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아이 펭귄클래식 2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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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참다운 행복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싱적인 것이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 아나톨 프랑스 -  

  

  

  동화 같은 9개의 단편들  

 

 

<행복한 왕자>라는 제목을 듣게 되면, 누구든지 ' 아! 그 동화. ' 라고 떠오르게 된다. 어떤 이는 어렸을 때 눈물을 훔치면서 읽었던 동화이며 또 어떤 이는 유치원 시절에 어여쁜 선생님이 구연하는 이야기로 들었을 것이다.  

굳이 소개 안 해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많은 이들은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한다. 내용은 읽어보면 동화 같은 구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왕자>는 단편소설로 분류된다. 아일랜드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짤막한 단편소설들을 모아 출간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1854~1900)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복한 왕자>가 발표된 당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생전에 화려하고 대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문학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생전의 화려한 인기들은 그의 머릿속에 나온 작품들 때문이 아니었다. 기성 사회의 흐름을 무시한 채 온 몸을 장식하고 있는 와일드 특유 패션 감각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재치있는 언변 때문에 '오스카 와일드' 라는 이름을 상류층의 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 작가로서의 명성은 상류층에서의 명성과 비교하면 길지가 않다. <행복한 왕자>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을 때는 책이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으며 지금도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는 출판사로부터 한 번 출판 거절당한 이력이 있었으며 출간 당시만해도 그렇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행복한 왕자> 외 총 8편을 읽게 되면 그 당시 출판사들이 오스카가 쓴 원고를 손사레쳤는지 알 수 있다. 소설 구성과 내용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다. 대중들이 좋아하지 않을법한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없는 흡인력이 부족하다. 동화 같은 와일드의 단편소설들은 어린이들에게는 좋아하겠지만 어른들에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만 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오스카 와일드의 냉소적인 시선    

이 작품의 서문을 쓴 이안 스몰은 그와 관련된 편지와 글들을 통해서 실제로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두 자녀를 사랑스럽게 여겼던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들은 단순히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만 볼 수 없다. 이 짧은 단편소설들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물질만능주의가 팽배되어 가고 있던 유럽 사회에 대한 그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행복한 왕자>에서 왕자는 도덕주의자이다.  자신의 발 밑에 위치하는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몇 몇 사람들이 가난과 추위에 고통받고 있는 사실에 슬픔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금, 자신의 두 눈을 이루고 있는 푸른 사파이어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는 칼자루에 박힌 붉은 루비를 절친한 존재인 제비를 통해서 보내게 한다. 온 몸에 박힌 황금을 거의 다 때어낸 왕자는 예전과 같은 화려한 황금색이 감돌지 않았고 그냥 허름한 돌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왕자의 동상이 초라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동료들 따라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면서까지 왕자의 덕행이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제비 역시 너무 쓸쓸하게 최후를 맞게 된다. 하느님의 구원으로 왕자와 제비는 따뜻한 천국으로 인도되면서 이야기는 헤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왕자와 제비의 참된 덕행의 실천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면하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작품을 다 읽었어도 뒷맛이 개운치 않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쓸모 없어진 왕자의 동상을 용광로에 녹여 다시 새로운 동상을 만들기로 결정하는데 끝내 녹여지지 않은 납으로 이루어진 왕자의 심장은 쓰레기터에 버려지고 만다. 이를 통해 본질적인 내면보다는 겉으로만 보이는 화려한 이면을 중시하는 인간의 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별에서 온 아이>에서도 <행복한 왕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훈과 유사하며 이에 대한 와일드의 생각이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나무꾼들의 대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냉소적으로 비꼬고 있다.  

  " 왜 우리가 기뻐하는 거지? 인생은 부자를 위한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데 말이야. 숲에서 얼어 죽거나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 맞아. 대부분이 몇몇 사람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주 적은 양을 나누어 가지지. 세상은 불공평해. 슬픔을 제외하고는 평등하게 나눠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 "

            -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206 -   

이런 냉소적인 마음은 우연히 숲에서 별에서 온 아이를 발견되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훗날 별에서 온 아이를 키우게 된 착한 마음씨를 가진 나무꾼은 이 아이를 가엾게 여기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러오려고 하지만 동행한 나머지 나무꾼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이유로 대면서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감싸고 있는 망토를 달라고 우기기도 한다. 부에 집착하면서도 자신의 영리를 위해서는 연약한 갓난아기마저 외면하는, 인간성이 상실된 자본주의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병리적인 사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도덕한 행동을 하게 된다. 착한 나무꾼의 손에서 기른 별에서 온 아이는 남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괴롭히는 불량 소년으로 자라고 만다. 비행에 대한 죄값으로 별에서 온 아이는 두꺼비 얼굴에다가 뱀의 몸을 가진, 기괴한 괴물로 변하게 된다. 못된 심성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들을 반성하게 된다. 그 후로 별에서 온 아이는 과오들을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서 착한 일들을 하기 시작하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아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으며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진짜 부모님을 만나게 된다.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예언대로 별에서 온 아이는 선정을 베푸는 왕이 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읽게 되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동시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무슨 의도에서인지 이 이야기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아이는 그리 오랫동안 그 도시를 다스리지는 못했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한 데다 너무 힘든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난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뒤를 이어 다시 사악한 왕이 도시를 다스렸다.

                                                   - [별에서 온 아이] p 227 -  

올바른 미덕보다는 부에 대한 끝이 없는 원초적 탐욕 그리고 따뜻한 휴머니즘은 사라지고 이기심이 많아져버린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마음씨 착한 왕자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해도 이 세상이 성서 속 낙원처럼 될 수가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편소설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격적 완성으로 구축된 인간성과 박애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도덕주의로만으로는 사회의 병리적인 문제점들을 고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입장 역시 피력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대로 살아간 오스카 와일드의 삶  

이 두 작품 말고도 나머지 작품들 속에서도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서 오스카 와일드는 도덕적 가치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설정된 선과 악의 대비는 이율배반적인 구도를 이루면서도 동등한 타당성과 현실성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소설 속 설정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소설을 쓴 오스카 와일드의 삶 역시 이율배반적이었다. 이미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을 꿰뚫은 오스카 와일드 역시 하나의 인간에게 미치는 사회의 거대한 기류를 거부할 수 없었는가 보다. 우리에게 오스카 와일드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라는 모습보다는 생계와 인기를 위해서 사교계에 발을 내딛었던 독특한 이력과 동성애자라는 면이 더 많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정신보다는 미적 가치와 감각을 중시하는 유미주의의 주창자라는 이미지가 더해져져서 오스카 와일드라고 하면 비도덕주의적인 인상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늘그막 인생을 알게 되면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가 딱하게 여겨질 것이다. 동성애 혐의로 인한 감옥 생활을 하고난 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사랑하던 자식들을 이제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병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해준 소설 속 주인공 행복한 왕자를 연상케 해준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사랑과 온정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화려하고 밝은 면은 어두운 면에 가려지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파괴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버려져야만 했던 불쌍한 왕자처럼 말이다.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ruthkim0212?Redirect=Log&logNo=70017687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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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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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발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문둥이> - 
 

  

  나병 시인, 한하운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문학 출판시장에 시집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잘 안 읽혀지기도 하는 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책을 잘 안 읽는 국민으로 유명한데 그 짧은 시들이 수록된, 읽기 편한 시집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전, 다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해방 전후 시대까지 활동한 시인의 시집들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정지용, 윤동주, 김소월, 김영랑 등 일제 강점기 때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명 시인들의 작품들이 간간이 시 전집 형태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마저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외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 이들의 시는 한국 문학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며 국어 교과서나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시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수험생들을 위한 글이 되어 문학적 가치와 작품성이 격하되고 말았다. 이들의 문학적 작품성과 가치는 암기 위주의 입시교육에 파묻히게 되었다.   

글의 시작부터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 시집에 대한 비관적인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루에 100여 권 정도씩 사이트에 소개되는 수많은 신간도서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인 이 시 전집 때문이다.  

한하운 , , ,  왠만하면 EBS 언어영역 문제집에 나오는 한국 시인들의 작품들을 줄줄이 꿰뚫고 있는 수험생들의 이 사람의 시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국어 교과서나 언어영역 문제집, 그리고 수능 모의고사 정도에 이 시인의 작품이 한 번 나올까 말까할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3년 생활동안 교과서, 문제집, 수능 시험지 통틀어서 한하운의 시를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런 시인의 작품이 전집으로 나올 줄이야.   

 


  


그러나, (대략 추정하면) 연세가 50대 이상인 분들에게는 이 시인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하운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보기 드문, (본인에게는 문학사에서의 자신의 기록을 혐오했겠지만) 나병 환자 시인이다. 그가 당시 활동하던 1950~60년대 때에는 나병은 무시무시한 병이었으며 특히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나병은 나균이 감염되어 피부가 썩어가는 병이다. 나병은 전염병이기도 하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은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의학기술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에는 나병에 걸리기만 하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으며 환자의 눈만 마주쳐도 병균이 옮긴다고 생각했다. 얼굴과 손에 썩어간 채 살아가는 나병 환자의 모습에 대한 혐오증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에게 문둥이라고 부르면서 천시하였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 나병 환자들은 정상인들의 핍박과 멸시를 피하기 위해서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도 소록도에는 나병 환자들이 격리되었던 병원 시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의 시대 속에서 한하운은 1949년,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나병 시인으로써 문단에 첫 발에 내딛게 된다. 그의 시에는 문둥이로서 살아가면서 겪은 병마의 고통과 사람 대접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하는 서러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슬프기도 하여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였으며 지금도 <파랑새><보리피리><황토길> 등이 애송되고 있다. 

 

  

  흉칙한 괴물, 그렌델을 아십니까? 

<한하운 전집>의 출판을 알게 되면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게 되면서 때마침 그 때 읽고 있었던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떠올렸다.  그렌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다.  

 


고대 영웅 서사시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베어울프>

 

하지만, 2년 전에 우리나라에 개봉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베오울프>를 보신 분이라면 '그렌델' 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 영화 제목에서는 ' 베오울프' 라고 하고 있지만, 펭클클래식 판본에서는 ' 베어울프 ' 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영어법 표기가 혼동하고 있어서 여기서는 ' 베어울프' 라고 명시하겠다.

이 헐리우드 제작 영화는 원래 고대 영국에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잔인하게 잡아 먹어버리는 괴물 그렌델을 덴마크의 이웃나라인 게아타스의 젋은 무사 베어울프가 무찌르게 되면서 주인공 베어울프는 케아타스의 왕이 된다. 이 영웅적인 왕은 자신의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인 용을 무찌르게 되느데 용과 싸우고 난 뒤에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일종의 영웅담이다.  

헐리우드 영화 <베오울프>의 내용 역시 서사시의 원전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인간 형태로 변신하여 아름다움으로 베오울프를 유혹하기도 하는 그렌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유명한 헐리우드 섹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분하였다. (이 글에서는 사족이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직접 봤다. 인간 형태로 변한 그렌델의 어머니는 누드 상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안젤리나 졸리의 몸매를 본떠 만들어 캐릭터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루하기만한 영국 서사시 원작의 영화 내용 속에서 제일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안젤리나 졸리가 분한 그렌델의 어머니의 첫 등장 장면을 언급할 것이다. 남자 관객들이 왜 그 장면을 꼽는지 직접 영화를 보게 되면 알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렌델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는, 그야말로 무서운 괴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연약한 아기(?)가 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나 원작의 서사시의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영웅 베어울프다. 그렌델은 착한 영웅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악의 이미지이며 영웅인 주인공을 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인간' 이 되고 싶어하는 철학적인 괴물 그렌델

하지만, 존 가드너가 재구성한 베어울프에서는 괴물 그렌델이 주인공이다. 일종의 패러디 기법 차원으로 작품 제목 역시 <그렌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렌델 역시 흐로드가르 왕의 용사들을 죽이는 괴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잔인함과 공포로만 가득찬 괴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괴물' 로 살아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며,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그렌델의 모습은 판편의 철학자를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렌델의 심적 고통과 갈등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영화 <베오울프>를 본 나나 독자들에게는 새롭게 재구성한 베어울프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그렌델의 본성은 인간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의 모습은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 그렌델은 고목 사이의 틈에 발이 끼이면서 혼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을 흐로드가르 왕과 그의 일행들이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왕은 정체불명의 짐승이 나무에 있는 거을 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어두운 동굴에서만 살았던 그렌델은 이 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지금 한쪽 발이 고목 틈에 끼여 움직일 도리가 없었으며 애초에 왕과 일행들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왕과 그 일행들은 인간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짐승에게 섣불리 다가가기가 두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왕이 여섯 명을 골라냈다. " 가서 돼지를 가져오너라. "  

  " 네, 폐하! " 

  그들은 그렇게 대답한 뒤 말을 타고 사라졌다. 나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이 미친 짓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기뻐서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올라다보았다.  

  - <그렌델> 존 가드너, 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35 -  

몇 시간동안 나무에 발이 끼인채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랬던 그렌델은 기쁨의 정서를 표시하기 위해서 웃고 있지만, 왕의 일행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내는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왕의 일행들은 일제히 그렌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인간의 공격에 그렌델은 당황하게 되며 공포감에 질린 상태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 저것을 포위하라! "   왕이 소리쳤다.   " 말을 지켜라! " 

  그러자 나는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우둔하고 기계적인 황소가 아니라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내는 동물이자 이제껏 본 중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나는 비명을 질러 그자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덤불 뒤에 숨어서 말안장에 있떤 긴 막대와 활, 창을 꺼내 들었다.  

  " 미쳤어,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 " 

 - p 36 -  
 

 

결국에는 어미의 등장으로 그렌델은 살아남았지만 그는 동굴 밖 세상의 무서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 각인하게 된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 모두를, 내가 깨닫게 된 것들 모두를 어미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세상이 얼마나 의미 없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우주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 p 37 -   

속마음에는 인간과 유사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렌델을 포악한 괴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렌델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자세로 인간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그렌델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는, 겉으로는 괴물이었던 규정 불가의 존재가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어야만했던 그렌델과 한하운

한하운의 자서전에서도 소설 속 그렌델이 겪어야만 했던 괴물로서의 멸시와 시선과 유사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고향 땅 함흥에 돌아왔으나, 이 꼴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더욱이 동리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이 오기를 기다렸다. (중략)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서러움에 하루 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내 값이 정말로 한 푼어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 한하운 <나의 슬픈 반생기> 중에서 -

삶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한하운과 그렌델이 그나마 위안과 안정을 느끼게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둠' 으로 가득찬 밤과 동굴이었다. 이들은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환경에 생활하는 괴물 같은 인생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이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한하운 <파랑새> -  

이 시에서 한하운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고 싶은 욕구를 죽어서나마 파랑새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지금 어디선가 파랑새가 되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숨을 내쉬면 남아 있는 생명도 함께 빠져 나갈까?  짐승들은 내 아래 펼쳐진 깊은 협곡처럼 검고도 고요하게, 아무 생각도 없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기쁨인가? 

 저것들은 나의 파멸을 즐기며 사악하게, 너무나도 어리석게, 나를 계속 쳐다본다.  

  " 하찮은 그렌델이 우연히 당한 거야. " 

 나는 속삭인다.  " 너희 모두가 그럴 것처럼. "  

 - p 211 -  

하지만 그렌델은 서사시의 결말대로 베어울프의 손에 죽고 만다. 한 번 괴물은 영원한 괴물로 남게 되는걸까?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을 향한 그렌델의 냉소적인 독백을 읽을수록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괴물에게는 인간처럼 희망과 자유,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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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1-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한하운과 그렌델을 이렇게 연결시켜 놓을 수도 있군요.
저도 한하운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로 알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렌델 읽어보고 시어지는데요?
베오울프가 애니메이션이었나요? 그냥 영환 줄 알았는데...크

cyrus 2010-11-27 14:58   좋아요 0 | URL
저도 개봉 당시 보러가기 전에 영환줄 알았는데,,
어린이 관람자들을 겨냥할뻔한(?) 애니메이션이었더군요.
만화는 만화인데,,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이
있어서,, 아마도 18세 미만 관람자 불가일겁니다. ^^;;
그리고 유명 헐리우드 배우들이 더빙에 참여했는데
앤소니 홉킨스, 존 말코비치, 그리고 그렌델의 어머니 목소리로는
당연히 안젤리나 졸리가 참여했습니다.

반딧불이 2010-11-2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하운 전집이 출간되었군요. 반가운 소식 고맙습니다.

cyrus 2010-11-27 14:56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한하운 전집을 희망도서 신청했는데,,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시뿐만 아니라 작가의 산문들도
수록되어서 800여페이지 정도 될겁니다.

비로그인 2010-11-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오울프와 한하운 ^^

"베오울프" 는 보면서 나름 재밌게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는데 cyrus님 얘기를 들으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한하운 전집 은 요새 조금씩 읽고 있네요~

cyrus 2010-11-27 23:39   좋아요 0 | URL
저도 얼른 그의 시를 접하고 싶네요.^^
 
셜록 홈즈 : 바스커빌 가문의 개 펭귄클래식 69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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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17] 바스커빌 가의 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두 권 이상으로 구성된 시리즈를 완독했던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전 6권), 그리고 황금가지에서 출판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전 9권)와 까치에서 출판된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뤼팽 시리즈(전 20권). 단 세 작품뿐이다.  이 세 작품을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권도 읽고 싶어질만큼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해서 언급하면 글이 더 길어질 것이고, 이번 글의 주제와 무관하니 제쳐두겠다.)

셜록 홈즈. 추리소설 매니아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안 읽어 본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영국의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이다. 그를 마주하는 범인들, 그리고 그의 절칠한 동료 왓슨 박사와 친분이 있는 형사들도 허를 찌르는 뛰어난 추리력은 유명하다. 사건 해결에만 흥미를 가지는 독특한 취향에다가 언뜻 '차도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탐정은 세계 모든 독자들을 매료시켰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홈즈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모인 '셜록키언' 이라는 모임까지 탄생할 정도이다. 셜록키언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셜록 홈즈가 나오는 모든 작품을 완독하는 것은 기본이며 작품에 나오는 모든 세부적인 사항과 정보는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1) 명탐정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살았던 집 주소는?    

 2) 셜록 홈즈의 형의 풀네임은?

 3) 왓슨 박사가 첫번째로 결혼한 부인의 이름은?   

 4) 홈즈와 범죄의 제왕 모라어티 교수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폭포의 이름은? 

내가 만들어낸 문제들이지만, 셜록키언이 될려면 아마도 이런 세부적인 내용들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첫번째,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살았던 집 주소는 셜록키언이라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세부사항이다.  

그리고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명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를 확립시킨 획기적인 작품이다. 코난 도일 이전에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추리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잃어버린 편지> 등에 나오는 오귀스트 뒤팽이 최초로 명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이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셜록 홈즈와 비교하면 재미와 흥미 면에서는 약간 뒤쳐지는 감이 있다. (재미있게도 셜록 홈즈의 시리즈의 첫 이야기인 장편소설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의 추리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그리고 셜록 홈즈에게는 간사하고 잔인한 흉악범들을 잡아내는 착한 영웅 이미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셜록 홈즈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셜록 홈즈가 있었기에 이를 변주한 새로운 추리소설 시리즈의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훔치는 범죄자이면서도 자신보다 악한 무뢰배들의 물건들을 훔치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베푸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괴도 아르센 뤼팽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추리소설 시리즈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바랐던대로 '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의 추리 대결' 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세기의 라이벌에 대한 내용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중의 하나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악당들 앞에서 승승장구하는 명탐정 덕분에 수입이 짭짤했던 코난 도일에게는 르블랑의 이런 작품 구성에 반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서 발표 당시, 셜록 홈즈가 아닌 Herlock Sholmes, 즉 헐록 숌즈(에를록 솔메)라고 표기를 하였다. 사실, 셜록 홈즈 이름의 알파벳 철자 Sherlock Holmes 에서 'Sh' 와 'H' 을 서로 바꾼 것이다) 

     

 

  셜록키언들이 뽑는 최고의 사건, [바스커빌 가문의 개] 

수많은 셜록 홈즈의 시리즈 사건들 중에서 셜록키언이 최고의 사건으로 뽑는 작품으로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이다. 물론, 다른 사건들도 내용상에서 이 작품에 뒤쳐지지 않을만큼 재미있고 훌륭한 내용의 작품들도 꽤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서 쓴 소설이라서 몇 몇 작품의 사건들은 누구나 다 맞출 수 있고, 지금도 추리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던 고전적인 트릭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연극, 영화와 TV 드라마 등으로 각색한 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품에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이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무서운 괴물로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개의 정체를 밝히려는 셜록 홈즈의 활동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장르는 추리소설이지만, 작품 분위기는 고딕소설을 연상시킨다.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작품 속 배경인 영국의 다트무어 지방 풍경의 묘사는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깊게 몰입시키게 만드는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뛰어난 두뇌라고 자부하는 천하의 셜록 홈즈가 수수께끼의 범인에게 제대로 뒷통수 맞기도 한다. 다른 작품의 사건에서도 헛다리 짚는 홈즈의 모습이 여러 번 나오지만 이런 구성은 독자들에게 작품 속 범인과 홈즈와의 팽팽한 두뇌 대결에 대한 흥미를 더욱 고조시켜주고 있다. 

  

 

  유령을 믿지 않는 홈즈, 유령을 믿는 코난 도일   

 

     

이제는 루피가 해적왕이 되는 결말을 보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 , ,  

코난, 도대체 언제 쿠도 신이치로 돌아올거니?

 

셜록 홈즈라면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착한 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직접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홈즈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모티브로 하여 탄생된 일본의 만화가 아오야마 고쇼 원작의 만화 <명탐정 코난>에 등장하는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처럼 마음씨 착하고 모든 사건에 관심이 있는 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이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에 대한 전말을 다 듣고난 뒤, 본인 스스로 허접한 사건이라고 판단하면 그 사건 해결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습관이 있다. 잔인하면서도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수법을 사용한 살인 사건이라면 홈즈의 눈빛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만큼 어떤 사건에 맡느냐에 따라서 홈즈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으로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홈즈가 선호하지 않는 사건 1순위이다. 다른 시리즈 작품들의 초반부에서도 홈즈는 왓슨 박사나 의뢰인들에게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드러나고 있다. [바스커빌 가문의 개]의 사건 의뢰인으로 등장하는 제임스 모티머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사람이 아니며 악마일 수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홈즈는 그의 입장에 대해서 의뢰인에게 면박을 주고 있다. 

 

   
 

 " (전략)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그 지역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간 담이 큰 사람이 아니고는 밤에 황야 지역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  

" 그럼 과학으로 단련되신 박사께서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일이라고 믿으시나요? "

  홈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제가 지금까지 벌였던 조사는 모두 이 세계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악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악마에 도전하는 일은 너무 지나친 야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개의 발자국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건 인정하시죠? "

 " 전설에 등장하는 개도 실제로 존재하니까 사람의 목을 물어뜯었겠죠. 그렇지만 악마 같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   

 " 박사님은 이제 초자연주의자가 다 되셨군요. 모티머 박사님, 말씀해 보십시오. 그런 생각이라면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지금 박사께서는 찰스 경의 죽음을 조사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제게 그 일을 맡아달라고 말하고 계시잖습니까? " 

- <바스커빌 가문의 개> 남명성 역, p 43 -
  

 
   
 
 
이 대화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이성적인 인식으로 바라보려는 홈즈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개가 정말 인간이 설명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였다면 홈즈는 이 사건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셜록 홈즈를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은 홈즈의 인식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코난 도일은 한 때 심령술에 심취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요정들의 존재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문제의 사진.  
결국, 이 사진은 조작된 것은 판명되었다.
지금으로 봐도 사진 속 요정이 가짜라는 것이 티가 나는데 
코난 도일은 이 사진 속 요정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리고 요정들이 촬영된 흑백사진이 어느 잡지에 게재되면서 코난 도일은 이 사진 속 요정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코난 도일의 관심은 셜록 홈즈 시리즈 작품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는 [서섹스의 흡혈귀] [기어다니는 남자] 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통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 등장하고 있다. [서섹스의 흡혈귀]에는 사건 의뢰인은 밤만 되면 아기에게 다가와 흡혈하는 부인의 행동을 목격했으며 [기어다니는 남자] 에서는 평범해보이는 대학교수가 밤만 되면 원숭이처럼 행동한다. 여기서도 홈즈는 사건의 의뢰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자신이 맡는 사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되지 않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코난 도일의 흔적들  
 
[바스커빌 가문의 개]의 사건 의뢰인으로 나오는 제임스 모티버 박사는 초자연적인 현상, 사이비 과학, 미신에 대한 맹신의 오류를 범하고 마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유명 추리소설가도 생각의 오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코난 도일이 헛된 현상에 불과하는 심령술에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추리작가로서의 명성에 약간의 흠집이 남게 되었지만 세기의 명탐정으로 불리우는 셜록 홈즈의 명성만큼은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셜록 홈즈 시리즈 집필에 큰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미스터리한 사건과 트릭들은 지금 읽어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출간된 추리소설들과 일본과 한국에 수많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는 만화시리즈 <명탐정 코난>과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도 코난 도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탐정 쿠도 신이치는 정체불멸의 괴한(진 & 워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하게 되는데 괴한들은 자신의 범죄 조직단에서 만들어진 아직까지 실용되지 않은 캡슐을 신이치에게 먹이게 함으로써 신이치는 초등학생의 신체로 변하고 만다. 약 한 알 먹고 주인공의 신체가 변화하는 장면은 요즘 과학 이론은 설명 불가능한 일이지만 앞에서도 소개한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단편인 [기어다니는 남자] 의 설정과 유사하다. (여기서 작품 설명까지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직접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이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6기 - 베이커가의 망령 (2002년 작)

 
그리고 꼬마가 된 쿠도 신이치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에도가와 코난'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책장에 꽂힌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보고나서 정한 것이다. 쿠도 신이치가 제일 존경하는 탐정이 셜록 홈즈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코난 6기 극장판 <베이커가의 망령>에서는 셜록 홈즈가 살았던 19세기 말 런던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명탐정 셜록 홈즈, 그리고 그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셜록 홈즈 이외에도 아가사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에큘르 포와로와 미스 마플,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형사 등 각기 다른 개성만점을 가진 명탐정과 수많은 사건들이 세상에 등장하였다. 사실,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과 같으 하드보일드파의 탐정들을 제외하면 셜록 홈즈는 다른 명탐정보다 성격이 차가운 냉혈한이며 사건이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사건을 맡는다. 그래서 다른 탐정들보다도 지극히 개인적인 면이 강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하면 상대방의 무지를 비꼬기도 하면서 잘난 척도 한다. 그리고 여성을 은근히 무시하는 까칠한 남자이며 코카인 중독자이다. (유일하게 홈즈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도리어 천하의 머리 좋은 홈즈에게 한 방 먹인 여배우 아이린 애들러를 제외하고 말이다. 홈즈는 이 여인에게만은 존경 어린 칭찬을 하기도 한다)  홈즈와 동거동락하면서 매 작품들마다 홈즈에게 은근히 무시당하는 왓슨 박사는 대인배인 것이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기는커녕 머리만 아파오는 사건 이야기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거나 개성이 강한 탐정의 이야기를 원하는 추리소설 매니아들 그리고 classics한 분위기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단순하고 유치해보이는 것에서도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 정도는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 윗 글에 제가 만든 셜록 홈즈 문제의 답입니다. 답이 궁금하시다면,  
   밑에 드래그를 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런던 베이커가 221B, 셜록 홈즈 시리즈에 자주 언급되는 주소입니다.  
 
 2) 마이크로프트 홈즈,  
     홈즈의 형도 머리가 좋은 편이며 정부의 중요한 관리로 등장합니다.  
      ex) [브루스파팅턴 호 설계도]에서 첫 등장, 그 후 몇 편의 작품에서도 조연으로 등장.
       
 3) 메리 모스턴,  
     장편소설 [네 개의 서명]의 사건 의뢰인으로 등장하여 이 만남을 계기로  
     왓슨 박사와 결혼하여 생활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으로 죽게 되어서  
     왓슨 박사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게 됩니다. 참고로 왓슨 박사는 작품 속에서  
     결혼을 세 번 한 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4) 라이헨바하 폭포,  
     ex) <셜록 홈즈의 회상록> 중 [마지막 사건]. 코난 도일은 이 작품에서 홈즈를  
     죽게 함으로써 잡지에 연재하고 있는 홈즈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하였으나,  
     독자들의 끊임없는 연재 요구를 이기지 못해서 <셜록 홈즈의 귀환>에 수록된  
     [빈집의 모험]에서 홈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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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2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만 읽고,
나머지는 장르소설 마니아 답게 가지고는 있지만,
띄엄띄엄 읽은 것보다 안 읽은 게 더 많아요.
황금가지보다는 까치가 더 잼나여~^^

한때는 셜록키언을 꿈꿨던 것도 같은데...
요즘은 더 잼난 책들이랑 탐정이 넘쳐나는지라~ㅠ.ㅠ

다이조부 2010-11-21 21:38   좋아요 0 | URL

셜록키언 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데 재미 있네요 ^^

cyrus 2010-11-22 12:27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렸을 때 홈즈에 미쳤을 때 셜록키언을 꿈꿨답니다.
한 번 우연히 TV에서 영국의 셜록키언에 대한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홈즈 코스튬은 기본이고,,^^;;
모든 작품 내용과 홈즈의 특징뿐만 아니라 모든 시리즈에 나오는
왓슨 박사, 형사들, 관련인물들 심지어 범인들에 대한 세부정보까지
알고 있어야하더라고요. 아마도 100번 넘게 읽어야 가능한 것이겠죠.^^;;

비로그인 2010-11-2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상하게도 이쪽 장르의 소설은 손이 가질 않더라고요.
어릴땐 그래도 좀 읽은 듯 싶은데..
<신의 지문> 을 읽고 그런 쪽으로 설명하는 책쪽으로 기울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후후 그나저나 셜록키언 되려면 쫌 힘들겠다는.. ㅋ

cyrus 2010-11-22 12:28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에 나오는 추리소설이 별로 땡기지 않더라고요.
왠지 읽게 되면 머리가 아플것도 하고요^^;;

2010-11-22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2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2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1-22 13:44   좋아요 0 | URL
편하시는 발음대로 불러주시면 되요.
대부분 사이러스라고도 하는데,, 사실 저도
이게 정확한 발음이 뭔지 모른답니다.

원래, 초딩때 읽었던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에서
시루스의 철자를 cyrus라고 알고 있어서,,, (외국어 실력이 형편
없답니다.^^;;) 닉네임을 cyrus이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키루스라고 부르더군요. 실제 네이버 사전에 키루스 검색하면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이름입니다.

그래서 maggie님이 편하실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잘못 불렀다고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비로그인 2010-11-22 15:28   좋아요 0 | URL
영어식으로는 사이러스....원래대로 읽으면 키루스라고 나오더군요.
저도 얼른 검색해봤죠.
헤헤~~난 키루스님이라고 불러야겠다, 그럼~~

stella.K 2010-11-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루스님은 펭귄 클래식 마니아가 되셨나 봐요.
저도 추리 소설 별로 안 좋아해서 뭐라 비교하는 게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저는 홈즈 보단 루팡이 더 재밌게
읽히더라구요. 몇해 전 홈즈 시리즈 중 두 권을 얻어었는데
결국 못 읽고 사이판에서 도서관 운영하는 친구에게 보냈지요.

알라딘 인용구 글박스 기능이 안 좋은가 봐요.
저도 처음에 사용했다 고생 좀 했는뎅...ㅠ

cyrus 2010-11-22 13:37   좋아요 0 | URL
루팡 시리즈도 홈즈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시리즈입니다.^^

사실은 지금 펭귄클래식 공식 온라인 카페에서
리뷰 대회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쩌다보니 펭귄클래식 책들이
서재에 올리고 있는거랍니다. 혹시 펭귄클래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카페에 한 번 들려보세요. 거기서도 고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모여있답니다. 간혹, 그 곳에서 제가 아는
알라디너도 만나기도 하고요^^

그리고,, 인용구 박스,, 이거,, -_-;;
간혹 이런 문제가 발생한답니다. 글 외면상 보기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삭제해서 다시 쓸쑤도 없고요.

starover 2010-11-2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로 추가했어요!

cyrus 2010-11-22 21:03   좋아요 0 | URL
갑작스러운 댓글에 누군가 했더니 그 분이었군요.
<왕자와 거지> 리뷰랑 제임스 조이스 리뷰 보고 알았습니다.^^
여기서 만나게 되서 반갑습니다.^^

starover 2011-01-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스커빌 가문의 개』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키루스 님의 리뷰에 굴복했습니다.

cyrus 2011-01-21 20:49   좋아요 0 | URL
굴복했다뇨,, 저도 그리 잘 쓴것도 아닌데요 ^^;;
 
한밤이여, 안녕 펭귄클래식 51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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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96] 한밤이여, 안녕

 

 Episode

1941년 4월 18일, 영국의 우즈 강 풍경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우즈 강 주변에는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A 소년과 그의 4명의 친구들은 우즈 강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자전거 타기에는 날씨가 무척 좋았다. 그런데 A 소년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가다가 멈추면서 우즈 강변 쪽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저기 강에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가고 있는데, 저거 뭐지? "  

A 소년과 나머지 일행들도 타던 자전거를 멈추고, 친구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강변 쪽으로 일제히 고개가 향했다. 그 친구 말대로 강변에는 시커먼 물체가 강 위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A는 강 위의 물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의문의 물체를 뚫어지게 쳐다본 A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 야,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거,,, 저거 사람 시체 같은데,,, "  

A의 말에 친구들도 다시 한 번 그 문제의 물체를 주시하였다. 그러자 이들도 이제서야 사람의 시체인 것을 아는 순간, 놀랐는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시체를 본 순간 느낀 충격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채 한 명은 바로 경시청으로 신고하였고 나머지 동료들은 떠내려가고 있는 시체를 건져냈다.  

소년들이 건져낸 시체는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시체의 상태를 봐서는 익사한지 20일이 되었다. 죽은 여자가 입고 있는 코트 주머니 안에 무언가 가득하게 채워넣었는지 불룩하였다. 코트 주머니를 확인해보니 수많은 돌덩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갑자기, 시체 발견 현장에 얼굴이 빨개진 채 흥분으로 가득한 사내가 시체 쪽으로 달려왔다. 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형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억누르면서 사내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레너드 울프 씨, 혹시 이 여자가 당신이 찾았던 실종되었던 아낸가요? "  

  " 네, 맞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실종 신고했던 제 아내, 맞습니다. "   

4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찌고 있는 잔디밭에 시체가 되어 잠 자듯이 누워 있는 사내의 아내, 그녀는 바로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였다. 죽기 20일 전, 3월 28일. 울프는 자신의 서재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버린 차가운 주검이 된 채, , ,   경시청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생전 그녀가 평소에 앓고 있었던 우울증세로 인한 자살로 판명내렸다.   

 

 

  버지니아 울프 vs 진 리스  

만약에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진 리스<한밤이여, 안녕>을 읽고 난 뒤,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성(性)과 문학성이 동일한 이 여성 작가를 반겼을까?  아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바닥에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진 리스가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 독자들과 여성 비평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들이 보기에는 진 리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너무 나약하고 암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 나로서도 무기력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의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면서도 쉽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 리스는 울프보다 먼저 8년 전에 태어나, 영국 내에서 여성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작가 '진 리스' 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한밤이여, 안녕>은 1939년에 출간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2년 전이다. 울프는 분명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여성 작가와 작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정신질환 증세가 그녀를 괴롭혔으며 그 정신적 고통의 순간에서도 울프는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막간>을 집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시기였다.

버지니아 울프와 진 리스, 이름만 들어도 두 사람 다 영국의 여성 소설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문학 역시 비슷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남성 작가들이 지배하는 문학사들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하면서 여성 작가들을 재평가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력에 눌러 있었던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각인시켜준,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이라는 비평문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울프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진 리스도 '여성'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한밤이여, 안녕>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작품 속 여주인공인 샤샤라는 인물을 통해서 남성 사회에 억압받고 있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작품 속 샤샤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져 있으며 온통 불안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질환자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심한 정신질환과 우울증세를 보여왔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에게 논란만 남긴 문제의 결말 

<한밤이여, 안녕>의 결말은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소설 속 샤샤는 전체적으로 자신과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괴물' 같은 남자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방이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방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샤샤의 방은 남성을 믿지 않는 그녀의 폐쇄적이고 어둡기만한 성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굳건하기만 했던 샤샤의 성격은 결말에 다다르게 되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다.외로운 그녀에 먼저 다가간 르네라는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재회하기를 고대하던 르네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소설 전반부에서 샤샤가 기피했던 흉측스러운 모습의 사내가 들어온다.(!) 그녀의 방에 들어온 사내는 샤샤는 한 침대에 누우면서 소설은 막을 내리게 된다.  

샤샤가 남자들에 대한 강박적인 혐오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결말에서는 자신이 싫어했던 사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만다. 이런 결말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의견이 엇갈려져 있다. 남성들로 가득한 사회에 희생당한 여성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의견과 지금까지 겪었던 남성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을 벗어나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아를 다시 얻게 된다는 재탄생이라는 긍정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울프의 방 vs 샤샤의 방

앞에서도 버지니아 울프가 진 리스의 작품을 읽는다는 문학적 가정에 대해서 살짝 언급했지만, 그녀가 쓴 <자기만의 방>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이라는 존재의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울프는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 샤샤와 작품 속 결말을 비관론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문학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인 저평가에 대해 예로 들면서 남성 사회에서 부당한 입장에 처한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울프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또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와 같은 여성 문학가들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입(Money)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여성의 공간, 즉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밤이여, 안녕>의 여주인공인 샤샤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방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 사회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울프가 말하고 있는 자유로운 자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샤샤의 방은 오직 세상의 남성들에 대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이고 답답한 공간일뿐이다.   

   
 
 "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지? "  방이 내게 묻는다.  " 그래? 안 그래? "  
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여성용 큰 침대와 그 맞은편으로 남성용 좀 작은 침대. 세면기는 커튼에 가려져 있다. 방은 꽤 큰 편이다. 싸구려 호텔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내 코를 스친다. 호텔 밖에 자갈을 박아 포장한 좁은 도로는 가파르게 경사져 올라 몇 개의 계단과 만나게 되어 있다. 막다른 길이다.  
 
 - p 9 -  
 
   
   
 
작품의 첫 시작 부부인 샤샤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방에 대한 묘사이다. 샤샤의 방이 의인화되어 샤샤에게 물어보는 첫 문장은 샤샤의 성격이 폐쇄적인 강박 증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방이 샤샤에게 방의 상태를 물어보고 있지만, 이것은 샤샤의 독백 중 한 부분이다. 그리고 방의 외부에는 '막다른 길' 이라는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막다른 길' 은 넓은 세상 앞에서 개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샤샤의 순탄치 않은 삶을 예고하고 있다.
 
   
 

 " 나가세요, 나가요. "  살바티니가 말한다. " 나가라니까. "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가봉실로 들어간다. 이 방은 사용하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사용되는 경우는 위층의 방들이 손님들로 가득 찼을 때다. 나는 문을 잠가버린다.

 - p 34 -

 
   

자신의 방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뛰어들어 샤샤는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지만 남성에 대한 기피와 혐오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힌다.  결국, 샤샤는 업무 중 실수로 인해 같은 사무실에 일하는 남성 직원으로부터 싸늘한 시선과 말을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한 충동적인 슬픔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샤샤는 밀폐된 공간으로 숨게 된다. 그곳이 바로 인적이 드문 회사 내의 가봉실이다. 가봉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가버리는 모습은 자신을 향한 남성들의 따가운 눈총과 언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자세이다.  

  

 

  검은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마는 샤샤  

여성은 '아름다움' 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이며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남성들보다 민감한 편이다.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사고 싶어하고, 입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넘어서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여성' 이라는 정체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려는 심리적 본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들은 이쁜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어한다.  

샤샤는 우연히 옷 가게에서 보게 된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검은 드레스' 는  샤샤가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나는 그 까만색 드레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미치게 화가 날 정도로 나느 그 옷을 갈망한다. 그걸 손에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질텐데.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페론 부인이 그 옷을 나를 위해 보관해 주도록 청하면 어떨까? ......  을 꼭 구할 거라고. 그 옷을 살 돈을 반드시 구할 거라고.  

- p 39 -

 
   

하지만, 샤샤는 이 드레스를 사지 못하고 만다. 남성들의 시선을 꺼려하고, 자신의 존재에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샤샤에게는 당연히 검은 드레스를 살 수가 없다. 샤샤에게는 여성의 정체성이 이미 상실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당에 아름다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샤샤가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에게는 드레스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샤샤에게 당장 드레스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주어져있었다면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구입하여 입는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했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전과 같은 남성에 대한 기피증이 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샤에게는 자신의 수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과 연결되었던 사무실 일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 사회적 지위와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던 당시 유럽의 여성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읽기가 쉽지 않았던 진 리스의 소설

긴 글을 마무리하자면, 진 리스 작품의 결말를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남성의 세상에서 희생당한 여성이라고 비관론적인 해석 쪽으로 손을 들고 싶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문헌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해서 울프의 입장을 빌어서 ' 내 생각은 이렇다' 고 말하기에는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리고 <한밤이여, 안녕>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어 있어서 쉽게 읽혀지는 것도 아니라서 제대로 읽지 못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샤샤의 삶과 작품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글의 마무리를 <한밤이여, 안녕>의 생뚱맞은 결말처럼 마무리짓고자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무척 예민한 성격과 정신질환을 달고 살아야했지만 어렸을 때 의붓 오빠로부터의 성추행과 아버지의 죽음 등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그녀의 마음의 병을 악화시켜버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지금보다 미치지 못했다. 울프는 평생 다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기성사회 내에서는 그녀의 활동에 대한 시선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제임스 조이스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작품을 쓰는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울프는 같은 문학적 기법을 구사하는 '여성' 작가가 아닌 제임스 조이스를 뛰어넘는 '문학' 작가가 되기를 바랬다. 어쩌면 그녀의 자살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기성사회를 넘어서지 못한, 불행한 페미니즘 작가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진 리스 역시 남성 위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 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밤이여, 안녕>이 영국 BBC방송에 극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문학적인 활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왕립 문학학회 특별회원으로서의 활동과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작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두 여성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은 같았으나, 이들이 걸어야했던 여성으로서의 삶의 길은 너무 엇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에서 보고 있을 울프로서는 진 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위의 Episode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출판번역가 박중서 씨의 글을 토대로 제가 나름 소설 형식으로 꾸민 것입니다. 울프의 죽음과 관련된 실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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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2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The Hours로 버지니아 울프를 엿봤던거 같아요.
'디 아워스'를 시작으로 델러웨이 부인,자기만의 방...정도 읽었던 거 같아요.

cyrus 2010-11-22 12:20   좋아요 0 | URL
울프의 소설들 어떤가요? 울프의 소설을 발표 연도순으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좋은 작품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나무꾼님^^

꽃도둑 2010-11-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어요. 처음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었던 게 아마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을 거에요. 버지니아 울프가 뭐지?.. 그러다 어느 날 <델러웨이 부인>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죠. 그때의 느낌이란...의식의 흐름...참으로 낯설고 꼼꼼하게 그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하는데 좀 지루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던 기억이 나네요...근데 진 리스 작가는 처음 접하네요. 사이러스 님 리뷰 덕분에 흥미로운 책 하나 얻고 가네요..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0-11-22 12: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시를 읽고나서부터 울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 리스도 울프와 동시대의 여성 작가인데 이 사람도 그 당시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나름 시련을 겪었던 작가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쉽게 읽혀지지도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꽃도둑님 같은 여성 독자분들에게는
진 리스의 작품의 내용이 공감되실겁니다.

지금 국내에서 출간된 작품이 펭귄클래식시리즈로 나온
<한밤이여, 안녕>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전 2권)이
소개되었습니다. 참고로 <사르가소 바다>는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혹시 <제인에어>도 읽어보셨다면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보시면 좋을겁니다.

굿바이 2010-11-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어쩐일인지 친구와는 다르게 저는 참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3기니>가 있는데 다시 한 번 꺼내볼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1-22 13: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읽어봤는데,, 글 형식이 비평문이다보니 딱딱한 느낌 때문에
힘들었답니다^^;; 특히 제가 읽었던 <자기만의 방>이 굿바이님께서
언급하신 <3기니>와 함께 수록된 민음사 문학전집 판본이었는데,,
<3기니>와 함께 읽었을 때 고생 좀 했었습니다. 분량도 두꺼웠고요^^;;

비로그인 2010-11-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작가의 일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엔 왜 그렇게 당차던 그녀가 돌을 쥐면서까지 물속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있었는데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죠..

치열한 내면, 용납하지 않는 사회,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리고 아무도 몰랐을 그녀만의 아픔들.

음.. 오늘 cyrus님의 글을 읽으며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걸음을 걸었던 또 다른 작가를 만나고 갑니다. 왠지 말없이 찡끗 ^^ 웃음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ㅋ

cyrus 2010-11-26 16:2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이 언급하신 <어느 작가의 일기>가 버지니아 울프가 생전에
기록했던 일기문인가요? 진 리스의 작품이랑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나서부터 울프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일기라면 그녀의
내밀한 생각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을거 같습니다.^^
 
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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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39] 감정 교육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  

 
   

 

  플로베르에게 살짝 굴복당한 뻔하다 

   " 이 책에 굴복한다. "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남겼다. 카프카의 문학은 플로베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카프카는 플로베로의 세밀한 묘사를 모방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플로베르의 문학은 사실주의에 속하는데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사실감 있게 묘사하려는 필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정말 작품 속 단어 하나하나에도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그가 얼마나 꼼꼼했는가 하면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이 작가에게 주말에 놀러가자고 권하자 플로베르는 새 작품을 쓰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자신들끼리 유흥을 즐겼고 일요일에 플로베르의 작품 집필 정도 확인 차 집으로 찾아갔다. 플로베르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작품이 완성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두툼한 원고를 읽어본 친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전에 읽어본 내용과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낀 것이었다. 한 친구는 플로베르에게 며칠 전에 읽어봤던 그 내용과 똑같다고 지적하였으며 주말동안 뭘 했는지 물었다. 플로베르의 친구들은 주말에 작품 집필하는데 바쁘다고 그러더니 내용이 고치지 않은 사실에 실망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의 반응에 오히려 본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플로베르가 하는 말,   

 "고쳐진게 없다니. 이 친구야. 어제 이 문장 부분의 쉼표를 마침표로 바꾸었다가 다시 쉼표로 바꾸었다네. "       

문장의 부호 하나 넣는데에도 사실적 표현을 위한 그의 몰입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주말동안 문장 부호 하나를 넣는데 집에 틀어박혀 고심을 한 작품이 아마도 <감정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플로베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명작 <마담 보바리>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두 권짜리 <감정 교육>을 읽는 내내 그의 세밀한 묘사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작품 한 편이라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플로베르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음을.) 1권을 읽는 도중에 여러 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카프카가 왜 플로베르의 작품에 굴복했는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리오 영감> 발자크의 파리  vs <감정 교육> 플로베르의 파리 

<감정 교육>은 파리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어느 청년이 욕망과 허영의 도시인 파리에서 겪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장관이 되기를 꿈꾸는 청년 프레데릭 모로는 자신보다 연상이며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아르누 부인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파리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소속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성에 집착하고 권태에 빠진 상류층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자신이 겪은 일들은 부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아르누 부인에 대한 사랑도 점차 식어만 갔다. 결국,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은 과거의 사랑에 대한 확인만 한 채 헤어지고 600여 페이지 소설도 마무리짓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길고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통해서 1840년대 파리의 어두운 사회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표 시기는 다르지만 프랑스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굵직한 대혁명 뒤의 프랑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19세기 초반의 파리를 묘사하고 있다면 플로베르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를 포함한 19세기 중반까지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다. 시기와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 파리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사회진출을 꾀하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다.  

발자크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플로베르는 그의 사실주의적 문학을 영향 받지는 않았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읽는 이에게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의 대단한 집중력과 관찰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필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 프레데릭의 삶은 작가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구상한 것이다. 그러니 플로베르의 파리는 정말 사실적이면서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본인이 말할 정도로 자신이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파리의 사회는 순전히 그가 창조한 파리이다. 즉, '발자크의 파리' 인 것이다. 발자크가 묘사한 파리는 무미건조한 파리와는 다르게 생동감 있어 보이며 <고리오 영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플로베르의 작품보다는 쉽게 읽혀진다. (발자크의 작품을 읽어본 다른 이들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리오 영감>을 읽었을 때 술술 읽혀져나갔다) 

서로 다른 사실주의 문학을 구축해서인지, 두 작품의 결말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고리오 영감>의 라스띠냑크는 부에 대한 욕망을 가득한 '진흙투성이' 파리 사회를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낙심과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 

결말에서는 파리라는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찬 포부를 드러나고 있다. 발자크는 라스띠냑크의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어둡고 칙칙한 파리의 기성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라스띠냑끄의 도전은 발자크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당시 파리의 열악한 현실을 비추어 보면 허무맹랑하다.  그래서 플로베르의 파리와 작품의 결말은 발자크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프레데릭은 부조리한 파리 사회를 목도하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제일 좋았다고 중얼거리면서 소설은 결말을 짓는다. 이런 프레데릭의 모습은 혁명 이후의 세대들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제를 뒤집고 바꾸기 위해서 가슴 속에 뜨거운 혁명의 열정을 뿜어내지만 혁명를 지나간 이후에는 이들 역시 혁명 이전의 기성 세대들처럼 순응적이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되면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만약 이 작품을 보들레르가 읽었더라면 

혁명 발발 이후 프레데릭과 아르누 부인의 재회 장면은 혁명의 열정이 식어가는 혁명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은 재회를 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아르누 부인에 대한 프레데릭의 사랑은 1권 속 모습과 대조적이다.  아르누 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보면서 속으로는 실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누 부인은 예전과 다른 프레데릭의 변화된 감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부산 떨면서까지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하려고 하고 있다. 프레데릭이 자신 말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거 아닌지 괜한 걱정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프레데릭은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워보려고 하지만 이전처럼 뜨겁지가 않으며 금방 사그라진다. 식어버린 부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당혹스러웠는지 담배 한 개피를 물어본다.  

   
 

  프레데릭은 아르누 부인이 몸을 내맡기고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자 그 어는 때보다도 더 강하며 격렬하고 미칠 듯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 반감이랄까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제지했다. 하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신중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끌어내리지 않으려는 마음에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 <감정 교육> 2권,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윤진 역, 펭귄클래식, p 338 -

 
   

작품에서는 사소한 장면이지만 당혹스러움에 담배를 피우는 프레데릭과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아르누 부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에 쉽게 변해지고 무미건조해지는 인간과 그런 인간의 습성에 두려워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예전과 달라진 프레데릭의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르누 부인이 떠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에게 전해주는 모습은 딱하기만 하다. 젊음의 상징인 까만 머리카락을 전해줘도 프레데릭의 감정은 이제는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인간의 모습에 대한 알레고리는 <감정 교육>이 발표된 해인 1869년에 나온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라는 산문시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쭈글쭈글한 노파는 누구나 좋아하고 환심을 사려 하는 이 귀여운 어린애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노파처럼 그렇게 연약하고, 그녀처럼 이도 머리털도 없는 귀여운 것을. 
 그래서 노파는 아이에게 다가가 웃어주면 좋은 얼굴 표정을 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니는 이 늙어빠진 착한 여인이 어루만져 주는 데 겁이 나 발버둥치며 집 안이 떠들썩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착한 노파는 다시 그녀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우리 불행한 노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것들조차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어린것들을 무서워하는구나! "  

 - <파리의 우울> [노파의 절망]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역, 민음사, p 27 -

 
   

<감정 교육> 그리고 <파리의 우울>은 1869년, 같은 해에 암울하기만한 파리를 예리하게 묘사한 글을 발표했지만, 보들레르는 이 유명한 플로베르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미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이 세상에 나오기 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플로베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파리의 모습을 플로베르라는 동시대의 작가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높게 평가한 유일한 문학가일 수도 있다. <감정 교육> 발표 당시 문단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보들레르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아르누 부인은 보들레르의 글에 나오는 노파처럼 영원한 고독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순진무구했던 프레데릭은 저 꼬마처럼 늙어버린 아누르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프레데릭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 드러난 프레데릭의 감정들은 다양한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기성 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이 되어서 사회에 대한 환멸과 안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프레데릭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세대들에게도 드러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프랑스 문단이 플로베르의 날카롭게 파리의 실상을 새긴 <감정 교육>을 외면했던 것은 혁명 이후 보다 나은 세상이 도래되지 않았다는 환멸감과 자신들도 모르게 삶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습성에 물들어 있었던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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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기전에 적어도 플로베르정도는 읽어줘야 할텐데...
보들레르는 고사하고 김광규만 읽었다나 어쨌다나~~~

근데,플로베르에서 보들레르를 떠올리시다니...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상상력도 대단하십니다여~^^

다이조부 2010-11-14 08:18   좋아요 0 | URL

딴지걸자는 건 아니지만 ^^

저는 세상에 죽기 전에 뭔가 해야 할일, 20대에 꼭 해야 할 일 이런

규정이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것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ㅋ

아무튼 그래서 플로베르 와 보들레르 를 남은 생에서 읽지 않는다고 해서

뭐 그닥 후회는 안할듯~ 한동안 김광규 시집을 틈틈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언급한 두 명의 외국유명시인의 시를 접하지 못한건 몰라서 모르겠는데

생전에 김광규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인생이 더 시시했을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하하하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시집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말로만 죽기 전에 읽자고 그러지, 그렇다고 너무 연연하게
두지 않습니다. 예전에 문학 작품 읽기를 소홀히 해서
삶도 바빠지는만큼 조금이라도 열심히 읽자는 차원에서 정한 것이랍니다.
뭐 죽기 전에 다 못 읽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책들이고,
안 읽었다고 그렇게 후회하는 점도 없고요^^


비로그인 2010-11-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기 구석에 있는데,, 오늘밤 다시 끌어 안아 봐야겠습니다. 물론 Cyrus님의 글도 생각해보면서 말이지욥 ^^

cyrus 2010-11-14 20:29   좋아요 0 | URL
읽는데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름 생각거리가 많았던 플로베르의
작품인거 같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감정교육>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학생시절의 정의감을 잃고 속세에 물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90년대부터 우리나라 소설에 나오는 후일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프랑스 고유무술 사바트의 고수가 나오는 것이죠.

cyrus 2010-11-14 20:32   좋아요 0 | URL
자이트님은 격투기를 해보신 적이 있어서 그 장면이 기억이 남았군요^^
이 작품 읽으면서 1840년대 파리가 크게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1권에는 부패한 왕정에 대해서 젋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장면이 간혹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11-14 23:3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문학사는 연변에서 나온 것이라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적인 관점이 강한데, 1848년 혁명을 그린 가장 사실적인 작품으로 <감정교육>을 꼽더라구요.

아...그런데 사바트는 발차기 전문이라 저는 못합니다.저는 오른쪽 골반을 다쳐서 오른쪽 무릎을 많이 올리거나 비트는 동작을 못해요.

cyrus 2010-11-14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격투기는 남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스포츠이지만,
무엇보다도 몸 관리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blanca 2010-11-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과 정말 비슷한 구도군요.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플로베르는 예전에 보봐리 부인을 참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망설여졌어요. 감정교육은 꼬옥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cyrus님 말씀 들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0-11-14 23: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다음 플로베르의 작품으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마담 보바리>를 읽으려고 하는데, 망설여지네요ㅎㅎ
그래도 blanca님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예전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두 권짜리 작품들도 완독하실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에는 무턱대고 덤벼든 감이 있었답니다.^^;;

starover 2010-12-1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이러스 님은 짱임.

cyrus 2010-12-11 16:1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으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