 자들의 도시』의 정신적 후속작이라고 볼 수 있다. 


 『동굴』에서 독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소재는 바로 유기견 '파운드'이다.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개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개의 이름을 '로스트(잃어버린)'로 지을지 '파운드(발견된)'으로 지을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한다. 이는 버려진 과거가 아닌, 발견된 현재를 중요시하는 알고르와 그의 딸 마르타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알고르에게 아내의 죽음은 분명한 상처이고 그를 좌절하게 하는 요소지만, 마르타의 임신이 그 노인을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 마치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빛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간은 얼마든지 과거의 어둠, 무지의 시대 속에 갇혀 있을 수 있다. 현재의 빛, 인식의 시대로 전환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다. 그것을 위해 따가운 햇살과 수고를 견뎌야 하지만, 새로운 삶이 줄 진정한 자유에 비하면 아주 값싼 것이다.


 작가가 종교적 모티브를 항상 사용한다는 점을 보았을 때,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도공인 것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인간이 흙에서 빚어졌다는 성경 구절을 이용해, 찰흙 인형을 만드는 알고르와 마르타의 모습은 인간의 창조와 연결된다. 센터의 의뢰를 받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인형을 굽다가, 필요 없어지자 빗물에 녹아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그들의 행동은, 어쩌면 동굴 속의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세계에 무관심한 신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역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성상의 눈을 가린 상징적인 장면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을 고발하면서 신의 부재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신은 왜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고 침묵하느냐고 말이다. 


 대신에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속의 세계의 창조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이 세 사람의 알레고리가 현실과 무관한 우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듯이, 그는 이렇게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이 소설의 정연한 논리와 규칙을 어길 수 있고 반드시 어겨야 하지만, 한 사람의 배타적이고 본질적인 특징, 즉 그의 성격, 그의 존재 양식, 그만의 뚜렷한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만은 결코 망가뜨릴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이 모순으로 가득 찰 수는 있지만, 앞뒤가 맞지 않아서는 안 된다. (p.291)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부정적인 뜻을 분명히 선언하기 위해 부정을 뜻하는 단어를 두 개나 품고 있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전문적인 문법학자들에 따르면, 그런 문장은 오히려 강한 긍정을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즉 We can't do nothing이라는 문장이 결국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We can do something)는 뜻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p.401)


 그는 이야기 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동굴의 비유를 글라우콘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소크라테스 역할을 자처한다. 마치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그러나 그 역시 센터를 떠나 새로운 길을 걷는 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나머지는 독자가 써 내려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은 동굴 안을 밝히는 빛이기 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분명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빛을 보고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실로 무용한 것이리라. 그 불안하고 위태로운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자들이 있었다. 나는 단지 동굴 안에 있는 자들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꼭 변화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어둠이 익숙하다면,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빛이 있는 곳이다. 나는 어떤 것도 강요할 힘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어둠을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냐, 그가 물었다. 항상 시작하는 지점부터요, 첫걸음부터, 마르타가 대답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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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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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만에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충격을 받은 책을 만났다.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파리대왕』을 집필한 윌리엄 골딩의 또 다른 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페이지에 나타난 글자를 쫓아가며 읽기에 바빴다. 서술자는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며, 그가 점차 신체를 되찾아가고 바위 섬에 표류한 이후 구조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틴이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바람들이 왜곡되게 실현되며, 마틴은 자신이 만든 환상을 보고 미쳐간다. 그때 검은 번개가 나타나 그가 만든 가짜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마틴 자신마저 파괴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야 해군이었던 핀처 마틴은 방수 장화를 벗을 틈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독자인 내가 느낀 충격은 마틴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두 핀처 마틴이 만든 환상이었단 말인가?


 이 소설의 세계에 초대되려면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작중 초반부는 현재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아주 모호하게 쓰여져 있다. 인간이 아닌 주어들이 계속 나타난다. 읽으면서도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아가 자신의 상태와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 독자 역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중에 그것들이 모두 죽음을 인정하지 않던 핀처 마틴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쉽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자는 적어도 자신이 인지한 것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은 누가 뭐래도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 아닌가?


 핀처 마틴은 뛰어난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의 자아를 지배하는 것은 구조되기 위한 간절한 노력보다는 바위섬의 구성물에 이름을 짓고, 각자에게 역할을 배분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소극장에서 기필코 주연을 맡는다. 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군에 입대해야 했던 현실 때문인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도 갈팡질팡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정의하는 일뿐이었다.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 마틴. 크리스.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 (p.103)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행위는 곧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욕망을 마음껏 발휘하는 마틴의 모습을 정당화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사망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떼를 쓰는 그의 영혼의 자작극이다. 독자는 마지막 장에 나타난 타인의 증언을 통해 차가운 진실을 마주한다. 그가 만든 세상은 검은 번개에 의해 파괴되었다. 검은 번개가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마틴의 죽음은 확정적이고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마틴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착각이다.


 우리는 모든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개인의 환상 속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계속 흐르는 시간선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스스로 만든 바위 섬과 망망대해 위에 갇힌 마틴과는 분명 다르다. 꼭 그럴까? 우리 마음 속에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이 없는가? 나에게도 많은 후회와 아쉬움과 원망과 미련이 있다. 나는 가끔 그것을 해소하는 상상을 한다. 가상의 세계 속의 나는 아주 잘 나가기도 했다가, 성인만큼 선량하기도 했다가, 추악한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금 씁쓸해 한다. 환상은 그토록 무섭다. 그것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죽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상상력이 부족한 핀처 마틴에게는 이루지 못한 과거,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섬, 구조되지 못할 미래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큰 세상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서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성취를 거두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현실이라는 검은 번개가 모든 환상을 박살 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라고 외치며 자신을 위해 살아가자는 결심을 되새기는 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명분으로 삼아 스스로 만든 세계에 갇힐 필요도, 타인을 마음대로 하려는 욕망을 간직할 필요도 없다. 마틴의 영원 같은 시간 속에서 나다니엘은 얼마나 많이 죽고, 메리는 얼마나 고통 받았을까? 아무리 그 세계가 가짜라고 해도,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이제 타인을 마음대로 다루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왜곡된 탐욕은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수병들의 시신을 거두는 캠벨과 데이비드슨은 마틴이 고통을 받았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영혼들이 있다. 대서양 한복판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도처에 말이다. 인간의 필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처럼 지금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들을 안타까워 하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이 만든 세상은 안녕한지, 그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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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엄마의 선물로 읽게 되었다. 신춘문예의 시들을 이렇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다는 것은 꽤 새로웠다. 시에 대한 감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시인들의 소감들이었다.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지만, 꿋꿋이 시를 써 왔고, 한 번 시인으로 등단한 이상 계속 그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공통적으로 보였다.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시에서 느껴진 자유분방함이 절제력 있는 수상 소감과 만나서 신비한 인상을 주었다. 앞으로 신춘문예로 당선된 신선한 시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


 『에피쿠로스 쾌락』은 돈을 주고 구매한 책이다. 나쁘지는 않았고, 고전을 읽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기분을 주지만, 나와 견해가 참 다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고가 잘 변하지 않은 탓인가, 신념이 확고한 자의 철학이 그렇게 반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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