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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가는 대로 - 조지 오웰 시사 에세이 ㅣ 오웰이 쓴 오웰
조지 오웰 지음, 정철.홍지영 옮김 / 빈서재 / 2025년 7월
평점 :
4점 ★★★★ A-
내가 좋아하는 글은 정직하게 쓴 글이다. 정직한 글쓴이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정직한 글은 글쓴이의 정신(얼)이 돋아난 ‘얼글’이다. 얼글은 얼굴의 평안도 방언이다. 글쓴이의 얼굴을 닮은 얼글은 꾸밈새가 없다. 얼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참모습이 보인다. 글쓴이의 얼글을 좋아하면 그 글쓴이의 얼굴을 닮고 싶어진다.
작가의 얼굴은 하나지만, 작가의 얼글은 여러 개(편, 篇)다. 수많은 얼글을 모아 놓은 한 권의 책은 조각무늬 그림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자화상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얼글이 많은 작가다. 오웰이 쓴 얼글은 에세이와 칼럼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오웰의 얼굴은 ‘소설가 오웰’의 모습이다. 얼굴이 유명해서 얼글을 많이 남긴 ‘에세이 작가 겸 칼럼니스트 오웰’의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웰은 1943년 12월 초부터 1947년 4월 초까지 『트리뷴』(Tribune)이라는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칼럼 제목은 ‘As I please’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나 좋을 대로’ 또는 ‘손 가는 대로’다. 오웰의 유명한 에세이는 주로 『트리뷴』에 실린 칼럼이다. 예전에 나온 오웰의 에세이 선집들은 『트리뷴』을 포함한 여러 언론 매체에 발표된 칼럼과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지난달 초에 출간된 《손 가는 대로: 조지 오웰 시사 에세이》는 『트리뷴』의 ‘As I please’에 연재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에세이 선집에 처음 번역된 오웰의 글이 많이 있다.
오웰은 ‘정치적인 글을 예술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주1] ‘소설가 오웰’의 얼굴만 본 독자들은 《동물농장》과 《1984》가 ‘예술이 된 정치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1940년대 초중반 오웰은 ‘소설가 겸 『트리뷴』 전속 칼럼니스트’였다. 이때 당시 오웰은 ‘항상 공격적으로 글을 쓰는’[주2] 칼럼니스트로 유명했다. 하지만 칼럼니스트 오웰은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고 센 척하는 건방진 건공잡이가 아니다. 얼글에 드러난 오웰의 참모습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공개하는 정직한 작가의 얼굴이다. 과거에 자신이 썼던 『트리뷴』 칼럼에 오류가 발견되면, 이를 정정하는 글을 『트리뷴』에 실었다. 오웰은 중국인과 흑인을 경멸하는 감정이 스며든 차별어를 지적하는 칼럼을 썼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첫 소설 《버마 시절》에 있는 차별어를 직접 고쳐 쓴 개정판을 발표했다.
오웰의 정치 칼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쓴 매문(賣文)이 아니다. ‘정치와 예술이 융합한’ 소설을 쓰기 위한 습작이다. 오웰은 짧은 칼럼도 성심껏 썼다. 그는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주3]을 알리려고 했다. 파시즘과 손을 잡은 좌파,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무시하는 작가와 언론인들, 베스트셀러를 과장 광고하는 가식적인 서평만 찾는 출판업계를 낱낱이 공개했다. 오웰의 칼럼은 세상의 모든 불의를 널리 알리는 종이 확성기다.
오웰은 진실을 무시한 채 거짓 선동을 하는 보수주의자,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우리는 가짜 뉴스가 판치고, 누구나 선동꾼이 되기 쉬운 정치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종이 확성기에서 오웰의 정치적인 목소리는 여전히 흘러나온다. 칼럼 속에 살아 있는 오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주1, 3]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이한중 옮김,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25년), 323쪽.
[주2] 조지 오웰, <울워스의 장미> 중에서, 《손 가는 대로》, 53쪽. 오웰의 『트리뷴』 칼럼은 원래 제목이 없다. <울워스의 장미>는 번역자가 붙인 가제목이다. 이 글은 최근에 나온 《나는 왜 쓰는가》 개정판(한겨레출판)에도 수록되었는데, 이 번역본에 나온 가제목은 『트리뷴』의 칼럼 제목인 ‘나 좋을 대로(As I please)’다.
<나 좋을 대로 서평을 쓰는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단어가 ‘카톨릭’이다. 과거에 쓰던 외래어 표기법인데, 1995년에 새로운 외래어 표기법이 확정되면서 ‘가톨릭’으로 변경되었다.
* 28쪽

T. E. 흄이 대략 정립한 아이디어는 특히 20년대와 30년대에 《크라이테리언》을 중심으로 활동한 수많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윈덤 루이스[주4], T. S. 엘리엇, 올더스 헉슬리, 에벌린 워, 그레이엄 그린 등이 모두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 29쪽

‘패배의 규율’을 비통하게 설교하는 페탱,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소렐, 러시아 혁명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베르다예프, 복지 보고서로 유명한 베버리지를 비꼬는 ‘비치코머’[주4], 미 함대의 대포 뒤에서 무저항을 주장하는 올더스 헉슬리 등,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인간 사회가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거부다.
‘비치코머’에 붙인 역자의 각주 22:
Beachcomber. 윈덤 루이스[주4]의 필명.
[주4] 영국에서 태어난 윈덤 루이스라는 이름의 작가가 두 명이다. 한 명은 작가이자 화가로 활동한 퍼시 윈덤 루이스(Percy Wyndham Lewis, 1882~1957)다. 또 다른 한 명은 ‘비치코머’라는 필명의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D. B. 윈덤 루이스(Dominic Bevan Wyndham Lewis, 1891~1969)다.
* 54쪽

대부분 남성 노동자가 하루 담배값으로 1실링 가까이 쓰는 나라에서 장미 나무에 6펜스를 쓰는 사치에 ‘부르주아’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담배값 → 담뱃값
* 56쪽, 각주 15

오웰은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의견을 독립된 에세이로 남겼다. [CW3612] ‘A Prize for Ezra Pound’.[주5]
[주5] ‘A Prize for Ezra Pound’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 봤는데, 찾지 못했다. 일단 번역되지 않은 글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혹시 번역된 글이 있으면 알려 주시라.
오웰은 무솔리니를 노골적으로 찬양한 파운드를 심심찮게 비판했다. 1949년에 오웰은 <에즈라 파운드의 문학상 수상에 대한 의문(The Question of the Pound Award>라는 글도 썼다. 이 글은 오웰의 에세이 선집 《영국식 살인의 쇠퇴》(박경서 옮김, 은행나무, 2014년)에 수록되었다. 문득 ‘A Prize for Ezra Pound’가 <에즈라 파운드의 문학상 수상에 대한 의문>과 비슷한 내용의 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130~131쪽

한 명은 “읽어본 최악의 시”라 단언했고,
다른 비평자는또 다른 평론가는 “헛소리!”라고 한마디 남겼다.
다른 비평자는또 다른 평론가는 → 또 다른 평론가(비평자)는
* 171~172쪽, 각주 125


박상은 역 『야성의 부르짖음 / 하얀 엄니』, 2013. [주6]
[주6] 출판사 이름(동서문화사)이 빠졌다.
* 287쪽


『고문실의 기쁨』[주7] 같은 책을 사려고 헌책방을 돌아다닌다면
매우 불쾌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주7] 이 책의 번역본이 있으며 2018년에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썼다. 존 스웨인, 조석현 옮김, 《고문실의 쾌락: 세계 고문 형벌의 발자취》(자작나무, 2001년, 절판).
* 267, 325, 382,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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