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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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좀 믿음이 간다. 나는아무튼, 외국어』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요가』, 『아무튼, 방콕』까지 몇 권을 읽었는데, 모두 다 좋았다.


『아무튼, 연필』은 아무튼 연필에 대한 이야기다. 취미와 덕질의 한계를 넘어 나라별로, 제조사별로 제작된 연필의 역사와 판매 경향뿐 아니라, 소장각을 부르는 희귀템에 대해서도 전문가다운 지식이 엿보인다. 연필 덕후라면 더 좋아할 만한 책이다. 연필에 대해 1도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으니 말을 더할 필요가 없다.



나는 여성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나는 세상을 보통 사람의 시각, 즉 남자의 시각이 아닌, 여자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게 됐으니까, 그렇게 읽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 먹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녀의 기운에 대한 이야기나 넬리 블라이를 말하던 저자의 사수 이야기는, 피할 나위 없이 여성의 이야기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성주의로만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여성적경험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어도 인구의 반 이상이라면, 도대체 이것은 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을 왜 보통 사람의 이야기라고 전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 싶은 말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얌전히 남겨둔다.  



혼자이고, 공기의 흐름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낮에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연약한 연결점이 사라진 새벽, 잠드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 되면 나는 거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돌기 전까지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이 힘들면 창이 보이는 곳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픈 사람에게는 창이 신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온통 기도다. 기도는 원래 책상 서랍 속에나 넣어두던 것인데...  (108쪽) 



말하고 싶은 건 이거 하나다. 나는 작가를 모르고, 그의 삶에 대해 모른다. 나는 그가 써 내려간 만큼만, 그가 종이 위에 고백한 만큼만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고단했던 삶.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의 삶에 대해 읽으면서, 그의 인생 고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외부적인 변화와 내부적인 변화. 환경의 변화와 신체의 변화가 부정적이라고 할 만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한다. 나는 세계를, 외부를,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비교적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망이 내 속으로, 내 과거로, 내 맘속으로 쳐들어오면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바보인 나는, 멍충이인 나는 그냥 죽어야 한다. 이 작은 책이라는 우주 속에서, 세계를 향한 원망과 나에 대한 후회의 저울이 갸우뚱거리면서도 계속해서 균형을 잡아가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날 이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면서도, 어쩌면 그게 내 실수일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다시 보는 것. 다시 사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



그래서, 나는 연필의, 연필에 대한, 연필을 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용기를 얻었다. 오늘을 살고, 다시 또 살아가게 되고. 후회를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고.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큰애의 필독 도서 중 하나였던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을 꺼내놓고, 둘째 아이 연필 쥐는 법 고쳐준다고 구입했던 스타빌로 이지그래프(오른손)를 쓰다듬는다. 아무튼, 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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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20-10-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연필보다는 만년필이 좋아요, 아무튼, 만년필! ㅎ

단발머리 2020-10-29 10:55   좋아요 1 | URL
저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아무튼, 만년필이라고 하고 싶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만년필하고는 친해지기 어려울거 같아요. 사실, 연필하고도 가끔만 만납니다. 저는 삼색볼펜을 좋아합니다. 아무튼, 삼색볼펜!

2020-10-29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10-29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연필 저도 다 읽었어요. 사유하고 건질 것들이 정말 많아서 다시 읽어야겠다 싶은!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_도 궁금해서 도서관으로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튼, 샤프! 입니다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0-29 13:11   좋아요 0 | URL
전 이번에 읽을 때 줄도 안 치고 읽었거든요. 한 번 더 읽고 싶어서요, 비밀 이야기 같으면서도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아무튼 샤프!! 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카알벨루치님은 <아무튼, 만년필>을 수연님은 <아무튼, 샤프> 이야기를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2020-10-2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0-2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연필을 주로 사용합니다...

4B루다가. 전동연필깎이도 있는데
그건 110V라 변압기가 필요하네요
ㅋㅋㅋ

연필의 사각거림, 쵝오지요.

단발머리 2020-10-29 13: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연필님이 드디어 오셨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연필 1도 모르는데 이 책 읽다가 여러 연필들이 정말 탐나더라구요. 나무나 모양, 흑연 종류 이런게 중요하다고 하대요.
제 생각에도 역시나 사각거림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각사각!!!

공쟝쟝 2020-10-2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너무 의외로 좋은 책이네요??! 저도 어쩌다 보니 아무튼을 읽고 있어요 ㅋㅋ 특히 운동 분야로 ㅋㅋ 이번 기회에 다른 장르 아무튼도 파봐야겠군여... 서걱서걱 연필

2020-11-01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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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레 케르테스는 운명 4부작’ 『운명』,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청산』의 저자다. 『운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나이트』(엘리 위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프리모 레비)에 이어 네 번째로 읽는 홀로코스트 이야기다.

 


열네 살 소년 죄르지 쾨베시는 노동 봉사 명령에 따라 체펠 섬으로 일하러 가던 중, 유대인은 내리라는 명령에 따라 버스에서 내린다. 이 곳, 저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큰 도로에서 만나게 되고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보내진다. 그들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지나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다시 차이츠 수용소로 보내져 노역을 하게 된다. 쾨베시는 그날의 노동 뒤 점호 전까지 잠깐의 휴식 시간을 온종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견뎌낸다. 독일 나치군의 패전으로 일 년 만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오지만, 강제 동원된 아버지가 죽은 것 같다는 소문과 새어머니가 가게 일을 돌봐주던 쉬퇴 아저씨와 재혼했다는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쾨베시에게 비극이 찾아왔던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유대인이라는 공동체에게도 너무나 가혹했던 비극은 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 일어난다. 일상적이고 평범했던 어느 날, 삶을 송두리채 휘몰아치는 거대한 비극이 시작된다.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났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도 생각났다. 엄마아빠가 따로 챙겨준 용돈을 지갑에 넣고 친구들과 셀카를 찍으며 즐겁게 떠났던 3 4일 제주도 수학 여행길에서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 했다. 어른보다 습도에 민감한 아기를 위해 일부러 구입한 가습기 살균제가 예쁜 아기의 폐를, 몸이 약해진 산모의 폐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다시는 눈 뜨지 못했다. 쾨베시에게도 비극은 그렇게 찾아온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 유대인들만 버스에서 잠깐 내리라는 경찰의 안내. 한없이 착해 보이는, 약간은 어리숙한 경찰관. 경찰관의 손짓에 그를 남겨두고 출발하는 버스. 그렇게 지옥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또 한 가지는 비극이 완성되어 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강제 노역에 처해지는 혹은 그대로 가스실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비극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떻게 참아냈을까.

 


나는 그에게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고 깨끗하고 멋진 역에 도착하는 것이 정말 생소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이해된다. 하나의 단계를 거치면 다음 단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단계를 거치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을 이해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일을 처리하고 살아가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새로운 단계마다 새로운 요구 사항을 완수해 나간다. (269)

 

 

유대인임을 확인하는 노란별을 외투에 달고, 통행 허가서를 발급받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자신 명의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다. 강제 노역 동원령에 따라 집합 장소에 모이고, 기차를 타고 수용소에 도착한다. 화장터로 향하는 길에서도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신발끈을 묶어 신발이 따로 돌아다니지 않게 한다. 나중에 찾기 편하도록 옷을 걸어둔 옷걸이 번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외우고, 비누를 받아 샤워실로 들어간다. 그 곳은 샤워실 일수도 가스실 일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진다. 하나의 단계를 거치면 다음 단계가 이루어지고, 각 단계마다 해야하는 일을 하다 보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게 비극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 사람들은 최후까지 알아차리지 못 한다. 되돌이킬 수 없는 항구적인 정지 상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극은 완성된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수용소 생활에 대한 차분하고 객관적인 묘사, 독일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후반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행복에 대한 고백을 통해 저자는 독자들이 대신 화내게 하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분석한다(295). 내 생각은 다르다. 임레 케르케스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온전한희생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절대악에 희생당한 완벽하게 순수한 피해자. 스스로를 그렇게 이해한 유대인들에게 극악무도한 독일 나치군의 범죄와 행복이라는 단어는 절대 공존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아들과 딸을 화장터 굴뚝 아래에서 잃어야했던 유대인들이 엄혹한 수용소 시절에도 작은 행복을 느꼈다고 말하는 임레 케르케스에게 분노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고, 때가 되면 밥을 먹게 된다. 미안하게도, 너무 사치스럽게도 커피가 마시고 싶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게 된다. 어떻게든 그 시간을 견뎌야 하고 버텨야 한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284)

 


참혹한 과거를 잊으라는 사람들에게, 잊어야만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임레 케르테스가 말한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경험한 일들, 나의 과거가 내 운명입니다. 우리 자신이 곧 운명입니다.

 

그의 말을 따라해본다. 내 과거가 바로 나에요. 내 인생이 내 운명이구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된 거에요.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운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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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2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서는 숭고한 것이지만 과거를 잊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말에서 성숙한 영혼을 봅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0-09-25 20:09   좋아요 1 | URL
명백한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있어야겠지요. 작가는 자신에게 다가온 절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다시 밤이 되었네요. 파이버님도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0-09-25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한 이십년 전에 읽은것 같거든요. 물론 다른 판형이었죠. 홀로코스트에 대해 다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응당 분노가 타올라야 할것 같은데, 덤덤한 분위기라서 책장을 덮고 나서도 흐음, 뭘까, 뭘까 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읽는다면 제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어요.

단발머리 2020-09-25 20:14   좋아요 0 | URL
20년 전이라면!?! 정말 아주 예전이네요.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먼저는 저자의 담담한 어조 때문인 것 같고요. 그런 구절도 있거든요.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인것 빼고는 참 사람들이 깔끔하고 정직하고 괜찮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이 다락방님처럼 이거 뭐지? 라고 반응하거나 유대인처럼 아니, 이게 뭐야!! 하면서 분노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때와는 다른 게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Falstaff 2020-09-2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르테스의 작품 중에서 읽기에 제일 수월했습니다. 작가가 어떻게 썼든지간에 그냥 종이에 적혀 있는대로 읽었는데요, 세상에 하도 많은 사람이 있어서, 이런 소년도 있었구나, 뭐 그런 식으로요.
사실 당시, 1944년도에 10개월 동안 부헨발트에서 소년이 살아남았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케르테스는 기적이었던 걸로 압니다. 당시 부헨발트의 코흐 소장의 아내 ‘일제 코흐‘는, 유대인의 가죽을 무두질해서 책의 장정을 하고, 전등 갓을 만들고 하는 엽기적 취미가 있던 여자로, 2차 대전 이후에 ‘아돌프‘란 남자와 함께 ‘일제‘라는 여자 이름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게 했을 정도니까요.
저는 그런 상처를 지닌 작가가 소년 시절을 되돌아보며 될 수 있는대로 딱 본 것, 느낀 것만 솔직하게 쓰지 않았을까, 했었나봅니다.

단발머리 2020-09-25 21:31   좋아요 0 | URL
Falstaff님은 케르테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셨군요! 이 책이 비교적 쉽게 읽히는데 그 점이 사람들을 좀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좀 담담하고 무미건조하다고 할까요?
전 ‘일제 코흐‘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들었는데, 그녀가 부헨발트의 코흐 소장의 아내인줄은 몰랐어요. 케르테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군요. 제가 읽었을 때는, 그래도 아우슈비츠보다는 나았구나, 라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사람들이 내게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라는 작가의 말이 전 오래 기억에 남더라구요. 딱 본 것, 느낀 것만 솔직하게 쓴게 아닐까, 라는 Falstaff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Falstaff 2020-09-25 21:17   좋아요 0 | URL
오, 단발머리 님, 이왕 홀로코스트 소설 읽으신 목록에 아쉽게도 <소피의 선택>이 빠졌습니다. ^^;;
그냥 한 번 읽어보세요. 읽고 난 다음에 괜히 읽었다, 라고 생각하시면 즉각 저한테 말씀하세요, 책값 물어드릴께요.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9-25 21:31   좋아요 0 | URL
오홋!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대로 <소피의 선택>을 꼭 찾아 읽어볼께요.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안네의 일기>와 비슷하네요.
괜히 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지만 혹여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결단코, 반드시, 꼭 Falstaff님께 말씀드리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25 22:50   좋아요 0 | URL
그럼요, 책 읽는 작자들한테 책에 관해 농담은 없는 겁니다. ㅋㅋㅋㅋㅋㅋ 정말? 이라고 묻지 마세요. ㅋㅋ

단발머리 2020-09-26 15:54   좋아요 0 | URL
<소피의 선택> 표지에서부터 아주 인상적이네요. 작가 이름도 처음 들어봤어요. 윌리엄 스타이런이 또 올해의 선택이 될까 기대됩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기 바래요, Falstaff님!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부클래식 Boo Classics 64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은자 옮김 / 부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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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는 <이집트인 모세>,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 <모세, 모세의 백성과 유일신교> 세 개의 논문을 묶은 책이다.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증거로 J. H. 브레스티드(Breasted)의 저서를 인용하며, 그의 이름, 모세가 이집트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모세의 추종자들로서 이스라엘 종교 의례의 수행자들인 레위인들에게서 이집트 이름들이 나타났다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 증거로 제시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집트의 젊은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가 집권해 한 나라 한 민족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보편신이자 유일신인 아톤을 섬기는 종교를 주창했는데, 그의 사후 아톤교는 폐지되고 이집트에서는 다시 다신교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의 측근 중 토트메스(Thothme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은 이름의 뒷부분이 모세(mose)이기 때문이다. 그는 몇 세대 전 이주해온 셈족과 접촉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집트의 풍습인 할례를 징표로 삼고 유일신 사상을 주창하며 그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모세는 이집트의 고위층 중의 한 사람이며, 이집트의 종교와 풍습을 유대인들에게 이식한 사람이다.

 


성서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모세의 특징을 그리고 있다. 성서는 모세를 화를 잘 내고 성미가 급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유대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잔인한 감독관의 행위에 분노한 나머지 그를 때려죽이는가 하면 백성의 배교에 격분하여 시나이 산에서 가져온 율법 판을 깨뜨려버린다. 결국 하느님은 모세의 어떤 조급한 행동에 벌을 내리지만 어떤 행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48)  

 

 

프로이트가 정말 모르고 있는지, 어쩌면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알기에 모세의 어떤 조급한 행동은 바로 이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던 그 순간, 즉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시점부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냈다. 모세 역시 인간인지라 불편한 감정이 쌓여가던 찰나, 한 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했다. 사막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냥 물이 필요하다고 불평한 게 아니라, 너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다, 곡식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않고 마실 물도 없는 이 곳으로 왜 우리를 이끌어냈냐, 하면서 한참 불평의 피치를 높여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이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회중과 가축을 먹일 수 있으리라하셨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백성에게 보여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모세도 이번에는 단단히 화가 났었는지 백성들을 모아 놓고는 이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마하고 바위를 치는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회중에 내가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민수기 20 1-12) 모세의 어떤 조급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책망을 듣는 장면은 바로 여기다.

 


 

첫 번째 머리글을 쓸 당시 나는 가톨릭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오스트리아에 있었고, 이 논문을 출판하면 교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동료나 제자들에게 작업 금지령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내심 두려웠다. 그러던 중 독일이 갑작스럽게 침공해왔고, 가톨릭교는 성서 용어로 말하자면 흔들거리는 갈대임을 보여주었다. 나의 학문적 신념뿐만 아니라 이제는 내가 속한 인종이 문제가 되어 박해받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어릴 적부터 78년이라는 세월 동안 살던 고향 도시를 떠났다. (84)

 

논문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류의 책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보통 논문을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쓰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은 프로이트 문체만의 특징인지. 새로운 주제에 대해 연구자들이 갖는 불안감이라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겠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껴 고향을 떠날 정도의 압박 속에서도 계속 연구에 정진하는 노령의 프로이트를 상상할 때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쉬운 점은 이런 대목.   

 


다른 민족보다 자신들이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총애를 받는 민족이라는 믿음과 자신들의 슬픈 운명의 지독한 체험을 융합하는 것은 이 민족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의심하며 괴로워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죄책감을 강화함으로써 신에 대한 의구심을 억눌렀다. (94)

 


유대인 선민 사상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최근에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던 Falstaff님의 <요셉과 그 형제들> 리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거처를 빼앗기고 오랜 시간 동안 뿔뿔이 흩어져 세계를 떠돌았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선민 의식이 그들만의 공동체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의 모습은 똑똑하나 철없는 요셉을 떠오르게 한다. 



알라딘 리뷰를 살펴보다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책을 읽고 반박하기 위해 쓴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이라는 책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는 절판된 책이라 중고책을 주문해야 하는데, 『오리엔탈리즘』을 반밖에 읽지 못한 1인은 고민이 크다고 한다.    






고로 오늘의 선곡은 <When you believe from The Prince of Egypt>. 1998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는데, 영화 속의 모세는 이집트 궁전에서 미래의 파라오와 형제로 자랐으나 자기 민족의 해방을 위해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로 그려진다. 물론 그는 유대인이다. 하지만 당대 최고 제국의 왕자였던 그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이집트 왕자'라는 제목을 사용한 듯 한다.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였던,이 아니라, 진짜 이집트의 왕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난 오랫동안 머라이어 캐리를 좋아했고 또 지금도 좋아하지만, 이 영상에서는 휘트니 휴스턴이 너무 좋다. 머라이어 캐리를 바라보는 휘트니 휴스턴. 언론은 끊임없이 두 사람의 불화설을 만들어냈지만, 글쎄. 난 저 눈빛에 더 신뢰가 간다. 머라이어 캐리를 바라보는 휘트니 휴스턴의 눈빛. 지지와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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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1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람세스] 읽을 때 모세 얘기 나왔었어요. 파라오의 절친인 모세가 그러나 파라오가 믿으라는 신을 안믿고 자기 신을 믿는거에요. 그래서 파라오가 ‘내가 믿으라는 신을 믿으라니까?‘했지만, 모세는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장면이었죠. 바다가 갑자기 갈라지는 걸 성경에서는 기적이라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람세스에서, 그걸 제부도 물 때가 되면 빠지듯이 그렇게 빠졌던 거라고 설명햇던 것 같아요. 물론 책에서는 제부도 안나옵니다... 갑자기 람세스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폴스타프님 서재에서 단발머리님이 요셉 이야기 하신 거 읽었었는데요, 여기에도 나오네요? 요셉과 저는 좀 특별한 인연이 있어요. 뭐냐하면, 국민학교 4학년 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할 때, 제가 아기예수 임신한 마리아 역이었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셉이 제 남편이었답니다? 그 때 6학년 오빠가 요셉 역을 했었는데, 연극 연습을 하다가 그만 우리는 서로 좋아지고 말았어요......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그리고 저도 이 책, 되게 어려울 것 같지만, 성경도 안읽어봤지만, 그래도 읽어볼래요!

단발머리 2020-09-15 13:53   좋아요 0 | URL
[람세스] 시리즈잖아요! 5권짜리지요? @@ 다락방님은 이미 읽으셨군요. 모세의 기적과 제부도 이야기는 참 기막힌 연결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해안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거기가 제부도군요. 저도 가서 함 체험해보고 싶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요셉은 진짜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웬만하면 폴스타프님 읽으신 <요셉과 그 형제들> 읽고 싶거든요. 집필기간만 13년에 토마스만이 자기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아, 순서를 기다리는 책들 때문에 아무래도 당장은 어려울 듯 합니다. 다락방님과 요셉은 진짜 특별한 인연이에요. 전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 성극에서 마리아는 커녕 목동 역할도 한 번 맡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마리아가 됐더라면 다락방님처럼 요셉 오빠와의 알콩달콩한 추억을 되새길텐데.... 저의 모든 크리스마스가 안타깝네요.

참고로 책 뒷부분에 제가 리뷰로 옮기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요. 프로이트가 모세 살해 가설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의 연결을 설명하는데, 전 그 부분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 부분은 설렁설렁 읽기만 했답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님 모세 읽기 응원합니다!!
 
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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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은 게 혁명의 완성이라는 여성을 만나고 싶다면 읽기를 추천한다.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전모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니, 다자이 오사무는 더 이상 안 읽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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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9-10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전 사양’을 사양하겠어요.

단발머리 2020-09-10 22:03   좋아요 0 | URL
그럼 저는, 사양에 대한 사양을 환영하겠습니다!

테레사 2020-09-1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후 일본의 비관주의 스러져가는 욕망 뭐 그런 것들 같아서 요즘같은 나날 특히 짜증나는 책이어요 ㅜ

단발머리 2020-09-11 18:10   좋아요 1 | URL
저는 그런 감정들이 전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남자들은 술 퍼먹고, 여자들은 밤낮으로 남자를 기다리는 대목에서 짜증이 나기는 했습니다.

페크pek0501 2020-09-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인간 실격을 읽는 걸로...

단발머리 2020-09-14 13:37   좋아요 0 | URL
네, <인간 실격>을 읽는 것도 좋으실 듯합니다.
 
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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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었다.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탓했다. 번역서가 어려워도 나를 탓했고, 한글책이 어려워도 나를 탓했다. 읽고 나서 별로인 책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너무 좋은 책, 권하고 싶은 책,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책에 대해 말하기에도 시간은 짧으니까. 별로인 책, 아니라고 생각하는 책에 대해 굳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외인 책이 여기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사양』.



패전 후 빠르게 몰락해 가는 귀족 집안의 장녀 가즈코는 어머니를 모시고 도쿄를 떠나 이즈의 산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전쟁에서 죽은 줄 알았던 동생 나오지가 다행히 살아 돌아오지만, 몰락한 귀족의 신세를 한탄하며 술과 마약으로 가산을 탕진할 뿐이다. 가즈코는 동생과 어울렸던 우에하라를 짝사랑하여 그에게 세 번의 편지를 쓴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줄거리다.


주요인물 네 명은 모두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이다. 전혀 공감 가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 시대 마지막 귀부인 어머니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 하는 공주병이고, 동생 나오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귀족임을 포기하지 못 한다. 가즈코가 짝사랑하는 소설가 우에하라는 매일 술집을 전전하며 다닌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을 가리켜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 중에서 여성을 가장 탁월하게 그려 낸 역작이라고 평했다.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책소개도 덧붙여진다. 페미니즘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의 화자는 가즈코다. 가즈코는 첫번째 결혼에 실패해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살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세가 눈에 띄게 기울어 귀족 가문의 딸이지만, 밭일도 도맡아 하고 하녀처럼 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한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순이 넘는 독신 홀아비와의 혼담에서 사랑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84)고 말했던 가즈코는 술집 계단에서 우에하라가 충동적으로 키스했을 때 왜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는가. 사랑일지도 모른다며, 다시 말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던가(88). 가즈코 자신이 그의 첩이 된다면 자신의 세상은 평범한 세상의 것과 다를 거라 어떻게 확신하는가. 자신이 우에하라의 작업에 도움이 된다면 우에하라의 부인도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말(88), 도대체 무슨 말인가.


가즈코는 갖은 모욕을 당하며 우에하라를 찾아가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바람대로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가즈코가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163). 너무 시니컬하게 보고 싶지 않지만, 참을 수가 없다. 나도 그렇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다. 지금도 키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도덕 혁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으로 여성의 도덕 혁명을 완성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다. 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환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주요 인물 중 누구에게도 내 맘을 줄 수 없었을 때, 다른 여성들을 찾아 보았다. 여자들이 있었다. 우에하라의 아내와 술집의 여자들. 우에하라의 아내는 집에서 아이를 지키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남자들이 패전의 아픔과 귀족 계급의 몰락을 술로, 마약으로, 술집을 방문해 그 곳의 여성들과 회포를 푸는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을 때, 여성들은 집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가 바랬던 희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이 아이를 낳아 귀족 계급의 대를 잃고,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은 채, 행복하고 씩씩하게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 그것을 자신 일생의 꿈으로, 희망으로, 혁명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것. 다자이 오사무는 가즈코의 입을 빌러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163).




독서모임 일곱 번째 시간이었다. 같은 작품을 읽고 이처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잘 생각해보니, 나만 달랐다. 선생님 포함 9 1. 나는 나대로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문학을 봐서는 안 된다고, 그런 해석은 편향된 것이라 하셨다. 모임 시간이 끝나고 나서, 회원 한 분도 도덕성을 내려놓고 작품을 보겠다 결심하시길래, 내 말을 알아들은 사람이 한 명도 없구나 하는 생각과 내가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독서 토론을 시작할 때, 대부분의 회원들은 가즈코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내 작품을 끝까지 따라 읽어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가즈코를, 다시 말해 다자이 오사무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건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술집 계단에서 제멋대로 키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 사랑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도덕 혁명은 이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안으로 독자가 걸어 들어갈 때, 그 세계 속에서 전능자로서 존재하는 작가의 의도, 생각, 사상에 의심을 품어야 비판적 독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자가 최고라고 말하는, 이런 도덕 혁명을 꿈꾸는 여자가 되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처음의 그 느낌, 본능에 가까운 자신의 직감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설득당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작가가 아닌가.




저녁에는 엽기 떡볶이에서 엽오와 쿨피스를 시키고, 김말이, 군만두 그리고 중국당면을 추가했다.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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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9-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넘 재미나요.
오사무, 솔직하게, 젬병 아녜요? 다른 작품도 다. 전 이이의 따님 쓰시마 유코의 <불의 산>을 좋아합니다. 아빠보다 훨씬 건강하고 사변적이고 무엇보다 셉니다. 센 여자라서요.

단발머리 2020-09-10 22:06   좋아요 1 | URL
속마음 토크라 재미있는 걸까요? ㅎㅎㅎ
전 이번에 처음 다자이 오사무 읽으면서 아무런 편견 없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요 (정보가 없어서 편견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읽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추천하신 오사무의 따님 책은 왠지 기대가 되네요. 딸이란 무엇인가. 사변적이란 무엇인가. 센 여자란 무엇인가.

잠자냥 2020-09-1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는 서른 딱 그때까지만 읽을 수 있는 작품 같아요.... 서른 넘어 읽으니 정말 오그라드는...... 특히 <인간실격>

단발머리 2020-09-10 22:08   좋아요 1 | URL
너무 아쉽네요. 방금 서른을 지나쳐 왔거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 웃는 거 아니에요. 우는 거에요. 그전에 읽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유부만두 2020-09-10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엽떡으로 위로가 될려나요?;;;; 다자이 오사무 워낙...

단발머리 2020-09-10 22:09   좋아요 1 | URL
엽떡을 엽오로 바꿨구요. 아이스크림 한 개 더하기 크림과 팥이 같이 들어간 빵 하나도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어요. 데헷!

수이 2020-09-10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가 파고드는 시간대라는 게 존재할 텐데 어쩌면 그 생각이 틀렸겠구나 리뷰 다 읽고난 후 느꼈어요. 가슴이 좀 아플랑 했는데 엽기떡볶이 먹고 마음 달랬다 하니 괜찮겠지_ 해요. 이제 얼른 푹 쉬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0-09-10 22:11   좋아요 0 | URL
제가 토론 시간에 너무 발표를 안 해서 선생님이 말 좀 하세요, **님~~ 그러셨거든요. 그래도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는 했어요. 전달은 잘 안 됐지만요.... 엽오의 기적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굿나잇, 수연님!

han22598 2020-09-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선생님이 편향된 생각을 갖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 충격인데요 ㅎㅎ 다수인 9명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아서 편향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단발머리님이 도덕적 잣대를 사용한 것같지 않지만 그리고..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되는 거죠? (밀란 쿤데라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분의 생각일뿐..)ㅋㅋㅋ 엽기적인 생각은 엽기적인 것으로 덮어야 하나 봅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20-09-11 07:13   좋아요 0 | URL
저는 나름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나봐요. 제 의견이 소수의견이라서 편향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작품을 보면 편향될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아요. 도덕적 잣대와 한계를 넘어설 때 문학이 주는 쾌감이 있죠. 저는 그 부분을 부정한게 아니구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새롭게 여러가지를 배운 터라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댓글 감사해요, han222598님!!!

hnine 2020-09-11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지잖아요~

단발머리 2020-09-11 07:46   좋아요 0 | URL
저의 별점은 한개지만, hnine님께는 또 다른 독서 경험이 될수 있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이 책을 권해봅니다^^

syo 2020-09-11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심한 소리를 듣고 오셨네요.... 21세기에 무슨 말이야 저게.
저는 다자이 오사무보다 그 선생님이 더 빡치네요.

단발머리 2020-09-11 10:25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래서 알라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화내주셔서 ㅠㅠㅠ
제가 전달력이 부족했겠지만, 그래도 빡침의 미학에 큰 감사드립니다.

북극곰 2020-09-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혁명‘..... =.=; 그냥 내로남불?
인용해주신 부분을 읽으면서도, 뭐래, 뭐래... 하고 읽었어요.

단발머리 2020-09-11 18:01   좋아요 0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생각이라는 게 제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뭐래요 진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독서괭 2020-09-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저도 그 선생님 말씀 이해 안 가네요. 토론시간에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지 왜 편향된 해석이라 단정하나요..

단발머리 2020-09-11 18:02   좋아요 0 | URL
선생님이 일본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 중의 작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싫어하는 태를 너무 많이 내었나봐요.
하지만 편향되었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마음이... 듭니다.

다락방 2020-09-1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선생님......좀 이상한데요? 도덕적 잣대 안되면...되는 잣대는 있나요? @.@

단발머리 2020-09-11 18:19   좋아요 0 | URL
김영하가 글쓰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던 게 기억나요. 부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글, 선생님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글, 서랍에 넣어 두어야 하는 글을 써라. 전 문학의 전복적 기능에 대해 부정한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나 봅니다.
졸지에 도덕적 잣대 들이대는.... 혹시 도덕적인 사람? @@

stella.K 2020-09-1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찌보면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이 시대마다 다른 것 같긴해요.
오사무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에 대한 생각이 딱 저 정도는 아니었을까요?
사실은 그 보다 훨씬 못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사무가 소설에서
그렇게 썼다면 그 시대로 봐선 꽤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한 건 아닌가 싶네요.
예전에 우리나라 여자도 인간 취급 못 받았지만 일본도 다르지 않았잖아요.
옛날 영화 보면 정말 속터지는 거 많죠. 저 시대니까 이해하지 정말 한숨 나오는 영화들 많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요?
근데 그 선생님 좀 거시기하긴 하네요.ㅉ

단발머리 2020-09-11 18:20   좋아요 1 | URL
네, 스텔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러니까 둘째줄에서 네째줄 말씀 그대로 다른 회원들도 이해하더라구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순종적인 여성상이 강요되는 일본에서의 선택이라는 걸 이해해야한다. 이렇게요.
제가 말한 요지는 이것이었죠. 가즈코가 유부남을 사랑해 불륜의 관계를 가진게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자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내가 너를 좋아하니 네 아이를 낳고 싶다, 라고 말하는게 폭력적이라는 거죠. 복잡한 하루였습니다 ㅎㅎ

공쟝쟝 2020-09-1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사양, 사양....

단발머리 2020-09-14 13:38   좋아요 1 | URL
사양은 사양하는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0-09-13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4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