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 속의 뼈 -상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대산출판사(대산미디어)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는 많이 봤지만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에 익숙하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영상이 떠올랐다. 아~ 이건 이렇게 표현이 되겠군 하며 그의 묘사 실력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처음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전혀 연관이 없을 듯한 이야기들이 하나 둘 씩 얽혀들고 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서 그 결말을 향해가는 과정이 정말 숨막히게 전개된다. 초반부 조금은 지루한 듯 펼쳐지던 주인공의 심리상태는 초현실적 존재와 부딪히면서 점차 그 긴장의 강도를 더해간다.

소설은 미국의 역사 초창기 시절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한 마을사람들간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유대라는 것은 유대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배타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그 것을 침해하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기 마련아니겠는가?

실은 사회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울타리 사이사이마다 수많은 문들을 만들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런 문이 없이 모든 걸 삼켜버릴 때 비극은 탄생하게 되고 그 비극은 복수로 화하여 울타리의식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게 된 것이 바로 소설 속 사라가 아닐까?

복수나 사랑이나 인간의 감정이란 때론 워낙 강렬해서 그 삶의 길을 어디로 흘러들어가게 할련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바로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영웅전설 1 - 여명편 은하영웅전설 1
다나카 요시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서울문화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은하영웅전설 1> 2001년 1월 15일

SF 삼국지

SF소설이라는 게 대부분 재미만을 추구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마광수 교수가 말하는 하수도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 재미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재미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이 그야말로 유치한 구성과 설정에 있다면 정말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재고해 봄직하다.

그런 측면에서 <은하영웅전설>은 삼국지만한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니 재패니메이션의 한 획을 긋는 에반게리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은하제국과 동맹에서 각각 한명의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웅이 되는 과정이라든가 개인적 캐릭터의 차이는 단순한 대립차원을 넘어 여러가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웅이라는 것은 개인적 의지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구조적 압력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삼국지의 유비). 그리고 영웅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괴로워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에반게리온의 신지) 영웅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또한 이런 캐릭터의 우수함 이외에도 우주로의 확정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보다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가령 자전, 공전 주기가 서로 다른 여러행성들간에 시간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다시 한번 지구라는 공간에 위치한 인간의 사고 개념의 유한정성을 생각하게끔한다.

아직 2편까지 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이 책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날 보고 있자니 과연 결말로 치닫는 과정에선 또 얼마나 책속으로 빠져들어갈지 상상이 간다.

<은하영웅전설 10> 2001년 3월 13일

민주공화정에 대한 찬가

이 소설은 많은 부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게 빚지고 있다. 독재자에게의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심리상태는 결코 우리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앞에 나서서 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생각, 고민없이 그저 주어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설속의 얀 웬리라는 주인공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살기좋은 전제정치제도와 살기 어려운 우민정치로 이어지는 민주공화정 중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갈등상황이다.

로엔그람 왕조의 패도정치가 그 썩은 내를 더해가면서 라인하르트라는 새로운 독재자와 얀 웬리라는 민주공화정 지지자의 두 정부로 우주는 나누어진다. 라인하르트는 전쟁에 있어 천재적 수완을 발휘하고 덧붙여 민심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반면 얀 웬리는 항상 인간적 고민에 둘러싸여 있는 고뇌하는 인간이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라인하르트 못지않은 수완을 발휘해 명성을 얻는다. 특히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전쟁에 앞장서야하는 얀은 그야말로 모순속에 살아가는 인물로서 소설 속 주인공중 색다른 묘미를 준다. 우주는 라인하르트에 의해 평정되고 민주공화정의 싹은 얀의 희생으로 부활의 씨앗을 품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은 계속해서 민주공화정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치제도라고 주장하지만 한편에선 우민정치로의 전락을 두려워하교, 또 진정한 지도자의 표상, 즉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독재자가 나온다면 그 정치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는냐는 고민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에게 지루한 관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전투씬 만큼이나 절절하게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의 힘을 가져다주고 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재패니메이션이 가져다 주는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체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 앤,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외계에서 온 것처럼 엉뚱한 사람들. 물론 그들이 나를 보는 눈길도 마찬가지일련지도 모른다.

그들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손바닥만한 것이라 어느새 반대편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쿤데라는 이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축장에서 송아지를 죽인다고 법석을 떠는 사람은 없다. 송아지가 인간의 법테두리 밖에 있듯이 타미나도 아이들의 법 테두리 밖에 있었다.(P246)

이 테두리, 경계선의 증가는 점차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 그 소통의 부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됨을 의미하고 급기야 모든 사람들이 작가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그렇기에 국경을 넘어 들어온 탱크는 모기같을 수밖에 없고 옆집의 사과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나의 경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망각을 가져온다. 잊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것은 없다. 나의 정체성은 실로 나의 기억들이 아니던가? 또, 세상의 웃음이란 경계가 서로 충돌할 때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도구가 된다. 웃음과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경계속에 사는 이들이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것을 그 경계의 차이로 인해 오해를 갖게 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기억하자. 웃음으로 어색함을 달래지 말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경계선을 인식하자.

왜 사냐면 웃지요

그 경계선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기를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 그림 찾기 1 - 1998년 제29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윤기 외 / 조선일보사 / 1998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법. 관계라는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 대는 모습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톱니바퀴속의 한 이빨이 되어 다른 이빨들과 함께 다른 톱니바퀴와 엇물려 있을 때만이 자신의 자리에 제대로 서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고 있을 때엔 자신이 그 속에 속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톱니바퀴중 한 이빨이 빠져 삐걱거릴 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 이빨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된다.

함정임의 <내 마음의 석양>과 전경린의 <밤의 나선형 계단>에서는 남편이 죽거나 직장을 잃음으로써 발생하는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잘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덜덜 거릴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했던가? 나의 마음속의 한 공간을 차지했던 것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인가가 대신 채워지겠지만 그 변화는 결코 쉽게 적응되어지지는 않으리라.

어렸을 적 몇년을 키웠던 개가 사라지던 날 혼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자신을 지탱해주던 그 무엇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험이 꼭 혼란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 빔으로 인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를 찾아갈 수도 있을테니까.

각기 다른 소설은 이런 혼란과 자아찾기를 보여주고 있다.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이들의 방황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고.(P5)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실은 안정된 삶이 아니었던가. 경제적 어려움을 없애줄 수 있는 직장과 심리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일상이라는 것, 가끔은 탈출하고 싶긴 하지만 결국엔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즐기는 일탈들. 그러기에 주인공의 독백은 참으로 놀라웠다. 순간 나의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가는 충격이 거의 메가톤급이다. 위태위태한 삶을 즐기겠다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위태위태한 삶이란 그다지 놀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안다. 그는 결국 밖으로 드러나는 위태로운 삶을 즐긴것일 뿐 진정 그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런 위태로움을 바란 것이 아니었음을 듣게 되니까.

나는 하늘을 가릴 지붕없이는 살수 있지만 내면과 외면 사이의 평정을 확립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P87)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맨처음 고백이 그냥 헛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삶 그자체가 우연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기에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우연이라는 사건앞에서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은 내가 그런 위태로운 삶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은 아닐련지 모르겠다. 주인공 자신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만나는 과정이 모두 우연처럼 다가오고 그 자신의 삶 전체가 이런 사건 속에서 이젠 그런 우연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과율은 이제 더 이상 우주를 지배하는 숨은 재판관이 아니었다.(P93)
어떤 것도 절대로 당연시해서는 안돼. 특히 나같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을 때는.(P163)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한 켠엔 나도 조금은 위태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숨어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조그만 마음이 실은 나를 살아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것은 아마도 주인공에게 감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 우연에 대한 매혹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