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살해
기본적 정의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 살인. 성차별적 테러리즘의 가장 극단적 형태
러셀 Diana E. H. Russell은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1차 ‘여성대상범죄 국제 재판’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공식화했다.(264쪽) 2001년 편집자로 참여한 책에서, 러셀은 여성 살해를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살해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여성 살해가 남성 지배와 성차별주의의 극단적 표현임을 명시하면서, 여성 살해를 성 정치학의 장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이것을 사적이거나 병리학적인 문제로 다루는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여성 살해>, 황주영, 265쪽)
강남역 화장실에서 일어났던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의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공감언론 뉴시스) 경찰은 범인이 말하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강남역 노래방 묻지마 살인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여성 혐오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19일 "피의자가 심각한 수준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만큼 이번 범행의 동기가 여성 혐오 살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이라는 게)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기초로 판단한 경찰의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공감 언론 뉴시스)
1시간을 화장실 주변을 서성이고 남자들이 왔다갔다 할 때 자리를 비켜주면서 범죄의 대상을 물색했던 범인이 화장실에 들어간 피해 여성에게 가한 살인행위는 ‘대상’이 분명하며 한정적이다. 피해자는 ‘여자’라는 이유로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라는 이유,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을 명명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을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서 개념화하는 것은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269쪽)
이 사건이 ‘여성 혐오 살인’이라고 인식될까봐, 사건을 통해 ‘남성 혐오’가 생길까봐 혹은 남성 대 여성의 대립과 갈등이 가열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상한 또라이 한 명 때문에 남자들 모두를 범죄자 취급할 셈이냐고 말하는 남자들도 있다. 남자들은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자들은 운다.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된 23세의 어린 그녀를 생각하며 운다. 내가 피해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를 느낀다.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서울 한복판, 사람이 그렇게도 많이 지나다닌다는 강남 번화가, 깨끗한 시설의 수노래방. 그리고 공용화장실.
강남역 10번 출구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꽃송이, 그리고 추모객들로 가득하다. 피해 여성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그 곳으로 모였던 젊은 여성들이 이러한 추모의 시간, 추모의 장소를 만들어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옮긴다.
각기 다른 사회가 채택한 상상의 질서는 서로 다르다. 인종은 현대 미국인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중세 무슬림에게는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았다. 중세 인도에서 카스트는 생과 사의 문제였지만 현대 유럽에서 계급제도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다. (212쪽)
동물의 세계에는 코끼리나 보노보처럼 의존적인 암컷들과 경쟁적인 수컷들 간의 역학관계의 결과로 모권 중심의 사회가 나타난 종이 많다. 암컷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을 발달시켜야 했으며, 협력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 보노보와 코끼리 사회는 협력적인 암컷들로 구성된 강력한 네트워크가 통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협력적인 수컷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평균적인 보노보 암컷은 수컷보다 힘이 약하지만, 수컷이 한계선을 넘어서면 종종 떼 지어 그 수컷을 괴롭히며 공격한다.
보노보와 코끼리가 이럴 수 있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사피엔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동물이고, 그 장점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자들이 비록 남자에게 의존한다 할지라도 협력이라는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공격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조종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231쪽)
유발 하라리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 않는다. 협력이라는 우월한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싶지 않다. 조종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들을 억압하고 통제했던 그 방법과 방식대로 동료이자 친구인 남자들의 허를 찌르고 싶지 않다. 남자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미움과 분노로 살아가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그녀를 추모하는 방법으로 포스트잇이 사용되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가해자를 조롱하거나 가해자의 성을 조롱하거나 가해자의 성기를 조롱하지 않고, 그녀들은 손바닥 만한 작은 종이에 절절한 외침을 적는다. ‘살아남아 죄송합니다’, ‘다음 타깃은 저겠죠, 여자니까요.’,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과 일상적인 두려움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그녀를 또 하나의 자아로 인식하게 했다. 보잘 것 없지만 실천 가능한 명확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녀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그로 인한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위를 환기시켰다.
협력이라는 사회적 기술을 이용했다.
이제 이야기할 때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