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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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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1월 1일 새벽,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이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백남준이 주도 하에 존 케이지 등 전위 예술가와 대중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여 실시간으로  

위성 생중계한 퍼포먼스를 제작하였다. 퍼포먼스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퍼포먼스로 인해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는
20세기 예술사의 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통해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빅 브라더 사회가 오지 않았음을 위성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역사적인 생중계 이후 언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비평가들은  

백남준의 위성 방송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미디어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 생활 및 사상의 통제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지배 기구를  

상징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그리고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권력의 일당독재화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유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빅 브라더의 눈은  

일상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마저  들이댄다.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이면서도  

은밀한 성 생활까지 감시하면서 욕구 충족을 위한 성 생활을 억제한다. 작품 속  

빅 브라더의 사회는 처음부터 결말까지 전체주의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전체주의 사회에 굴복해버리고 마는 윈스턴 최후의 독백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빅 브라더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미디어의 존재를 무서워하고 부정하면서도
결국에는 미디어의 매력에 사로잡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流刑)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417 -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미디어도 다변적으로 발달하였다. 범죄 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설치한 CCTV에서부터 이제 방송에서는 일반인부터 유명  연예인까지 개인의 일상  

생활이 TV와 인터넷으로 전파되고 있다. 특히 트위터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달됨으로써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예전보다 신속한 정보 소통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모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트위터에 올린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개인 정보 유출은 사생활 초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트위터의 개방성을 악용한 범죄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는 빈집털이범  

경력이 있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다른 사람의 트위터에 공개된 일거수일투족의
기록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빈집털이범들은 트위터에 자신의 여행 일정을 올린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 미디어 제국주의

미디어를 지배한 빅 브라더는 인간의 공공장소에서까지도 영항을 미친다.
예전 극장에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지배정권에 관한 보기 좋은 소식들을 알려주었던  

‘대한 늬우스’처럼 빅 브라더 사회의 극장에도 전체주의 정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홍보성이 짙은 영상물이 스크린에 전파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 만 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18 -

이 대목에서 무시무시한 점은 잔혹한 전쟁 영화 장면에서도 관객들이 전혀 연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수잔 손택은 전쟁의 참혹성에 관해서 쓴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대중들은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의 상실에 대해서 지적을 하였다. 빅 브라더 체제의 사람들은 범람하고 있는  

미디어의 거짓된 영상으로 인해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려는 능력이 상실되었다.

정치 지배 세력이 미디어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현상은 다원주의인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나라의 민영 TV 방송국을  

3개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 미디어 그룹의 소유주이다. 동시에 이탈리아 세리에 A 축구  

명문 팀인 AC 밀란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미디어 매체와  

AC 밀란을 총괄하는 통합적인 그룹을 만들었다. 속내에는 자신의 기업이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사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많은 부정적인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3선이나  

총리직을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1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계적 정세의 배후에도 베를루스코니보다 더한 미디어의  

지배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지구촌의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는 칭찬과  

‘비도덕적인 악덕 자본가’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왕 루퍼트  

머독이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와 이와 관련된 사업만 해도 총 52개국 780여 종에 달하며  

한때 미국 LA 다저스의 소유주이기도 했었다. 머독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이라크 타도에 한 몫을 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라크를 세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머독이 장악하고 있던 미디어의
힘이 컸다. 미디어의 무서운 전파력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다. 대부분 전 세계  

사람들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의 허황된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미국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중심부를 공습하였다. 

전 세계로 방영된 공습 장면에 세계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1984>에서 전쟁 영화  

장면을 보는 관객들처럼 ‘세계 공공의 적’ 후세인의 나라가 파괴되는 모습에 환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국과 거대 미디어 제국의 합작에 희생당하는  

이라크의 모습에 세계 평화 존속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지배계층에 의해  

미디어가 통제되고 이를 권력 유지에도 이용하는 ‘미디어 헤게모니’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미국 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 속에서도
그는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을 힘입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했던가.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였던 동명의 부시 대통령도  

1994년 재임 당시, 이라크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CNN을 통해서  

전 세계로 방영되게 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전 세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동조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1984> 속의 미디어 헤게모니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하나의 나라를 통제하고 있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세계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미디어 제국주의’가 형성됨으로써 지금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믿는 미디어에 발등 찍혀버린 백남준 
 

백남준의 퍼포먼스 제목에는 조지 오웰의 영혼을 만나 당신의 예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소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리고 과학 기술로 발달된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찬가를  

불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백남준이 불렀던 희망찬가는 이제 그만  

불러야할 때이다. 백남준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거대한 키메라로 진화된 새로운 빅 브라더의  

존재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시도하고자 했던 미디어를 이용한 세계  

통합은 거꾸로 미디어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미디어가 올바르게 성장해주기를 바랐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의 악동으로  

자라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백남준은 믿고 있었던 '미디어'에게 자신의 발등이  

찍혀버리고 만 셈이다.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윈스턴처럼  

빅 브라더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펼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다.  

윈스턴과 같이 빅 브라더에 대항했다가 나중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남 일처럼 같이 여겨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 미디어는 현대 문명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지구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미디어는 TV와 컴퓨터를  

이용해 우리의 감각을 마사지하고 있다. 지금도 24시간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수많은 정보들이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를 무조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용한, 그리고 올바르고 진실한 정보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디어 정보에 대한 적극적인 안목이 있어야 앞으로 계속  

위세를 부리게 될 미디어의 빅 브라더에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용 관련 기사 자료 출처 

["트위터에 휴가계획 올리면 큰일나요"] 한국일보 7월 21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07/h2010072116385822450.htm

[이탈리아 권력·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2일자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221758265&code=9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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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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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한 관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처음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맨 처음 제목 속의  

‘고도(Godot)’가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고도(高度)’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고도’는  사람 이름이었다. 작품 내용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인물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제1막부터 보게 되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며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막부터 이들은  이름 모를 시골길에서 만나게 된다. 이 두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직업인지 알 수 있는 상세정보는 없다. 다만 에스트라공의 ‘공(公)’이 공작의 지위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보아서는 블라디미르보다는 높은 계급에 추측할 수 있다.  

1막의 대화 속에서도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나으리’라는 단어와 높임말을  

쓰는 대사가 딱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부조리극인만큼 에스트라공의  

공작이라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친구처럼 대화를 하지만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다.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거까지고 티격태격  

말다툼하며 괜히 지나가는 럭키와 포조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계급의 차이를 떠난 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보기 어렵다.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니, 또 너로구나!  

  에스트라공  그래서? 
  블라디미르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주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에스트라공  나도 그래.
  블라디미르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

  에스트라공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0 -  


 

  

 계속되는 무의미한 대화

이들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부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발 벗는데 생기는 고통을 한 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무안한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단추나 제대로 끼우라고 반격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에게는 부조리한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이 대화가 진행된다.    

 

 

  에스트라공  (약한 소리로) 좀 거들어줘!

  라디미르  아프냐? 
  에스트라공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블라디미르  (화를 내며)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에스트라공  너도 아팠냐?

  블라디미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에스트라공  (집게손가락을 가리키며) 그렇다고 단추까지 안 끼고 다닐 거야 없지 않아? 

  블라디미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참 그렇군. (단추를 채운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2 -

 

그리고 이들은 미지(未知)의 인물을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대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하나의 막이 끝날 무렵에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2막이 시작되면 1막과 같은  

장소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재회한다. 1막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자마자  

동문서답과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되며 2막에서도 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가 곁에 있어도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고도’에 대한 상징성은 다양하다.
작가는 고도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독자나 관객들에게 고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직접 무대를 보는  

관객들도 무형(無形)의 고도를 기다리게 하는 참여성의 효과를 주고 있다.  
 

고도가 희망 또는 자유이며, 현대인의 상실한 목적의식 등 다양한 해석이 많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블라디미르가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에스트라공이며, 반대로  

에스트라공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라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만나면  

티격태격한다. 대화는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주는  

원인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서로 친하지 않는 이들이  

굳이 만나서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에게는  

서로서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희망이자 행복인 '고도'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희망과 행복이 우리 삶 가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또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 되지도 않을 복권에  

매달리거나 돈만 많이 모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부조리한 현실에 매몰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블라디미르  너는 속으로는 반갑지? 안 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01 - 
 

 

 둘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2막이 끝나가는 부분에서는 이번에도 고도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되고 다음 날에도  

고도를 기다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은 다음에 올 때는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가 막바지로 갈수록  두 인물의 

심리 변화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블라디미르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트라공의 ‘끈’이 부조리한 삶에 사는  

두 인물이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나?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져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중략)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58 -

 

만약에 사무엘 베케트가 또 하나의 막, 3막을 만들었다면 이 두 사람을 죽게 되는 결말을  

선택했을까?  고도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못 만나면 죽겠다는 말은 거짓된 한탄뿐이다. 연세 드신 분들이 가끔 ‘빨리  

죽어야 편하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 날에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이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에스트라공의 ‘끈’은 자신과 블라디미르를 연결해줌으로써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매개체이다. 다음 날에 끈을 가지고 옴으로써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부조리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가려는 일상인들의 생존력이기도  

하다.   
 

 

 기다리다 지친다

<사기열전> ‘소진열전’에 미생(尾生)이라는 인물의 일화가 나온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오지 않았지만 미생은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서 다리 밑의 물이
불어나는데도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 장소인 다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결국 그는 넘쳐나는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소진은 미생의 일화를 인용하여
자신의 신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장자> ‘도척편’에서는 도척은 미생의 행동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후세에 미생은 미련하게 약속을 지키는 융통성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런 약속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고 하게 된다.

고도를 향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도 어떻게 보면 ‘미생지신’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며 부질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고도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리고 미생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질없는 존재나 일에 대해서 큰 미련을 갖는 버릇이 있다.  

복권을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여러 번 구입해도 언젠가는
꼭 1등에 당첨되리라 믿는 사람, 2PM의 노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 기다리다가 
지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희망과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으며 아무리 상대방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지만 상대방은 당신을 알아주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믿는 외곬들이 자기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주위를 둘러보아라. 우리가 바라는 희망과 행복은 어쩌면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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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정말 별 시나리오를 다 쓰면서 괴로워했는데.. 그 고도가 고도를 말함이 아닌걸 알아도..아마도 그때부터 우리말이
지니는 동음이의적 표현에 더욱 환상마저 갖으며....ㅎㅎㅎㅎ어렸던..내가..

cyrus 2015-01-22 15:40   좋아요 0 | URL
이거 완전 오래 전에 쓴 글에 댓글을 남기시다니, 부끄럽습니다. 꼭 벌거벗은 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ㅎㅎㅎ 이때가 이 작품이 독자(관객)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제 맘대로 생각하면서 글로 끼적거렸던 시절이에요. ^^

[그장소] 2015-01-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비밀인데..알라딘 램프가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서 찾아줘요..묶은 글..찾아..이것도 네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어때?..이러는 거죠..진짜예요..(-_ど) 어때..? 그치?? 거봐..좋아할줄 알았다니까...이런다니까요...신기하게.

cyrus 2015-01-22 20:02   좋아요 0 | URL
북플에 `읽고 싶은 책` 추천글 말하시는군요. 신기하네요. 5년 전의 글을 보여주다니.. ㅎㅎㅎ

[그장소] 2015-01-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닌데..그렇게 찾은것은..ㅎㅎ
스마트폰도..북플도 초보라서..뭘 움직이는지 통모르고 주사위를 던지는지도 모르죠..ㅎㅎ
그냥..아..이 책 좋았지..싶으면..그다음..이렇게.글이 떡..와요..읽다보면..헉..시간이 역순하고 있음을..아는..거죠..cyrus님이 글이 예전것..이라 말 하지않았다면..실감도 채 못할..만큼..^^! 마법이라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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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77]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현실주의자 vs 낙관주의자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미국의 스톡데일 장군은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수용소에는 스톡데일 장군뿐만 아니라 많은 미군  

병사들이 잡혀 있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고문에 시달렸다. 스톡데일 장군도  

수용소에서 무려 8년이나 갇혀 있을 동안 베트콩의 무자비한 고문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군뿐만  

아니라 함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미군 병사들도 고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절반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포로 생존자들이 악명 놓은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스톡데일 장군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포로들의 생사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을 사고방식에 따라 현실주의자와 낙관주의자로 나누어진다.
낙관주의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게 되면 크리스마스에는 꼭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현실주의자는 크리스마스가 와도 수용소에서 나가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언젠가는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대비하는 마음을 가졌다.  

두 유형의 포로 중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결국에 수용소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은 현실주의자였다. 낙관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차게 되지만 막상 탈출하지 못하면 금방 낙심하였다. 그리고 명절이 또 한번 

찾아오면 그 때는 꼭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희망과 낙심이 반복된 그들은  

상심에 빠지게 된다. 상심이라는 부정적 사고방식에 지배당한 낙관주의자들은 면역력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맞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장군의 이름을 따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패러독스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은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사람이 미래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스탈린 시대의 비극, 웃음으로 희화화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슈호프의 수용소  

일상에서의 비인간적인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하는 소비에트 체제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작품 속 슈호프의 다소 어리숙한 인간적인 면모와 대비되어 수용소의  

억압적인 상황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절망적인 수용소 생활의 하루를 행복한 하루라고 말하는 반어적 표현은 슈호프의  

비극적인 상황을 희화화하고 있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중략)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206 - 

 

그리고 슈호프의 기나긴 수용소 생활의 일수를 언급하면서 고통의 연속이었던 수용소의  

생활을 강조함과 동시에 희화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206 - 
 

 

 전쟁 박물관은 두 번 이상 가지 않는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고발한 시대는 역사 한 켠 구석으로 사라졌다. 작품 속 배경은  

구시대적이며 그의 작품은 과거의 한 시대를 말해주고 있는 문학적 유물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독자들도 솔제니친의 작품을  ‘다크 투어리즘’의 시선으로  

읽기 마련이다.  이 작품을 교훈 삼아서 어두웠던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반성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전쟁 박물관에 두 번 이상 가는 사람이 있던가?   

아무리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전쟁 박물관에 자주  

관람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즉, 역사의 사회 고발적 내용을 그린 문학작품은  

단순 일회성 독서로 끝나기가 쉽다. 그리고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지금까지도  

잘못된 역사가 낳은 희생자로만  생각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솔제니친이  

말하고자 한 것처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를 어두운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로  

여겨야만 하는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행복한 시간들 

슈호프도 어떻게 보면 스톡데일 패러독스를 극복한 현실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에는 수용소에서 풀려나는 슈호프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결말을 통해서 그가  

3653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들을 이겨내고 수용소에서 풀려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비참한 수용소의 생활을 직시한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이  

10년의 수용소 형기를 마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그는 사소한 일상에서  

많은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다! 윗사람들이 상의를 하고 있는 동안  

  아무 곳이나 따뜻한 곳을 찾아 불 옆에 앉아 조금 후에 시작될 고된 노동의  

  시간에 대비하는 것이다.  (중략)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나 행복한 것이다.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58 - 

 

힘든 노동 끝에 찾아오는 짧은 휴식 시간은 슈호프에게는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다. 비록 자신이 원했던 수용소 밖의 자유로움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지만
슈호프는 나름 수용소 생활에 길들어져 고통스러운 수용소의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쉬는 시간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식사 시간이야말로 슈호프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행복 엔도르핀이 최고조로 달하는 시간이다. 슈호프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수용소 형기가 끝나게  

될 날을 인고하면서 일상적인 삶으로의 회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 (중략)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  

  불만을 잊어버린다.  (중략) 그래, 한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테지! 

                   - A.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영의 역, p 175 - 
 

 

 만약에 솔제니친이 낙관주의자였더라면?

이 작품처럼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그린 또 하나의 작품은 빅토르 E.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일들을 수기 형식으로 쓴 이 작품 속에서도 

스톡데일 패러독스와 유사한 사례가 등장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낙관주의들은  연말만  

되면 수용소에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 빠지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빅토르 프랑클은 힘든 수용소 생활과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생이별한 아내와 재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수용소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장르는 소설이지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솔제니친은 반 소련 체제 관련 조직을 결성한 죄로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러 곳의 정치범 관련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미 자신의 나라 소련의 잘못된 정치 체제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고, 기존의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수용소 생활로 인해서 

젊은 시절부터 뿜어져 나온  혁명적인 열정을 접어야했던 것이 아쉬웠던 것일까?  

그는 스탈린 체제가 지난 뒤에서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소설 속에서나마 표출하였다.
자신이 못다 이룬 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솔제니친은 길고 긴 악명 높은 수용소  

생활을 극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그도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슈호프처럼  

고통 속에서의 행복을 느끼는 방식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먼 훗날, 수용소를 벗어나  

잘못된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는 날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걸출한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만약에 솔제니친이 낙관주의자였더라면, 다시 말하자면 수용소 생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혁명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살아갔더라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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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4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001-148] 80일간의 세계일주

 

 

 

 


 오늘날의 세계 일주 여행

16살의 나이로 최연소 단독 세계 항해일주에 도전했던 미국의 애비 선덜랜드라는 소녀가
도전 5개월 만에 실종되었다. 원인은 거친 파도에 의해서 배가 좌초되었던 것.
다행히도 이틀 뒤에 다른 선박에 구출되었다. 일부 항해 전문가들은 자식의 무모한 도전을  

방치한 부모의 행동이 무책임하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에  

나섰다. 몇 살부터 모험에 나설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소녀의 부모들은 자식의  

모험심을 막는 부모의 과잉보호가 더 문제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옹호하였다.
통신과 장거리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요즘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 일주를  

많이 하고 있다. 배뿐만 아니라 자전거, 자동차 등 본인들이 직접 작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세계 일주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세계 여러 나라를  

이동하는 것만 아니다.  

 

세계 일주에도 테마가 있다. 지구 환경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있으며 세계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도 여행자들에게 위험한  

분쟁 지역의 국가들까지도 세계 일주의 여정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어린  

소녀처럼 기네스 북 기록이라는 세계 최고의 기록자가 되기 위해서 세계 일주를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자신 인생의 큰 목표로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어린 시절부터 부자가 되면 그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제철 사업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얻게 된 카네기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마리 준마가 끄는 호화 마차로 세계 일주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철왕, 세계 최고의 부호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전 세계에서 각인시켜주었다.
이렇듯 자기 PR의 목적을 가진 세계 일주도 있다. 세계 일주는 단순히 모험심 강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모험심 이외에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 일주를 해야만 하는 자기만의 특정한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동시에 전 세계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자기 PR 효과가  

불러오게 된다.  

 

 

 

 과거의 세계 일주 여행 : 오리엔탈리즘의 기원  

하지만 예전의 세계 일주는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15~17세기에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
탐험가들의 등장으로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항해 시대부터 인간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근대의 시대로 오게 되면서 나날이 증가하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비(非) 서구지역에 대한 정치지배 및 교역통상 등의 체계가 

이루어져 식민지 건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서양에서 동양 문화에 대한 인식이  

늘어나고 동양 문화를 반영한 풍습과 문화가 유행하였다. 서양 화풍에 일본의 양식인  

우키요에가 유행하여 반 고흐나 드가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폴 고갱은  

당시 서구에게는 미개인의 나라였던 타히티에 직접 가서 그 곳에 정착하게 된다.  

영국의 라카프디오 헌은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의 민담 문학을 서구에 소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나중에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동양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가지게 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형성된다.  

단지 서구의 문화적 유행이 오리엔탈리즘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를 비추어보면 서양인들은 동양 문화에 대한 동경 뒤에는  

자신보다 아래인 동양 국가를 지배하고 싶은 이중적인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만약 유럽에서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행하지 않고, 아예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을 모르고  

있었다면 일본 내의 서양인 진출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근대적 국가로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메이지 유신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쥘 베른의 등장 : 경이적 여행의 탄생 
 

세계에 대한 서양의 동경은 단순히 동양 문화의 유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의 발달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겼다. 19세기 후반에 과학이 크게  

발달함에 따라, 자연과학의 지식을 이용한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문학적 유행의  

대표주자는 프랑스의 근대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인 쥘 베른이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고작 그가 가본 나라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그러나 여행 경험으로 많은 여행가와 지리학자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얻은 지식에다가 풍부한 상상력을 더하여 일종의 과학모험 소설을 발표한다.  

작품 속에 나오는 여행들은 당시 독자들에겐 경이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였다.  

바다 밑을 여행하는 <해저 2만리>, 달나라를 여행하는 <달세계 일주>, 지구의 내부를  

여행하는 <지저 여행>, 그리고 세계 일주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할 법한 경이적 여행 형식을 

낳게 한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나머지 소개한  

작품들보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영화로도 리메이크하기도 하였다.
소설 장르가 모험과 과학이 결합된 소설이다 보니 아동용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아동용 모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단순히 아동용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아동용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어린이들은 단순히  

모험 이야기에 혹해서 이 작품을 읽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나도 초등학생 때 집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아동문학전집의 한 권으로써 쥘 베른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다. 그 때의 작품도 <80일간의 세계 일주>였다. 2만 파운드의 내기가 걸린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그의 하인인 프랑스 인 파스파르투와 그 밖의 주변 인물들의  

세계 일주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인도, 중국, 미국, 대서양 등 세계 각지의 인정과  

풍물들이 소개되어 있어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들은 이 작품을  

한 번 읽게 되면 빠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포그 일행과 세계 일주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지막에 갈수록 포그가 세계 일주를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2만 파운드의 

내기에서 진 장면에서는 안타까워하다가 결말에 파스파르투가 내기에 승리하였음을  

증명하게 됨으로써 어린이 독자들은 해피엔딩에 대해서 무척 기뻐하게 느낄 것이다.  

책을 덮으면 포그 일행이 세계 여러 나라를 거쳐 갔던 여행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게 된다.

그런데 오랜만에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읽어 보니, 이 작품을 아동용으로 치부하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다. 아니, 이 작품을 어린이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한 단순한 아동  

모험소설로만 볼 수가 없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풍습과 성격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우다 부인은 남편이 죽게 되면 부인도 남편 따라서 죽어야 하는 인도의 풍습에 따르게  

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풍습의 진행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포그 일행들은  

인도의 잔인한 풍습에 대해서 미개하다고 비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영국 정부는 왜 이런 잘못된 풍습을 막지 못하고 있냐고 한술 더 뜬다. 분명히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습은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풍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풍습에는 문화적, 역사적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인도 사회를 지배하는 힌두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서로 때래야 땔 수 없는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다른 나라의 풍습을 미개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시각이다. 그리고  

그런 식민지 국가의 미개한 풍습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 국가가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던 통치 체제의 특징이다. 

작가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국의 문화 통치는 독립을 바라는 있었던 인도의 힘을 무마시키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이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종교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관습까지도  

  존중하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엄격히 처벌하는 현명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 『80일간의 세계 일주』p 77 -

등장인물들의 타 민족 문화에 대한 무지함은 파스파르투의 행동에 대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인도의 일부 사원에는 기독교인이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과 사원에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는 풍습이 있다. 하지만 파스파르투는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한 채 멋도 모르고 금단의 구역인 힌두 교 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힌두 교 사원 안의 승려들은 이방인의 출입을 목격하게 되면 당연히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세 명의 승려들은 파스파르투를 구타하지만 오히려 파스파르투는 승려들을 때려 눕히면서 

간신히 사원 밖으로 빠져나온다. 파스파르투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나이다.
만약에 도망치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금단을 어긴 죄로 그들만의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에 오게 되면
그 나라의 풍습을 인정하고 지켜야하는 법이다.

작품 속에 미국을 여행하는 장면에서도 독자들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기 위한 열차를 타고 있었던 포그 일행은 수 족 인디언의 습격으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어린 독자들은 이 장면을 읽게 되면 인디언에 대한  

고정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오류의 소지가 생길 수가 있다. 인디언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죽여야 하는  

그들의 슬픈 역사를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미국의 땅은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박해받았던 영국의  

청교도 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백인들은 이 거대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전에 생활하고 있었던 인디언들과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자기 땅을 뺏으려고 하는 백인들을 내쫓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터전인 땅과 자연을 지켜내기 위하여 이들이 타고 다니는 열차를
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인디언과 백인 간의 피 튀기는 살육의 역사는  

곧 미국이라는 제국이 탄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백인들이 승리하게  

되면서 그 승리의 대가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수많은 인디언 족들은 몰살당하게  

되었으며 생존한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까지도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어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복지와  

과거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숨어있는 주인공, 파스파르투

최근에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필리어스 포그이다. 그는 영국 사람이다. 반면에 그의 하인은 프랑스  

사람이다. 그런데 작가 쥘 베른은 프랑스 사람인데 왜 작품 속 주인공인 신사를  

영국 사람으로 그려 넣은 것일까? 그리고 왜 영국 신사의 하인은 자신의 나라  

사람이였을까? 영국의 부유한 신사의 하인이 프랑스 사람이라.....
당시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프랑스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민족적 수치감을 가졌을 법도 한데 말이다. 아동문학전집의 해설과 최근에 읽은  

쥘 베른 컬렉션  시리즈의 해설에는 내가 궁금했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쥘 베른의 고국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서 수치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며  

이에 대한 커다란 물의도 빚지 않았을 것이다. 뜻밖에도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작가의 숨겨진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작품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독자들의 눈에 띄게 활약을 했던 인물은 단연코  

파스파르투이다. 인도에서 화형당할 위기에 처한 아우다 부인을 구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수 족 인디언들이 열차를 습격했을 때 과거에 직업이었던  

광대 생활에서 생긴 유연성과 민첩성으로 기차 아래 사이에 매달려서 기관차와  

객차를 분리시켜 인디언들의 추격을 따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포그가 80일 안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음을 증명을 하게 되어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던 포그를 기사회생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결국 파스파르투는 세계 일주의 성공의 숨은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그와 파스파르투의 성격을 비교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파스파르투에 정감이  

가게 된다. 아우다 부인을 구한 공로를 주인인 포그에게 돌리기도 하며 포그를  

현상수배범인 줄 알고 일행을 따라다니던 픽스 형사를 포그를 미행하기 위한  

스파이라고 생각을 하여 주인을 지키려는 노력을 한다. 파스파르투는 주인을 위한  

충성심이 강하며 인간적이다. 반면에 포그는 기계 인간이라고 칭해도 어색하지가  

않은 원칙주의자다. 시간의 지배자 류비셰프처럼 자신이 정한 시간대로 일과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세계 일주하는 장면에서는 파스파르투가 중요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찬의 말을 표현하지 않는 괴팍한 독신 신사의 성격을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파스파르투가 세계 일주 성공을 증명하는 이야기를 해도 처음에는  

믿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조건 자신의 말이 옳다고 우긴다.  

그러다가 주인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파스파르투는 주인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말을  

증명시키려고 한다. 마지막 이 장면은 원칙주의자의 고리타분한 획일적인 사고(思考)를  

은근히 희화화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에서 파스파르투는 남의 나라의 신사의 하인이지만
그가 주인공인 필리어스 보그보다 독자들의 눈에 띌 수 있는 활약을 하도록 함으로써 
위험한 행동을 직접 나서는 용기가 가득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미가 넘치는 대인배적 인물로 만들게 하였다. 이 프랑스 인이야말로 작품 속에  

숨어있는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프랑스 독자들은 자신의 나라 사람이  

영국인을 수발해야하는 하인이었지만 그의 훌륭한 활약상 때문에 이에 대한 수치감은  

느끼지 않았고 작가의 인물 설정에 불만의 목소리도 없었던 것이다. 
 

 

 

 위험한 독서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  
 

쥘 베른의 대표작에 대해서 평을 정리하자면, 이 작품이 아동 독자들을 위한 포맷이  

설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동용 소설이라고 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작 쥘 베른은 이 작품을 단지 어린이들을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근대  

사회의 서양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한 통속소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양을 포함한 다른 세계에  

대한 편협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도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험소설의 고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의 문학적 공로는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올바르게 읽게 하기 위해서는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들의 독서 교육이 중요하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은 먼저
아이들을 위한 책들을 읽어보고,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이 책을 읽게 만들어야할지
고려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눈을 사로잡게 하는 추천도서나 어린이들의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자신들도 읽어보지 못했던 책들을 무작정 읽으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린이들이
독서라는 활동을 꺼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아동용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뭣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이 작품을  

읽으라고 권하게 되면 아이들은 평생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된다. 결국에는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독서가 되고 만다. 아이들이 읽기 전에  

부모들은 작품을 먼저 읽어보고, 아이들이 작품을 다 읽으면 아이들과 함께 독서  

토론을 해본다. 그리고 아이들의 의견 중에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모가 고쳐주고

아이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사고력을 가지게 된다. 부모의 올바른 교육이 어린이들은  

평생 독서 습관이 몸에 배어 자라게 되면서 올바른 인격과 의식 함양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한때 실종 ‘16세 소녀의 세계 항해일주’… 책임소재 논란] 뉴시스 6월 15일 입력 

http://news.donga.com/3/all/20100615/291124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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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안해요 Mr. Pamuk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이 <눈>을 발표한 지 7년 만에  

신작이 나왔다. 더군다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로 소설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유명세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최근에 나온 <순수박물관>이 처음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오르한 파묵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한  <내 이름은 빨강>을 읽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 당시  

워낙 유명했던지라 동네 공공 도서관에 대출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빌려가곤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예약자가 많아서 예약 기회도 없었다. 꼭 읽어야겠지  

하고 벼르다가 이 책을 알게 된 지 두 달 만에 드디어 그의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달이라는 인고(忍苦)의 시간동안 느꼈던 책에 대한 기대감이  

첫 페이지를 넘길수록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를
알리게 한 이 책의 독특한 역순행적 구성과 16세기 말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색채의 문장에 기대감만큼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의 장르가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 읽었건만 추리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몰입과 긴박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야, 이게 추리소설이라고? 그냥 터키에서 유명한 추리작가의 작품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1권의 절반도 채 읽지 못한 채 다음 날 도서관에 반납을 하였다.
성숙하지 못했던 나의 풋내기 독서력이 훌륭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2년 뒤, 터키에서 유명한 추리작가는 세계적인 문학상의 No.1인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오르한 파묵을 저평가했던 과거의  

망상이 떠오르는 동시에 나의 유치했던 독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노벨상 수상 이후로 대형 서점에는 그의 책들이 진열되어있는 코너가 마련되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추리작가가  

아니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은 추리적 요소가 가미된 장편소설이었던  

것이다. 또 한 번 나의 무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Mr. Pamuk. 당신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그리고 작가 앞에서는 염치없겠지만 노벨상 수상 이후의 작품이라는 광고에 혹하여
<순수박물관>을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망설임없이 직접 2권을 공공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여 두 권 모두 완독을 하였다. 
 

 

 그녀를 찾습니다

이번 작품은 2권이며 합친 분량만 따지면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 그리고 파묵은  

작가 생활을 하면서 펴낸 전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간략하다.  

케말이라는 남자가 미모가 출중한 퓌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는 돌연  

말없이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사랑의 열병을 앓게 만들어버린 퓌순을 찾기 위해  

케말은 그녀를 찾기 위해 방황의 시간 속을 헤매다가 결국 퓌순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퓌순은 이미 결혼한 사이였다. 케말은 포기하지 않고 구애 끝에 퓌순과  

재결합하게 되지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인생의 절반을 퓌순에게  

사로잡혔던 시간동안에 간절한 그리움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녀가 사용한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에 모아둔다. 퓌순과의 사랑에 대한 추억이 담긴 수집품들은  

결국 책 제목처럼 ‘순수박물관’을 세우게  되면서 30여년에 걸친 그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사랑에 빠져버린 우리들의 모습 
 

제목과 내용만 봐도 사랑에 관련된 한 남자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인거 같은데.....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케말과 같은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화성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그 사람이 주었거나 혹은 관련된 물건을 

버리기 마련이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추억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케말은 

정 반대이다. 퓌순은 케말이 약혼녀 시벨과 결혼하게 된 시점부터 돌연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케말은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불문하고 단지 퓌순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녀의 

갑작스런 이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결핍과 부재가 낳은 케말의 고독감은  

그녀의 손길을 스쳐간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 방에 가득 채워 넣는다.  

멜하메트 아파트는 케말과 퓌순만을 위한 사랑의 공간이며 유토피아(Utopia)이다. 

하지만 그의 ‘화성인’다운 행동에 대해서 이상하게 본다거나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지 마시라. 케말의 행동은 결국 사랑에 빠져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연인이 되면 꼭 하는 일이 있다.
그들만의 사랑의 징표라고 알릴 수 있는 커플링을 끼고 다니거나,
만난 지 22일이 된 날을 ‘투투데이’, 100일이 되면 그 날에 기념을 하고 선물을  

주고 받는다. 커플들의 이런 행동들은 자신들 간 사랑을 더욱 더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며 서로 간의 사랑의 유대감을 강하게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없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공간에 그녀의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케말은 퓌순과의 사랑을 자신의 인생에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념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부재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수집 행동이 오랜 시간동안 그녀를 찾아다니는
끝에 재결합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만남은 곧 헤어짐의 시작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에도 이별이 있는 법이다. 케말에게는 시벨이라는 약혼녀가 존재하고 있어서  

사실 처음부터 퓌순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 번의 이별을 겪고  

다시 한 번 퓌순과 재결합하게 되지만 교통사로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운명조차도 이들의 행복한 사랑을 오래가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케말의 퓌순에 대한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한 번 사랑에 빠지게 되면 오래갈  

것이라고 행복감에 도취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생각이다. 

더욱이 그런 행복감에 지나치게 빠지다보면 이별 후의 후유증이 오래 남게 된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이성과 헤어지게 되면 아직까지도 상대방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후유증의 영향은 이별 이후에도 그녀가 준 물건들에 대해 더욱 더 애착이  

가게 된다. 그녀에 대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면서 이별을 선택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기도 하며 심지어 다시 재결합하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에게 애걸복걸  

매달리기도 한다. 어쩌면 케말도 퓌순을 사랑했던 기간 동안 지나치게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퓌순이 사라진 뒤에도 그녀의 물건을 수집하는 행동은
이별 뒤에 찾아오는 사랑의 후유증을 보여주고 있다. 
 

 

 순결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 유토피아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작품 속 삼각 갈등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이 ‘순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갈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는 시벨과 퓌순이다.  

하지만 이들의 가치관은 다르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은 서구 문화가 들어오고 있는  

70년대 터키의 여성상을 말해주고 있다. 시벨은 전통적인 여자이다.  

그녀는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케말의 이중적인 사랑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
반면에 퓌순은 예전에 미스코리아 대화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서구적인 여성이다.
케말이 약혼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여
멜하메트 아파트에서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사랑에 대해서는 개방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케말은 여성이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켜야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퓌순과의 사랑은 순결만 따져서는 안 되는 특별한 사랑으로 치부한다.
케말은 시벨과의 말다툼에서 자신의 사랑 관념을 드러나고 있다.

 "순결이 아직도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그렇게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척하는 거야?
  최소한 좀 솔직해졌으면 해.” 
 “모두들 이 문제에 대해선 정직해..... 너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는 게  

  너의 문제야.
  어쩌면 너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유럽적이고 현대적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는 이 나라에서  

  그리고 한 여자에게는 중요해.” 
                                                                                             - 2권 p 234 -

남성들 입장에서는 순결은 참으로 모호하고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워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남성들끼리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기도 한다. 케말처럼 남성들도  

순결 앞에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과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과 사귀기 전에 과거의 남자를 사귀었던 경험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괜히 민감해진다. 그리고 자신과 사귀고 있는 여성이 ‘순결 여(女)’임을 바라는 

남성도 있다. 여성이 과거에 남성과 사귄 경험이 많다고 하면 우리들은 그녀를 안 좋게    

바라보곤 한다. 남성의 심리는 여성은 순결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남성들은 자신들에 대한 순결은 생각해보지 않는다. 남성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어발식 연애를 즐기는 남성도 있으며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여자 친구 몰래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남성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여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 행동에 대해서 동족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자랑하고 다닌다. 무엇보다도 남성들 사이에서는 숫총각을 ‘천연기념물’이라고
비유하여 은근히 성적 비하를 하기도 한다.
결국 남성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점은 남성 지배적인 사고가 자리 잡혀 있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게 순결을 지킬 것임을 강조하는 사랑 방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사랑이며 잘못된 것이다. 
 

 

 남성들이여, 케말을 본받자

개방적인 서구식 문화가 유입되면서 남녀 간의 사랑 관념도 변하고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여성들의 가치관은 천차만별이다. 한 번 사랑한 남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끝까지 정절을 지키는 춘향이식 사랑은 옛 말이다. 2년이라는 세월동안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하고 오면 군 입대 전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던 곰신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도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원 나잇 스탠드도 이성 관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다양해진 만큼 타인의 눈으로 이들의 행동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예민한 성격을 가지다보니 이성의 부재 시 느끼는 고독감을  

더욱 느낄 수밖에 없다. 2년이라는 기간. 누구에게는 짧은 기간이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긴 시간일 수가 있다. 군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가가 정신적으로 힘들다보니 다른  

이성과 눈 맞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자유연애를 즐기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만족함을 

느낀다면야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또 젊음은 질풍노도라는 말이  

있듯이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에 이성에 대해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의 본능이며 젊을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많은 사랑의 경험은 하되 올바른 방식의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연애를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버리듯이 한 달에  

수십 번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랑을 하지 말자. 짧아도 100일이라도 좋다.   

왠만하면 오랜 기간동안 연애를 하자. 자신의 잣대를 벗어나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 더 너그러이 이해하고, 케말처럼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다’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뜨겁게 사랑을 표현해보자. 그러면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케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집착적으로 모으지 말자.  

다만 상대방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을 해서 준 물건들은 무시하지 말자. 세월이 흘러  

그 사람과 헤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가끔  

그 물건들을 보면서 ‘아! 나도 예전에 이런 사랑을 했었구나’하고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남성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기념일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남성들은 기념일 외우는 것이 귀찮고 날짜 자체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여성은 

다르다. 여성은 기념일로 하여금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랑을 더욱 더 특별하게  

여기고 싶어 한다. 또 한편으로는 기념일을 계기로 이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며  

이 사랑이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은 심리도 가지고 있다. 여자 친구와 오래 사귀고 싶다면  

여자 친구에게 애정 표현을 자주 하고 이런 기념일도 챙겨주면서 여자 친구와의 사랑을  

돈독히 하자. 그럼 언젠가는 오랜 열애의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리뷰를 끝맺음을 안도현 님의 시로 장식하겠다. 케말도 이 시에 나오는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도 케말처럼, 아니 이 시에 나오는 연탄재와 같은
사랑을 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보는 것이 어떨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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