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억압의 핵심은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의 역할이다. (109쪽)
이렇게 쓰기 미안한데 차를 가지고 출근한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한데, 아니, 가까운 거리여서 버스를 타러 나가는 시간이 전체 이동 시간의 6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길이 언덕이라서, 하지만 이 모든 변명은 적당한 이유가 되지 않기에. 지구에게 죄송하게도 차를 가지고 출근한다.
차 안. 위, 아래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 앞이다. 최근에 이런 신호등 공사가 한참 유행이었는데, 초록 불이 켜지면서 차량 전체가 멈추고 보행자는 자기가 서 있는 도로의 맞은 편뿐 아니라, 그 맞은편의 맞은편으로도 한 번에 건널 수 있도록 하는 신호 체계다. 지금 찾아보니 ‘동시 보행신호’라고 한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고 이제 좌회전 신호 한 번만 받으면 도착이다. 아직 3분이 남았고, 마음은 여유롭다. 나는 정면을 보다가 왼쪽을 본다. 중년 여성이 아이를 안고 있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여성도 아이도 민소매 옷을 입고 있다. 하얀 바탕에 연한 하늘색 무늬 옷을 한 벌로 입었다. 누구에게인지 모르지만 맞은편을 바라 보던 중년 여성이 손을 흔든다. 꽂꽂이 안겨 있는 모양새가 9-10개월이 됨직한 아이는 아직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신호등 맞은편에는 조금 전에 뒷모습만 보았던 여성이 서 있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일자 슬랙스를 입었다.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카락이 거의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다. 예쁘다. 내가 원하는 그러나 추구할 수 없는 멋진 출근룩이다. 신호가 바뀐다. 초록 불 보행 신호에 인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죄다 횡단보도에 발을 내딛는다. 바쁜 발걸음. 젊은 여성이 횡단보도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뛰어가서는.
중년 여성이 안고 있는 아이에게 뽀뽀를 한다. 쪽쪽 쪽쪽! 네 번. 네 번의 뽀뽀를 하고 그 여성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의 맞은편의 맞은편으로 뛰어간다. 동시 보행신호는 보통 보행신호보다 신호 대기 시간이 길다. 이제서야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20, 19, 18, 17... 세 걸음 정도 걸어가던 젊은 여성이 뒤를 돌아본다. 부지런히 오른쪽 왼쪽으로 손을 흔든 후, 다시 앞을 보고 뛰어간다. 내 차 앞에는 중년 여성과 아이가 있다. 아이는 꽂꽂하게 안겨 사라져 가는 엄마를 바라본다. 언어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의 감정을 제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건 얼굴일 것이다. 눈 혹은 표정일 테지. 나는 외할머니에게 안겨 있는 (그 중년 여성은 젊은 여성의 엄마일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아이 맡기고 출근하면서 시어머니에게 인사하지 않는 며느리는 없을 것이므로.)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그 아이의 마음을 읽었다. 완벽하게, 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냥.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 주시다가 친정 근처로 이사 오면서 엄마가 아이를 봐주셨다.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길 때는 밤마다 데려와야 했는데, 엄마는 ‘당연히’ 밤에도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셔서 퇴근 후에 친정에 들러 엄마 밥을 먹고 아이랑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에는 아이가 보고 싶어서 출근하는 길에 친정에 들렀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하나 지나쳐 와야 해서 바쁜 아침 시간이 더욱 빠듯했는데, 그래도 거의 아침마다 친정을 경유해 출근을 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1층에 내려와 계시면 아이를 한 번 안아 보고 사진을 한 장 찍고는 바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고는 했다. 나는 내 뒷모습을 못 보니까 내 뒷모습이 어떠했을지 모르고(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앞만 보고 뛰어갔을 테니 엄마와 내 아이의 뒷모습이 어떠했을지 모른다.
나는 아이의 주 양육자가 꼭 엄마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나쁜 양육자가 될 확률만큼이나 아빠나 할머니도 좋은 양육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느꼈던 건 엄마가 없어서 외로운 마음이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걸 지켜보는 마음이랄까. 내게 아이의 등은 그렇게 보였다.
모성에 대한 강요는 차고 넘친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며 내게는 댓글을 달아주시지 않는 정희진쌤은 ‘모성은 어머니와 자녀와의 관계가 아니라, 여성과 자녀의 아빠와의 관계가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온 나라가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엄마와 아빠에게 ‘버림받은’ 아이 문제로 떠들썩하다. 엄마에 대한 악마화가 도를 넘었다. 열 달 동안 함께 했던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마음과 상황과 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성만을 문제 삼을 뿐이다. 모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 숭배와 혐오.
어머니 ‘됨’은 일정 부분 인간의 삶을 포기하게 하고 또 포기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라고 강요한다.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의 외침, 항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더 풍성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경험 역시 소중하다, 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오 천년 여성 혐오의 근본 뿌리 중 하나인 여성에 대한 ‘성역할 강요’임을 안다. 그러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머니’라 불리는 나는, 나의 어머니 ‘됨’을 거부해야만 하고. 나의 생각이 캐서린 비처가 쓴 <가정경제에 대한 논문 A Treatiseon Domestic Economy(1841)>의 가정 페미니즘(domestic feminism;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나쁜 일자리로 내몰리는 여성들을 보호해야 하며 가정 내에서 여성의 고유한 역할인 육아와 가사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증명해야 하는 것 역시 나의, 혹은 나만의 일일 것이다(<젠더와 역사의 정치>, 45쪽).
인지부조화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간은 과거를 긍정해야 한다. 아름다웠노라고, 행복했노라고 말해야 한다.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사회와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했던 ‘전업주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금 내게 묻는다면. 그때처럼 일 vs 육아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또 다른 길 ‘워킹맘’의 길을 선택하고 싶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4개월 정도 해보니, 아이들이 다 크고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요즘에도 매일 녹다운 되는 나를 데리고 살다 보니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면.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인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그 짧고 소중한 순간을 누리고 싶다. 나도 그 순간을 함께 살고 싶다. 그 이유를 나는 아이들에게서 찾았다. 그런 아이들이라면, 그것이 생존을 위한 진화적 속임수라 할지라도 그렇게 귀여운 아이들이라면. 그 귀여운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