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의 날 이벤트에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꼽았던 제인 에어를 다시 들었다.

소설을 재미있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는 아주 쉬운데, 스스로를 소설 속 주인공 중의 하나로 여기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의 마음과 생각이 더 선명하게 읽히고 들리고 보인다. 나는 그렇다. 제인 에어를 읽는다 했을 때, 나는 등장인물 중의 한 명이 되는 거다. 나는 제인 에어. 그녀를 찜한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대해 들은지는 꽤 됐다. 로체스터의 아내인 버사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라고 하던데, 아직은 읽지 못 했다. 그 책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떨린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쁜 남자, 나의 소중한 남주 로체스터를, 이제 나는 증오하게 될 것인가

애써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외면한 채, 제인 에어를 읽는다. 스스로를 제인 에어라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읽어왔다.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고아 소녀, 무엇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는 까탈스러운 성격, 예쁘지 않은 외모(가장 근접한 지점), 창백한 얼굴, 작은 몸집.

로체스터의 숨겨진 아내, 버사를 살펴본다.

검은 피부(검다는 건 로체스터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니, 사실은 누런 피부가 아닌가 추측), 검은 머리카락, 큰 키.

대충 봐도 자세히 봐도 결론은 같다. 제인 에어보다는 버사 쪽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제인 에어야 한다. 그래서, 아직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지 못 했다. 그 책을 읽으면 난 로체스터를 미워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내가 제인 에어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로체스터는 멋진 남자로 남아야 하고, 나는 제인 에어여야 한다.

     

그의 예사로운 태도가 나를 구속감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따스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다정스러운(다정스러운? 다정하고, 아닐까?) 솔직한 태도로 나를 대해 주었고 그 때문에 나는 그에게 끌렸다. (267)

 

... , 내게로 와요, 제인, 어서!“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잡고 있는 손을 풀어 놓아주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오히려 미친 듯이 나를 끌어안을 때보다도 더 반항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그 앞에 굴복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의 분노와 맞서 그걸 좌절시켜 왔다. 이제는 그의 슬픔에서 도망쳐야 했다. 나는 문 쪽으로 물러났다. (162)

 

 

이제 다시 읽어보니 괴팍한 성격이라고 단정지었던 로체스터는 오히려 다정한 면이 많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엉켜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로체스터는 애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제인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청한다.

세인트 존은 다르다. 그리스 조각 같은 완벽한 외모에 풍부한 학식, 굳건한 신앙심과 친절한 심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다. 하지만 그를 거부했을 때, 그를 거절했을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 ... 그러기 위해서 당신에게는 오빠가 아니라 협력자가 필요한 거요. 남매간의 기반이란 약한 겁니다. 남편이라야 합니다. 나도 누이동생은 필요 없습니다. 누이동생은 언제 남한테 빼앗길지 모르는 거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은 아내입니다. 죽는 날까지 온전히 내 것으로 해둘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협력자가 필요한 겁니다.“ (334)

 

 

그리고 그동안에 그가 내게 느끼게 한 것은, 선량하면서도 엄격하고 양심적이면서 집념 깊은 사람이 자기를 거역한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적대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비난 섞인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내가 자기의 관심 밖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343)

 

자신의 뜻에 거역한 사람, 자신을 거부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두 사람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로체스터는 매달리고 세인트 존은 제인을 안 보이는 사람 취급한다. 로체스터는 애원하고 세인트 존은 가르친다. 로체스터는 울부짖고 세인트 존은 안수(按手)한다. 진짜 나쁜 남자는 로체스터가 아니라, 세인트 존이다. 세인트 존을 미워하려는 순간, 만약 세인트 존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소설 속에서는 아마도 로체스터가 천하의 불한당으로 그려지겠지.

 

녹턴

  

 

 

 

 

 

 

 

  

시의 특정한 구절을 따로 떼내어 마음대로 해석하는 건, 시를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이 구절만큼은 그래도 될 것 같아 옮겨본다.

 

이런 이별

1월의 저녁에서 12월의 저녁 사이

                                                                  김선우

 

.....

첫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두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세번째 기도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문 앞의 흰 자갈 위에 앉은 따스한 이슬을

위해

 

.....

 

당신이 내 마음에 들락거린 10년 동안 나는 참 좋

았어.

사랑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행히 하고픈 말이 같았다.

 

내게,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게,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시는 분이 있어 나는 참 좋았다. 그 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몰고 강물로 뛰어들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끌면서 돌아오는 편이라 더 그랬다.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차저차 제정신은 돌아오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해는 지고 뜨고, 달도 부지런히(야나문^^). 별조차 이렇게나 바쁘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제정신이 돌아오는 시간.

로체스터는 실상 유약한 남자였고, 세인트 존은 알고 보니 나쁜 남자였다.

나는 당신을 위해 세 번쯤 기도하고, 자전거를 끌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 때가 바로 지금,

제정신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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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5-25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 리스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해요. 책에도 언급되지만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하고 생각하고 깨우치고 그리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이야기에 대해 썼으니까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그래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읽었던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가 엉망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발머리님. 저는 여전히 로체스터가 좋아요.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사랑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진짜 인상깊었어요. 제가 그간 읽었던 연애장면들 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었어요. 나중에 불에 타서 팔도 못쓰고 앞도 못보는데, `난 이래서 안될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하잖아요. 사랑한다는 건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내가 어떤 모습이든 감춰야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는다고 해서 제인 에어가 싫어지지는 않을거다, 라는 거였어요.


지금 다시 제인 에어를 읽는다면 저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그때 로체스터를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도 로체스터를 인상깊은, 당당한 남자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광막한 사르가소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요. 제가 많이 달라져서요. 나이도 먹었고 연애와 이별을 겪었고 회사도 좀 더 다녔고 여러 친구들을 새로 사귀고 헤어졌으니, 저는 과거의 저와 달라졌을 거 아녜요. 그러니 지금 읽는 제인에어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단발머리님,
흔들리는 단발머리님도, 제정신이 돌아온 단발머리님도,
그 모두가 다 단발머리님 입니다.

단발머리 2016-05-25 12:30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이름조차 거대하고 위엄넘치는 이 작품이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읽지 않고 말하는 이 뻔뻔함..)

제가 정말 놀랐던 건, 그러니까 그런 작품이 가능했던 작가의 인식이었던 것 같아요.
버사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써 보자, 이런 생각이요.
저 스스로라고 한다면, 제3세계의 유색인종인 나는, 왜 스스로를 제인에어에게 동일시했을까.
나는 왜 버사에 대해서는, 불쌍하고 가련한, 어쩌면 자기주장이 강하고 똑똑했을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을까. 왜 미친 여자로만 생각했을까. .....
전 여러번, 아주 여러번 <제인 에어>를 읽었고,
통으로 읽고, 나눠읽고, 공부하고, 시험보고, 영어로 읽고, 한글로 읽었는데도,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깜짝 놀라고 당황했죠.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 진 리스에게 감사를...

다시 읽는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책은 그대로인것 같지만 그 책을 읽는 우리는 계속 바뀌어가니까요.
가끔, 아주 가끔은 예전에는 좋았는데, 다시 읽었을 때 별로인 책들도 있더라구요.
저한테 <제인 에어>는 아직 그대로예요. ㅎㅎㅎ
다락방님께는 어쩔지 궁금하네요.

저는 이제 제정신 단발머리예요.
다락방님 말씀대로, 왔다갔다의 단발머리도, 제정신의 단발머리도 모두 저니까요.
ㅎㅎㅎ 좋네요^^

2016-05-25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이 넘 맘에 들어요. 광사바도 일단 제목이 매혹적이고요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로체스터는 여전히 매력적이더라구요. 마사나 로체스터나 다 존재의 이유가 있는거지 누가 누구에게 특히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구요. 읽은지 2년이 안되었는데 가물가물하네요.다시 읽어야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16-05-26 18:03   좋아요 0 | URL
페이퍼 제목이 맘에 드신다니 저도 좋아요.
광사바는 좀 아껴둘려구요.
저에게는 아직 로체스터가 필요합니다.
강하고 매력적인.... 매달리면서 집착하는 그런 남자요... ㅎㅎㅎ

꿈꾸는섬 2016-05-25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인에어 다시 읽어야겠어요. 그리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녹턴도요.^^

단발머리 2016-05-26 18:05   좋아요 0 | URL
ㅎㅎ 책읽기에서 제일 흥미로운 게 다시 읽기인 것 같아요.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보이네요.

저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좀 미뤄둡니다.
위의 이유 때문이지요.
강하고 매력적인.... 매달리면서 집착하는 로체스터 때문에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