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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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만나러 가자.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신다.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학교는 어두워진다. 친구가 없는 다현은 어두운 학교를 좋아한다방과후에 울리는 종소리는 다현을 설레게 한다준후가 다현을 기다린다준후는 결혼한 마흔 다섯 살의 교사다. 다현과 준후는 집에 가지 않는다. 제자와 교사는 남몰래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어둑한 욕정이 솟구치는 사랑의 학교아무도 없는 교실은 두 사람을 위한 침실이 된다하지만 밀회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다현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준후는 다현을 죽이지 않았다. 준후가 경찰에 신고하면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가 들통난다. 혼자 살아남고 싶은 준후는 다현의 시체를 호수에 내다 버린다.


정해연홍학의 자리는 이중으로 구성된 추리소설이다. 본격 추리소설과 도치 서술 추리소설(inverted mystery)이 절묘하게 겹쳐 있다. 본격 추리소설은 탐정이나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본격 추리소설이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도치 서술 추리소설은 범행의 전모가 밝혀지는 과정을 보여준다도치 서술 추리소설은 범인을 공개하면서 시작된다. 독자는 범인과 범행 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 홍학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범인은 다현의 시체를 유기한 준후다하지만 준후는 다현을 살해한 범인이 아니다. 독자와 준후는 진범이 누군지 모른다. 시체 유기죄를 저지른 준후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진범 찾기에 나선다. 그는 다현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탐정과 형사, 범인이 유명한 추리소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범죄 피해자는 간간이 언급되는 단역이다. 죽은 단역은 말이 없다홍학의 자리피해자를 비중 있게 묘사한 추리소설이다. 다현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이자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인간이다. 다현의 삶은 대륙과 같은 사회에 어울리지 못해 따로 떨어진 섬[주]과 같다작가는 사회가 외면한 피해자의 열여덟 인생을 온전하게 복원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진심이 머금은 생전 목소리(“홍학이 있는 네덜란드의 아루바 섬에 같이 가보고 싶어요.”)를 들려준다준후는 자신이 다현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욕정이 가득한 그는 다현의 몸을 껴안을 뿐이다. 다현의 외로운 마음을 보듬지 못한다.


다현이 없는 학교는 교실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감추기에만 급급하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건전한 도덕을 강조(강요)한다. 교장은 학생들이 올바르게 자라는 데 필요한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덕 교육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명예를 중시하는 교장은 학생들의 생각에 도덕을 처발라서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을 가린다. 학교는 죽은 학생을 애도하는 시간을 없앤다. 심지어 죽은 학생을 학교에 다닌 적도 없는 투명한 학생으로 만든다. 비정한 학교는 살기 위해 죽은 학생을 두 번 죽인다



학교 종이 땡땡땡


그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제대로 알자.

살아있는 학생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게 살고 싶은 학교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죽은 학생을 위한 조종(弔鐘)은 누가 울려주나?

 








[]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문장 인간은 완전한 하나의 섬이 아니다를 참고했다. 원문은 던이 병상에 있었을 때 쓴 17번째 기도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기도문에서 가장 유명한 또 하나의 구절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제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에 영감을 주었다. 



 인간의 죽음은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니, 나는 인류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 종은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다(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존 던, 김명복 옮김, 인간은 섬이 아니다: 병의 단계마다 드리는 기도, 나남, 2009,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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