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시민으로 사는 법 - 농촌, 귀농 컨설턴트 정기석의
정기석 지음 / 소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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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이란 농촌으로 가서 먹고 살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농사를 짓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농사짓기는 경험이 재산인 경우가 많다보니 도시에서 쌓아온 경력은 거의 쓸모가 없어진다. 또한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단절을 통한 재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이 농촌에서의 삶의 방식으로 이어지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농은 어렵고도 힘든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밖에도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삶의 행태나 교육, 의료, 문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도 결정을 더디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귀농이 꼭 농사만 짓고 살아가는 방식이어야만 할까. 농촌도 하나의 마을이라면 그 마을을 구성하는 사람들 모두가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지않을까. 즉 마을에서 마을시민으로 사는 것은 다양한 직업들로 구성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어우러지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런 고민이 이 책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을 관통하고 있다.

 

한씨는 귀농이 아니라 귀촌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장난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은퇴자들의 전원생활을 뜻하는 그런 의미의 귀촌도 아니다. 귀농이 단순히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마음 자세로 농부가 되는 것을 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농사짓지 않는 귀농인, 농촌공동체 재건에 소용이 될 만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인력들이 농촌공동체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178쪽

 

즉 도시에서 쌓아왔던 기술과 경력을 사장시키지 말고 그 능력을 살리는 귀촌의 방식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그런 가능성이 있는 24가지 생활형 귀농법을 제시하고 있다. 대안학교 교사, 농산촌유학 활동가, 교육농장 교사, 문화예술인, 공예가, 작가, 농업회사원, 농식품가공 사업자, 농산물유통상, 마을사무장, 마을조사원, 마을컨설턴트, 시민사회단체활동가, 풀판 언론인, 농정공무원, 생태마을 운동가, 농촌사회복지사, 마을 성직자, 농촌형 사회적 기업가, 로컬푸드 사업자, 도농교류 사업자, 생태건축가, 대안기술자, 생태쉼터 운영자 등등이다.

물론 이런 형태의 귀농이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규모가 이루어진 곳이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또한 공공단체와 원거주자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수많은 갈등들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만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이런 생활형 귀농자들을 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생활형 귀농이 생계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분명 도시에서의 수입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경우가 많을 것이며, 지속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철저한 준비와 마음자세,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생활형 귀농 또한 사람농사이기 때문이다.

농자천하지대본. 그 본이 된다는 것은 보람차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님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꼭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농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마을을 풍성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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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에도 자격증이 있다 - 귀농 창업 농업인의 필독서
곽해묵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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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5년 팔공산 자락으로 30대에 귀농해 신지식농업인이 된 한 농부의 해외농업연수기다.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일본, 말레이시아 등의 연수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사이사이 자신이 귀농해서 지금까지 겪었던 생활을 풀어놓고 있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현재 우리 농촌이 처한 환경과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를 조금은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자립으로서의 귀농이 아니라 비즈니스로서의 귀농, 즉 농업을 통한 창업 또한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를 실감케 한다. 그리고 자립농이든 기업농이든 농촌에서 삶을 정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인간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먼저 글쓴이가 바라본 농업의 흐름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농업도 노동집약적인 농업에서 자본집약적인 농업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느꼈다. 즉 경제소득 작물인 벼 재배는 70년대에 증산왕시대가 마감되고 80년대의 시설채소 등장, 90년대 기계화 영농에 이어 IMF 이후 축산농가의 규모화와 21세기 들어와 생산과 유통은 물론 관광농업을 포함한 비즈니스 농업으로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37쪽 

 

이는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뭇가뭇한 기억이지만 그는 농촌이 체험관광지로 변모해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대로 선진국의 농업형태는 많은 부분이 체험화, 관광화 되어 있다. 이책 <귀농에도 자격증이 있다> 내용 중 해외 연수부분은 체험관광 형태에도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상은 평야지대는 기계화 영농의 기업농으로, 그 외 지역은 생산, 가공, 유통, 관광농업을 아우르는 6차 산업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84쪽

 

위에서 언급했듯 관광농업과 함께 농촌의 또다른 생존 대책으로 글쓴이는 기업농을 말하고 있다.

나는 세계화 시대에서 열악한 환경의 우리나라 농업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가족 농을 단위조직으로 세분화 전문화로 연합된 기업농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79쪽

가족노동력 중심의 한국농업은 작목반과 영농조합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산지유통센터로 규모화와 집단화, 그리고 효율화로 기업형 농업으로 발전하여야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177쪽

현재 시장유통의 흐름이나 대형유통업체는 안전한 친환경 농산물의 산지규모화와 품질규격화, 상품의 균질화 및 유통단일화로 경쟁력 있는 친환경농산물산지유통센터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67쪽

 

글쓴이는 이와 같은 상황 판단으로 작목반과 영농조합 등을 만들고 산지유통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애써 왔다. 하지만 사람들간의 알력과 갈등이 발생하면서 끝내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루 20시간씩 일해오면서 구축해온 일들이 인간 사이의 균열로 인해 무너져내린 것이다. 뜨거운 열정과 헌신이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비즈니스라는, 경제적 이익을 놓고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소작농 형태의 자립농사를 위한 귀농인들은 이런 갈등으로부터 조금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많은 책들 또는 글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충고하는 말이 있다. 바로 마을에 녹아들어라,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귀농의 형태가 되었든 그것이 생존 또는 생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귀농의 절망도 희망도 모두 사람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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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3-01-23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염원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과정쯤이라고 생각해주시면 ^^;
언젠가 한 수 배우러 갈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아기는 역시 부모를 닮는 법(?)인가 봅니다. 고집이 얼마나 센지 ㅜㅜ

윤대권 2013-06-11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곽대표님 그렇게 좋은 책을 펴내사고 바쁘신 와중에보람있는큰일을 하셨네요 곽대표님 같은분이 계시기에 우리농업도 희망과 발전을 기대보 는것 아닌가 쉽네요. 그열정으로 못이룰일 무엇이겠습니까.용기 일치마시고. 원하시는바 꼭이루시길...
 
귀농 길잡이 - 자연을 그리워하는 땅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귀농 길잡이
전국귀농운동본부 엮음 / 소나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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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귀농인구가 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그 증가추세는 더할 기세다. 그런데 귀농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중매체에서 가끔 접할 수 있는 부농에 대한 접근법이다. 즉 농사를 직업의 하나, 그것도 블루오션의 하나로 바라보는 것이다. 도시에서 창업을 하듯 농사를 잘만 지으면 억대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도시민의 직업이 농업으로 바뀌었을뿐 삶의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 두번째는 시골을 별장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유롭게 은퇴한 사람들이 건강도 챙길겸 시골에 내려와 텃밭을 가꾸는 것이다. 마치 TV 프로그램 잘먹고 잘사는 법에나 나올 법한 사례들 말이다. 세번째는 자립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는 삶의 대변혁을 의미한다. 도시의 무한경쟁과 소비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할 수 있는 즉 자립할 수 있는 대체적인 삶을 바란다.

이책 <귀농 길잡이>는 세번째 관점에서 농촌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책이다. 앞서 귀농한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담이 녹아져 있다.

먼저 농사를 짓기 위해선 4W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4W란 Way, Water, Worker, Wife다. 즉 맹지가 아닌 길이 난 땅을 구입해야 하고,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하며,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고,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 네가지가 갖춰진 후에는 의식주, 의료, 교육에 있어서 자급자족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옷을 직접 지어입는 것은 너무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에 염색 정도만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먹는 것은 쌀의 경우 논 한마지기 200평당 3가마 즉 3인 식구가 먹을 만한 양이고, 부식으론 간장, 된장, 김치를 담아먹을 정도, 밭은 400평 정도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살 집은 헌집 고치기부터 시작해 단열이나 태양열을 이용한 집짓기, 빗물 저장통과 같은 에너지 순환을 생각해 직접 짓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뒷간은 이것이 거름으로 활용해야 하므로 부숙이냐 발효냐에 따라 그 종류를 결정해야 한다. 의료는 우리 전통의 뜸과 침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들 교육은 대안교육이나 홈스쿨링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 완벽한 자급자족이 안될 경우나, 재해 등을 대비해 약간의 여유로움을 얻는 방법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생계+a를 위한 돈벌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시에서 귀농한 사람들은 친지나 지인들을 활용한 유통망 확보를 공고하게 해야 한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유기농이나 태평농법과 같은 안전한 농산물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덧붙여 가공을 생각해볼 수 있다. 농가공은 크게 장류와 효소, 차로 나눠볼 수 있겠다. 알음알음 팔 게 아니라면 식품제조업 허가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다.

이 책은 귀농을 위해선 삶의 철학을 점검해보고, 근본부터 바꿔나갈 용기를 갖추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론 모종이나 벌키우기, 콩심기 등등 아주 구체적인 작물키우는 법 등이 나오고 있어 길잡이라고 하기엔 한발 앞서 나가 있는 내용들도 있어 당혹스럽게 만든다. 농사가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농사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작도 해보기 전에 겁부터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읽어볼 필요는 있다. 또한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농작물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일구어진 것인지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부자되기를 권하는 사회, 부자만 되면 모든게 달라질 것 같은 세상, 하지만 그 부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누군가는 가난해야 큰 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제도(행운의 편지같은 제도)들을 뒤로하고, 직접 몸으로 흙과 사람들을 만나는 길을 택한다는 것. 그것이 귀농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첫발을 내딛는게 조마조마하다. 머리로는 시멘트를 벗어나 흙을 향해 걷고자 하나 아직 발이 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첫발을 떼는 법을 조금이나마 다양하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힘내라 한다. 그래, 스스로 서는 법을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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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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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사람은 평범하고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 15쪽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인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을 신처럼 숭배하기 떄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자본주의와 같은 세속적 신학을 포함하여 모든 신학적 사유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공통된 목표였으니까요. 53쪽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ㄷ르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천주교 성당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누구나 성당이란 공간이 내뿜는 강렬한 힘을 느낍니다. 이런 공간에 적응해가며 천주교적 인강, 일종의 종교적 인간이 탄생하게 됩니다. 77쪽 

두가지 종류의 개인주의.양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비록 수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인간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 존재가 됩니다. 사실 이 같이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성을 인정했기 떄문에 칸트의 정언명령, 무조건적인 도덕명령이 가능했습니다. 칸트의 윤리적 명령에ㅓ 중요한 것은 보편적 입법자라는 개념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마치 잣니이 국회의원인 양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이나 입장에 근거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칸트의 주장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는 내용에서나 형식에서 보편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짐멜에게 자유란 내 자신이 어떤 타인과도 구별되고, 이러한 구별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양적 개인주의 가 아니라 질적 개인주의르르 옹호한 니체의 편에 섰지요.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는ㅇ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한다. 니체가 볼 떄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칸트의 양적 개인주의에 대해 본성을 거역하는 도덕, 즉 반자연적 도덕이라고 보았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95쪽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며 ㄴ다음과 같습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 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7쪽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은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짐멜이 대도시의 삶에서 보았다너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ㅇ                                                                                                                                                                                                                                                                                                                                                                                                                                                                                                                                                                                                                                                                                                                                                                                                                                                                                                                                                                                                                                                                                                                                                                                      인 셈입니다. 따라서 짐멜이 니체를 통해서 긍정하고자 했던 질적 개인주의는 인간이 새로운 역사로 나아갔다는 진보의 표시로 보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자유가 실현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생산의 차원이 아니라 소비의 차원에마 ㄴ국한된 문제이기 떄문입니다. 99쪽

산업자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상품만을 구매하면, 잉여가치를 얻겠다는 산업자본의 끝없는 욕망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이 가능해졌습니다. 119쪽 

벤야민이 보기에 인간은 신화적 사유에 익숙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유는 당연히 자본주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인식론적 장애물이 됩니다. 벤야민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고 싶었습니다. 최신의 사유로 보이는 것도 사실 너무나 낡은 사유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준다는 진보와 행복이란 관념이 신화적 사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했습니다.126쪽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상품이 교환됩니다. 그러나그 교환의 이면에는 상품에 대해 돈이 갖는 존재론적 우월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다른 것보다 절대적 우월성을 갖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요. 자본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상품에 대한 돈의 존재론적 우월성으로 드러납니다. 돈이란 그 액면가에 해당하는 모든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절대적 힘을 상징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미래라는 시간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166쪽 

벤야민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오히려 종교성 자체에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태고시대부터 인간을 지배했던 종교 논리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만약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기능할 수 없다고 보았지요. 도박에서 판돈을 잃었어도 자신을 탓할 뿐 결코 룰렛을 탓하지는 않는 경건함. 자본주의 종교성의 신비는 바로 이런 장면들 속에 고스란힌 담겨 있습니다. 179쪽 

문명의 세계, 즉 도시의 삶에서는 객관적 시간이 무척 중요합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분업화되고 복잡하기만 한 도시에서 사람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항상 만날 시간과 장소를 객관적으로 정해야만 합니다. 이 떄문에 도시에서의 삶은 각자의 체험된 시간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210쪽  

화폐경제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능하고, 미래를 염두에 둔 시간관념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식 속에서 미래의 소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현재를 통제하며 조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의식이 지닌 전형적 특징입니다. 214쪽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습니다. 전자본주의적 인간에게 미래란 가능성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만 이해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미래에 나는 파리의 센 강에 있을 테고, 만약 체코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나는 미래에 프라하의 야경을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래할 그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로 이어지는 순환에 비유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1쪽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동경 혹은 동양적 사유의 회복은 일종의 노스탤지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는 대도시에서 지친 도시인들이 시골이나 전원의 삶을 꿈꾸는 정서적 동기를 공유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과연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현재 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낳은 폐단들을 치료하는데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237쪽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상근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자본주의 체계의 문제점들에 대해 숙고하고 여론을 형성할 만한 힘을 갖게 됩니다. 244쪽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떄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254쪽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이렇게 웃음은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행동, 혹은 일상에 대한 조롱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웃음에는 혁명적 힘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유연한 생명의 운동을 긍정하는 반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를 거부하는 무의식적 행위의 하나이기 떄문입니다. 261쪽 

칸트에 따르면 진선미의 세계는 우리의 관심이 이론적 관심, 실천적 관심, 아니면 무관심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269쪽  

칸트 철학을 독해할 때 우리는 그의 철학이 근대사외의 한 특징인 직업의 전문화 및 세분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선미의 구분을 통해서 칸트는 전문화된 직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전문직 종사자들, 즉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그런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대부분 부모나 가족의 역량에 따라 후천적으로 재생산된 것입니다. .. 부르디외는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는 대작을 내놓습니다. 이 책을 통해 부르디외는 노골적으로 칸트의 미학이 추구하던 순수성을 비판합니다. ... 부르디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부르주아 계층뿐입니다. 왜냐하면 무관심하게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는 이미 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학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칸트의 순수 미학이 아닌 혀재 대중미학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대중에게 아름다움은 감각적 쾌적함이나 윤리적 메시지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론 부르디외는 대중 미학만이 진정한 미학이라고 보지 않아ㅏㅆ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름다움이란 물질적 조건을 다르게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느 ㄴ점을 강조합니다. 상류 부르조아 계급처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자신 이외의 지시 대상은 갖고 있찌않은 이미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면, 노동자 계급은 모든 미적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에 ㄸ라라 취향이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미학 논의를 통해 칸트의 미학이 결코 보편적이거나 유일한 미적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 것입니다. 275쪽 

부르디외는 미적 성향, 즉 취향의 차이가 어떤 계급이 자신을 다른 계급으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미적 취향은 혈연같은 선천적 요인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서서히 획듭됩니다. ...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 구역질난다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ㅇ르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ㄱ솨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라고 하더라도, 돈 만으로 이 세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세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 상류사회의 성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떄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286쪽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계급적 아비투스의 전형적 사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적 취향이 그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입니다.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는 것입니다....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되었지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사실ㅇ느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모든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사업자본을 상품화한 것에 지나짖 않는다는 점입니다 291쪽 

여러분의 현재 노동은 미래의 월급이라는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 같은 시간 의식은 기독교의 시간의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선ㄴ 현재를 고통의 순간,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괴로운 순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심판 논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미래의 그날을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간주하겠지요. 300 쪽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닏.ㅏ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느 ㄴ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직 됩니다. 이에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하지만 이미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자시느이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303쪽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ㅇ르획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가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328쪽 

산업자본은 계속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사용가치의 세계에 매몰됐다면 산업자본은 상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장 가동ㅇ르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달성할 ㅅ 없겠지요. 하지만 상품에 기호가치를 계속 새롭게 불어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자본은 이런 위기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ㅅ김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점은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ㅎ녀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의식 말입니다. 또한 이런 피해 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깁관도 함께 깔려 있지요.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ㅇ느소수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그런 소수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은 바로 부르디외가 말한 귀족적 취향에 대한 욕망과 같ㄷ고 볼 수 있습니다. 333쪽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발닳나 진정한 이유는 사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베버가 생산 부분에서 드러난 금욕주의적 태도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계기를 찾았다면 좀바르트는 소비 부분에서 나타난 인간의 사치와 허영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339쪽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숩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욕망조차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포획된 것에 지나지 ㅇ낳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치명적인 문제겠지요. 더욱 심각한 것은 소비사회라는 호나각의 사회에 포섭되면 우리가 더는 이렇나 상황을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지 ㅇ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산업자좁주의라는 체계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역량이 소진되기 때문이지요. 보드리야르가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349쪽 

소비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유대감을 소비자들 사이의 경쟁적 허영심으로 변질시킵니다. 이에 휩쓸린 소비자들은 자기과시의 치열한 소비 경쟁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연대의 전망을 잃고 고립된 개인들로 산산이 분해되고 맙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최근 산업자본의 경향입니다. 산업자본의 소비 논리는 이제 한 인간의 내면마저도 산산이 쪼개어 분열증적 소비 촉진의 경향으로 심화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아내로서의 자아, 어머니로서의 자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아, 동창 모입 성원으로서의 자아 등드응로 쪼개질수록 한 개인이 소비하는 상품의 목록은 금나큼 거질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비사회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연대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통일성마저도 가능한 분해햐려는 것입니다. 352쪽 

분업과 전문화를 통해 산업자본은 우리가 가진 야성과 잠재 능력을 오나전히 무력화합니다. 산업자본의 필요에 따라 우리 능력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전문화하고 규격화해왔기 때문이비낟. 물론 그 대가로 일정기간 고소득을 보장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우리가 배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 없다고 판단함ㄴ, 산업자본은 냉정하게 하루아침에 우리를 해고해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기술을 낡고 하찮ㅇ느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산업자본의 끊임없는 변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참 낡아버린 지식이나 기술만을 가진 그들, 노숙자가 되거나 사회로부터 폐기처분된 사람들은 이제 농사를 지을 수도 그렇다고 고기를 잡을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시골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연에서 살아갈 삶의 기술을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느 ㄴ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업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를 파편화하고 길들이는지 그리고 우리의 노동과 소비가 어떤 위험한 논리를 내포하는 지 잘 모릅니다. 심지어 우리는 산업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고 착각할 정도입니다. .. 자본주의하에서 돈은 분명히 자유라는 감정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자유의 감정, 두려움 없는 당당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구매할 자유, ㅅ즉 이러한 소비의 자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절히 생산할 수 있는 생산의 자유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생산의 자유란 결국 자본가 자신이 독점하느 것이지요. 363쪽 

보드리야르가 제안한 사물의 네 가지 서로 다른 논리. 다이아몬드. 도구, 상품, 상징, 기호일 수도 있다. 도구는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도리 수 있다. 도구로서의 다이아는 사용가치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실제적 작용의 논리 혹은 유용성의 논리라고 설명. 상품의 측면에선 1억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등가의 논리나 거래의 논리에 따른다. 상징의 측면.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다. 1억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다.혹은 다른 상품과 바꿀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 교환과는 다르다. 다이아를 나 선물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대방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교환의 논리. 양면성의 논리. 증여의 논리. 마지막으로 기호의 측면.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번째 측면. 다이아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다. 신분의 논리를 따른다. 기호의 측면이 앞서 말한 상품의 측면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 과환가치가 높으면 높을 수록  고가의 상품일수록 구매자의 더 높은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다. 이는 고가의 제[품을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과시하려는 허영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이다. 384쪽 

사실 도구 상품 기호라는 사물이 가진 생산주의적 측ㅁ녀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활을 윤책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사물의 측면들입니다. 하지만 상징아로서 타인에게 주는 선물 혹은 타인으로부터 뱌ㅏㄷ은 선물은 주는 사람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정신과 생활의 만족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 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물의 상징적 측면은 공조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주의적 만남의 장으로 이끌 수 있기 떔누이다. 386쪽 

체계는 그것이 개체 수준이든 아니면 사회 수준이든 간에, 과잉 에너지를 아낌없이 소모해야만 그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제안한 일반경제의 핵심 논리입니다. 389쪽  

과잉 에너지는 반드시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전쟁이나 사치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증여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394쪽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던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심시숙고행랴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대문이지요. ㅎ나편 지금 삶의 고통은 순간적일 뿐이고 사후에는 영원한 복락의 삶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ㅇ느 니체에 의해 강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삶의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은ㄹ 순간적인 것이라고, 다시 ㅁ라해 일회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테에 따르면 현재가 고통으로 가득할 경우 그 고통은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담녀 으느 누가 현재의 고통을 해소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참고 인내하려고만 하겟습니까.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기독교의 염세주의적 세계관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413쪽 .. 이 대목에서 저자본주의적 아비투스에 관한 부르디외의 통찰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분명 다르지만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반란과 폭동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새로운 사회에 대한 합리적 기획,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대안이 될 수 잇다는 막연한 생각을 애초에 거부했던 것입니다. 414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업도 하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음녀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문제 대문에 고진은 지금 생산 소비 협동조합이라는 또 다른 삶의 양식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반자본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일종의 생활 공도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 소비 협동조합이라는 공동체는 우선 화폐에 대한 시앙을 거부하는 성격을 띠ㅐㅂ니다. 화폐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돈으로 댜ㅏ른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의미하지요. 결코 돈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이 공동체에서는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잉여가치를 남기는 자본가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역교환 거래제도.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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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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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는 단순히 일본의 한 농부가 농약과 비료 없이 사과를 재배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식이라고 불리는 고정관념을 깬 한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고, 현대 농업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지적됐으며, 농업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자연주의 생명철학이 녹아 있다. 특히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는건 사과가 사과를 낳는 기계가 아니라 사과를 선물해주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장면이다. 농약과 비료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현대농업은 화학적 공업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만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1. 겪어보면 알겠지만, 바보가 되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 하지만 죽을 마음을 먹을 정도라면 그전에 한번 바보가 되어 보는 것도 좋아. 똑같은 생각을 품어 본 선배로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한 가지에 미치면 언젠가는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  31쪽 

계속되는 유기농 사과재배의 실패로 기무라씨는 파산 직전에 몰리고 자살까지 생각한다. 파고 파고 또 팠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도 그는 문제를 놓지 않았다. 역자가 말한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포기한 순간에 찾아온다 246쪽) 바대로 그는 한계 바로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이 끈질김이 결국 유기농 사과 재배의 성공을 가져왔다. 그것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을 쌓아 나갈 필요가 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으로 새로운 뭔가에 도전할 때 , 가장 큰 장벽이 되는 것 역시 그 경험과 지식이다. 144쪽 
 

2.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 없애면 사과나무가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159쪽 
 

그는 사과나무가 죽어가는 건 순전히 병이나 벌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과 벌레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른 이름의 농약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그런데 이 깨우침의 과정은 내가 아토피를 앓으면서 얻게 된 깨우침과 다소 비슷한 측면이 있다.  

흔히 아토피를 음식 알러지나 진드기 알러지, 또는 면역체계 이상반응으로 본다. 그래서 알러지를 생기게 하는 음식이나 진드기를 피하는 것이 주된 처방법이 된다. 이것은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는 생각과 닮았다. 내 몸이 건강하다면 실은 아토피도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태어날 때부터 어떤 특정하고도 불균형한 장기를 가지고 있기에(한의학에선 모든 사람들의 장기가 불균형하다고 보는 것 같다. 사상체질이란 이런 불균형이 만들어낸 차이일 것이다. 이런 불균형을 균형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체질이 될 것이다) 발생한 병이라면 그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유가 될 것이다. 사과나무가 강해지기 위해선 건강한 흙이 필요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건강한 흙이 필요하다.
 

3. 덫을 치우고, 수확할 때마다 이 빠진 옥수수를 모아 놓기로 했지. 그 후로 너구리 피해는 거의 사라졌어. 그걸 보니까 인간이 몽땅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피해를 입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따지고 보면 원래는 너구리 서식지였던 곳을 밭으로 만들어 버린 거잖아. 먹이를 주면 너구리가 더 많이 모여들어 밭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 정말 신기했지. 자연의 불가사의함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자연은 인간의 계획대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군.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그 무렵이 효율만 따지던 농업에서 벗어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어. 57쪽 

자연은 그 자체로 완결된 시스템이다. 사람의 도움 같은 게 없어도 초목은 무성하게 잎을 맺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시스템에 손을 댐으로써 인간에게 편하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는 행위가 곧 농업이라고 후쿠오카는 말한다. 비료를 주면 보다 큰 열매를 맺는다. 해충을 죽이면 보다 많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비료를 주고 해충을 없애는 방법을 발달시켜 왔다. 그것이 거듭된 결과, 농작물은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종의 석유 화학제품이 되어 버렸다. 68쪽 

4. 자연을 도와주고 그 은혜를 나눠 받는 거지. 그게 진정한 농업이야. 232쪽 
 

그렇다면 진정한 농업이 이 땅에 가득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생명체 운동이 결실을 맺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 이런 공동체들이 학교, 병원, 군대 등 단체의 급식을 책임질 수 있도록 판매망을 확보한다면 흙이 살아날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기무라씨는 보다 간단한 듯 하면서도 어려워보이는 방법을 제시한다.  

현재 상황에서는 어려울지 몰라도 언젠가는 자기들이 하는 방법으로 만든 작물을 농약이나 비료를 준 농작물과 경쟁할 수 있는 싼 가격에 출하시킨다. 그것이 기무라 씨의 꿈이다. 가격에 큰 차이가 없다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무농약 무비료 농작물을 택할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일반 농가들도 진지하게 무농약 무비료로 농작물을 재배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236쪽 
 

5. 농약이나 비료를 안 주면 사과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현대인은 농약이나 비료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도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234쪽 
  

화학연료 없이는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세상. 그런데 그 화학연료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화학연료를 대체할, 말 그대로 대체에너지를 개발할 것이라는... 그러나 그 대체에너지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에너지는 아무런 부작용 없이 무한하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만 한다. 기무라씨의 자연 농법이 거든 수확이 농약과 비료를 쓴 사과의 수확과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약해빠진 사과나무는 농약과 비료를 필요로 하고, 농약과 비료를 쓴 농부는 중독의 위험에 빠지고, 그것을 먹은 소비자 또한 오염의 위험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농약과 비료를 만드는 사업체며, 병원이며, 종자회사이며 대형유통회사일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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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는 해충도 익충도 없다. 기무라 씨는 너무나 당연한 그 진리에눈을 뜬 것이다. 인간이 해충이라 부르는 벌레가 있기 떄문에 익충도 살아갈 수 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있기 떄문에 자연의 균형은 유지된다. 거기에 선악은 없다. 병이나 벌레의 극심한 창궐만 하더라도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의 활동이 아니던가. 187쪽 

테루아를 보면 비옥한 밭보다 오히려 척박한 토지에서 자라난 포도가 최상의 와인이 되는 일이 적지 않다. 포도나무가 부족한 영양분을 찾아 지하 깊숙이 뿌리를 뻗음으로써 포도는 토양 속의 다양한 미량의 원소를 섭취해 향이나 맛이 훨씬 복잡하고 깊은 맛을 내게 된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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