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파이터 -상
방학기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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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보고나서 최배달이란 사람이 궁금했다. 도대체 그는 왜 각 무술의 강자들과 목숨건 싸움을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영화 속에선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순간 답은 얻었지만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그는 정말 사람인가?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술인들과 사투를 벌인걸 운명처럼 여긴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가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때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있지 않은가 싶은 그런 생각들 말이다. 갱, 마피아 들의 총구 앞에서 살아남기도 하고, 미국 FBI 교관이 되기도 하고, 러시아, 프랑스, 태국 등 새로운 무술을 접하기 위해서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은 없다. 세상에 상도는 무수히 많다는 깨달음. 그리고 싸움에 있어서 다음 기회란 절대 없다는 것. 목숨을 건 싸움에서 진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그의 싸움은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은 항상 승리로 나타난다.

흔히 내노라하는 무사들은 필사적이니 죽을 각오가 돼 있다느니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까린다. 그러나 칼싸움에 임박해서 필사적이 되는 건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서는 누군들 죽을 각오를 안하랴. 문제는 기필코 이긴다는 신념을 갖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중권 37쪽)

승리를 꿈꾼다고 누구나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목숨을 걸고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싸운다고 해서 모두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배달은 결코 패한 적이 없다. 무엇이 그를 백전불패의 사나이로 만들었을까? 소설 속에선 수많은 일화들이 등장한다. 마치 장자 책을 읽듯 나타나는 우화들 속엔 인생의 교훈들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하는 정신. 외부의 어떤 조건하에서도 변하지 않는 신념. 그것이 그를 승리의 사나이로 만들었지 않은가 싶다.

소설 속에선 역도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사업가로서는 뛰어나지만 무술인으로서는 그다지 훌륭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그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의 실존인물에 대한 영화들이 많이 그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속에 비쳐진 인물들을 곧이 곧대로 그냥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갇게 만든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단련. 천일간의 단과 만일간의 련을 통한 성장. 또 하나의 삶의 자세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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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의 여인에 대한 찬양
스티븐 비진체이 지음, 윤희기 옮김 / 해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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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학창시절 소위 빨간책이라 불렸던 음란서적들.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흥분에 들떠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게 했던 그 끈적끈적한 글들.

<연상의 여인에 대한 찬양>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그걸 읽은 나는 빨간 소설이 떠올랐다. 두 책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우스갯소리만큼이나 이 잘 쓰여진 책과 음란 서적간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 것인가?

작가는 전쟁으로 인해 어렸을적 평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전쟁 전엔 수사들에 의해 경건한 삶을 살았다면 전쟁 와중엔 미군 캠프에 기생하면서 헝가리 여인과 미군과의 뚜쟁이 역할을 했던 어린아이.

종교적 배경하에서 성장하면서 내 가슴에 박힌 것은 성에 관한 죄의식이었다.(중략) 그렇게 많은 시체를 보았으니 살아 있는 몸뚱어리에 대한 자기 욕망의 억제나 금지를 그냥 쉽게 상실해 버린 것이다. (33쪽)

극과 극의 경험을 한 아이는 성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자기 욕망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또 하나의 자아, 즉 죄의식으로 가득찬 자아와 자꾸만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른들의 종교적 도덕성을 거부했다.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본능에 반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취한 행동인데도 그것 때문에 죄의식에 눌려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240쪽)

그래서 그가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보다 연상의 여인들이다.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의 첫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나 서툰 연애로 인한 갈등이 없이 편안하게 육체적 정신적 탐닉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많은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라 하더라도 그에게선 종교적 도덕성의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여자에 대한 탐닉은 돈주앙과는 꼭 닮아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여자를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면 또 실제로도 그렇게 능력있는(?) 남자도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있어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육체적인 것임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그런것. 편안함을 주는 그 무엇. 그러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또 한 대상만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우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 성격과도 상관없이, 우리는 사랑이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중략) 궁극적인 공허함이 늘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고, 우리는 늘 불안 속에 흔들린다. 우리는 우리 삶에도 솔직하지 못하다. (241쪽)

그러니 우린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불안과 공허함을 벗어던지고 영원성에 대한 강박관념과 죄의식을 떨쳐내고서 우리의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 감정의 물결이란 작가의 말처럼 연상의 경험많은 사람들이 잘 헤아려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금기라는 가상의 선에 갇혀 살지 말것이며 그 선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내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영원이 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 세상은 이미 영원하지 않으니, 나의 삶 또한 영원하지 않으니,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즐길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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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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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또는 구분짓는 것은 무엇일까? 합리성과 감성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기억과 마음, 의지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령이나 귀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면 그런 책은 철학책이거나 종교관련 서적일게다.

불확적성의 원리,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뇌의 역할 등등이 일상생활에선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위의 질문들을 해설해준다면 그 책은 과학서적일테다.

그런데 이 모든 질문들과 답변이 한 책에 뭉뚱그려져 있다면, 아니 뭉뚱그려졌다고 표현해서는 안될 것 같다. 나름대로의 일관적 논리성을 바탕으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 책의 성격 또는 장르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추리소설이다.

전혀 연관되어져 있지 않을 것 같은 사유들이 전체적으로 얽히고 설켜서 살인과 실종이라는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로 작용하게 된다. 더군다나 귀신이나 영, 도깨비에 대한 해설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 내가 지금 당장 한밤중 귀신을 만난다면 그것이 나의 가상현실임을 그러나 또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했던 무의식의 그 무엇이 눈 앞에 나타나 진짜 현실로 된 것임을 알게 될듯 싶다. 그래서 공포감에 사로잡혀 졸도하거나 귀신을 물리치겠다며 악다구니를 쓰지는 않을게다.

꿈 속에서 눌려본 가위, 그 끔찍한 기억 또한 이젠 먼 과거의 일일뿐 앞으로는 아마도 그런 가위에 눌린 삶을 살지는 않을거라 조금은 자신해본다.

암튼 밀실에서 사라진 건장한 남자,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소설가와 음양사, 탐정의 뚜렷한 캐릭터가 소설의 흡인력을 높여준다. 맨 처음 소개했던 여러가지 이론에 대한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단초들을 그 이론들이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냥 책속의 검은 잉크로서 존해했던 그 이론들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다만 사건의 해결이 어떻게 보면 황당한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한듯한 조금은 모순적인 결말로 치달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중간 중간 계속해서 단서를 제공해준 작가의 배려 덕택에 설마 이런 결말은 아니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게 풀어낸 소설의 구조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특히 탐정으로 나온 캐릭터의 신비한 능력은 실은 신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사 우리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도록 만든다. 타인의 과거, 모든 타인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가 서로 혼재해 있는 현실이라는 공간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고받는다는 것, 다만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할 뿐,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놓았을땐 나는 알몸이 되고 상대방 또한 알몸이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함과 반대로 감정의 풍부함을 갖을 수 있다는 희망이 공존하는 것. 누가 나도 모르는 과거를 안다는 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영화 속에서도 이런 캐릭터들은 많이 등장한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속의 인디언들이 이런 능력을 많이 지니고 있다)

아무튼 수학마냥 실제 생활과 아무 상관이 없는 학문이라 여겨졌던 많은 이론들이 이 소설 속에선 현실 속에서 힘을 갖는다. 그 재미 하나만으로도 굉장한데 추리를 쫓아가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기에 읽는 내내 즐거웠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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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8-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하루살이 2004-08-2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예!
 
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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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책은 <두려움과 떨림>이후 두번째다. 첫번째로 봤던 두려움과 떨림에 대한 인상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걸로 보아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않았던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의 건강법>을 보게된 사연은 아무래도 알라딘의 광고탓(?)이지 않나 싶다. 물론 알라딘 이외에도 이 책에 대한 소개는 그야말로 칭찬 일색이었으니...

어쨌든 큰 기대를 않고 보게 된 책을 정말 순식간에 읽어제쳤다. 등장 인물들간의 대화가 워낙 재미있을뿐더러 추리소설마냥 끝을 맺어가는 사건의 반전은 손에서 책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책의 본래 목적이 프랑스 현대문학의 조류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프랑스 문학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읽힐 수 있는 재기발랄함을 곳곳에서 느낀다.

특히나 개인적으론 타슈라는 작가의 독설에 '죽음'을 맞이하는 기자들의 모습에 통쾌함을 맛보고, 또다시 기자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작가 자신이 남다른 기자 니나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극한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낀다. 독설이란 분명 상대방을 죽이는 무서운 말이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선 그저 오락속의 전투일 뿐이다. 독설이 더 강렬하면 강렬할 수록 더욱 더 강한 무기를 가지고 업그레이드 되고 있는 오락 속 캐릭터마냥 흥미를 더해준다. 더군다나 그 독설이란 것이 상대방의 허위라는 방패를 깨뜨리고 있을때는 더욱 그렇다.

인간을 미워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오. 내 생각에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허위요.(P81)

작가의 말에 동감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허위라는 것 속에 감싸여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더욱 이 책의 독설과 궤변들이 재미있다. 하지만 책의 대화가 모두 독설과 궤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다. 니나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진정 책을 읽었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해야 한다. 책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차이만큼의 변화 또한 서로간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번 웃거나 또는 울기 위해 읽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외로 치자. 이미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있어야 하겠지만. 만약 소설 속 타슈라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면 독자는 구토를 일으키거나 인간에 대해 혐오하거나, 등등... 작가를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을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면서 읽은 체하고, 아는 체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같은 시대엔 더욱 이렇게 있는척, 아는척 하기가 편하다. 요약되어 있는 정보들이 자판만 몇번 두드리면 눈앞에 펼쳐지니까 말이다. 그런 허위의 벽은 독설에 의해 무참히 깨진다. 그리고 깨어져 마땅하다.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허위의 벽이 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요, 어떻게 하면 허위라는 벽을 새롭게 만들지 않을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있는 '척'하고)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쾌한 독설로 가득찬 재미난 책임에는 틀림없다.

천재인마냥 자신이 최고인마냥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마냥 생각한 것들이 자신에게 직접 닥친 일들로 인해 산산히 부서져버리는 경험.

때로는 폐허 속에서 꽃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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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표단편선 2
이노우에 야스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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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인간의 양>을 읽다보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들게 된다. 그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틱낫한 스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달라이 라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 부처님 또는 공자님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노자나 장자, 맑스, 알튀세르 등등의 철학자들은 또? 네루다, 도스토 예프스키, 김용택 시인, 법정 스님이라면 달랐을까?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과연 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것인지를 무한히 상상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맨 뒷좌석 미군들이 앉아있고 그 옆에 한 아가씨가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앉는다. 시끄럽다. 미군들과 여자 사이에 실강이가 오간다. 그러던 중 그 실강이에 우연히 내가 끼여들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사건들. 미군들은 나를 좌석들 사이 통로에서 엉덩이를 까발리게 만든다. 나만이 아니다. 그들의 폭력적인 위압에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내 놓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안도의 함숨을 내쉬며 힐끗힐끗 쳐다본다. 자존심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미군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난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목적지다. 나도 내린다. 그 때 이 광격을 목격했던 선생 한명이 따라 내린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선다. 이 사건을 이대로 묵과해선 안된단다. 경찰서로 간다. 그러나 경찰들은 웃음만 흘릴뿐이다. 미군과 관련된 사건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계속 웃기만 한다. 난 끝내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히 잠을 청하는 것이다.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온다.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그렇다. 칼을 들고 서 있는 나보다 힘이 센 사람앞에서 난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다. 선생도 그렇다. 그들 앞에선 한마디 말도 못하면서 나중에서야 지식인의 자존심을 내걸며 사건을 해결하잔다. 비겁하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비겁할 것임을 안다. 20대라면 달랐을 것이라며 허풍도 치지 않는다. 그래도 10대였다면 혹시 모르겠다라고 위안을 삼지도 않는다. 난 그런 비겁자일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저항해봤자 개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감히 반항은 꿈도 못꿀것임을 잘 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혹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일절 갖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미군 8놈과(6이었던가?) 덤비겠다고 모두가 일심동체로 일어서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그럼 그렇다고 치자. 모두가 어찌하다보니 그들과 맞섰다고 하자. 자, 이젠 어떡하지. 그들이 칼을 휘두르는 앞으로 내가 달려들 수 있을까?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힘을 갖고 있을 때 그 힘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 용기인가? 아마 힘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행동은 겸손이나 인내이지 용기는 아닐 것이다. 부닥쳤을 때 깨질 수도 있음을 알지만 부닥치는 것, 잘못하면 만용이다. 만용과 용기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깨질 줄 알면서도 꼭 부닥쳐야 할 필요가 있을때 부닥쳐보는 것, 그것이 용기인가?

세상은 나에게 타협만을 가르쳤다. 개울 속의 돌맹이처럼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용기는 동화속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_역사 속의 영웅들을 떠올려보라고? 그래서 그들은 영웅이지 않은가? 나같은 하찮은(?)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 되겠는가? 그래서 조용히 있고싶다. 나라도 그저 그렇게 멍청히 당했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당한 모멸감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인가? 그것이 끝내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이라면...

비겁자도 괴롭다. 문득 문득 잠이 들다가도 떠오를 그 사건들. 시간이 약이 되지 못할 악몽들. 나를 짓누를 그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올가미에 갇힌 삶. 어느 순간 자책감에 무너져내릴 나를 바라본다는 것.

비겁자도 괴로운 것이다. 왜 나에게 용기를 주지 않은 것입니까? 외쳤봤자 돌아오는건 자괴감일 뿐이다. 용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키워낼 방법이라도 가르쳐주셔야죠.

그래서 비겁자도 괴롭습니다. 비겁자로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슬픕니다. 비겁자로서 살지 않아도 될 그런 세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겁자이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데는 분명 한 몫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비겁자를 만들지 않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겁한 자의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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