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상을 수상한 이 영화 <경계선>을 보고 있으면 역겨운 감정을 느낍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소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모습들을 보게 될테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걸 역겹게 느끼고 있다는 그 감정이 부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선을 무너뜨립니다.
 
또한 남성과 여성성에 대한 관념도 여지없이 깨뜨립니다. 도대체 이 작가, 감독의 상상력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몸 속엔 모두 남성과 여성 호르몬이 함께 흐르고, 단지 그 비율의 차이가 성을 가른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만듭니다. 상대에 따라 성이 바뀌는 것인지, 외면과 내면의 성은 다른 것인지, 참 오묘한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 초반부에선 그냥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어찌보면 추한 몰골의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과 비슷한 이를 만나면서 자신의 감추어진 특성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주인공 티아와 상대자 보레는 트롤이라는 종족입니다. 이들은 후각을 통해 감정을 읽습니다.
 
티나는 세관 직원으로 후각을 통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불안한 감정을 읽어냅니다. 한번은 아동포르노를 메모리 카드에 몰래 들여오려던 한 남자를 잡아냅니다. 그리고 이 영상을 통해 범행이 저질러지는 곳을 찾아내게 되죠. 그런데 이 사건은 보레와 연결되어 있고, 또한 트롤이라는 종족이 살아가는 비밀도 함께 엮어 있습니다.  
 
보레는 인간이 기생충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자신들의 아이까지도 해할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보레의 '아이 바꿔치기'라는 범죄는 마땅함을 얻습니다. 하지만 티나는 보레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티나는 “누구도 해치기 싫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인가요?”라고 반문합니다.  
 
아이까지도 범죄에 이용하는 것도, 누구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도 모두 인간입니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춤을 춥니다. 티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닙니다. 이런 경계선은 티나에게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인간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트롤로서 티나답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 길이 비록 외로운 길이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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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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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강력범죄 중에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유정과 손님을 죽여 한강에 버린 한강 몸통시신 사건의 장대호라는 인물이 자꾸 신경쓰인다. 이들의 범죄수법이 악랄하다거나 잔인해서라기 보다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당연한 일인마냥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호하고 있다.

 

정유정의 소설 <진이, 지니>는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민주는 평소 까탈스러워 마주 대하기 싫었던 해병대 할아버지의 구조 소리를 무시해 죽게됐다는 죄책감, 진이는 콩고에서 우리에 갇혔던 보노보를 구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이 죄책감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을 이끌어나가는 숨은 힘이 된다. 

 

이번 소설은 다소 판타지적 내용을 담고 있다. 사육사인 이진이가 우연한 교통사고로 보노보의 몸 속으로 자신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사건이 이어진다. 이런 류의 소재는 각종 소설과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데, <진이, 지니>가 다른 점은 보노보의 영혼과 진이의 영혼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나로 일치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결국 진이는 죽음 직전의 자신의 육체로 영혼을 되돌릴 것인지, 아니면 보노보의 몸 속에서 영혼을 지속시킬 것인지를 선택해야한다. 즉 죽음이냐 기생이냐의 선택. 민주는 옆에서 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보노보의 몸을 가진 그녀를 병원의 죽어가는 인간의 몸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정유정 소설이 그렇듯 이번 <진이, 지니> 또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듯한 속도감과 재미를 보장한다. 충실한 자료조사 덕분일 테지만,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영상화가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항상 인간에 대해, 또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이번 소설은 나에게 있어, 생명과 죄책감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업혀본 적이 없다. 타인에게 기대본 경험 역시 없다. 육체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기댄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마저 있었다. 기댄다 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기대는 일이 지식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머리를 기울여 맞대면 되는 거였는데. 225쪽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367쪽

 

생명이란 혼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유일한 생명체도 아니다. 소설 속에서 보노보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명과 생명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것, 그래서 삶을 귀히 여기는 것, 생명이 죽어가는 것,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끝내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

인간이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뭇생명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시기이다. 공장식 사육과 살처분이 만연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죽음이나 상처에 무뎌진 시대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소설의 끝자락, 진이의 선택이 가슴에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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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이란 책을 팔고 사는 가게를 말한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유통은 온라인으로 넘어가고 있다. 서점이라고 다르겠는가. 문을 닫는 서점들이 많다. 2007년 3247곳이던 동네서점은 2017년 2050곳으로 10년 사이 1/3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류 속에서도 새롭게 서점을 열거나, 긴 역사를 자랑하며 꿋꿋하게 버텨내는 곳도 있다. 물론 이런 서점들은 이제 책만 사고 파는 거래의 장소가 아니다.

 

 

서림, 서원 등등 서점의 이름도 다양하다. 책의 숲, 책의 정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진 이름들일 것이다. 이제 서점은 치유지, 예술터, 교육관, 낭송의 장소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 동네에서 살고 싶은 이유로 서점이 꼽힐 수 있을 정도의 문화적 교류의 중심이 되는 곳도 있다. 이번 <백투더 북스> 4편은 전국의 이색적인 동네서점들을 찾아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 서울 혜화동 동양서림, 속초 동아서점 등 오랜 시간을 버텨온 곳의 변천사와 진주의 진주서점, 부산의 인디고 서원 등의 다양한 활동을 담아냈다. 서점의 다층적 역할과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발길이 더 많이 서점으로 향하도록 해 줄듯 싶다.

 

 

특히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점은 대전의 <도시여행자>서점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높아진 임대료로 기존의 소규모 상인들이 떠나는 현상)으로 인해 운영의 어려움을 맞이한 곳이다. 아직 앞으로의 구체적 계획을 말하진 않았지만, 소유에서 공유의 개념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사례가 될듯 싶다. 서점의 월세 또는 건물의 매입을 다수의 대중이 공동출자나 펀드 형식을 통해 공공의 자산 형식으로 해결하고, 서점 운영자는 콘텐츠 기획자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이다.

 

 

모든 서점이 이렇게 운영될 이유나 필요는 없겠지만,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을 사람들로 북적이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런 서점이 전국 면단위 마을에 들어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이게 될 이 서점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작은 병원, 작은 이발관 등이 들어서 옆에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소멸'이라는 단어는 사라지지 않을까. 시골의 작은 서점이 문화와 교육, 치유의 역할을 해내 줄 수 있다면, 아이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곳에도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려올 성 싶다. 너무 세상을 간단히, 어설프게 바라보는 것 같지만, 동네서점이 시골 부흥의 '넛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서점 때문에 이 동네에 살아'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매력적인 동네서점들이 많이 들어서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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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조커의 탄생기라는 이번 <조커>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영화 <블랙스완>의 거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튼 분명 비극적 인생임에도 일종의 코미디였다고 평가하는 조커의 인생 변환점을 잘 표현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모방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모방범죄를 낳을지도 모르는 조건, 즉 사회경제적 환경의 개선에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 아동학대라는 비극

요즘 뉴스에 들어가는 소식 중에 하나는 '아동학대'다. 실제 벌어지는 아동학대의 대부분은 친부모로부터 일어난다. 조커의 '코미디'같은 인생의 시발점은 어머니의 아동학대다. 그로인해 뇌손상이 일어났고,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웃음이라는 병과 과대망상증을 갖게 됐다. 시도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은 사회생활을 힘들게 만든다. 항상 웃는게 좋은 건 아니다. 웃음에도 때가 있다. 부적절한 때에 터져나오는 웃음은 비아냥이나 조롱, 업신여김, 무시로 읽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런 웃음병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카드를 들고 다니며, 오해를 풀고자 한다.

 

 

◆ 이해, 배려없는 지옥

타인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가늠하는 것이 이해이고, 그 이유를 인정해주는 것이 배려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행동에 즉각적 대응을 하기가 일쑤다. 타인의 설명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이해와 배려를 잃어버린 것이다.

조커를 대하는 사람들은 조커가 자신의 웃음병을 설명할 시간조차 주지않거나, 혹 그 사정을 알더라도 인정 또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우리의 태도에서 친절을 버리게 됐을까. 친절한 태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 분노로 뒤끓는 사회

영화 속 고담시의 시민들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건드리면 터질 준비가 되어있다. 버스 안에서 아이를 웃겨주려 하는 조커의 선한 행동에도 아이의 엄마는 화부터 낸다. 아이들은 상점홍보 알바를 하는 조커에게 린치를 가하고, 지하철에서 성희롱하던 금융인은 웃고 있는 조커에게 폭력을 가한다. 분노는 꼭 빈곤층에게서만 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빈자와 부자간의 인식의 격차도 커지고, 서로 간의 이해가 멀어지면서 상대를 향한 분노는 걷잡아질 수 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 방아쇠는 언제 당겨지나

분노 속에 놓여진 자에게 총이 주어졌다. 아무리 무엇인가를 해보려해도 바뀌지 않는 삶. 희망은 부서지고, 절망만이 가득한 도시. 자신의 꿈을 조롱하는 사람들. 자신을 인격체로 보지않고, 밟고 넘어갈, 또는 비웃음의 대상이 될, 마치 벌레 취급하는 세상.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에겐 나 또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마음. 그것의 극한이 조커의 손가락을 움직여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었다. 꼭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밖에 없는지는 현실 사회가 논의해야 할 부분일 테고, 영화는 그렇게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 <조커>영화의 핵심은 음악

이번 <조커> 영화의 백미를 계단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또는 그가 변했음을 보여주는 화장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꼽는 이도 많다. 거울 앞에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꼬리를 치켜올려 웃는 모습을 만드는 장면도 뺄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조커>영화 속 이런 장면들보다 음악이 훨씬 중요해보였다. 이번 영화에서 음악을 빼 버리면 그야말로 흐리멍텅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야기의 흐름, 또는 분위기, 그리고 의도조차도 모두 음악 속에 녹아있다. 눈을 감고 음악만 듣고서도 <조커>의 심경이 어떤지를 짐작할 정도다. 음악에 비중을 많이 둔 영화였다고 평하고 싶다.

 

 

무엇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분노는 어떻게 다스려져야 할까. <조커>는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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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0보 100보의 차이

 

■ 깡패와 양아치의 차이?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이야기 하나. 깡패와 양아치의 차이는? 아이들을 폭력과 이익의 대상으로 삼느냐. 마약을 거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야말로 50보 100보다. 그럼에도 50보와 100보에는 차이가 있다. 돈벌이에 있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같지만 그 대상을 한정하느냐의 여부가 이 둘을 가른다.

 

■ 마피아의 신구 세력 다툼

영화 <배신자>는 이탈리아 마피아 이야기를 다룬다. 1980년대 마피아 신구 세력간의 다툼에서 벗어나 브라질로 떠난 토마소 부세타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토마소는 브라질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이탈리아로 송환되고, 재판 과정 중에 마피아 세력의 중심인물들과 그들의 범죄행위를 폭로하게 된다. 실제 이탈리아에서 벌여졌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영화는 토마소의 시선으로 즉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 명예로운 자의 길

토마소는 스스로를 '명예로운 자'로 여긴다. '명예로운 자'는 새로운 마피아 세력 이전의 구 마피아 집단을 말하기도 한다. 토마소에게 새 마피아 세력은 헤로인을 취급하기에 명예롭지 않다고 여긴다.-하지만 실제 기록되어진 사실은 토마소가 두목급 마약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 그런 생각으로 그는 거침없이 내부고발자의 길을 걷는다. 그의 폭로로 범죄사실과 증거가 드러나면서 수많은 마피아 간부급 인물들이 체포되고, 정치세력과의 연계가 밝혀진다. 죽음을 무릅쓰고 폭로의 길, 즉 배신자의 길을 택한 그는 자신이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자신은 명예로운 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 헤로인을 취급하는 당신들이야 말로 명예를 내팽개친 배신자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마피아 가입 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수십년이 지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재판 과정 중에도 결코 실행해내는 모습을 통해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자칫 토마소가 정말 '명예로운 자'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한 장면이라 생각된다. 반대로 마피아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범죄집단이라는 증명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 평온한 죽음이 소원

토마소의 소원은 '침대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평범한 이들에게 정말 소박한 꿈일 수 있겠지만, 마피아의 길을 걷고 있는 그로서는 원대한(?) 꿈이다. 과연 그는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마피아의 뒷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토마소의 불안한 영혼을 통해 화려해 보이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신을 끝내 명예로운 자로 여기는 모습 속에서 이들의 이중성을 파악한다. 다만 이 과정이 언뜻 토마소를 변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어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해진다. 어찌됐든 영화적 재미는 생각보다 많다. 지루할 것 처럼 보이는 재판과정도 꽤나 흥미진진하다. 영화 <대부>와는 다르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추천해본다. 

 

오늘도 평온하게 잠을 청하는 일상과 이렇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영화를 통해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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