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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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이 왜?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지? 뭐라고? 내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이 빅뱅 덕분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음....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쓰려면 충전을 해야 하잖아. 그럼 전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전기→화력→석탄→3억년전 식물 리그닌→식물 광합성→햇빛→핵융합에너지→수소, 헬륨→빅뱅. 이렇게 해서 바로 빅뱅 덕분이라고.

사실 과학은 어렵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실험실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우리 일상이 과학이다. 음악과 미술은 역사부터 시작해 작가들 이름까지 교양이나 상식처럼 알기 위해 공부하지만, 과학은 그냥 옆에 저만치 떨어뜨려 놓는다. 하지만 과학 또한 일상이며 상식이자 우리 시대의 교양이라 할 수 있다.

김상욱 교수는 양자물리학을 토대로 과학이 현대인의 삶에 얼마나 녹아 있는지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한다. 과학법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통찰하는 시선이 날카롭다. 이 책을 통해 양자물리학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즉 과학적 사고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관찰하고 의심하고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양자장론이 보는 세상은 이렇다. 전자장에서 전자가 만들어진다. 전자는 실체가 아니라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장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전자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똑같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과 평균적으로 99.5% 정도 같다고 한다.

자크 모노의 생각은 이렇다. 생명현상도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리법칙은 원자 수준에서 확률만을 알려준다. 생명도 이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왜 특정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져 왜 하필 1이 나왔냐고 묻는 거랑 비슷하다. 1은 가능한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진화는 우연히 일어난다. 우연으로 선택된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 의미를, 아니 더 나아가 의도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우연은 필연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는 네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그것이다.

힘은 두 입자 사이에 작용한다. 입자가 혼자 있을 때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힘은 상호관계다.

에너지를 전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축전기라 하고, 자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코일이라고 한다.

알코올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기화합물의 하나다. 술에 들어 있는 알코올은 효모라는 세균이 분해할 때 부산물로 나온다. 산소 없이 에너지를 만드는 이 과정을 발효라 부르는데, 루이 파스퇴르가 발견했다. 인간의 경우 산소를 이용하여 음식에 들어 있는 포도당을 분해한다.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파스퇴르는 발효가 단순한 화학반응이 아니라 생명의 고유한 현상이라며 여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것을 생기론이라 한다. 화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명의 고유한 현상이 있다는 생각이다. 파스퇴르가 죽은 후 에두아르트 부흐너는 발효가 화학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발견으로 생기론은 종말을 맞았으며 생명을 환원주의로 설명하는 시각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물질에서도 상전이를 통해 얼음이 물이 되거나 물이 수증기가 되듯이, 상전이 이전에 물질이 갖지 않았던 속성이 새롭게 생겨난다. 이처럼 구성요소에서 없던 성질이 전체 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이라 부른다. ... 원자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창발이라 보면 된다.



근육 내 ATP를 만드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는 호흡으로 얻는다. 호흡은 유기물을 산소로 태워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다. 유기물은 우리가 먹은 음식을 분해하여 얻는다. 우리가 먹고(유기물) 숨을 쉬어야(산소) 하는 이유다. 유기물을 태울 때 에너지가 나오는 것은 유기물이 높은 에너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에너지 상태의 유기물을 만드는 것은 대개 식물의 몫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유기물을 만든다. 식물도 에너지를 창조할 수는 없다. 광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는 햇빛에서 얻는다. 결국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원은 태양이다.

분자들 가운데 탄소화합물은 특별하다. 복잡하고 긴 구조물을 쉽게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탄소화합물은 산소와 결합하여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를 연소라 부르는데, 쉽게 말해서 타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부터 38억년 전 지구상 어딘가에서 탄소화합물로 이루어진 화학반응의 복합체가 탄생한다. 그 복합체는 에너지를 생산하여 자신의 구조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같은 형태로 복제하는 능력을 가졌다. 바로 생명이다.

태양도 에너지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태양에서는 핵융합반응이 일어난다. 수소 원자들이 결합하여 헬륨이 되면서 에너지가 생성된다. 수소들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보다 헬륨으로 뭉쳐 있는 것이 에너지가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소의 에너지는 어디서 왔을까? 수소는 우주의 탄생, 그러니까 빅뱅 때,정확히는빅뱅이 있은 후 38만 년이 지났을 즈음 만들어졌다. 빅뱅 당시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결국 우리 주위의 모든 에너지는 빅뱅에서 기원한다. 에너지 보존법칙이 우리에게 알려준 놀라운 사실이다.

사피엔스는 왜 농업을 선택했을까? 하라리는 우리가 농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농작물이 우리를 선택한 거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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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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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게 참 신기해서 그냥 살면 될 것을, 굳이 삶의 의미를 찾거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애를 쓴다. 그런 삶의 의미와 삶의 설명은 종교와 철학이 주된 역할을 해오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과학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예 대놓고 과학철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과학과 철학을 융합하기도 하지만 꼭 철학이 아니더라도 과학이 설명해주는 현상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영화 <양자물리학>에서처럼 삶의 모토를 양자물리학의 법칙으로 삼기도 하면서 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 '상황은 항상 변한다'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방법은 만능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과학은 명제의 참, 거짓을 땨지는 데 유용하지만 가치를 판단하는 데 종종 무용지물이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것은 과학의 능력 밖이다. ... 학문의 역사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인문학의 몫이었다. .,.,. 가치를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정의, 사랑, 인권, 아름다움 같은 것을 정의하거나 왜 중요한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들 없이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고는 현대인의 삶에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간단하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증거에만 의존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 가짜 정보가 힘을 얻는 시대에서는 과학적 사고가 꼭 필요하다.

과학적 방법은 세 단계로 구성된다. 첫 단계는 관찰과 실험을 통해 정확하고 정량적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다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언론이든 SNS든 넘쳐나는 정보, 상반된 정보들을 판단할 때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이유 또한 명확하다. 

과학은 신화와 동요를 고발하고, 권력을 거부한다. 결국 과학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은 이제 과학을 통해 그 길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은 과학이 어렵고 접근하기 두려운 법칙이 아니라,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동반자임을 쉽고도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놀기 위해 일한다. 일이 목적이 아니라 잉여가 목적이었다는 말이다. 잉여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계로 절약된 시간을 우리의 행복으로 전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통신에서의 잉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자연에서 잉여는 그 자체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사회란 잉여를 누리는 사회이다. 사실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운동, 오락 등은 모두 잉여가 아니었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잉여의 가치를 잊어버린 것 같다.

자연에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의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중력과 전자기력만이 공간을 전파하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카오스는 복잡해서 얼핏 보면 불안정해 보인다. 하지만 카오스계는 선형계보다 외부의 간섭에 대해 훨씬 안정적이다.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침에 1시간 지각을 하면 하루종일 엉망이 되겟지만, 대충 살아가는 사람은 2시간 지각을 해도 큰 문제가 업슨 것과 비슷하다고 할가. 자연은 카오스와 프랙탈을 통해 안정과 효율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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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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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힘을 다 쏟은듯 지쳐버렸나요? 그냥 갑자기 눈물이 흐를듯 외롭나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허무감이 밀려오나요? 그럴 때면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 우울과 피곤, 허무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갖고 있습니까?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의 저자 고미숙은 친구들과 낭송을 하라고 합니다. 낭송은 몸과 머리를 함께 쓰는 일(외우고 말해야 하므로)이자, 우정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던 영혼과 육체를 깨우고, 인연을 짓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함께 하는 낭송이라는 활동을 통해 삶에 대한 탐구도 수반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낭송은 또한 진정한 휴식을 건넵니다. 반면 우린 우울과 피곤, 허무를 지워내기 위해 지금까지 쾌락을 추구해왔는지 모릅니다.

 

쾌락이냐 휴식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호흡과 유연성이라는 사실이다

즉 휴식은 숨결이 고르게 되고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을 구분짓게 만드는 핵심은 속도에 있습니다.

 

빠르고 거칠고 공격적인 리듬, 그것이 열정이고 광기다. 이걸 하루 종일 주입받고 있으니 어찌 쉴 수 있겠는가. 잠시라도 쉬면 죽을 것 같다. 이것이 불안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초조해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것만이 불안을 없애고 마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흔히들 우리는 이런 휴식이 물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물적 부를 가지고 있어야 느긋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꼭 부자여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타의에 의한 가난은 빈곤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청빈이고, 청빈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윤리다. 또 고정된 정체성이 없으니 사람이든 일이든 인연의 오고감에 따라 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즉  오히려 백수가 지성을 연마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며, 백수를 찬양합니다. 욕망 혹은 환상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자유! 백수에겐 바로 이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슴을 타인의 노래로 채우지 마라!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린 불안을 내포한 쾌락을 보장하는 부를 저버리고, 청빈한 백수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물적 부만 주어진다면 삶의 진리와 상관없이, 아니 물적 부가 삶의 진리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 자본주의 시대에, 비록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앵무새가 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심해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차피 끊임없는 욕망에 갇혀 산다면, 물질적 편리와 안락함의 욕망보다는 삶의 진리에 대한 욕망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낭랑하게 낭송하라,필사적으로 필사하라,글로벌하게 글쓰기 하라.

 

삶을 이야기할 진짜 친구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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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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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등장때문일까, 아니면 세계 역사의 흐름상 트럼프가 나타난 걸까?

미국을 비롯해 일본은 물론 영국 등등 국가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세계의 통합이라는 흐름은 깨지고, 자국중심의 정치세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순 없다. EU도 위태롭고 국가를 넘어선 통합체들이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수정자본주의가 신자본주의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고 승자독식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내것이 먼저가 됐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 중 3가지 이슈는 어떤 한 국가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핵전쟁, 생태적 위험, 사물인터넷을 넘어선 생체측정과 AI의 결합이다. 이 3가지는 전세계가 합심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종교로도 해결이 어려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보다 통제하려한다.

 

앞으로 닥쳐올 문제들이 우리에게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핵이 주는 고통은 최근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도 지켜볼 수 있다. 물을 사 먹고 공기를 구입하는 시대, 초미세먼지가 주는 고통은 어떠한가. 생체를 측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보다 편안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격차를 크게 만들고 이에 따른 의료 격차 등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더욱 크게 만든다. 우리의 생체 데이터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세속주의자가 과학적 진실을 중시하는것도 지적호기심을 중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올 난제들도 우리는 과학적 진실 등을 통해 우리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말조차 어불성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기술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진짜 현실이라는 것도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진짜 나라는 것도 모두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수 없게된다.

 

우리의 욕망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느낌, 욕망에 덜 집착할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의지의 폭정에서 좀더 자유로워질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했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패턴에 있다는 사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라는 것 또한

 

정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않다. 조작용 껍질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위해 내디뎌야할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 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정신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의 욕망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명상(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이 책은 명상추천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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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생태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5
김윤성 지음, 권재준 그림 / 개마고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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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봄이 왔는데도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상의 마을을 통해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슨 이전에도 생태와 관련된 논의는 있어왔다. 그리고 카슨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생태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책은 이런 생태에 대한 생각을 개괄적으로 죽 훑어보여주고 있다. 생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그 시선들의 장단점, 그리고 오히려 악용 또는 오용될 수 있는 여지 등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생태학을 크게 두 줄기로 파악하고 있다. 시스템적 관점에서 전체 특징을 분석하는 오덤학파와 진화론적 관점에서 염색체 수준의 설명을 시도하려는 맥아더 학파이다. 즉 전체주의와 환원주의로 거칠게 나눌 수 있겠는데, 생태에 대한 설명 또한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가지의 절묘한 결합이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주의깊에 들여다본 부분은 종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이다. 맥아더와 윌슨은 해마다 지구에서 14만종의 동식물이 사라진다면서 종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종이 다양해질수록 지구 생태계가 풍성해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종이 다양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먼저 극단적 예를 하나 들어보면, 숲을 허물고 도시를 만들면서 숲에 살던 다양한 동식물이 사라졌다. 대신 도시 속에서 인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들의 종은 대폭 늘어났다. 지구 생물의 90%는 곤충류에 속한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가설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즉 종 자체는 오히려 다양해졌지만, 무엇인가 생태적 균형을 잃어버린 모양새다. 메이는 생태계 생물들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록 생태계가 불안정해진다고 본다. 특히 그 관계 중 벼리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종이 있다면, 그 종의 사라짐이나 증대로 인해 생태계가 깨져버릴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성이나 복잡성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공진화의 양상이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생태계에 불안정한 이유는 생태계의 구조가 단순해서가 아니라는 관점과 일치한다. 대신 해충이나 기생충이 작물과 맺는 공진화의 관계가 무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해충이 나타나면 살충제로 박멸시키고, 다시 내성을 갖춘 해충이 발생하는데, 해충과 내성제 싸움에서 작물들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공진화를 함께 하지 못하고 해충과 전염병에 약하게 변모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보완하는 측면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GMO라 여겨진다. 하지만 GMO는 공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또다른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곳곳의 농업은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살충제와 살균제를 사방에 뿌려대고 있다. 오직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이다. 즉 경제적 이윤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적 피해로 인한 손실은 농업의 득실 계산에서 빠져있다. 땅의 황폐화와 수질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농부의 장부 어디에도 기록되어져 있지 않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천을 유지하고 플랑크톤과 수초를 잘 자라도록 만드는 활동은 경제적 활동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없이는 결코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을 수가 없다. 농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태적 활동까지 포함하는 경제학이 바로 생태경제학이다.

 

우리의 농수산업도 이런 생태경제학점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 지구온난화 속에서 지속적 농업과 어업이 가능하기 위해선 당장의 눈앞 이득만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경제에 대한 수고를 인정해주는 제도가 정착되어야지만, 우리는 먼 미래 우리 자손들에게도 풍부한 농수산물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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