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뇌과학지식 50』

 

 

 

 

나는 오로지 신체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은 신체에 대한 무언가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뇌에 관한 책을 펼칠 때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자의식혹은 자기 인식에 관한 것이다. 마음의 미래에서는 라는 의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로 통일된 라는 느낌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의식 속에는 서로 경쟁하면서 종종 모순까지 일으키는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있지만, 좌뇌는 모든 불일치를 무시하고 논리의 틈새를 어떻게든 메워서 라는 하나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좌뇌는 이 세상의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경솔하고 불합리한 변명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것이. (마음의 미래, 100)

라는 의식은 결국은 좌뇌의 속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설명인데, 니체의 명제도 신체와 영혼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과학적인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뇌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가 많았다. 크게는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소제목은 이렇다.

뇌와 자아, 사고 과정, 역동적인 뇌,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 도그마를 벗어나, 새로운 기술과 도전.

 

신체에 대한 소유의식 중 이 부분이 흥미로웠다.

신체 소유의식의 왜곡은 정신질환 상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헤드와 홈스는 신체의 의식적인 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아의 표상에 덧붙여지며,” 여성의 신체도식은 모자의 깃에까지 확장될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컴퓨터 마우스나 어떤 연장을 사용하면 그 물체가 우리 뇌 속 신체 표상에 통합된다는 것을 안다. 달리 말하면 뇌는 오래 사용한 연장을 자아의 일부로 여긴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로 촉각을 대신할 수 있는 까닭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결국 다음 세대에는 뇌가 의수족을 신체의 일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13)

인간의 뇌가 오래 사용한 연장을 자아의 일부로 여긴다는 지적은 신선하다. 동시에 그 사실 자체는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핸드폰 정확히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다. 스마트폰은 볼펜, 노트 혹은 지갑처럼 우리 삶에 필요한 구체적인 도구의 한 가지 형태가 아니다. 스마트폰은 내 몸의 일부, 다시 말해 내 뇌의 일부다. 스마트폰은 내 자아의 일부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장시간, 그렇게 편안하게 스마트폰과 함께 할 수 없다. 이제 스마트폰은 나의 일부다. 내 뇌의 일부다.

지난 10년 동안 뇌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 전 100년 동안 알아낸 것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6). 혁신적인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수치화할 수 있게 됐다. 이제야말로 기술의 발전에 대한 해석과 관련 법률에 더하여, 신경윤리학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이를 테면 이런 경우다.

 

예컨대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자들은 살인을 저지른 41명의 뇌를 촬영했다. 그들 모두가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다.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의 경우 전전두피질의 포도당 대사 수준이 낮았는데, 계획적으로 살인한 범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 연구자들은 나중에, 사이코패스의 편도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평균 18퍼센트 더 작으며, 3세 어린이에게 공포 조건 형성fear conditioning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20년 뒤 범죄에 관계하게 된다고 보고했다.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막기 위해 사람들에게 강제 예방 조치를 취하는 시대가 언젠가 찾아올까? 만약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섯 살짜리 아들이 나중에 알코올의존증 환자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면 당장 어떤 처치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만약 그 같은 예측이 정확하게 이뤄질 수 있다면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248)

 

마지막에는 정보의 통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출생배경, 양육 환경, 학력, 성격적 결함, 소비 패턴, 정치적 성향에 더해 만약 각 개인의 혹은 뇌에 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면, 그 권력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 및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뇌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화려한 여정은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전망으로 마무리 된다. 이런 식으로.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전통적인 인공지능이 지능을 획득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기계에 설명을 입력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아지를 보여줄 때 그것을 강아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기계에 각각 설명을 입력해 줘야 한다. 문제는 설명하지 않은, 설명이 입력되지 않은 강아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설명을 하면 강아지 집합의 멤버가 아닌 동물들이 포함되기 시작하고 또 너무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강아지 멤버에 다양한 종들의 강아지가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편성과 구체성이 정반대의, 즉 역의 관계를 가지다 보니 두 개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35)

사람들은 기계가 세상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38) 그 다음 장부터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인간은 바깥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학습하는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이어진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지능, 세상을 알아보는 능력은 설명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고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배운다는 걸 알게 되고, 후에는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연구해서 그 방법을 기계에 차용하기로 한다(117).

전통적인 인공지능 구현에서는 기계가 무언가를 알아보게 하려면, 예를 들어 자전거를 알아보게 하려면 기계에게 자전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딥러닝은 더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자전거를 포함한 엄청나게 많은, 대부분 수천만 장의 사진들을 집어 넣어준다고 한다. 그러면 이 알고리즘은 계층적인 구조 형태로 점점 압축된 표현을 학습한다고 한다(130).

 

 

지능이라는 것, 혹은 자체 또는 자아, 정신은 완전히 내면적인 현상입니다. 각자 스스로는 자아가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정신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 좀비일 수도 있고 잘 만들어진 로봇일 수도 있어요. ..... 자아의 존재는 우리가 우리끼리 믿어주는 거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는 분명히 정신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인간은 서로 비슷하게 생겼고, 각자가 정신이 있다고 꾸준히 말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그다지 당연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15, 16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남미를 정복하고 잉카인들을 학살하면서 이런 보고서를 썼습니다. ‘잉카인들은 칼로 찌르면 피는 나오고 소리는 지르지만 아픔을 못 느낀다’(312).

 

바로 이 부분이다. ‘인공 지능에 대해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이 부분이다. 인공 지능이, 로봇이, 컴퓨터가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인공 지능도 자아를 의식할 수 있는가. 인공 지능도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는가.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의 답이다.

인간의 뇌는 10층에서 15층 정도의 구조를 가졌는데 현재의 인공지능은 152층까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훨씬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326)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기원은 처음에 누군가가 인과관계를 줘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기계에서 바라는 것은, 인공지능 기계 안에서의 모든 계산의 첫 번째 인과관계는 인간이어야 된다는 거죠. 만약 인공지능 스스로 첫 번째 인과관계를 만들어냈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자기 의지의 시작이기 때문이죠. 그때부터의 인공지능은 지능이 있어서 생각도 한다는 겁니다. (331-2)

 

이미 인간의 사고의 층을 넘어서버린 인공 지능. 김 교수의 설명과 추측에 따르면, 이미 인공 지능은 스스로를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보다 빠르고 인간보다 더 깊은 사고를 하고 있는 인공 지능에게 지구+인간지구-인간보다 낫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언어로 기계를,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한다는 기계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강한 인공 지능의 등장을 기다리는(?) 인류의 앞날 역시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다 읽지 못했는데 도서관 희망도서가 도착했다기에 얼른 대출해 왔다. 요즘엔 차례차례 읽지 않는다. 제일 관심이 가는 챕터부터 먼저, 읽는다.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엘렌 식수를 통해서/이봉지>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이 부과한 여성의 거짓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스스로를 알기 위하여, 또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요청된 개념이다. 즉 아직 실체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자기 탐색 및 표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로 상정된 것, 즉 일종의 절대온도와 유사한 개념인 것이다. (166)

 

1) 왜 글쓰기인가?

글쓰기는 역설적으로 남근중심주의에 틈을 만들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 그 자체이고 전복적인 사상의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사회적, 문화적 구조의 변모를 가져오는 선구적 힘이기 때문이다. (169)

 

2) 여성적이란 무엇인가?

식수는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남근중심주의의 언어 및 상징체계 속에서 작업하면서 자크 데리다 식의 해체를 통해 그 의미를 전복시키며 이를 통해 여성적인 것의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간다. (173)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자질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1) 여성의 신체적 자질, 그 중에서도 특히 성적 특질 2) 타자에 대한 수용성 3) 법에 대한 거부 등이다.

 

3)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여성적 글쓰기는 체계화를 거부하는 글쓰기이며(176), 여성의 무의식을 닮은 글쓰기이다(177). ‘법의 거부의 측면에서는 언어유희 등을 통한 전통적인 의미체계와 문법의 파괴, 그리고 기존의 서사 구조의 파괴가 일어나기도 한다.(179)

  

  

Twilight

 

 

 

 

 

 

 

 

청소년 코너를 돌아보던 큰 애가 이 책을 빌려왔다. 그래라, 하고 별 관심 없이 봤는데, 금방 그만 두지 않고 계속해서 읽어가길래 그래, 많이 대출해가서 그런지 책이 더럽더라, 하면서 시리즈를 전부 구입했다. 나도 읽을까, 하며 기대 없이 집었는데, 재미있다. 말 그대로 쭉쭉 읽힌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이 책이 어떤 책인가, 하고 구글링을 해보았더니, 이런 얘기가 있다. ‘귀여니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에구머니. (내가 귀여니를 무시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달라. 그녀는 나름의 문학세계가 있을테고, 나는 그 세계와는 가깝지 않다.) 책장에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꽂아 봐라. 얼마나 예쁜지. 까만 바탕에 빨간 사과가 너무 너무 예쁘다. 속으로 은근 흐믓한 분위기였는데, ‘귀여니’, ‘10대나 읽을법한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김이 확 샌다. 내 모토가 그것 아닌가. 내가 읽는 책이 곧 나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이 트와일라잇’, 귀여니, 10대나 읽을법한, 이란 말인가. 그런 게 뭐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또 그런 것도 신경 쓰는 그런 소심한 사람.

그래서, 반대 의견 내지 수비 의견 소심하게 내본다. 오랜 전에 읽은 내용이라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강 이렇다.

 

『크라센의 읽기 혁명』

언어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 읽기와 회화 구사 능력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외국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회화 능력에 큰 진전이 없는 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절반의 실험 대상자들에게만 미국 학원 로맨스물을 읽도록 하고 일정 기간 후에 두 실험 대상자들의 언어 능력을 비교했는데, ‘10대를 대상으로 한 학원 로맨스물을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읽었던 실험 대상자들의 영어 실력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쉬운 영어 혹은 문법에 어긋나는 표현을 다수 포함한 책이라고 해도, 쉬운 단어, 쉬운 문법으로 쓰여진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원서를 충분히 즐겁게(*^^*) 읽어나갈 때, 영어 실력이 향상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믿고서 읽는다. 트와일라잇. 100살의 뱀파이어와 17살 인간 소녀의 사랑 이야기. 하하하

 

“I was taking her to the nurse,” Mike explained in a defensive tone, “but she wouldn’t go any farther.”

“I’ll take her,” Edward said. I could hear the smile still in his voice. “You can go back to class.”

“No,” Mike protested. “I’m supposed to do it.”

Suddenly the sidewalk disappeared from beneath me. My eyes flew open in shock. Edward had scooped me up in his arms, as easily as if I weighed ten pounds instead of a hundred and ten. (97)

 

“That’s fine I’m not hungry.“ I shrugged.

“I think you should eat something.” Edward’s voice was low, but full of authority. He looked up at Jessica and spoke slightly louder. “Do you mind if I drive Bella home tonight? That way you won’t have to wait while she eats.” (166)

 

I think you should eat something.

이번 주의 문장이다. , 뭐 좀 먹어야 돼~~가 이렇게 섹시하게 들리다니.

 

연휴에는 바다에 갔었다. 맘 같아서는 공항 근처까지 온 김에 비행기 타고 어야디야 멀리멀리 가고 싶었지만, 사람 없는 바다에 발 담그고 선녀물회 한 그릇과 차이나타운 하얀 짜장과 공갈빵으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다시 에드워드에게 간다. 금빛 눈동자에 살인 미소를 날리는 에드워드에게.

 

간다/간다/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16-06-08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멋지구리한 해변이 을왕리나 그쯤 되는거예요? ㅎ.ㅎ)) 바다는 언제 보아도, 부르네요~ 나를..!

-여성적 자질 중에 세번째 법에 대한 거부가 많이 궁금하네요! 이방면 무식자이지만 또 관심은 있어요! ㅎㅎ

-와, 김대식의 책도 음.. 단발머리 님 페이퍼 전반적으로 지적 아우라 뚝뚝 뭍어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너 좀 먹어야 돼~~~ 네요! ㅋㅋㅋㅋ 속으로 한번 암송하고 가요~!

단발머리 2016-06-10 09:22   좋아요 1 | URL
- 네, 을왕리예요. 그 때도 조금 더웠지만 들어가기에는 좀 그랬는데, 피끓는 젊은 청춘 남녀들이 바다에 퐁당퐁당 하더라구요. 저는 구경만^^

- 세번째 법은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작법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엘렌 식수의 작품이 난해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고, 하네요~~

- 김대식의 책은 쉽습니다. ㅎㅎ 어차피 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쭉쭉 읽습니다.
근데 icaru님 제 방에 자주 좀 오시어요. 지적 아우라~~ 이런 칭찬 들으니까 넘넘 기운이 솟구치면서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막 요동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올해의 문장이죠.
너, 뭐 좀 먹어야돼~
에드워드는 사랑입니다

icaru 2016-06-09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리고 저기 강아지 사진들 모음 있잖아요~
저 집에 저거 스티커로 갖고 있는데, 15년 전쯤에 샀던 스티커인데 호~~ 똑같아요~! 김대식 책에 나온 첨부 사진인거예요? ㅎ

단발머리 2016-06-10 09:22   좋아요 1 | URL
진짜 완전 신기하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네,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책에 나온 사진을 제가 찍어서 올린거예요.
딥러닝은 정보의 입력이 아니라, 사진 업데이트를 통해 지식을 얻고 독특한 알고리즘을 발전시킨다 하네요.
그 알로리즘은 물론 엄청 복잡합니다.
 

 

 

얼마 전, 책의 날 이벤트에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꼽았던 제인 에어를 다시 들었다.

소설을 재미있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는 아주 쉬운데, 스스로를 소설 속 주인공 중의 하나로 여기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의 마음과 생각이 더 선명하게 읽히고 들리고 보인다. 나는 그렇다. 제인 에어를 읽는다 했을 때, 나는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이 되는 거다. 나는 제인 에어. 그녀를 찜한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대해 들은지는 꽤 됐다. 로체스터의 아내인 버사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라고 하던데, 아직은 읽지 못 했다. 그 책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떨린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쁜 남자, 나의 소중한 남주 로체스터를, 이제 나는 증오하게 될 것인가

애써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외면한 채, 제인 에어를 읽는다. 스스로를 제인 에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읽어왔다.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고아 소녀, 무엇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는 까탈스러운 성격, 예쁘지 않은 외모(가장 근접한 지점), 창백한 얼굴, 작은 몸집.

로체스터의 숨겨진 아내, 버사를 살펴본다.

검은 피부(검다는 건 로체스터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니, 사실은 누런 피부가 아닌가 추측), 검은 머리카락, 큰 키.

대충 봐도 자세히 봐도 결론은 같다. 제인 에어보다는 버사 쪽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제인 에어야 한다. 그래서, 아직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지 못 했다. 그 책을 읽으면 난 로체스터를 미워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내가 제인 에어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로체스터는 멋진 남자로 남아야 하고, 나는 제인 에어여야 한다.

     

그의 예사로운 태도가 나를 구속감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따스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다정스러운(다정스러운? 다정하고, 아닐까?) 솔직한 태도로 나를 대해 주었고 그 때문에 나는 그에게 끌렸다. (267)

 

... , 내게로 와요, 제인, 어서!“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잡고 있는 손을 풀어 놓아주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오히려 미친 듯이 나를 끌어안을 때보다도 더 반항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그 앞에 굴복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의 분노와 맞서 그걸 좌절시켜 왔다. 이제는 그의 슬픔에서 도망쳐야 했다. 나는 문 쪽으로 물러났다. (162)

 

 

이제 다시 읽어보니 괴팍한 성격이라고 단정지었던 로체스터는 오히려 다정한 면이 많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엉켜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로체스터는 애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제인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청한다.

세인트 존은 다르다. 그리스 조각 같은 완벽한 외모에 풍부한 학식, 굳건한 신앙심과 친절한 심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다. 하지만 그를 거부했을 때, 그를 거절했을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 ... 그러기 위해서 당신에게는 오빠가 아니라 협력자가 필요한 거요. 남매간의 기반이란 약한 겁니다. 남편이라야 합니다. 나도 누이동생은 필요 없습니다. 누이동생은 언제 남한테 빼앗길지 모르는 거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아내입니다. 죽는 날까지 온전히 내 것으로 해둘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협력자가 필요한 겁니다.“ (334)

 

 

그리고 그동안에 그가 내게 느끼게 한 것은, 선량하면서도 엄격하고 양심적이면서 집념 깊은 사람이 자기를 거역한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적대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비난 섞인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내가 자기의 관심 밖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343)

 

자신의 뜻에 거역한 사람, 자신을 거부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두 사람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로체스터는 매달리고 세인트 존은 제인을 안 보이는 사람 취급한다. 로체스터는 애원하고 세인트 존은 가르친다. 로체스터는 울부짖고 세인트 존은 안수(按手)한다. 진짜 나쁜 남자는 로체스터가 아니라, 세인트 존이다. 세인트 존을 미워하려는 순간, 만약 세인트 존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소설 속에서는 아마도 로체스터가 천하의 불한당으로 그려지겠지.

 

녹턴

  

 

 

 

 

 

 

 

  

시의 특정한 구절을 따로 떼내어 마음대로 해석하는 건, 시를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이 구절만큼은 그래도 될 것 같아 옮겨본다.

 

이런 이별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김선우

 

.....

첫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10년 동안 나는 참 좋

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내게,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게,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시는 분이 있어 나는 참 좋았다. 그 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몰고 강물로 뛰어들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끌면서 돌아오는 편이라 더 그랬다.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차저차 제정신은 돌아오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해는 지고 뜨고, 달도 부지런히(야나문^^). 별조차 이렇게나 바쁘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제정신이 돌아오는 시간.

로체스터는 실상 유약한 남자였고, 세인트 존은 알고 보니 나쁜 남자였다.

나는 당신을 위해 세 번쯤 기도하고, 자전거를 끌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 때가 바로 지금,

제정신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6-05-25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 리스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해요. 책에도 언급되지만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하고 생각하고 깨우치고 그리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이야기에 대해 썼으니까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그래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읽었던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가 엉망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발머리님. 저는 여전히 로체스터가 좋아요.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사랑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진짜 인상깊었어요. 제가 그간 읽었던 연애장면들 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었어요. 나중에 불에 타서 팔도 못쓰고 앞도 못보는데, `난 이래서 안될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하잖아요. 사랑한다는 건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내가 어떤 모습이든 감춰야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는다고 해서 제인 에어가 싫어지지는 않을거다, 라는 거였어요.


지금 다시 제인 에어를 읽는다면 저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그때 로체스터를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도 로체스터를 인상깊은, 당당한 남자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광막한 사르가소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요. 제가 많이 달라져서요. 나이도 먹었고 연애와 이별을 겪었고 회사도 좀 더 다녔고 여러 친구들을 새로 사귀고 헤어졌으니, 저는 과거의 저와 달라졌을 거 아녜요. 그러니 지금 읽는 제인에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단발머리님,
흔들리는 단발머리님도, 제정신이 돌아온 단발머리님도,
그 모두가 다 단발머리님 입니다.

단발머리 2016-05-25 12:30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이름조차 거대하고 위엄넘치는 이 작품이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읽지 않고 말하는 이 뻔뻔함..)

제가 정말 놀랐던 건, 그러니까 그런 작품이 가능했던 작가의 인식이었던 것 같아요.
버사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써 보자, 이런 생각이요.
저 스스로라고 한다면, 제3세계의 유색인종인 나는, 왜 스스로를 제인에어에게 동일시했을까.
나는 왜 버사에 대해서는, 불쌍하고 가련한, 어쩌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똑똑했을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을까. 왜 미친 여자로만 생각했을까. .....
전 여러번, 아주 여러번 <제인 에어>를 읽었고,
통으로 읽고, 나눠읽고, 공부하고, 시험보고, 영어로 읽고, 한글로 읽었는데도,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깜짝 놀라고 당황했죠.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 진 리스에게 감사를...

다시 읽는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책은 그대로인것 같지만 그 책을 읽는 우리는 계속 바뀌어가니까요.
가끔, 아주 가끔은 예전에는 좋았는데, 다시 읽었을 때 별로인 책들도 있더라구요.
저한테 <제인 에어>는 아직 그대로예요. ㅎㅎㅎ
다락방님께는 어쩔지 궁금하네요.

저는 이제 제정신 단발머리예요.
다락방님 말씀대로, 왔다갔다의 단발머리도, 제정신의 단발머리도 모두 저니까요.
ㅎㅎㅎ 좋네요^^

2016-05-25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이 넘 맘에 들어요. 광사바도 일단 제목이 매혹적이고요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로체스터는 여전히 매력적이더라구요. 마사나 로체스터나 다 존재의 이유가 있는거지 누가 누구에게 특히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구요. 읽은지 2년이 안되었는데 가물가물하네요.다시 읽어야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16-05-26 18:03   좋아요 0 | URL
페이퍼 제목이 맘에 드신다니 저도 좋아요.
광사바는 좀 아껴둘려구요.
저에게는 아직 로체스터가 필요합니다.
강하고 매력적인.... 매달리면서 집착하는 그런 남자요... ㅎㅎㅎ

꿈꾸는섬 2016-05-25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인에어 다시 읽어야겠어요. 그리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녹턴도요.^^

단발머리 2016-05-26 18:05   좋아요 0 | URL
ㅎㅎ 책읽기에서 제일 흥미로운 게 다시 읽기인 것 같아요.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보이네요.

저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좀 미뤄둡니다.
위의 이유 때문이지요.
강하고 매력적인.... 매달리면서 집착하는 로체스터 때문에요. ㅎㅎㅎ
 

 

 

 

 

 

 

 

 

 

여성 살해

기본적 정의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 살인. 성차별적 테러리즘의 가장 극단적 형태

 

러셀 Diana E. H. Russell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1여성대상범죄 국제 재판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공식화했다.(264) 2001년 편집자로 참여한 책에서, 러셀은 여성 살해를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살해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여성 살해가 남성 지배와 성차별주의의 극단적 표현임을 명시하면서, 여성 살해를 성 정치학의 장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이것을 사적이거나 병리학적인 문제로 다루는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여성 살해>, 황주영, 265)

 

강남역 화장실에서 일어났던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의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공감언론 뉴시스) 경찰은 범인이 말하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강남역 노래방 묻지마 살인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여성 혐오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19"피의자가 심각한 수준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만큼 이번 범행의 동기가 여성 혐오 살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이라는 게)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기초로 판단한 경찰의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공감 언론 뉴시스)

1시간을 화장실 주변을 서성이고 남자들이 왔다갔다 할 때 자리를 비켜주면서 범죄의 대상을 물색했던 범인이 화장실에 들어간 피해 여성에게 가한 살인행위는 대상이 분명하며 한정적이다. 피해자는 여자라는 이유로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라는 이유,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을 명명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을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서 개념화하는 것은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269)

이 사건이 여성 혐오 살인이라고 인식될까봐, 사건을 통해 남성 혐오가 생길까봐 혹은 남성 대 여성의 대립과 갈등이 가열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상한 또라이 한 명 때문에 남자들 모두를 범죄자 취급할 셈이냐고 말하는 남자들도 있다. 남자들은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자들은 운다.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23세의 어린 그녀를 생각하며 운다. 내가 피해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를 느낀다.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서울 한복판, 사람이 그렇게도 많이 지나다닌다는 강남 번화가, 깨끗한 시설의 수노래방. 그리고 공용화장실.

 

 

강남역 10번 출구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꽃송이, 그리고 추모객들로 가득하다. 피해 여성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그 곳으로 모였던 젊은 여성들이 이러한 추모의 시간, 추모의 장소를 만들어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옮긴다

각기 다른 사회가 채택한 상상의 질서는 서로 다르다. 인종은 현대 미국인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중세 무슬림에게는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았다. 중세 인도에서 카스트는 생과 사의 문제였지만 현대 유럽에서 계급제도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다. (212)

 

 

동물의 세계에는 코끼리나 보노보처럼 의존적인 암컷들과 경쟁적인 수컷들 간의 역학관계의 결과로 모권 중심의 사회가 나타난 종이 많다. 암컷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을 발달시켜야 했으며, 협력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 보노보와 코끼리 사회는 협력적인 암컷들로 구성된 강력한 네트워크가 통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협력적인 수컷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평균적인 보노보 암컷은 수컷보다 힘이 약하지만, 수컷이 한계선을 넘어서면 종종 떼 지어 그 수컷을 괴롭히며 공격한다.

보노보와 코끼리가 이럴 수 있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사피엔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동물이고, 그 장점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자들이 비록 남자에게 의존한다 할지라도 협력이라는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공격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조종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231)

 

유발 하라리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 않는다. 협력이라는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싶지 않다. 조종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들을 억압하고 통제했던 그 방법과 방식대로 동료이자 친구인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싶지 않다. 남자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미움과 분노로 살아가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그녀를 추모하는 방법으로 포스트잇이 사용되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가해자를 조롱하거나 가해자의 성을 조롱하거나 가해자의 성기를 조롱하지 않고, 그녀들은 손바닥 만한 작은 종이에 절절한 외침을 적는다. ‘살아남아 죄송합니다’, ‘다음 타깃은 저겠죠, 여자니까요.’,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과 일상적인 두려움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그녀를 또 하나의 자아로 인식하게 했다. 보잘 것 없지만 실천 가능한 명확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녀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그로 인한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위를 환기시켰다.

협력이라는 사회적 기술을 이용했다.

이제 이야기할 때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함께.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16-05-20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공감하고, 특히 마지막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여태 여성 차별의 문제를 공감하고,
생활에서 소통하고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는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단발머리 2016-05-20 15:54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여성 차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제가 자란 환경이 그러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 자체를 제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차별을 넘어서 여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가 이런 끔찍한 사태를 일으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이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감은빛님....

cyrus 2016-05-20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를 적으로 대하는 태도는 또 다른 증오만 계속 생길 뿐입니다. 적개심으로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이제 남자들도 생각을 바꿀 때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남자들이 여성 차별 문제를 등한시하면, 제2, 3의 비극이 생겨도 무감각해질 겁니다.

2016-05-20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20 17:53   좋아요 0 | URL
저는 `상대를 적으로 대하는 태도`, `적개심으로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는 태도`를 그 태도를 유지하는 여성 혐오자들을 염두하고 쓴 것이었습니다. 여성 혐오가 잘못된 생각이라는 입장에서 쓴 댓글이었는데 첫 문장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저는 단발머리님의 생각에 공감해서 댓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공감하지 않았으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고, 댓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단발머리 2016-05-20 18:03   좋아요 0 | URL
cyrus님의 댓글로 오해가 풀렸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이 끝과 저 끝이 아니라면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해야겠지만
제 글의 전제와 상황 판단에 대해 cyrus님도 공감하신다니, 저도 `좋습니다`.

cyrus 2016-05-20 18:0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의 말씀대로 제가 태도의 주체를 밝혔으면 오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실수였습니다. 앞으로 댓글 달 때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남겨야겠습니다.

몬스터 2016-05-2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다르다는 것을 다르다는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게 상식인데...저도 요즘 제 스스로를 많이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양육 방법에 대해서도요. 아주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꾸어가는게 방법밖에는 없는 듯 싶습니다. 나부터 , 그리고 내 주위 부터.

단발머리 2016-05-21 07:04   좋아요 0 | URL
배움과 생활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아가는 요즘입니다. 세상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기도 하구요.

몬스터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세상이 이상하다고 탓하기도 해야하지만(저는 이 일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서부터 바꿔야 할 것들은 조금씩 바꿔가야겠다 생각합니다.
나도 모르게 아롱이에게 `남자가 쪼잔하게..`라고 했더니 막 화를 내더라구요.
`남자가... `라는 말이 양성평등에 어긋난다고요.

나부터, 내 주위부터 고쳐야할 것은 고쳐야겠다, 생각합니다.
 

 

 

 

 

 

 

 

마침 책이 눈에 띄어 아침부터 읽기 시작해 이제 막 다 읽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름만 알고 있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활동과 활약까지 읽다보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5월의 광주가 가진 의미, 그 숭고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채식주의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을 수상한 한강의 소식이 무척이나 기쁘다. 어제만 그녀의 책이 4만부가 넘게 나갔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녀가 힘들여 내놓은 이야기 소년이 온다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음 한다.

일단 나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으로 부르지 말고 '합창'으로 부르라 하고, 사람들은 일어서서 '제창'으로 부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이런 나라에서...

5. 18. 광주를, 그녀는 자신의 말로 기록했다. 가녀린 몸으로, 그녀는 참, 큰일을 해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온 2016-05-1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18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단발머리 2016-05-19 12:36   좋아요 0 | URL
5. 18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사랑을 해 보았다면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릴 때, 마침내 그 사람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놀랍게도 오직 그 사람만이 확대되어 또렷하게 부각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인상마저도 기억할 수 없이 배경으로 물러나게 되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364)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게 눈 속의 연꽃, 댈러웨이 부인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분류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30여페이지 읽다가 포기했다. 나는 열린책들을 원망하고 싶다. 책이 작고 글씨가 작고 자간이 좁아서, 그래서 내가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한 거다. 그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이 이런 식이 아닐까 쓸데없이 생각해본다.

    

팝스라는 게 있나보다. 아이들의 건강 여부를 체크하는 건데, 키와 몸무게를 측정한다고 한다. 우리집에 사는 어떤 아이는 팝스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를 원망하며 학기 초부터 거의 2달간 자발적 다이어트를 실시했는데, 그 놈의 팝스가 드디어 화요일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아이는 엄마, 오늘 팝스 했어! 오늘 우리, 곱창 먹으러 가면 안 돼요?”하고 묻기에 그 날은 아빠가 늦어 안 되고, 내일, 그러니까 수요일에 곱창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나는 곱창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편도 일부러 돈 주고 곱창을 사 먹지는 않아서, 우리 둘이 먹으러 갈 일이 없었는데, 교회 언니들과 함께 곱창맛을 본 그 아이가 곱창을 다 먹고, 밥까지 비벼 먹으면 정말 맛있다며 신이 나서 선전을 한다. 팝스도 끝나고 기분도 상쾌하고 그래 가자, 하고 집을 나섰다. 멋도 모르는 또 한 아이, 어디 가는 줄도, 뭘 먹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오는 어린이를 데리고 곱창집에 갔다. 맛나게 먹고, 그리고 2.

그 아이가 주문한 바닐라 프라푸치노에 커피가 들어간다는 걸 몰랐다. 그 아이는 빨대로 생크림을 꺼내먹으며 행복해하고, 나는 바닐라라떼를 빨대로 쪽쪽 빨고, 또 한 아이는 소세지빵을 먹었다. 저녁도 먹었겠다, 나는 차에서 책을 꺼내오라 지시하고, 할 일 많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책도 읽고, 핸드폰도 들여다보고, 커피도 마시고. 그렇게 2시간여를 혼자 보내고 커피숍을 나왔다.

커피숍을 나오자마자 바람이 세차게 분다. , 역시 여름 원피스는 아직 일러. 춥다, 추워. 에코백에서 또 한 아이의 바람막이 점퍼를 꺼낸다. 많이 컸네, 아롱이. 이 옷이 나한테 맞네. , 발 시려. 그래, 샌달도 오버였어. 춥다, 집에 빨리 가야지.

왼쪽에 GS마트. 내일 아침에 뭐 먹지? 김치찌개할까? 냉동실에 돼지고기, 냉장고에 두부 한 모. 햄 하나 살까? 아니야, 사지 마. 햄이 뭐가 좋다고. 그냥 두부만 넣자. 내일 아침에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이 생각이. 커피숍을 나오면서 바람을 맞으며 점퍼를 꺼내며 이 모든 생각이 1초 안에 들어오고 나갔다. 내 느낌으론 그랬다. 1초가 안 걸렸다.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덕길. 천천히 걸었다. 열 발자국 정도 갔을까. 밤하늘을 봤다. 별이 떠 있다. , 하늘에 별 떴다. 별 보는 거 오랜만이네. 그대로 멈춘다. 별을 본다. 별을 보니까, 별을 보다 보니까, 별을 보면서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 나는 별을 보면서 항상 그 사람을 생각했는데...

내게 별빛을 내리쬐는 저 별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저 별이 어떤 별인지, 내게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그냥 저 별을 마주하고 있는 거다. 별을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거다. 별이 내게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별을 바라볼 때, 내가 별을 바라볼 때마다, 별이 내게 마주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내게는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별을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했다. 잘 사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그러다 옆을 돌아보니 오른쪽에는 초승달이 또 이렇게 예쁘게 떠있다. 아파트 숲 가까이 내려온 초승달은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더라도, 시원한 초여름의 밤하늘에 밝게 빛나고 있다. , 정말 예쁘네. , 별을 따달라고 그래. 달을 따달라고 해야지. 달 좀 따 주세요. 너무 너무 예뻐요. 목걸이로 하든, 반지로 하든, 아무튼 내 맘대로 할테니 누가 나한테 달 좀 따다 주세요.

돌아가는 길을 서둔다. 빨리 가야지. 춥다, 추워.

그런데, 그런데 나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일하지 않고, 사회적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될까.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도 괜찮을까. 아이들이 더 크면 더 돈이 필요할텐데. 지금이야 아이들이 집에 일찍 오니까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곧 아이들도 다 커버리면. 아이들은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올 텐데. 나는 그 많은 시간에 뭘 하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뭔가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또 다른 아이가 4학년이니까. 그래, 그 아이는 중학교 때도 내가 집에 있어야해. 안 그러면 집이 진짜 피씨방 될거야. 또 다른 어떤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려면 몇 년 남았지. 6년이 남았구나. 만약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시작할 수 있겠네. 그럼 내 나이가 몇 이야. 4@이구나. , 그래도 젊긴 하네. 또 다른 어떤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도 난 젊구나. 그래, 일을 해야 돼. 일을 해야겠어. 근데 무슨 일을 하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언덕이 끝났다. 이제 집 앞이다. 코너를 돈다. 또 별이 보인다. 이 별이 저기 아래에서 보았던 바로 그 별일까 하고 생각한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추워.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른다. #*2@@9@. 문이 열린다. 몸을 반대로 돌린다. 집 앞 놀이터로 간다. 벤치에 앉는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 ... 또 별이 보인다. 그 사람을 생각한다. 잘 살고 있겠지. 그럴 거야. 잘 살고 있을 거야. 행복하게, 알콩달콩. 아들 낳고. 딸 낳고. 아니지, 딸 낳고, 아들 낳았지. 나는...

그 사람의 와이프를 알고 있어서, 와이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 카톡의 사진을 볼 수 있어서, 그 사람이 딸 낳고 아들 낳았다는 걸, 그 사람의 안방을, 그 사람의 딸이 얌전한 분위기의 예쁜 아이라는 걸, 그 사람의 아들의 팔이 자꾸 빠진다는 걸, 그런 걸 다 알고 있다. , 모르면 좋을 것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다시 비밀번호 #*2@@9@. 을 누른다. 안으로 들어온다. 문 안쪽으로, 집 안으로, 내 세계로 그렇게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1부다. 그런데, 어제.

 

밀양을 살다, Why? People 이태석

 

 

 

 

 

 

 

어제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나갔다. 밀양을 살다는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대출한 책인데, 책을 펴보지도 못하고 반납일이 되었다. 또 다른 아이의 책도 예약된 책이 도착했다고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주말에 가도 되는데, 근래 몇 번 반납일을 놓쳐 연체가 되기도 했고, 또 다른 아이도 보고 싶어할 것 같아, 일부러 집을 나섰다. 평소대로 주차를 했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 나면 주로 상가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는 길을 건너 도서관쪽으로 간다. 그런데, 어제는 차가 들어온 쪽으로 걸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다니는 길과는 다른 길로 걸어간 거다. 책을 손에 들고는 너털너털 걸어 주차장 입구에 왔을 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정말 믿기지 않게도 그 사람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옆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 눈이 얼마나 커졌는지 볼 수 있었을 거다.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있는 거다.

그 전날, 별을 보며 생각했던 그 사람이

잘 살라고,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라고

진심을 빌어주었던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는 거다.

 

우리는 45도 각도로 지나쳤다. 내가 본 건 그 사람의 왼쪽 얼굴이고, 그 사람도 분명 나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과 마주친 순간 멈칫했지만, 그 사람은 그냥 나를 지나쳐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새로 산 카키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슬리브리스 카키색 주름 원피스에 짧은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멀리 갈 때만, 좋은 자리에 갈 때만, 예쁘게 보이고 싶을 때만 렌즈를 낀다. 당연히 어제는 책을 대출하러 집 앞에 나가는 길이었기에 안경을 꼈다. 아침에 급하게 대충한 화장은 거의 다 지워져 있었다. 눈썹 끝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얼굴이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집을 나가면서 거울을 봤지만 화장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집 앞에 나가는 거였으니까. 입술에는 크리니크 립밤을 바르고 있었는데, 내리기 직전 너무 초췌해보여 차안에서 급하게 쓱쓱 바른 거였다. 피부화장이 거의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핫핑크의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내리면서 사이드미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안 어울린다, 진짜. 역시 나는 베이비핑크가 어울려.

그래서, 나는 그 사람한테 알은 체 하지 못 했다. 나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안경을 꼈고, 눈썹은 반이 지워져 있었고, 핫핑크의 립이 너무 강렬해서. 그래서 나는 그 사람한테 알은 체를 하지 못 했다.

도서관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너무 뒤돌아 보고 싶었다. 내가 본 그 사람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도 뒤를 돌아본다면, 그렇다면. ... 그렇다면 그는 내 안경과 눈썹과 핫핑크를 보게 될 것이었다. 그건 안 돼.

마음 속은 전쟁터였다. 나는 그에게 잘 지냈냐고 묻고 싶었다. 잘 지내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느냐고. 내가 묻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한 그는 다정하게 대답해줄 것이었다. 그의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다. 다정한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안경 때문에 눈썹 때문에 핫핑크 때문에, 나는 뒤돌아볼 수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려는 찰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아무 책이나 뽑아들고는 창문으로 갔다. 도서관은 언덕에 세워져 있고 종합자료실은 4층이라 반대쪽이 잘 보였다. 그와 내가 마주친 그 장소를 쳐다봤다. 그는 없었다. 3층으로 내려와 예약된 책을 대출했다. 그리고 또 창문 앞으로 갔다. 그 자리를 쳐다봤다. 그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쩔 줄을 몰라, 집 안을 뱅뱅 돌았다. 아쉬웠고, 그리고 궁금했다.

내가 본 건 분명 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못 알아본 걸까. 나를 못 알아본거야? 내가 안경을 써서? 내가 롱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래서 나를 못 알아본 거야? 나를? 나를 못 알아본 거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2000년 겨울이니까, 15년 전이다. 그 해에, 나는 회사에 들어갔고, 그리고 뜨거운 연애 중이었다. 내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그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내 친구가 그에게 내가 곧 남자친구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을 때는, 그 친구가 정말 미웠다. 그냥 미웠다.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었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준비해온 선물을 줬고, 그 후로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그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누구랑 결혼했는지도 들었다.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아들의 사진도 봤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찾아 나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가끔이나마 그의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하고도 뜸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내 눈 앞에 거짓말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나타난 거다.

15년 만에,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거다.

날 알아보지 못했고

난 인사하지 못 했다.

내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내 화장이 다 지워져 있어서

 

늦은 밤,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만난 사람, 내가 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걸까? 내가 잘못본 거는 아닐까. 나는 그 사람을 1초도 제대로 본 게 아니니까, 그냥 순간적으로 그 사람을 봤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그래,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떻게, 내가, 내가 그 사람을 못 알아보겠어.

내가 안경을 썼으니까, 내가 헤어스타일을 바꿨으니까, 내가 롱원피스를 입었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못 알아본 거야. 내가 본 건 맞아. 난 제대로 본 거야. 내가 본 건 그 사람이 맞아.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갑자기, 그 시간에 나타난 걸까. 이틀에 한 번씩 다니는 내 도서관 앞에, 왜 나타났을까.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전날 밤 별을 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던 내 이야기가 그에게 가닿았나. 내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주려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그래서 내 앞에, 내 눈 앞에 나타난걸까?

 

 

그럼, ....

왜 나를 못 알아본 거야?

? 내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내 눈썹이 지워져서? 내 입술이 핫핑크라서? 내가 롱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날 못 알아본 거야?

그래? 진짜 그런거야?

? 그런거야?

진짜... 그런 거야?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6-05-1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발머리님......

하아.....

단발머리 2016-05-13 19:36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사실 아직 제 정신이... 안 돌아와서요.
그러니까 제가 어제 본 게 제대로 본 건지, 잘못 본 건지,
너를 본건지, 너였다가 아닌거를 본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알은 체 안한걸 후회하려면 일단 제 정신이 좀 돌아오고 나서 해야할 것 같기는 해요. 후회를 하던지, 아니면 잘했다고 위안을 삼던지 해야겠지요.

하아.....

cyrus 2016-05-1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보고 싶은 사람을 우연찮게 만났을 때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심장이 요동치는 느낌. 그 짧은 순간동안 그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나중에 후회 되요.

단발머리 2016-05-13 19:3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마주치고 걸어내려오는 그 7-8미터의 길이 100미터처럼 느껴졌었죠.

저는 아무일없이 지나쳤거든요.
후회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제 정신이... 아니에요.

수퍼남매맘 2016-05-1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한 편의 연애소설을 읽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가슴이 철렁 하셨을 것 같아요.
안경을 끼고, 눈썹이 반 지워지고, 입술 색이 핫핑크라서 알은 체 하지 못하셨다는 대목에서 완전 공감합니다.

단발머리 2016-05-13 19:39   좋아요 0 | URL
그런 생각도 하기는 했어요.

만약 내가 안경을 벗고 있었고, 화장도 예쁘게,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는데도,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 사람이 먼저 멈춰서지 않았다면, 저도.... 저도 아마 그냥 지나쳤을 거예요.
아.... 모르겠어요.

2016-05-1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4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단편 읽은 느낌이어요. 후아 후아...정신 돌아오지 말고 그냥 계속. . .

단발머리 2016-05-14 07:58   좋아요 0 | URL
저 사실...
아직 제정신이 아니에요.
원래 글을 쓸 때도 올릴 생각은 없었고 그냥 너무 당황스런 일이라 기록해두자,하고 적어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알라딘에 올렸거든요.
제정신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오후 5시였고, 날은 환해고, 저도 멀쩡해서...
잘못 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왜...
그 사람은 저를 못 알아본 걸까요? 아흐...

2016-05-13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4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6-05-1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심장을 문득 처음처럼 뛰게 한 그가 누군지 행복하겠어요.

단발머리 2016-05-14 08:03   좋아요 0 | URL
제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저만 놀라고 저만 행복했어요.
지금 제가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저만 그래요.

그는 저를 못 알아봤으니까.
제 마지막 자존심이거든요. 설마 나를 알아보고 지나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냥... 나를 못 알아본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제 이야기죠.
그가 등장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예요.
그는 나를 못 알아봤으니까요.
아흐.... 흐흑 T.T

수이 2016-05-13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일 큰일인건가 아닌건가 아 그냥 좋다 라고 말할 수 없는데_

단발머리 2016-05-14 08:06   좋아요 1 | URL
큰일은 아닌데, 좋은 건지 어쩐지 잘 모르겠어요.
그를 그렇게 보았던 거, 그 1초가 너무 난 좋았거든요.
그 순간을, 그 느낌을 지속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는 멈짓했지만, 그냥 지나쳤고,
그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내가 아흐.... 이 페이퍼에 몇 번 쓴지 알아요?
이것까지 다섯 번... 아흐...

해피북 2016-05-14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어떤 사람은 발걸음 소리만으로, 비춰지는 그림자 만으로, 특정한 숨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아마 그분도 단발머리님이 느끼시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은 흘러 모습은 변했다고 생각이 들고 문득 눈앞에 나타난 친구에게 손흔들며 인사하기 쑥스럽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진정하느라 아마도 힘드셨을테고 말이죠. 그 느낌..생각들에 깊은 공감이ᆞᆞᆞ

단발머리 2016-05-16 19:52   좋아요 1 | URL
그 사람이 제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기를 원하지는 않았던것 같아요.
그냥.... 그냥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을, 친구를 그냥....
알아보고, 평범한 이야기들, 아이들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기를 바랬는데, 그런데, 그가 저를 못 알아보는 바람에... 이렇게 긴 이야기가 만들어졌네요.

에휴...

몬스터 2016-05-15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 달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평생 마음에 남아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저까지 가슴이 떨리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단발머리 2016-05-16 19:53   좋아요 1 | URL
평생 제 마음에 남을 사람이라 생각해요.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와 상관없이 제가 가진 기억이 예쁘고 따뜻하니까요.
잘 읽었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아직 제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ㅎㅎ

icaru 2016-05-19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눈 언저리가 뜨거워지려 하네요... 막 감정이입되고...
가까이 살고 있는가요? 그분~?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 소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감으로 읽어내려 갔습니다요!
가독성 짱 ㅎㅎㅎ;;

단발머리 2016-05-19 18:29   좋아요 1 | URL
이 사람이 노을을 보며 생각했던 그 사람입니다. icaru님께만 쓰는 유머^^
제가 아는 바로는 가까이에 사는데요. 어딘지는 모르고.
아이들이 얼추 비슷해서 아이들 좋아하는 곳 다니다 보면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한 번도 못 만났어요.

가독성이 좋다고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도 나름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제정신이 아닌... 그런 시간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