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
사랑을 해 보았다면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릴 때, 마침내 그 사람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놀랍게도 오직 그 사람만이 확대되어 또렷하게 부각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인상마저도 기억할 수 없이 배경으로 물러나게 되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364쪽)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게 눈 속의 연꽃』, 『댈러웨이 부인』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분류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30여페이지 읽다가 포기했다. 나는 열린책들을 원망하고 싶다. 책이 작고 글씨가 작고 자간이 좁아서, 그래서 내가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한 거다. 그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흐름 기법이 이런 식이 아닐까 쓸데없이 생각해본다.
팝스라는 게 있나보다. 아이들의 건강 여부를 체크하는 건데, 키와 몸무게를 측정한다고 한다. 우리집에 사는 어떤 아이는 팝스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를 원망하며 학기 초부터 거의 2달간 자발적 다이어트를 실시했는데, 그 놈의 팝스가 드디어 화요일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아이는 “엄마, 오늘 팝스 했어! 오늘 우리, 곱창 먹으러 가면 안 돼요?”하고 묻기에 그 날은 아빠가 늦어 안 되고, 내일, 그러니까 수요일에 곱창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나는 곱창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편도 일부러 돈 주고 곱창을 사 먹지는 않아서, 우리 둘이 먹으러 갈 일이 없었는데, 교회 언니들과 함께 곱창맛을 본 그 아이가 곱창을 다 먹고, 밥까지 비벼 먹으면 정말 맛있다며 신이 나서 선전을 한다. 팝스도 끝나고 기분도 상쾌하고 그래 가자, 하고 집을 나섰다. 멋도 모르는 또 한 아이, 어디 가는 줄도, 뭘 먹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오는 어린이를 데리고 곱창집에 갔다. 맛나게 먹고, 그리고 2차.
그 아이가 주문한 바닐라 프라푸치노에 커피가 들어간다는 걸 몰랐다. 그 아이는 빨대로 생크림을 꺼내먹으며 행복해하고, 나는 바닐라라떼를 빨대로 쪽쪽 빨고, 또 한 아이는 소세지빵을 먹었다. 저녁도 먹었겠다, 나는 차에서 책을 꺼내오라 지시하고, 할 일 많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책도 읽고, 핸드폰도 들여다보고, 커피도 마시고. 그렇게 2시간여를 혼자 보내고 커피숍을 나왔다.
커피숍을 나오자마자 바람이 세차게 분다. 아, 역시 여름 원피스는 아직 일러. 춥다, 추워. 에코백에서 또 한 아이의 바람막이 점퍼를 꺼낸다. 많이 컸네, 아롱이. 이 옷이 나한테 맞네. 아, 발 시려. 그래, 샌달도 오버였어. 춥다, 집에 빨리 가야지.
왼쪽에 GS마트. 내일 아침에 뭐 먹지? 김치찌개할까? 냉동실에 돼지고기, 냉장고에 두부 한 모. 햄 하나 살까? 아니야, 사지 마. 햄이 뭐가 좋다고. 그냥 두부만 넣자. 내일 아침에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이 생각이. 커피숍을 나오면서 바람을 맞으며 점퍼를 꺼내며 이 모든 생각이 1초 안에 들어오고 나갔다. 내 느낌으론 그랬다. 1초가 안 걸렸다.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덕길. 천천히 걸었다. 열 발자국 정도 갔을까. 밤하늘을 봤다. 별이 떠 있다. 아, 하늘에 별 떴다. 별 보는 거 오랜만이네. 그대로 멈춘다. 별을 본다. 별을 보니까, 별을 보다 보니까, 별을 보면서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 나는 별을 보면서 항상 그 사람을 생각했는데...
내게 별빛을 내리쬐는 저 별이 지금도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저 별이 어떤 별인지, 내게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그냥 저 별을 마주하고 있는 거다. 별을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는 거다. 별이 내게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별을 바라볼 때, 내가 별을 바라볼 때마다, 별이 내게 마주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내게는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별을 보면서 그 사람을 생각했다. 잘 사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그러다 옆을 돌아보니 오른쪽에는 초승달이 또 이렇게 예쁘게 떠있다. 아파트 숲 가까이 내려온 초승달은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더라도, 시원한 초여름의 밤하늘에 밝게 빛나고 있다. 아, 정말 예쁘네. 왜, 별을 따달라고 그래. 달을 따달라고 해야지. 달 좀 따 주세요. 너무 너무 예뻐요. 목걸이로 하든, 반지로 하든, 아무튼 내 맘대로 할테니 누가 나한테 달 좀 따다 주세요.
돌아가는 길을 서둔다. 빨리 가야지. 춥다, 추워.
그런데, 그런데 나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일하지 않고, 사회적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될까.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도 괜찮을까. 아이들이 더 크면 더 돈이 필요할텐데. 지금이야 아이들이 집에 일찍 오니까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곧 아이들도 다 커버리면. 아이들은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올 텐데. 나는 그 많은 시간에 뭘 하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뭔가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또 다른 아이가 4학년이니까. 그래, 그 아이는 중학교 때도 내가 집에 있어야해. 안 그러면 집이 진짜 피씨방 될거야. 또 다른 어떤 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려면 몇 년 남았지. 6년이 남았구나. 만약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시작할 수 있겠네. 그럼 내 나이가 몇 이야. 4@이구나. 아, 그래도 젊긴 하네. 또 다른 어떤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도 난 젊구나. 그래, 일을 해야 돼. 일을 해야겠어. 근데 무슨 일을 하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언덕이 끝났다. 이제 집 앞이다. 코너를 돈다. 또 별이 보인다. 이 별이 저기 아래에서 보았던 바로 그 별일까 하고 생각한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추워.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른다. #*2@@9@. 문이 열린다. 몸을 반대로 돌린다. 집 앞 놀이터로 간다. 벤치에 앉는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 별... 또 별이 보인다. 그 사람을 생각한다. 잘 살고 있겠지. 그럴 거야. 잘 살고 있을 거야. 행복하게, 알콩달콩. 아들 낳고. 딸 낳고. 아니지, 딸 낳고, 아들 낳았지. 나는...
그 사람의 와이프를 알고 있어서, 와이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 카톡의 사진을 볼 수 있어서, 그 사람이 딸 낳고 아들 낳았다는 걸, 그 사람의 안방을, 그 사람의 딸이 얌전한 분위기의 예쁜 아이라는 걸, 그 사람의 아들의 팔이 자꾸 빠진다는 걸, 그런 걸 다 알고 있다. 아, 모르면 좋을 것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다시 비밀번호 #*2@@9@. 을 누른다. 안으로 들어온다. 문 안쪽으로, 집 안으로, 내 세계로 그렇게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1부다. 그런데, 어제.
『밀양을 살다』, 『Why? People 이태석』
어제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나갔다. 『밀양을 살다』는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대출한 책인데, 책을 펴보지도 못하고 반납일이 되었다. 또 다른 아이의 책도 예약된 책이 도착했다고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주말에 가도 되는데, 근래 몇 번 반납일을 놓쳐 연체가 되기도 했고, 또 다른 아이도 보고 싶어할 것 같아, 일부러 집을 나섰다. 평소대로 주차를 했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 나면 주로 상가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는 길을 건너 도서관쪽으로 간다. 그런데, 어제는 차가 들어온 쪽으로 걸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다니는 길과는 다른 길로 걸어간 거다. 책을 손에 들고는 너털너털 걸어 주차장 입구에 왔을 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정말 믿기지 않게도 그 사람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옆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 눈이 얼마나 커졌는지 볼 수 있었을 거다.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있는 거다.
그 전날, 별을 보며 생각했던 그 사람이
잘 살라고,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라고
진심을 빌어주었던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는 거다.
우리는 45도 각도로 지나쳤다. 내가 본 건 그 사람의 왼쪽 얼굴이고, 그 사람도 분명 나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과 마주친 순간 멈칫했지만, 그 사람은 그냥 나를 지나쳐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새로 산 카키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슬리브리스 카키색 주름 원피스에 짧은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멀리 갈 때만, 좋은 자리에 갈 때만, 예쁘게 보이고 싶을 때만 렌즈를 낀다. 당연히 어제는 책을 대출하러 집 앞에 나가는 길이었기에 안경을 꼈다. 아침에 급하게 대충한 화장은 거의 다 지워져 있었다. 눈썹 끝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얼굴이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집을 나가면서 거울을 봤지만 화장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집 앞에 나가는 거였으니까. 입술에는 크리니크 립밤을 바르고 있었는데, 내리기 직전 너무 초췌해보여 차안에서 급하게 쓱쓱 바른 거였다. 피부화장이 거의 지워져 있었기 때문에 핫핑크의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내리면서 사이드미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안 어울린다, 진짜. 역시 나는 베이비핑크가 어울려.
그래서, 나는 그 사람한테 알은 체 하지 못 했다. 나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안경을 꼈고, 눈썹은 반이 지워져 있었고, 핫핑크의 립이 너무 강렬해서. 그래서 나는 그 사람한테 알은 체를 하지 못 했다.
도서관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너무 뒤돌아 보고 싶었다. 내가 본 그 사람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도 뒤를 돌아본다면, 그렇다면. 아... 그렇다면 그는 내 안경과 눈썹과 핫핑크를 보게 될 것이었다. 그건 안 돼.
마음 속은 전쟁터였다. 나는 그에게 잘 지냈냐고 묻고 싶었다. 잘 지내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느냐고. 내가 묻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한 그는 다정하게 대답해줄 것이었다. 그의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다. 다정한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안경 때문에 눈썹 때문에 핫핑크 때문에, 나는 뒤돌아볼 수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려는 찰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거기에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아무 책이나 뽑아들고는 창문으로 갔다. 도서관은 언덕에 세워져 있고 종합자료실은 4층이라 반대쪽이 잘 보였다. 그와 내가 마주친 그 장소를 쳐다봤다. 그는 없었다. 3층으로 내려와 예약된 책을 대출했다. 그리고 또 창문 앞으로 갔다. 그 자리를 쳐다봤다. 그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쩔 줄을 몰라, 집 안을 뱅뱅 돌았다. 아쉬웠고, 그리고 궁금했다.
내가 본 건 분명 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못 알아본 걸까. 나를 못 알아본거야? 내가 안경을 써서? 내가 롱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래서 나를 못 알아본 거야? 나를? 나를 못 알아본 거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2000년 겨울이니까, 15년 전이다. 그 해에, 나는 회사에 들어갔고, 그리고 뜨거운 연애 중이었다. 내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그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내 친구가 그에게 내가 곧 남자친구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을 때는, 그 친구가 정말 미웠다. 그냥 미웠다.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었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준비해온 선물을 줬고, 그 후로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그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누구랑 결혼했는지도 들었다.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아들의 사진도 봤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찾아 나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가끔이나마 그의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하고도 뜸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내 눈 앞에 거짓말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나타난 거다.
15년 만에,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거다.
날 알아보지 못했고
난 인사하지 못 했다.
내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내 화장이 다 지워져 있어서
늦은 밤,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만난 사람, 내가 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걸까? 내가 잘못본 거는 아닐까. 나는 그 사람을 1초도 제대로 본 게 아니니까, 그냥 순간적으로 그 사람을 봤다고 착각한 건 아닐까. 그래,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떻게, 내가, 내가 그 사람을 못 알아보겠어.
내가 안경을 썼으니까, 내가 헤어스타일을 바꿨으니까, 내가 롱원피스를 입었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못 알아본 거야. 내가 본 건 맞아. 난 제대로 본 거야. 내가 본 건 그 사람이 맞아.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갑자기, 그 시간에 나타난 걸까. 이틀에 한 번씩 다니는 내 도서관 앞에, 왜 나타났을까.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전날 밤 별을 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던 내 이야기가 그에게 가닿았나. 내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주려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그래서 내 앞에, 내 눈 앞에 나타난걸까?
그럼, 왜....
왜 나를 못 알아본 거야?
응? 내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내 눈썹이 지워져서? 내 입술이 핫핑크라서? 내가 롱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날 못 알아본 거야?
그래? 진짜 그런거야?
어? 그런거야?
진짜... 그런 거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