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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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좀 믿음이 간다. 나는아무튼, 외국어』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요가』, 『아무튼, 방콕』까지 몇 권을 읽었는데, 모두 다 좋았다.


『아무튼, 연필』은 아무튼 연필에 대한 이야기다. 취미와 덕질의 한계를 넘어 나라별로, 제조사별로 제작된 연필의 역사와 판매 경향뿐 아니라, 소장각을 부르는 희귀템에 대해서도 전문가다운 지식이 엿보인다. 연필 덕후라면 더 좋아할 만한 책이다. 연필에 대해 1도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으니 말을 더할 필요가 없다.



나는 여성주의에 빠져 있으니까. 나는 세상을 보통 사람의 시각, 즉 남자의 시각이 아닌, 여자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게 됐으니까, 그렇게 읽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 먹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녀의 기운에 대한 이야기나 넬리 블라이를 말하던 저자의 사수 이야기는, 피할 나위 없이 여성의 이야기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성주의로만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여성적경험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어도 인구의 반 이상이라면, 도대체 이것은 왜 인간으로서의 경험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을 왜 보통 사람의 이야기라고 전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 싶은 말들,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얌전히 남겨둔다.  



혼자이고, 공기의 흐름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낮에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연약한 연결점이 사라진 새벽, 잠드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 되면 나는 거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돌기 전까지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이 힘들면 창이 보이는 곳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픈 사람에게는 창이 신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온통 기도다. 기도는 원래 책상 서랍 속에나 넣어두던 것인데...  (108쪽) 



말하고 싶은 건 이거 하나다. 나는 작가를 모르고, 그의 삶에 대해 모른다. 나는 그가 써 내려간 만큼만, 그가 종이 위에 고백한 만큼만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고단했던 삶.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의 삶에 대해 읽으면서, 그의 인생 고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외부적인 변화와 내부적인 변화. 환경의 변화와 신체의 변화가 부정적이라고 할 만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절망한다. 나는 세계를, 외부를,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비교적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망이 내 속으로, 내 과거로, 내 맘속으로 쳐들어오면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바보인 나는, 멍충이인 나는 그냥 죽어야 한다. 이 작은 책이라는 우주 속에서, 세계를 향한 원망과 나에 대한 후회의 저울이 갸우뚱거리면서도 계속해서 균형을 잡아가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날 이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면서도, 어쩌면 그게 내 실수일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다시 보는 것. 다시 사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



그래서, 나는 연필의, 연필에 대한, 연필을 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용기를 얻었다. 오늘을 살고, 다시 또 살아가게 되고. 후회를 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고.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큰애의 필독 도서 중 하나였던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을 꺼내놓고, 둘째 아이 연필 쥐는 법 고쳐준다고 구입했던 스타빌로 이지그래프(오른손)를 쓰다듬는다. 아무튼, 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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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20-10-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연필보다는 만년필이 좋아요, 아무튼, 만년필! ㅎ

단발머리 2020-10-29 10:55   좋아요 1 | URL
저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아무튼, 만년필이라고 하고 싶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만년필하고는 친해지기 어려울거 같아요. 사실, 연필하고도 가끔만 만납니다. 저는 삼색볼펜을 좋아합니다. 아무튼, 삼색볼펜!

2020-10-29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0-10-29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연필 저도 다 읽었어요. 사유하고 건질 것들이 정말 많아서 다시 읽어야겠다 싶은!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_도 궁금해서 도서관으로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튼, 샤프! 입니다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0-29 13:11   좋아요 0 | URL
전 이번에 읽을 때 줄도 안 치고 읽었거든요. 한 번 더 읽고 싶어서요, 비밀 이야기 같으면서도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아무튼 샤프!! 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카알벨루치님은 <아무튼, 만년필>을 수연님은 <아무튼, 샤프> 이야기를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2020-10-2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0-2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연필을 주로 사용합니다...

4B루다가. 전동연필깎이도 있는데
그건 110V라 변압기가 필요하네요
ㅋㅋㅋ

연필의 사각거림, 쵝오지요.

단발머리 2020-10-29 13: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연필님이 드디어 오셨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연필 1도 모르는데 이 책 읽다가 여러 연필들이 정말 탐나더라구요. 나무나 모양, 흑연 종류 이런게 중요하다고 하대요.
제 생각에도 역시나 사각거림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각사각!!!

공쟝쟝 2020-10-2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너무 의외로 좋은 책이네요??! 저도 어쩌다 보니 아무튼을 읽고 있어요 ㅋㅋ 특히 운동 분야로 ㅋㅋ 이번 기회에 다른 장르 아무튼도 파봐야겠군여... 서걱서걱 연필

2020-11-01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