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넷플릭스 드라마 4부작, 총 160분 정도로 보통 영화 1편보다 살짝 긴 정도. 스웨덴. 실화 바탕. 원작소설 각색, 스웨덴의 한 마을에서 8살 아이와 50대 여자가 한 곳에서 동시에 칼에 찔러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16년 간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집념 어린 형사가 새롭게 등장한 DNA족보학자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 이 사건은 스웨덴 역사상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수사력이 동원되었다. 외로움은 죽음을 불러오는 병이자 죽음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범인과 형사, 피해자의 가족과 목격자까지 사건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세심하게 살핀다.
2. 북유럽의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사실에 흥미가 갔다. 소위 살기 좋은 나라라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곳에선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시리즈 속에 비쳐진 모습 속에서는 스웨덴만의 독특한 삶의 풍경을 찾아보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였다. 축구클럽의 성황, 의무교육의 절대성?(족보학자의 딸이 학교를 결석하자 족보학자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선 결코 결석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을 건넨다. 실제 스웨덴에서는 홈스쿨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슷비슷한 집의 규모와 풍경 등을 얼핏 엿볼 수는 있었다.
3. 독일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스웨덴어의 낯설음이 드라마 초반 집중력을 잃게 하지만 이내 화면 속에 집중하게 된다.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두 가족과 담당 형사의 사건 당일 아침 풍경이 교차 편집되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목격자도 있는데다 혈흔을 통한 범인의 DNA까지 확보해서 범인은 쉽게 잡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격자는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만 간다. DNA대조를 위해 프로파일링을 통해 밝혀진 15~30세 남성의 DNA를 확보하려 하지만,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 DNA를 확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최면요법으로 겨우 범인의 몽타쥬를 작성해 배포하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16년이 흘렀다. 이제 이 이중살인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넘어갈 날이 멀지 않았다. 담당형사 욘은 최근 40년 만에 사건을 해결하게 도움을 준 DNA족보학을 알게되면서 마지막 희망을 건다.
4. 시리즈는 담당 형사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쏟다 가족 간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막 태어난 아기와 부인을 돌보지 못하면서 별거에 들어가고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피해자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민자 가족으로 살인 사건의 피해가 도리어 인종차별로까지 이어지면서 이사까지 가게 된다. 목격자는 기억나지 않는 범인의 얼굴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어떻게 이 파장으로부터 힘들어 하는지를 과장되지 않게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관심을 갖고 힘을 쏟아야 할 부분들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5. <브레이크 스루>라는 제목처럼 이 사건을 해결하는 돌파구는 DNA족보학이다. 시리즈 후반부에선 이 족보학에 꽤나 시간을 들이지만, 짧은 설명만으로 족보학의 의미를 알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시리즈 속 족보학자가 족보학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면서 화를 내지만, 좀처럼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다. 족보학자가 자신이 밝혀 낸 범인이 틀리면 어떡할 지 고민하는 모습 속에서는 학자로서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6. 올해 발표된 케임브리지 연구에서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이 건강을 악화시키며 그 원인이 단백질에 있다고 밝혔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과 연관된 단백질이 있으며, 이로 인해 수명까지 단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레이크 스루>의 범인은 사회적 고립 상태에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전화통화와 문자 등 타인과 소통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스웨덴에서는 이런 사회적 고립을 특히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족보학자의 딸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야단치는 행동에서 보여지듯 말이다.
실제 스웨덴을 포함해 노르딕 국가에서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것을 중시한다고 한다. 얀테의 법칙은 평범함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나 개인적으로 야심을 품는 행동을 부적절하다고 본다.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1등을 칭찬하지도 꼴등을 비난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사적인 성공보다는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무한경쟁사회에서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는 대한민국에서 눈 여겨 볼만한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단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게 지나쳐 개인이 설 자리가 빈약해지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과 사뭇 다른 길을 걷는 나라들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외로움이라는 병만큼 무한경쟁이 가져다 주는 병리적 현상도 못지 않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