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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는 모든 책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제 평생의 화두, '인간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에요. 그 물음 앞에서 제가 유일하게 발견했던 것은, 낯선 존재, 모르는 존재, 두려운 존재, 즉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인간의 성장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정성입니다. 이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곁'을 만들어냈을 때에만, 이 망해버린 세상을 그나마 저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단속사회> 엄기호 강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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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의 출현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이기심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이기심의 바탕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욕망은 나와 다른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울면 엄마가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멈춘다. 아기는 아직 느끼기만 할 뿐 움직일 수 없으므로, 아기의 뇌에서 일어나는 감각입력에 맞춰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주게 되고, 아기는 이럴 때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 주지 않는 때가 온다. 동생이 생기거나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느라 아기가 원하는 만큼 엄마가 충분히 운동출력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아기는 엄마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에 따라 욕망이 출현한다. 욕망의 취약성은 바로 조정할 수 없는 타인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욕망은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따르는 이기심

현재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난 욕망과 이기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 예로 주식시장을 보면 개인이 컴퓨터 앞에 앉아 클릭 하나로 사고팔기를 할 수 있는데, 실시간으로 가격 동향이 보이기 때문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저점에 주식을 사고 고점에 팔아 그 차액을 취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자신이 돈을 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단지 제로섬 게임으로, 개인들 간에 소득이 옮겨진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 돈을 벌면 다른 누군가는 잃게 마련이다. 만약 이런 행위를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한다면, 그래서 상대방의 클릭 한 번에 내 주머니에 있던 돈이 상대방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거나 또는 그 반대 상황이라고 해도 이를 계속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식 말고도 현대사회에는 익명의 상대를 대상으로 죄책감 없이 이기심을 발휘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실물가치를 몇 배로 뻥튀기 하다가 터져버린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이 극도의 버블을 만든 이 상황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이타적 속성은 혈연 선택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

가장 이타적인 생명체로 꿀벌이나 개미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여왕벌의 알을 부화시키고, 자기는 짝짓기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꿀을 모으는 일벌의 부지런함이야말로 대단히 이타적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일벌의 행위를 보면 자신과 75%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여왕벌과,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여왕벌의 알을 돌보는 것이 무조건 희생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꿀벌의 사회는 유전자 보존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짜인 이기적 체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이기심은 유전자의 조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개체의 생존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개체의 생식은 50%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행위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 보존을 목표로 진화해 왔다. 인간도 유전자를 운반하는 생명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이기심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한 자식과 형제를 보살피고, 25%의 유전자를 공유한 조카와 손자를 돕는 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후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유전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타심을 발휘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청년이 구해내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협력을 선택하는 이유

침팬지 집단에서는 서로 털을 다듬어주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또한 침팬지들 사이에서는 한 녀석이 먹이를 달라고 하면 다른 녀석이 자기가 먹던 먹이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나누어주는 먹이 공유 현상도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 먼저 A가 B의 털을 다듬어주면 B가 A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눠줄 가능성이 높다. 반면 A가 B의 털을 다듬어줬는데 B가 A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까지 하면 A는 거절한다. ‘상대방이 나를 도와준 적이 있을 때만 상대를 도울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무임승차행위(주지는 않고 받기만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일삼는 개체는 생존하기 힘들다.

인간의 경우, 동네 과일가게 주인들은 단골손님에게 종종 ‘오늘은 사과가 별로 안 좋으니 다른 과일로 들여가세요’라고 정보를 준다. 이들은 왜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을 고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일까? 지금 당장 속여서 단기적 이익을 내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행동함으로써 앞으로의 장기적인 거래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고객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웃이 그 과일가게에서 횡포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고객들이 나서서 과일가게에 대한 정보를 다수와 공유하고 거래를 끊는 방식으로 보복을 할 수도 있다.

서로 반복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그리고 단위가 소규모일수록 무임승차행위는 장기적 거래에 악영향을 미쳐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눈앞의 이익보다 훗날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을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타심이 경쟁력이다

이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이득을 더 많이 취하면 이기적인 행동이 이타적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는 이타적인 공동체가 이기적인 공동체보다 전쟁이나 혹독한 환경에서 더 잘 생존한다. 즉 집단 내에서 개인 선택 과정은 이타적인 사람들을 ‘추려내지만’ 집단 선택 과정에서는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집단이 ‘추려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론상으로는 이타적인 집단이 살아남지만, 실제로는 집단 내에서 이타적인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의 전략을 배워나가는 속도가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공동체가 소멸하는 속도보다 빠른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선택과 개인이 원하는 선택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원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속도를 낮추고 이타적인 집단의 생존력을 키워주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제도’이다. 인간 사회가 다른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법 외에도 인간사회에는 관습이나 규범 같은 규칙이 존재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공공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동일한 서비스를 얻는 대가로 더 많은 부분을 부담해야 하는 고소득층의 저항이 거세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양극화가 심한 사회는 고소득층을 위한 고급 사설 서비스와 저소득층을 위한 질 낮은 공공 서비스가 특징이다. 반면 소득 격차가 크지 않고 중산층이 두터운 지역의 경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공재 서비스 공급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단 선택에 유리한 방향은 제도를 통한 소득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 선택은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얻는 사람의 전략을 따라가게 된다. 따라서 집단에 필요한 이타적 인간의 감소 속도가 소득차에 의해 탄력을 받아 더 많은 소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일방통행하게 된다. 그래서 IMF 위기와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소득의 양극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소득 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성장한 세대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극화 속에서도 사회는 여전히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고자 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비교적 이타적인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에게서 새로운 이타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이타적 인간

거대 도시 사회 속에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복적인 거래를 하면서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이익이 되는 상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성찰하고 공동체의 미덕을 살려내기 위한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주변 마을 같은 예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안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타적인 성향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타적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을 올린 사람의 계좌로 네티즌들이 십시일반 송금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인터넷 상에서 모금운동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전에는 정부나 공공 단체에서 수재의연금 같은 성금을 모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그 모금액이 엉뚱하게 쓰이거나,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절차가 복잡하여 정작 필요한 때에 받지 못하는 사례를 접한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욕망에 따른 이기심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타적 대안을 찾고 그것을 제도화 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유전자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글·강윤정 chiw55@brainmedia.co.kr
도움 받은 책·《욕망의 연금술사 뇌》 모기 겐이치로,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슨,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춤추는 뇌》 김종성

 

 

출처 : 브레인미디어 www.brai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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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은 일본인 스승 오카지마 긴지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고 제자들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 간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돼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꾸어야 한다.”

10년 동안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자세로 한 군데 미쳐야 진정한 프로, 즉 ‘아웃라이어’가 될 수 있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책이 떠오르는군요. 글래드웰에 따르면 아웃라이어는 천재성이 아니라 시운과 환경이 만듭니다. 석주명도 교육열 높은 어머니가 있었기에, 윤치호와 오카지마 긴지 등의 스승을 만났기에 나비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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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웃라이어를 만든다. 비틀스는 독일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하루 8시간씩 연주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곡들과 새 연주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고,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하루 종일 컴퓨터와 놀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역사를 바꾸었다. 근무시간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절대 프로가 될 수가 없다.

○성공에 있어 IQ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설득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실용지능’이다. IQ 190인 크리스토퍼 랭건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농장에서 외톨이로 사는 반면, 성공한 사람들은 남을 설득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능력이 없다고, 불운하다고 자신의 처지를 쉽게 비관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 탁월하게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시운과 교육환경에 따라 1만 시간을 한 군데에 몰입한 사람일 따름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한다면 언젠가 성공은 보장된다.

○사업이나 직업에서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쌓이면 성과가 나올 가능성은 커진다.

○자녀에게는 커다란 꿈을 심어주고 유행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1955년 안팎, 기업가는 1835년, 변호사는 1930년에 태어난 사람이 엄청난 대가가 됐다. 시대의 흐름에 맞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심과 잣대에 따라 자녀를 억지 교육시키면 이 흐름에 동승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릴 수도 있다.

○역으로 대가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한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아웃라이어는 사람들이 인식하기 어려운 시대환경과 교육환경 등에 따라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신의 천재성이나 노력이 성공의 전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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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간단한 놀이에 관한 실험을 벌였다.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 각각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주었다.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25개의 노래가 적힌 목록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듣는 사람은 두드리는 사림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노래의 제목을 맞혀야 했다. 120개의 노래 중 듣는 사람들은 겨우 2.5퍼센트. 즉 단 세개의 노래밖에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험 결과가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듣는 사람이 노래의 제목을 예측하기 전에 두드리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짐작해보라고 했더니 50퍼센트라고 대답했다.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확률은 마흔 번 가운데 한 번에 불과했음에도 가능성을 반반으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드리는 테이블을 두드릴 때 머릿속에서 노랫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것은 조금 이상한 모스부호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딱딱 소리뿐이다.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멜로디를 알아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일반 정보(노래의 제목)를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테이블을 두드릴 때 그들은 맞은편에 앉은 듣는 사람이 음악이 아닌 단순하고 단절된 몇개의 타격음밖에 듣지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다. 일단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듣는 사람의 심정을 두번 다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의 저주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아예 일찌감치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변형하는 것이다.

<스틱>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웅진 윙스, 2007.6 -중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지식의 저주에 휩싸여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상대방의 몰이해만을 서로 이야기하는 세상. 자신에게 눈을 돌려 혹시 자신이 지식의 저주에 씌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상대방을 무식하다고 깔보고 또는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꼭 지식의 저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식의 저주로부터 탈출하듯 상대방과 접점을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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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cine21.com/eshangel/52489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개봉되었는데, 100편 이상을 연출한 또 다른 영화 감독 정보가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2003.2.6자로 씨네21에 게재된 재미있는 기사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가 눈에 띄었다.

기사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업로드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기사들만 발췌하여 지금에는 맞지 않는 내용엔 약간의 수정을 하여 정리한다.


제목이 긴 한국 영화
(1위의 영화는 그 제목을 알고 있지만 역시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는 늘 어렵다. 2위의 '홍반장'은 당시 기사에는 없던 영화인데, 이제 새로이 2위에 오르게 되었다)

1.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2000)
(남기웅 감독의 디지털영화. 27자)
2.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2003)
(강석범 감독, 26자)
3.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1974)
(장년층들의 이름 외우기 놀잇감이었던 김영효 감독의 1974년작, 24자)
4.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2002)
(이무영 감독, 20자)
5.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 (1991, 강우석 감독),
따봉수사대-밥풀떼기 형사와 전봇대 형사 (1991, 신우철 감독),
내가 성에 관해 알고 있는 몇가지 이야기들 (1933, 양태화 감독).


제목이 한 글자인 한국 영화
(기억하기에 편해서 좋지만, 이거 제목만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려면 애로가 크다)

<돈>(1958), <흙>(1960), <딸>(1960), <쌀>(1963), <한>(1967), <꿈>(1967), <산>(1967), <나>(1971), <애>(1971), <왜>(1971), <문>(1977), <불>(1978), <요>(1979), <형>(1984), <태>(1985), <뽕>(1985), <단>(1986), <덫>(1987), <업>(1988), <떡>(1988), <팁>(1988), <꿈>(1990), <무>(1990), <뻘>(1991), <맨>(1995), <큐>(1996), <짱>(1998), <까>(1998), <찜>(1998), <섬>(1999), <정> (1999), <폰>(2002) 등.


제목이 긴 외국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의 원제목이 제일 긴 줄 알았는데 더 긴 영화도 꽤 있었네. 지난 해 개봉한 '보랏'의 원제목도 긴 축에 든다. 근데 이들 영화는 어쩌자고 다들 이리 길게 제목을 지었을까? 흥행에도 별로 안좋을텐데..)

1. Night of the Day of the Dawn of the Son of the Bride of the Return of the Revenge of the Terror of the Attack of the Evil, Mutant, Alien, Flesh Eating, Hellbound, Zombified Living Dead Part 2: In Shocking 2-D (1991)
2. The Fable of the Kid Who Shifted His Ideals to Golf and Finally Became a Baseball Fan and Took the Only Known Cure (1916)
3. Homework, or How Pornography Saved the Split Family from Boredom and Improved their Financial Situation (1990)
4. The Lemon Grove Kids Meet the Green Grasshopper and the Vampire Lady from Outer Space (1965)
5.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1964)
6. Revelations of a Sex Maniac to the Head of the 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1972)
7. The Incredibly Strange Creatures Who Stopped Living and Became Mixed-Up Zombies!!? (1967)
8. Borat: Cultural Learnings of America for Make Benefit Glorious Nation of Kazakhstan (2006)
9. Can Hieronymus Merkin Ever Forget Mercy Humppe and Find True Happiness? (1969)
10. Celsius 41.11: The Temperature at Which the Brain... Begins to Die (2004)

가장 짧은 제목의 외국 영화
(26개 알파벳 중 한 글자의 영화 제목이 없는 알파벳은 몇 개 안된다)

파이(원주율 기호) (1998)
A (1964), B (1969) 등 알파벳 문자 다수.


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재, 소설, 캐릭터

단연 남원골의 절세미인 춘향이었다. 1935년 문예봉과 한일송이 출연한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이 발표된 이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모두 13번에 걸쳐 극영화로 제작됐다. 1999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성춘향전>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탈선춘향전>(1960)이나 <그 후의 이도령>(1936) 같은 ‘유사작’도 발표됐다. 멜로드라마에 민족정서를 고루 녹인 이 고대소설이 그동안 가장 각광받았는다는 사실은 1961년 극적으로 표출된다. 당시 설 극장가에서 김지미를 내세운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최은희 주연, 신상옥 연출의 <성춘향>이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펼친 것. 결과는 신상옥의 압승이었지만, 사실 주가가 오른 것은 춘향 캐릭터였다. 당시 춘향을 연기한다는 것은 최고의 여배우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지미, 최은희 외에도 홍세미, 문희, 장미희 등 그동안의 춘향의 면면을 봐도 이는 입증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소재
(아래의 수치는 기사 당시에도 정확할 수 없었겠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또 변동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 자체는 수긍이 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무려 359편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중에서도 <햄릿>이 93편으로 수위를 차지한다. 스크린을 제패한 캐릭터는 아서 코난 도일 경이 창조한 추리의 대가 셜록 홈즈. 1900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225편의 영화로 제작됐으며, 각각 2명의 흑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88명의 배우가 홈즈를 연기했다.


개봉관에서 가장 오랜 기간 상영된 영화
('서편제'가 6개월이 넘게 극장에 걸려 있었던 영화였다니 새삼 더 애착이 느껴진다. 당시 나도 단성사에서 관람한 그 관객의 1인이었다. 인도 영화 '용감한 자가 신부를 얻는다'라는 영화는 10년 넘게 한 극장에서 상영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 영화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정말 부러운 일이다)

서편제 (1993): 194일, 단관 최다 관객동원(84만6427명)
<서편제>의 성공은 일종의 신화다. <쉬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영화 흥행의 한계치’라는 12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 1개관에서 개봉하던 당시 가장 오랫동안 상영되며,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사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큰 수익을 올렸던 태흥영화는 이 영화에서 상업적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임권택 감독의 예술성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1993년 3월10일 첫 기자시사회가 열리자 태흥 모든 직원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영화를 본 기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에 또 칭찬을 했고, 다음날 열린 평론가 시사회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쏟아졌다. 태흥은 빗발치는 요청 때문에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연일 시사회를 열며 개봉일인 4월10일의 ‘대박’을 기대했다. 아뿔싸, 개봉관인 단성사의 첫날 결과는 객석점유율 60%대인 3102명이었다. 일요일에는 3500명 정도가 들었지만, 월요일이 되자 1897명으로 뚝 떨어졌다. 기준 스코어 아래를 맴돌면 영화 간판을 내려야 했던 상황이었기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그러자 이 영화를 칭찬하는 기사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주말 스코어는 3847명과 3929명. 첫주보다 월등히 올라간 결과였다. 문화부 장관이 봤다는 소식과 함께 관객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개봉한 지 12일째 되는 4월21일 4280명의 관객이 극장에 몰린 것이다. 그것도 금요일에 말이다. 결국 세 번째 주말에는 6천명에 가까운 관객이 몰리며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서편제>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매진행렬은 주말에 이어 평일로 이어졌고, 오전 9시대에 ‘특회’를 빼도 전회 매진은 여전했다. 5월1일에는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시사했고, 그동안 극장에서 보이지 않던 중년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서편제>를 모르면 대화에서 소외될 지경이었으니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도 홀로 객석을 차지하곤 했다. 전회 매진 행진은 8월24일까지 계속됐고,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매진을 기록하며 10월22일 단성사에서 종영할 때까지 84만6천여명을 동원했다. 단성사에서는 막을 내렸지만, 10월 초 씨네하우스 등 8개관에서 확대개봉했기 때문에 12월 말까지 12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게 된다. 비공인 기록을 추가한다면 <서편제>는 입소문으로 서울 100만 기록을 깬 최초의 영화이며, 관람객 평균 연령대가 가장 높은 영화였으며, 가장 성공한 판소리영화.


한국영화가 가장 사랑한 작가는 이광수, 최인호

간발의 차로 이광수가 최인호를 앞섰다. 지금까지 이광수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은 21번. 1925년 이경손 감독이 <개척자>를 스크린에 옮긴 이후 김기영, 전창근, 강대진 감독들이 뒤를 이었다. 1960∼70년대 여러 감독들이 다들 한번씩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무래도 문예영화 제작 붐과 관련이 있다. 14편 중 특히 <무정> <유정> <사랑> <흙> 등은 2번씩 영화화됐고, <꿈>은 배창호 감독이 1번, 신상옥 감독이 2번 모두 3번씩이나 영화화됐다. 하지만 이광수보다 최인호의 작품이 영화화된 게 하나 더 많다. 최인호는 <바보들의 행진> <적도의 꽃> <겨울나그네> <황진이> 등 15편이, 21번 영화화됐다. 필모그래피 중 배창호 감독과의 작업이 압도적으로 많다. 1976년 <걷지말고 뛰어라>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세계 영화가 가장 사랑한 작가
(에드거 월러스는 누구지?)

의심의 여지 없이 셰익스피어.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적어도 179편 이상의 영화에 원작을 제공한 영국 작가 에드거 월러스 역시 ’20세기가 가장 사랑한 작가’라 할 만하다. 그의 생전에만 50편 이상이 영화화되면서 저작권료와 각본, 연출로 돈을 벌었음에도 월러스가 31만5천달러의 빚을 안고 죽은 사실은 미스테리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 작가나 지망생이라면 기억해 둬야 할 이름이고, 작품 편수이겠다)

정종화씨에 따르면 유한철씨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아낌없이 주련다> 등 모두 250편 넘는 작품을 썼다.


한국 최초의 만화 영화

1926년 이필우 감독의 <멍텅구리>. 1924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심선 노수현 화백의 네컷 만화 <멍텅구리>를 각색해 만든 코미디영화.


영화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한 왕

정종화씨는 <대원군>(1968) 등 24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고종 황제라고 밝힌다. 왕관만 따지면 50편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여왕. 왕으로는 35편에 등장한 헨리 8세.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 역사적 인물은 프랑스의 황제였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이고 163편에 등장했다고 하며,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통령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1965)이고 128편의 영화에 등장했다고 한다- 여기서의 작품 편수는 꽤 오래 전의 어느 시점의 수치로서 지금에는 변동되어 수치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최초의 키스신
(기억해 둘만한 영화다)

<운명의 손>(1954):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러브신이라 해봤자 하염없이 바라보다 덥석 두손을 마주 잡거나 와락 껴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외국 배우들이야 ‘필’만 꽂히면 입술을 부벼댔지만서도, 이를 본 관객이 금발의 연인들을 제몸처럼 여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운명의 손>이 건드린 표현 금단의 영역은, 그래서 ‘조선’ 관객에겐 달콤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5초가량 슬쩍 입을 맞댄 것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한형모 감독의 ‘결단’이 뜻대로 진행되기 위해선 거추장스러운 몇 가지 의례가 요구됐다. 일단 카바레 마담 정애 역의 윤인자와 국군 대위 영철 역의 이향의 키스 도중 ‘부적절한’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차단해야 했다. 두 사람의 입술에 셀룰로이드 재질의 비닐(담뱃갑의 비닐을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을 입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질병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일석이조. 이와 관련해 사회적으로 질병예방 체계가 허술했던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책이라는 분석도 있다. 처음 시도하는 키스이니만큼 당시 제작진은 만반의 준비를 기했는데, 윤인자의 남편을 세트로 데려와 그의 입회하에 촬영을 진행한 것도 그중 하나다(방송작가였던 남편이 고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아래 에피소드와 뒤섞여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적인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봉 이전에는 기본적인 설정 이외에 영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등 비밀 마케팅으로 일관했다. 효력은 상당했다. 12월14일, 서울 스카라극장의 전신이었던 수도극장에서 개봉해서 5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영화들이 키스장면을 끼워넣는 것은 보지 않아도 당연한 일. 하지만 잡음도 없지 않았다. 첫 번째 키스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이향은 <인생역마차>(1956) 촬영 도중 노경희와의 키스장면이 신문광고에 버젓이 등장하는 바람에 몸을 사려야 했다. 노경희의 남편이자 배우였던 전택이가 주머니 칼을 소지하고 그를 찾아 충무로를 헤맸기 때문. 결국 감독이었던 김성민이 살벌한 협상테이블을 중재한 뒤에야 촬영이 재개될 수 있었다 한다. 이러했으니 여배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강대진 감독은 <외나무 다리>(1962)를 두고, “주연배우였던 김지미와 최무룡이 당시 열애 중이라 실감나는 장면을 뽑아낼 수 있었다”며 회고하기도 했다.

세계 영화 사상 최초의 키스신으로 기록된 장면은 1896년 연극 <미망인 존스>에서 필름으로 찍은 메이 어윈과 존 라이스의 입맞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이 장면은, 당대의 저널 <더 채프 북>에서 "절대적으로 역겹다"는 평을 듣기도.


한국 최초의 누드 <전후파>(1957)

윤인자
최근작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호스티스 역을 맡은 윤인자의 목욕장면. 1950년대 윤인자는 국내 여배우 중엔 광범위한 팬을 확보하고 있던 마릴린 먼로의 독주에 제동을 걸 만한 이로 손꼽혔다. 같은 해에 선보인 <그 여자의 일생>(1957)에서도 윤인자의 샤워장면을 볼 수 있는데, 실제 이 장면 촬영시엔 두 번째 남편이었던 고설봉씨와의 협의 끝에 감독과 촬영, 조명감독만 입장이 가능하도록 세트장 출입을 통제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그녀를 훔쳐볼 순 없었다. 큰 수건으로 맨몸을 둘둘 말았기 때문이다. 한때 세속의 때를 벗기 위해 출가하기도 했던 윤인자는 83년 환속한 뒤 연기를 계속했다. 쉽사리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 노스님을 눈여겨볼 것.


가장 많은 작품에서 주연한 배우
(주연급은 아니지만 최다 출연 배우는 '최남현'으로 700 여편에 출연했다는 정보도 있다. 5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한 여자 배우가 1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가장 부러운 일이다)

신성일
최근작 : 태풍
한국: 신성일 (536편)- 한해에 가장 많은 영화에서 주연한 배우(45편, 1968년), 가장 많은 여자배우를 상대한 남자배우(104명)

한국영화 80여년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다. 신필림의 오디션에 합격한 뒤 강신영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뉴페이스 넘버원’이란 뜻의 신성일로 다시 태어난 그의 출발은 짐작과 달리 초라했다. 평소엔 사무실에서 전화수 역할이나 복사일 등을 했고, 영화에 출연한다 해도 단역만을 전전했다. 이강천 감독의 <사랑의 역사>에선 육체파 배우 김혜정의 ‘몸받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가 1957년 <로맨스 빠빠>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화를 잘 받아서였다. 평소 전화 심부름을 하던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눴던 작가 김희창의 추천 덕에 이 햇병아리 배우는 김승호, 주증녀, 김진규, 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엄앵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이후 흥행과 비평에서 대성공을 거둔 유현목 감독의 62년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각종 상을 받은 신성일은 드디어 스타덤에 오른다. 63년만 해도 <가정교실> 등 10여편에 출연했을 뿐인 그는 64, 65년에는 30여편씩 출연하더니 66년에는 40편대를 돌파하고, 67년에는 50여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주연작의 개봉 기준으로 볼 때, 1968년은 최절정의 해였다. 신성일은 이 해에 개봉된 212편 중 20%가 넘는 45편에 주연이었다. 자연 납세순위에서도 두각을 발휘했다. 66년엔 195만원(총소득 645만원) 납부로 연예인 1위를 차지했고, 67년에도 총소득 965만원 중 339여만원의 세금을 내며 이 자리를 지켰다. 신성일에 따르면 1967년 65편에 출연했는데, 하루 18편에 겹치기 출연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홍길동이나 손오공도 흉내낼 수 없을 ‘둔갑술’을 보여준 셈이다. 잡지에서는 “신성일의 아성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라는 기획기사가 다뤄지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많은 영화에 나온 것은 당시 영화의 큰 돈줄이었던 지방 흥행업자들이 그를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가 주연하지 못하면 이름이라도 포스터에 넣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그를 짝사랑한 것은 흥행사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제주도의 한 관광호텔에 묵었을 때, 창 맞은편에 자리한 여고에서 수업이 안 된다며 교감이 방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는 모든 여성의 우상이었다. 당연 남성들, 그중에도 젊은 남성의 질투는 심했다. 서울대 문리대학생회가 그에게 ‘최악우상’을 수여한 것도 어쩌면 이런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부인 엄앵란은 ‘상을 받는다’는 소식에 수상식장에 왔다가 난망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아무튼 가장 최근작인 <아찌아빠>(1995)까지 신성일이 출연한 작품은 모두 536편. 그중 주연작은 495편이었다. 상대한 여자배우는 104명이었다.

외화의 경우, 최다 주연의 주인공은 인도의 여성 코미디언 마노라마. 1958년에 데뷔한 이래 30편을 동시에 찍곤 했다는 그녀는 1985년에 이미 1천 번째 영화를 선보인 바 있다. 할리우드 스타 중에서는 존 웨인이 153편의 출연작 가운데 11편을 제외한 전작에서 주연을 맡은 기록을 갖고 있다.


최다 연출 한국 영화감독
(씨네21 기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김수용 감독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한국영상자료원 정보에 따르면, 고영남 감독이 110편을 연출하여 최다 연출자라는 설도 있고, 비공식이긴 하지만 한국의 에드 우드로 불리는 남기남 감독이 130 여편을 연출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정보는 어디에 있을까? 어쨌거나 100편의 임권택 감독을 비롯하여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다)

김수용
최근작 : 침향
김수용 감독: 109편. 이쯤되면 백팔번뇌도 저리 가라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수용 감독. 1999년 <침향>까지 40여년 동안 109편의 작품을 낳았다. 1967년에는 <어느 여배우의 고백> <길잃은 철새> <애인> <산불> <빙점> <고발>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만선> 등 무려 10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빚었다기보다 토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 <중광의 허튼소리>(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난도질당하자 메가폰을 던지고 10년 넘게 공백기를 가졌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연출 편수다. 신기한 것은 태작들 중에 수작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1967년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빨리 촬영이 완료된다는 건 캐스트의 일치와 진행상 차질없는 완전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만큼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편 그는 86년 <…허튼소리> 이후 13년만에 <침향>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만에 컴백한 감독이며, 데뷔 이후 41년간 감독생활을 하고 있는 최장수 감독이기도 하다 (이제, 임권택 감독이 1962년에 데뷔하여, 올해 45년째에 이르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최장수 감독이 되었다. 한편, 지난 해 타계한 고 신상옥 감독은 1952년에 데뷔하여 2004년까지 감독 작품을 내놓았으니 52년간 감독 생활을 한 최장수 감독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감독은 스페인의 헤수스 프랑코. 섹스와 피의 향연을 앞세워 1950년대 후반부터 무려 200편 이상의 저예산영화를 만들어왔고, 그중 100편에 가까운 작품들이 비디오로도 출시돼 있다. 가장 오래동안 활동한 감독은 1908년생으로 현존 최고령이기도 한 포르투갈의 거장 마뇰 드 올리베이라 (이 감독은 1908년생으로 거의 100살인데도 올해에도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1929년 자신의 고향 오포르토의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두루 강에 대한 습작>으로 데뷔한 뒤, 2001년 칸영화제에 출품된 <나 집으로 돌아가리라>까지 꾸준히 영화를 찍어 왔다.


최연소 데뷔 감독

한국에선 <검은도시>(1990)로 데뷔한 최야성 감독. 1969년생이니 21살에 ‘입봉’한 셈이다.

외국에선 직접 제작, 각본, 출연까지 겸한 <천재 강아지 렉스>(1973)로 13살의 나이에 데뷔한 네델란드의 신동 시드니 링.


최고령 데뷔 감독

<돌아이4-둔버기>(1988)로 데뷔한 방규식 감독. 60년대부터 제작부에서 활약했고 기획자, 제작자로 이름을 알렸던 방 감독은 <돌아이> 시리즈의 4편에서 이두용 감독 대신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3살이었다. 인도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알려진 막불 피다 후세인. 인도 여성들의 역할에 대한 뮤지컬 <가자 가미니>(2001)로 85살에 데뷔했다.


한국 최초의 특수효과영화
(당시의 영화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대괴수 용가리'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불가사리>: 한국 영화계에 특수효과라는 개념을 가져온 작품은 1962년 광성영화사에서 만들어진 김명제 감독, 최무룡, 엄앵란 주연의 <불가사리>였다. 고려 말기에 역적들의 손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한 청년이 원한에 사무쳐 쇠를 갈아 마시는 불가사리라는 괴물로 환생,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괴기물인 이 영화는 1985년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불가사리>로 불붙은 특수효과영화는 <옹고집>(1963), <대괴수 용가리>(1967), <우주괴인 왕마귀>(1967) 등으로 이어진다.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불가사리>의 특수효과는 지금은 물론이고 당대 기준으로도 그리 ‘특수’한 느낌의 ‘효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괴수 용가리>가 만들어지던 66년 당시 <영화잡지>는 “방화 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특수촬영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불가사리>란 영화가 선을 보인 적이 있으나 역시 기술적인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트릭’과 ‘미니어쳐’ 등을 사용한 특수촬영을 방화계에서 급격히 서두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옹고집>에 관한 내용. 허장강, 도금봉, 황정순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조선시대 소설인 <옹고집전>을 영화로 옮긴 것. 옹진에 살던 못되먹은 옹고집이라는 양반이 한 스님이 만들어낸 또 다른 옹고집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잡지>는 “여기서 허장강은 1인2역을 했는데 둘이 맞붙어 싸우는 장면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장면들이다. 따라서 국산영화로서 특수촬영을 성공시킨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아무튼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인 특수촬영”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괴수 용가리>는 일본 기술자 10여명이 들여온 200여종의 장비를 이용해 만들어졌고, 훗날 한국 SFX영화의 모태가 된다. 그 적자(嫡子)가 심형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초의 발성영화
(헐리우드에선 1928년작 '재즈 싱어'란 영화가 최초의 유성 영화로 알려져 있다)

<춘향전>: <춘향전>(1935)의 야심은 ‘유성’에만 있지 않았다. 이필우는 1931년 디스크에 사운드를 따로 녹음하는 방식의 유성영화가 수입되자 4년 연구 끝에 필름에 직접 소리를 입히는 방식의 P.K.R 발성장치를 만들어낸다. 형인 이명우가 연출과 촬영을 맡고, 이필우가 조명과 녹음을 맡은 <춘향전>은 애초 동시녹음까지 욕심냈던 것. 하지만 현장은 머릿속의 구상을 헤집어놓았다. 처음 써보는 시스템이라 작동이 서툴렀고, 새벽 두부장수 소리부터 자동차 소리까지 덤벼드는 노이즈를 어찌할 수 없었다. 후시녹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상과정까지 거치고 나니 버려야 할 필름만 4만척. <농부가>를 집어넣으려 하였으나 충분한 경비를 얻지 못해 포기한 뒤 양악으로 대체한 것은 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춘향전>이 놓친 최초의 동시녹음영화의 타이틀은 이듬해 <홍길동전>(1936)이 가져갔다.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
(처음으로 색채 영화를 경험했을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1949)로 16mm 필름을 사용했다. 35mm 영화로는 <선화공주>(1957)가 최초.


한국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신동헌 감독이 연출한 <홍길동>(1967). 아우인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제작비 5400만원과 하루 400명씩 동원해 <홍길동>을 제작했다. 이때 그린 그림은 가로길이로 3759km에 이르렀고, 장수도 12만5천장에 달했다. 신동헌 감독은 60년 ‘야야야, 차차차’로 유명한 진로 소주의 애니메이션 CF를 제작하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감독

한국:
박남옥
최근작 : 묘녀
, “아기 업고 영화 만든” 감독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고 그래. <미망인>(1955)을 내놓으며 ‘여성 감독 1호’라는 수식을 얻었던 박남옥 감독. 산후 조리도 채 끝내지 않고 촬영장에 선 그는 네오 리얼리즘영화에 경도되어 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필모그래피는 16mm로 찍은 데뷔작이 전부지만,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 계보뿐 아니라 이후 활동을 시작했던 여성 감독들에게도 시원으로서의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외국: 고몽영화사를 설립한 레옹 고몽의 비서 출신인 알리스 가이. 1896년, 혹은 고몽의 카탈로그에 따르면 1900년 <양배추의 요정>을 연출했다. 최초의 장편영화를 만든 여성감독은 미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도 한 로이스 웨버. 1914년 <베니스의 상인>으로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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