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1
최인훈 지음 / 문이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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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아니면 공동체의 규범, 또 좀 내려오면 역사의 법칙 그런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길흉화복과 조화를 한손에 쥐고 있는 존재거나, 법칙이거나, 어떤 소식이 발하는 목소리,그것이 뒤돌아보지 말라의 세계다. 그런데 그런 존재나 법칙이나 소식이 모두 희미해졌거나 이미 간곳 없어 보이는 시간을 사는 시대 인간은 어쩌면 좋은가 -p530

<과거는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오히려 얼마나 인간이 과거에 집착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즉 과거에의 <기억>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비단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결코 망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기억에 대해 뒤돌아봄으로써 만이 다시 과거로의 퇴행을 막을 수 있을뿐더러 보다 나은 앞으로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의 작가 자신의 뒤돌아보기이며 20세기의 뒤돌아보기의 시도라고 여겨진다. 일제시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역사의 회오리속에서 살아간 자신의 운명이 해방후 개인적 상반된 두 경험에 의해 전 생애가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공동체의 삶 자체의 두 흐름이 아닐까 회상하는, 그의 개인사는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개인사에 그대로 투영되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동체적 감정>과 <공동체적 이성>사이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써만이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지닌다는 생각(p357)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이다. 그러나 이 감정과 이성사이의 통합이 무너짐으로써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고 있는 현실의 나로서는 과거로의 퇴행을 막기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이 길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나는 그 길 위에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동물이 먹이를 사냥하고 새끼를 낳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아무것도 다른 게 없음을 몸서리치도록 자각하게 만든다, 이 책은. 정녕 나에게 주어진 이 화두를 짊어지고 나 또한 내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한번쯤 뒤돌아본 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조그마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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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1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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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소설은 읽는 순간 나 자신이 역사의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다. 여기서 사실적이라 함은 그것이 실제 사건을 다루었다거나 묘사가 현실적이라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바로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말투 하나하나가 소설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강>은 우리의 역사를 읽어내는 대중적 시선보다는 그 소설속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들 자체에 애정을 갖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천두만은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였으며 그들의 아들 딸들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왜 그토록 아버지께서 쌀밥을 좋아하시는지, 왜 아들들이 고시를 봐서 합격하기를 기원하는지, 얼핏 이해하면서도 왜 <그토록>인지는 사실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느끼게 됐다. 왜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이 자식들이 바라볼 때 <그토록> 권력지향적이며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누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살아남는다는 것이 최대의 지상과제이기에 인간다움에 대해 돌아볼 수 없었으면서도 어느 순간 왜 인간답게 살아야하는지를 깨우치고 그것을 향해 두려움없이 나아가는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를 얼핏본다.

아버지의 주름이 결코 세월만이 가져다 준것은 아니라는 것을 책을 덮는 순간 깨우친다. 역사는 결코 역사책에 쓰여진 것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의 주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던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옳고 그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작가가 얼마나 그들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지는 실감할 수 있다. 작가의 애정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제부턴 우리의 아버지세대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또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월이 어떤 것인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조정래의 소설은 그러기에 한없는 사랑의 손길로 더듬어 보는 가족앨범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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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 작가정신 소설향 8 작가정신 소설향 23
성석제 지음 / 작가정신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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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가 주창한 <하수도 문화>는 경건주의 엄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문학이라는 것이 꼭 교훈을 준다거나 지식을 전달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억눌려진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면 그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온 문학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직된 그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에게도 일종의 자유를 심어준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의 이번 <호랑이를 봤다>라는 소설은 하수도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드는 생각,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난 소설을 잘못 읽었음을 알았다. 도대체 이 소설이 뭘 이야기하려 한 것일까 생각한 순간 나는 벌써 소설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마실나가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감정, 성석제의 소설은 바로 그 감정을 가져다준다. 해학가득한 농짓거리를 한바탕 듣고나서 실컷 웃고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책 표지의 그림처럼 호랑이의 실체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저 꼬리만 보이면 그것만 쳐다보고 오면 된다. 꼬리의 실체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책으로 행하는 즐겁고 유쾌한 마실을 또 한번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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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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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원히 나방을 이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가 가능한 것은 궤도를 이탈한, 비정상적인 인간들끼리다.(P220)

이상은 나에게 신비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신비스럽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범주를 뛰어넘은 곳에 거처하고 있어 다가설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야만 한다. <꾿빠이 이상>은 이 신비한 세계를 한꺼풀이라도 벗겨보고 싶은 요량에 집어들게 됐다. 그리고 책이 말하고자 했던 진짜와 가짜(책은 이상의 데드 마스크와 오감도 제 16편의 진위여부와 맞물려 이야기가 진행된다)의 사이를 넘어 과연 존재란 무엇인가를 되새김질 하게 됐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김태익은 이상의 전집에서 드러나는 단어의 빈도를 통해 독보적인 위치에 선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단어의 빈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책 중간중간 마치 주인에게 잊혀지지 않으려고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나타나는 '변형'이라는 개념에 눈길이 갔다.

데포르마숀(변형)은 원래의 성질이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물이 얼음이 되고 아이가 아버지가 되고 김해경이 이상이 되듯이 (P147)

데리다가 얘기했듯이 우리가 어떤 뜻을 찾기 위해 사전을 찾았을 때 우리는 해설된 말 중 또다른 단어를 사전으로 계속해서 찾아야 하고 그것은 미끄러지듯 유영하다가 결국 처음의 단어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즉 처음 단어의 원래 뜻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등반에서의 링반델룸과 같다. 귀신에 홀린듯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상.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몇번의 변주를 거치는 동안, 애초의 주제 프레이즈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됐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처럼 애당초 무엇때문에 벽돌을 쌓는지는 잊어버리고 단순히 거기 벽돌이 있기 때문에 벽돌을 쌓는 것처럼(P220)

그렇다. 우리는 지금 무엇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잊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마저 갖지 못하고 살고 있을지도. 우리가 그나마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그 첫자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거대한 설계도가 있고 그 설계도의 일부분을 조금씩 변형시킨 것이 <오감도>를 비롯한 이상의 시 작품인 셈이다. (P181)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의 설계도를 기억해내야만 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는 설계도를 쳐다보았을 때야 비로소 알아낼 수 있다. 얼마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는지를. 그 궤적을 이탈해서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이제 새로운 설계도를 구상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다시 그 설계도의 변형에 갇혀 같은 자리에 서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설계도를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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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과 조지 그리폰 북스 12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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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

판타지 소설을 이제서야 조금씩 접하는 입장에선 그 책의 장점이 무엇인지, 매력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조차 힘에 버겁다. 그저 재미있게 읽어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한편엔 이 소설이 도대체 이 장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보다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조금 차지하고 있다.

<드래곤과 조지>라는 책은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 얼치기 독자인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재미로만 읽히는 책이었다. 정말 가볍게 손에 들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톨킨의 <반지전쟁>이 보여준 공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장르소설이었다.

나에게 있어선 무협지라는 것도 <영웅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즉 <영웅문>을 독파한 이후 <영웅문>의 틀을 벗어난 그 어떤 괜찮은 무협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을 보고나서 SF 소설을 다 읽어버렸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반지전쟁>이 보여준 환상적인 인물들과 모험, 갈등과 그 해결의 방식은 그대로 <드래곤과 조지>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 말은 그만큼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미이지 비난의 뜻은 전혀 없다. 다만 항상 새로움을 구하는 독자의 입장에선 무엇인가 새로운 요소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용과 기사, 말하는 늑대(재패니메에션 원령공주가 생각난다), 신궁에 가까운 궁사 등 그 상상의 매력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실토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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