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랙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강추! 하지만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비추! 마냥 웃고 싶다면 다른 영화를 보시길.... ★★★☆


2. 천문학과 대학원생과 담당 교수가 새롭게 발견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다. 이 무시무시한 종말론적 사실을 세상에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먼저 찾아간 곳은 백악관. 하지만 혜성과의 충돌이라는 예견된 사실은 진영 논리에 의해 진실과 거짓의 논쟁으로 바뀐다. 정치가 아닌 언론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하지만, 방송은 무거운 주제마저도 가벼운 농담처럼 다룬다.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사라지고, 출연자들의 이미지만이 소비된다. 이들의 외모와 행동은 밈이 되어 SNS로 퍼져간다. 


3. 정치와 언론이 사실을 다루는 방식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했지만, 진짜 현실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과학적 발견이 소재로 쓰였지만, 현실에서는 단일한 사건을 둘러싸고 사실이 진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핵심을 벗어난 가벼운 즐길거리로 둔갑한다. 사실이 사실인지를 점검하는 팩트체크마저도 진영 간의 논리에 의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을 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실은 그 모습도 영향력도 달라진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 뭐, 이런 정도의 비판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너무나 자주 접해온 일이었기에, 블랙코미디를 통한 웃음이 유발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어처구니가 없다라기엔 우리 현실이 이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많은 탓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대목은 어찌됐든 혜성과의 충돌이라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애초의 핵무기를 발사시켜 혜성을 폭파시키려던 계획은 거대 IT기업 배시의 CEO가 혜성에 수 조 가치의 희토류가 포함되어 있어, 혜성을 파괴하는 대신 드론을 이용해 채굴한다는 계획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드론을 보내기 위한 우주선은 모두 폭파되어 버리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5. 실제 우리에게도 지구온난화라는 종말론적 사실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진영에 따라 달라진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입장차는 커보인다. 아니, 지구온난화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한 음모라는 주장까지 떠돈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탓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라는 주장도 있다. 

입장차도 입장차이지만 이를 해결하는 자세도 큰 차이가 있다. 화석연료를 비롯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해결책 대신 결국 인간의 과학기술, 첨단기술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주위를 떠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류가 눈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자명한데도 말이다. 

[돈룩업]의 지구를 향한 혜성은 현실의 지구온난화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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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윅을 1990년대 홍콩영화 식으로 만든다면 노바디가 되지 않을까.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들였다. 그냥 놔두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분노로 들끓은 주인공의 가공할만한 복수가 시작됐다.영화 <존 윅>을 떠올리는 통쾌한 액션과 이야기의 흐름. 하지만 액션의 결이 존 윅과는 사뭇 다르다. 


3. 존 윅은 과장된 듯 하지만 절대무적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반면, <노바디>의 허치는 존 윅과 닮은 듯 다르다. 맨 몸 액션은 비슷해 보이지만 총격씬은 마치 1990년대 홍콩영화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은 총알이 알아서 피해가고, 상대방은 총을 쏘는 대신 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이런 모습이 통쾌함을 안겨주기에 눈에 거스르지 않는다. 


4. 감독은 러시아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일리야 나이슐러라고 한다. 이 감독이 오우삼 감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근거없는 추측도 해본다. 존 윅 식의 액션과 오우삼식 액션(영화 <첩혈쌍웅> 같은)을 좋아한다면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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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약을 찾기 위해 떠난 서복처럼 영화의 의도는 결국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시한부 인생인 전직 요원 민기헌(공유 분)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분)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헌이 서복과 함께 이동 중 급습을 받고, 둘은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3. 영화<서복>은 얼핏 기헌과 서복의 로드무비처럼 보인다. 도망다니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신기한 서복과, 오직 자신의 임무만을 빨리 완수하려는 기헌의 갈등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기헌과 서복의 대화는 마땅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서복을 빼앗으려는 집단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기헌에게 "왜 당신을 따라가야하죠?"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죠?"라는 식의 질문은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엄청난 에너지 낭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서복처럼 왜 그래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라는 질문없이 살아가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로봇과 다르지 않아서다. 그 대답엔 과학적 이유가 아닌 가치가 숨겨져 있다. 


4. 사람이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은 왜일까?(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아마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죽음을 알 수 있을까.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즉 알수 없는 죽음을 알기 위해 애쓰기 보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일 터이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이 세상을 소풍왔다 가듯 생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충족은 끝이 없고, 욕망의 크기는 더욱 커지며, 결국 욕망을 좇는 그림자로 영원히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불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불멸의 삶이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 불멸의 삶을 다룬 소설, 드라마, 영화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죽음을 꿈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나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고통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에 치를 떤다. 그렇다면 모두가 영원한 삶을 누기게 된다면 이런 고통도 없을테니 괜찮을까. 문득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기시 전에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사는게 지겹다"

영화 <서복>에서도 서복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모두가 불멸의 삶을 살게된다면 재앙이라 여기기 때문인듯하다. 


5. 영화 <서복>은 영원한 삶이라는 소재와 함께, 인간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복제인간이나 유전자 조작 인간이 과연 인간일 것인지, 도구일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굉장히 많다. 그리고 대부분 답이 정해져 있다. 그들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장기 이식을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동물은 그저 인간이 아니기에, 마치 우리가 고기를 먹듯, 생명체라기 보다는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반려동물로 애정을 쏟는 대상과, 고기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의도와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 영화 <서복>에서는 이런 질문을 넌지시 내뱉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수단으로 여길 때 그 존재의 분노가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음을 액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10여 분 간 서복의 분노가 터지는 액션은 공을 들인만큼의 특수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너무 낯익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낯익은 액션 만큼이나 우리 영화에 등장한 유전자 조작 및 복제 인간 '서복' 또한 신선하기 보다 낯익게 다가온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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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볼거리★★ 마음거리★생각거리


2.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의 아파트에 나타난 여자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여자는 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몇일 후 다른 여자가 딸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준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재산을 훔쳐가려는 자들의 음모일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남자의 삶을 미스터리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재미가 솔솔.


3. 영화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그의 기억들로 말미암아 평온한 일상은 음모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버렸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는 아직 기억을 쌓지않고 있는 아이와 같아진다. 그가 아이가 되어가는 모습이 짠하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그야말로 최고다. 


4.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나빌레라>에서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나빌레라>는 비록 기억을 잃어간다 하더라도 차마 꿈꾸지조차 못했던 어릴적 동경을 실현하려는 할아버지의 분투를 통해, 지금 당신이 어떤 처지에 있다하더라도 한번쯤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비록 기억을 잃을지언정 몸은 기억하리라. 


5.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이야기 중 단연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압권이라 생각한다. 김혜자 주연의 이 드라마는 마지막 부분에서 앞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김혜자가 만들어낸 상상이었음을 밝히는 반전으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래켰다. 더군다나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찬란한 시간인지를 깨닫도록 만드는 감동의 힘까지 지녔다. 


6. 영화 <더 파더>에서는 소품 중에 시계가 등장한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는 시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더 파더>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안소니의 상태를 시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보여준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잃어버린 것과 같을지 모른다. 


7. 기억을 잃은 사람에겐 지금까지 함께 해 온 모든 사람들이 처음 본 사람들로 둔갑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잃는 것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기억을 잃은 이들에게 어깨를 내주고 품을 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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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일이 없는 외로운 사람의 감정이 가슴에 와닿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너무 무겁게 너무 비장하게 흐르지 않으려는듯 웃음을 집어넣었지만, 오히려 감정의 흐름만 깨뜨린듯. 이 영화의 교훈은 <총은 칼보다 강하다>는 것. 볼거리★ 생각거리★ 마음거리


2. 조직의 행동대장이라 할 엄태구는 유일한 가족인 누나와 조카를 교통사고로 잃는다. 그는 교통사고가 자신을 향한 경고였다 생각하고, 지시를 내렸을 것이라 여긴 조직의 보스를 살해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제주로 몸을 숨긴다. 이곳에서 시한부로 살아가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삼촌으로 인해 러시아 마피아들에게 가족들이 몰살당한 사건을 겪었다. 피붙이 하나없이 홀로 남겨져 언제 죽게될지 모르는 이 두 남녀가 서로에게 기대며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품어본다. 


※스포일러주의

3. 영화는 반전을 준비해놓았다. 하지만 느와르라는 장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부분. 악당 중에서도 악당이라는 캐릭터를 구성해놓고, 이를 향한 분노를 키워간다. 하지만 모두가 결국 악당이다. 그냥 싹 쓸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영화는 확실히 싹 쓸어버리지만, 통쾌함 보다는 허무함이 가득하다.     


4. 영화의 액션은 곳곳에서 피를 튀긴다. 특히 칼은 무자비하다. 하지만, 칼은 상대와 가까워졌을 때만 살인무기가 된다. 총은 멀리서도 한방에 깨끗하게 보낼 수 있다. 총보다 무서운 칼솜씨를 선보였다면 르와르가 아니라 무협영화였을 것이다. 총을 총처럼 다루지 않고 칼처럼 다룬다면 액션영화였을 것이다. 총이 칼보다 강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낙원의 밤>은 총이 느와르의 최적의 도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총알이 발사되고 난 후 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느와르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이 비장함은 세기말적 시대의 이미지다. 2021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이런 비장함이 겉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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