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넷플릭스. 2시간 25분. 액션. 어디서 본듯한 복수활극과 액션에 핏줄기만 솟구친다. 5점/10점(별 2개 반)


2. 섀도우라는 암살자 집단에서 암살 훈련을 받고 있던 13은 일본에서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인도네시아 자택에서 대기하라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한 범죄집단에 의해 어머니가 죽고 소년 혼자만 남는 일이 발생한다. 13은 소년을 위해 복수에 나선다. 한편 섀도우 집단 내에서도 명령을 거부하고 집단을 탈출하려는 세력이 등장한다. 13의 사부는 상대를 알지 못한 채 이들을 제거하러 나선다. 


3.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3의 복수극과 13이 속한 섀도우라는 집단에서 발생한 반발. OTT 라는 속성 때문일까. 영화 초반의 액션 퀄리티가 가장 좋다. 일본 사무라이들과의 대결이 펼쳐져서 자칫 일본영화인 줄 알았다. 초반의 액션 이후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다시 액션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액션 장면이 너무 자주 등장하다보니 몰입이 되기보다는 조금 지겨운 느낌마저 든다. 게다가 몇 장면에서는, 특히 자동차 질주 장면에서는 차가 천천히 또는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편집 속도를 높이거나 카메라 워킹으로 속도감을 주려 하는 것이 티가 날 정도. 왜 이런 몇 장면을 다시 찍거나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완성본에 넣은 건지 의문이 든다. 


4. 머뭇거리다. 이 영화가 그나마 볼만한 지점은 바로 머뭇거림에 있다. 13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것은 살인의 대상이 아닌 자의 등장으로 인해 머뭇거린 탓이다. 13의 사부가 자신의 조직 내부의 반란을 제압하는 와중에 머뭇거림이 발생하는데, 13은 머뭇거림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녀의 사부는 머뭇거림을 없애려 한다. 이때의 머뭇거림은 상대를 죽이라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킬러가 생각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명령에 따르는 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자각하는 신호로 여겨진다. <섀도우의 13>이 현란한 액션으로 뒤범벅 되었음에도 지겨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냥 게임을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만약 이 머뭇거림이라는 요소를 이야기 전반에 잘 녹여내어 풀어갔다면, 좀 더 흥미진진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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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었던 여름 탓인지 농사를 짓는 하우스에서는 병해충 피해가 심한 듯하다. 특히 벌레들의 피해가 커서, 노지에 키우는 배추와 무에도 성한 것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집에 들어앉아 방에 앉거나 누워 있을 때 이 벌레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집 안에서 이 벌레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설령 이 벌레들이 있다고 한들 사람을 괴롭힐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집에 있으면 벌레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여름밤 잠을 청하려 누우면 어디서인지 몰래 다가온 모기의 날갯소리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여름이 지난 지금은 파리가 성가시게 군다. 책이라도 한 장 읽을라 치면, 이제 막 집중해서 문장을 쉬이 쉬이 넘나들려는 찰나 귓가에 날갯소리를 드리우거나 눈 앞에 어른거려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모기처럼 피를 빨아 먹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모른 척 하면 가끔 자리를 떠 다시 평온을 되찾지만, 이 평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또다시 찾아와 내 몸의 오감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침범해 들어와 자극한다. 결국 책을 읽는 등의 하던 일을 멈추고 파리채를 집어 든다. 내가 원하지 않는 오감을 자극한 벌로 쫓고 쫓기는 관계로 바뀐다. 파리는 날래어서 쉽게 잡히지는 않지만, 모기만큼은 아니다. 계속 날아다니거나 어디 숨어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내려앉는 경우가 많아 파리와의 추격은 결국 파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파리가 불러온 간단한 사건 사이에는 이성이 들어갈 틈이 없다. 신경을 거스린다는 나쁜 기분은 곧바로 응징을 결정한다. 


혹시 지금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갖가지 변명이나 설명으로 치장되어져 있지만, 파리와의 관계처럼 즉각적 응징으로만 대처하는 일은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만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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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플릭스. 126분, 전쟁, 액션영화. 서걱서걱 모가지를 베는 칼날에 드리워진 날 선 감정. 별 넷.(8점/10점)


2. 양민이었지만 빚으로 인해 노비가 된 어미로 인해 자신마저 노비가 되어버린 천영(강동원)은 조선의 최고 무신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 집안에서 같은 또래의 종려(박정민)를 대신해 매를 맞는 몸종이 된다. 천영은 매를 피하기 위해 종려의 검술을 지도하고, 둘은 신분을 넘어 친분을 다진다. 성인이 되어 무과에 매번 떨어지는 종려를 대신해 천영이 시험을 치르고 장원급제를 한다. 하지만 면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종려는 천영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하다. 이즈음 왜란이 일어나고 종려는 선조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된다. 천영은 종려 집안을 뒤집어 엎은 노비들의 사태를 뒤집어 쓰고, 의병이 되어 맹활약을 펼친다. 호위무사와 의병으로 맞부딪히게 된 천영과 종려는 서로에 대한 앙금을 품은 채 서로에게 칼날을 겨눈다. 


3. 천영의 꿈은 면천이다. 원래 노비가 아니었기에, 노비가 아니고 싶었다. 대리시험을 치른 것도, 종려의 집에서 도망을 친 것도, 의병활동을 한 것도 모두 면천이라는 목표가 있어서다. 천영의 이런 개인적 욕망은 의병활동을 함께 했던 의장군 김자령이 그의 공을 보답받지 못하고 역적으로 몰리는 것을 보며, 개인적 욕망의 울타리를 깨고 나온다. 당시 정여립의 대동계처럼 모두가 동등한 사회를 꿈꾸며 범동계를 꿈꾼다.


4. 종려는 자신의 가족, 집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자신의 칼날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는 크게 상관없다. 선조의 울화통 터지는 명령에도 서슴없이 백성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종려가 백성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 천영은 의병으로 왜군을 향해 칼날을 드리운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영화를 끝까지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간다. 


5. 하지만 <전, 란>의 백미는 선조에 있다. 어디 감히 '임금과 백성이 같다'라고 할 수 있냐?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에 사로잡힌 선조는 오로지 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백성의 목숨은 헌신짝 처럼 버려진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백성이 피폐해도 오직 왕권을 드러내기 위한 궁궐 복원에만 혈안이다. 철저하게 세상의 중심은 왕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선조의 만행은 울분을 토하게 만든다. 이 선조의 너무나도 얄미운 말투와 행적을 차승원이라는 배우가 멋드러지게 해낸다. 개인적으로 <전, 란>의 주인공은 선조였다. 그리고 이 선조의 행위를 통해 지도자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만든다. 백성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며, 우리를 분통 터뜨리게 만드는 지도자는 결국 대동단결한 백성의 힘으로 끝끝내 내쳐질 것임을. 


6. (쟁)은 우리를 황폐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이 되느냐의 여부는 그 황폐한 현실을 추스리는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을지도, 또는 황폐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백성들의 염원에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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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폴란의 다큐 <COOKED 요리를 욕망하다> 첫 편의 '불'에 이어 '물' '공기' '흙' 2~4편을 모두 보았다. 


인류가 불을 이용해 음식을 먹게 됨으로써 뇌의 발달과 음식 소화시간을 절약해 문화생활에 쓰이게 되었다는 내용의 1편에 이어 2편에 등장한 것은 '물'이다.

불로 고기를 굽는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펴져 있는 가장 간단한 요리 양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이 요리의 맛은 세계 어디에서나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어떤 고기를 어느 정도의 불의 세기로 얼마만큼 구웠느냐에 따라 맛은 다르겠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요리를 확장시키게 된 용기의 발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요리'의 발달을 가져온다. 용기를 사용함으로써 요리에 사용되는 식자재 간의 섞임으로 전혀 새로운 맛이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고기라 하더라도 그 고기에 어떤 향신료 또는 다른 고기 등등을 집어 넣는지에 따라 요리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자재의 섞임에는 물이 큰 역할을 한다. 식자재를 조화롭게 섞도록 도와주는 요소로써 물이 작용하는 것이다. 요리란 섞임의 미학이며, 이 섞임이 가능토록 한 것은 바로 용기와 물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요리에서는 이 식자재의 섞임 이외에도 다양한 화학적 조미료와 화학제품 등이 뒤범벅되고 있다. 정말 전혀 알지 못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재료가 등장해 가공식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등장은 진정 요리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의 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3편은 '공기'다. 요리에 공기라고? 3편을 보고나서도 고개가 약간 갸우뚱거리는 것은 4편의 '흙'과 혼동되어서다. 3편 공기라는 요소의 핵심 음식은 빵이다. 곡물을 갈아 물과 소금 정도만 섞어 두어도 공기 중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반죽은 부풀어 오른다. 이 반죽을 구우면 크기는 더욱 커지고, 그 안에는 기포, 즉 공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공기로 인해 빵의 맛은 다양해진다. 그 양 또한 증가한다. 공기가 가져오는 맛과 양의 풍부함은 절대 끊을 수 없는 빵의 매력이 된다. 하지만 이 빵의 매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반죽이 발효가 되어 공기가 차기 위한 시간 말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스트를 빵에 넣는다. 또한 자연 그대로 주어지는 다양한 맛이 아니라 인위적인 맛을 위해 밀, 물, 소금 이외에 다른 식자재나 첨가물을 이것저것 집어넣기 시작했다. 현대적 빵은 전통적 빵의 건강함을 잃어버리고 효율이라는 이름 하에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건강함의 상실을 글루텐에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다. 


4편은 '흙'이다. 흙 속에는 다양한 미생물이 살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마이크로바이옴의 세상이다. 이 미생물들이 음식을 발효시켜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만들어 준다. 저장할 방법이 없었던 과거에 음식을 오랫동안 먹을 수 있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발효는 영양성분의 풍부함과 맛의 다양성까지 가져왔다. 음식물의 미생물은 우리 사람의 몸 속 미생물과 어우러져 건강함을 유지시켜 준다. 하지만 잘 발효되지 않은 음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현대의 가공식품이나 초가공식품들은 발효식품이라 하더라도 이런 독성을 없애기 위해 살균의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위험을 없앤 대신 천연의 발효가 가져다 준 깊은 맛과 풍부함을 상실했다. 

발효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술이다. 인류가 곡물을 키운 것은 굶주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술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점차 호응을 얻고 있다. 


마이클 폴란이 살펴본 진정한 요리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슬로푸드인 듯하다. 이것은 요리의 속성 차원이고, 요리를 하는 이유는 더불어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사회적 차원에도 큰 의미가 있다. 요리하지 않는 현대인, 부엌이 필요없는 집. 이는 요리가 노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가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을 회복한다면 요리는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유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집마다 요리하는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가 퍼져나오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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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예능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가 장안의 화제다. 요리라는 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시들지 몰라, 시기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레시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먹방으로, 이어 여행의 주요 목적으로서의 맛집 탐방에 이어 이젠 경연의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그나마 요리라고 해봤자 반조리가 된 간편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왜 요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거운 것일까. 이런 똑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욕망하는 식물> 등의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폴란이다. 마이클 폴란의 이런 의문을 가지고, 요리의 기원과 문화,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요리를 욕망하다>라는 책을 2014년에 냈고, 2년 후 다큐멘터리로 영상화하는 작업을 했다. 


책과 다큐는 모두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가지 주제를 챕터로 구성했다. 1부는 불로, 요리의 시작이 불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인간이 유인원과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요리하는 인간부터라는 리처드 랭엄의 '요리 가설'을 소개한다. 랭엄은 <요리 본능>이라는 책을 쓴 학자로, 인류가 음식을 불로 익혀 먹음으로써 먹고 소화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 그 남은 에너지를 뇌로 보내어 뇌가 발달하고, 또 남는 시간에 문화 등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불로 익혀 먹는 요리의 시작은 원재료를 그대로 굽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동물의 사체를 우리가 먹는 행위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해체된 고기가 아니라 통으로 된 사체를 구워서 나누는 과정을 통해 문화가 형성되어진다. 즉 고기를 굽는 동안 불 주위에 모여 앉은 이들이 사냥의 과정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 익은 고기를 서로 나누어 먹음으로써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바비큐를 먹는 행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께 먹는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불멍을 통한 치유와 나눔을 통한 연대가 불로 구워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요리의 시초는 불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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