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고민 상담소의 훈훈한 이야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오래전에 사서 달 토끼의 사연만 읽고 그대로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것을 꺼내 읽었답니다. 물 먹인 종이로 만든 것처럼 두께에 비해 페이지가 많지 않고 (그래도 400여 페이지는 넘는), 인기 유명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이라는 출신 성분답게 복선과 단서가 적절히 가미된 흥미진진함으로 초광속으로 읽게 되는 책이에요 :)


무정차 고속열차처럼 밑줄 한 번 긋지 않고 귀 접기도 잊은 채 종착 페이지에 도착하고나니 "고민" (일본말로 "나야미")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싶었답니다. 국어와 영어 사전을 정처 없이 떠돌고 나니, "고민 상담을 하려는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고, 상담자에게 그 답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라는 참신성을 잃은 (명백한 진리지만 현실에선 이론인)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전 어디에도 "선택"이라는 단어는 "고민"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미야 잡화점 할아버지 말처럼, 조언을 해주는 사람의 어떠한 답과도 상관 없이 고민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따라 고민이 풀려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에서 100점을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시험을 치면 됩니다~"

라는 재치 가득한 하지만 깊이 있는 할아버지의 고민상담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고민을 가지고 있는 각 인물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도 감동적입니다.


일정 시간마다 일정 시간 동안 각 지방의 풍경을 보여주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된다면, 창가에 앉아 원근감 때문에 다르게 흘러가는 창 너머 풍경들과 함께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



의도치 않게 전달된 백지 고민 상담 편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 일부를 올려드리며 짧은 후기를 마칩니다.


"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 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 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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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로님의 글을 읽으니까 인생 자체가 하나의 종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가는 과정 하나하나 기록하는 과정. 계속 써나갈수록 삶을 기록할 수 있는 빈 공간은 줄어들지만, 불의의 사고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종이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는 것이 중요해요.

초딩 2015-08-10 22:09   좋아요 0 | URL
종이와 그 써나감의 비유는 많이 봤지만. 종이의 훼손에 관한 비유는 처음이라 신선하네요. Cyrus 님 글을 요즘 자세히 못봐 죄송스럽습니다.

cyrus 2015-08-10 22:2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웃님들의 글을 다 못 봅니다. ^^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비가 올 것 같다.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p7, 어린 새


`너`라는 인칭대명사에 익숙해지는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ㅓ`를 `ㅏ`로 바꾸어가며 읽고 싶을 정도였으니깐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뜬 것 같은 가는 눈을 가진, 수수한 흑백 사진속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는  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조금 먼저 영혼이 된 `정대`가 `동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p47, 검은 숨

 

한강작가님이 서사하는 검붉었던 그날들과 잿빛으로 가득한 그 이후의 날들에 대한 묘사는 그녀가 1970년생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게 했습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p211, 눈 덮인 램프


무엇을 위해 쓴다는 것이 아닌 `써야 함`이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무엇을 위해서", "희생된 누구를 위해서", "우리 후세의 무엇을 위해서" 그 모두의 이전에 우리의 뼛속에 각인 시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써야했던 그 무엇인가가 느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의 한 사람 소포클레스는 "내가 헛되게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7, 일곱개의 뺨


그 검붉었던 날들 이후에 태연하게 물을 쏟아내는 분수대를 보며 울부짖듯, 애원하듯 민원실에 전화를했고, 마지못한 응대 끝에 들려온 메마른 응답이었습니다. 전화를 한 이가 다 잊고 공부를 하지 못했듯이, 응대한 나이든 여사무원도 결코 다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의 `저지른 인간들`을 보며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분노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p134, 쇠와 피


하지만, 거대한 감긴 태엽이 서서히 어쩔 수 없이 풀리듯이 그렇게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공허하게

보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이

듣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이

비워진 껍데기뿐인 몸이 그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p212, 눈 덮인 램프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p103, 일곱개의 뺨


이 책은 천편일률적으로 취한 이가 했던 말을 또 하는 듯한 누군가의 현대사도 아니고,

교과서 같은 딱딱한 제목과 소제목 더 작은 제목들 그리고 흑백의 사진들이 가득한 다큐멘터리 같은 건조한 책도 아닙니다.

초록색 큰 포도를 은쟁반에 담고 오물 오물 씹으며 가느다란 손으로 허공에 우아한 곡선을 그으며 말하는 서사시도 아닙니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라고 말했던, 나와 같았던 어떤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진지하려던, 고뇌하려던, 상념에 젖으려던 저는 마지막 뒤표지의 추천사까지 읽고 책을 덮고,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책 표지에 온통 어른거리던 하얀 것들이 무슨 `무늬`가 아니고 꽃이라는 것을. 흰 빛이 있던 자리가 어둠으로 채워진 하얀 꽃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사실적으로 알아보려고 하기전에

무엇을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말하려 하기전에

무엇을 뜨겁게 행동하려 하기전에

우리는 `그 무엇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먼저해야하지 않을까 자문해봅니다.

"비가 올 것 같다.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p7, 어린 새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p47, 검은 숨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p211, 눈 덮인 램프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물을 잠가주세요."
...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p97, 일곱개의 뺨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p134, 쇠와 피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p212, 눈 덮인 램프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p103, 일곱개의 뺨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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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8-03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로님의 글을 보니, `객관적`인 `인지`도 능력인가, 하는 의문을 품어봅니다:-)

개인적으로 특정 `참사`가 특정 `대상`에 국한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이 어렵고,
그 모든일의 개입된 인간 경계가 완벽히 무너지는 경험에서 절망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ㅜㅜ

붙임, 한강작가님께서 어느 인터뷰에서 그러셨어요. 보통 책을 출판하면 ˝축하한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데
이번 책은 ˝고생 많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라고요.
...아로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2015-08-03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데이비드 맥컬레이 건축 이야기 2
데이비드 맥컬레이 글 그림, 장석봉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헤이리 예술인 마을을 만드셨고, 파주 출판단지를 조성했으며, 지혜의 숲을 만드신 한길사 김언호 이사장님을 너무너무 존경하지만, 한길사의 인문학 서적에는 퍼뜩 손이 가질 않네요. 하지만 어른과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같은 한길사의 "성"은 쉬이 펼쳐진답니다. 보리출판사의 자연관찰책의 세밀화 같은 그림들이 잔뜩 들어있어요.



1277년부터 1305년 사이 웨일스 정복 사업을 위해 지어진 성들의 구조와 건설과정, 외관을 바탕으로 가상의 성을 짓는 과정을 세밀화로 서사한답니다. 이렇게 성을 축조하기 위해 필요한 직업군도 소상히 그림으로 보여준답니다.



돌과 돌을 붙이기 위해 물과 모래와 석회를 혼합한 회반죽을 만들어 이용한다든지, 석공들을 관리하는 부감독이 성벽을 쌓을 때 마다 수평과 수직을 항상 체크한다는 것, 화살을 쏘기 위해 벽 중간 중간에 화살코를 뚫고, 궁수가 더 자유롭게 화살을 쏠 수 있게 요부 - 쑥 들어간 부분 -를 만든다든지, 위 그림처럼 수조가 꼭대기에 있고, 효율성을 위해서 이미 만들어진 성벽을 한쪽 면으로 삼고 주방이나 집회소를 만든다는 내용들이 그림과 함께 상세하게 나와있답니다.



저자 데이비드 맥컬레이는 잉글랜드에서 성장했고 그의 가족들이 성이 많은 웨일즈로 자주 여행을 갔다고 하네요. 그래서 자연스레 그가 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멋진 책까지 냈답니다. 완성된 성이에요. 타운 (TOWN)은 중세 유럽의 도시들이 성과 그 주변의 마을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둘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네요. 영어 단어의 어원도 알 수 있네요.



후반부에는 신나는 - 하지만 할애된 페이지가 너무 짧아서 아쉬웠던 - 전투도 나온답니다~ 조립식 격납고에 파성추 (왼쪽 페이지)를 달아 성을 공격하고, 포위 공격용 탑으로 성벽을 넘으려는 시도 (오른쪽 페이지)도 한답니다. 물론, 우리의 튼튼하고 견고한 성은 함락되지 않는답니다. 단순하게 돌로 쌓은 높고 멋진 성이 아닌 그 만들어지는 과정과 각 구조물들이 왜/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마치 옆에서 구경하듯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도 `칼데콧 아너북 선정도서`이지만 저자의 다른책도 무수히 상을 많이 받았답니다. 저와 아이들을 위해서 `고딕성당`, `도시`, `피라미드`!!!도 곧 구매해서 보려고해요. 책은 보통 책들의 1.5배 정도 크기에요. 그래서 그림도 엄청 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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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8-0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미있게 봤어요^^

보슬비 2015-08-01 20:50   좋아요 0 | URL
저도 붉은돼지님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초딩 2015-08-01 20:52   좋아요 0 | URL
두 분 중 한 분의 서평을 보고 이 책을 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자기 앞의 생" by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지은이가 유별나다.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로맹 가리` 혹은 `에일 아자르`.

1956년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콩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가 `에일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1975년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고, 이 소설로 콩쿠르 상을 또 받게 되었다. 콩쿠르 상은 한 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상을 다시 주지 않으니 인류 최초로 콩쿠르 상을 두 번 받게 되었다. 그 콩쿠르 상을 두 번 받기 위해서 로맹 가리가 가명으로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 포함되어있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보면 더이상 비평가들과 독자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곰브리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313


"파리의 비평가들은 원래 텍스트를 꼼꼼하게 연구하는 일 외에 다른 일로 더 바쁜 사람들이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텍스트를 읽을 시간이 있을 뿐 아니라 수박 겉핥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p329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관심`과 `인정`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불편한 대목이다. 인류 최초로 콩쿠르 상을 받았고 그 가명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고해도. 저자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갈무리하고 모모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창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맡아서 키우는 `늙은 창녀`가 사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빈민촌에 그들과 같은 바닥의 삶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열네살 (줄곧 열살로 알고 있었던) 모모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 (창녀)를 죽이고 정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을 찾으러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 때 모모는 자기가 10살이 아니고 14살인 것을 안다. 이 것은 그를 맡아서 키우던 로자 아주머니가 모모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부러 속인 것이다. 로자 아주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유태인이고 창녀였다. 늙어서는 창녀들의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을 키워주며 살고 있다. 프랑스의 지독한 빈민촌에서.

모든 것이 다 지독하다. 여기에 그것을 옮겨 쓸 수 없을 만큼 -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의 생은 지독할 뿐이다.

하지만, 그 지독함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의 하늘을 나는 애니메이션이나 꿈이 가득한 동화처럼 그 지독함은 `지독함`이라는 본래의 뜻을 무기력하게 잃고 개구지게 또 심지어는 청진하게 서술되어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여염집 아이와 할머니의 만담 이야기처럼 들리기도한다.


"나는 콜레라에 대해 잘은 몰라도 롤라 아줌마의 말처럼 그렇게 구역질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건 그저 병일 뿐이고 병에는 책임이 없으니깐. 나는 때로 콜레라를 변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콜레라가 그렇게 무서운 병이 된 것은 콜레라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콜레라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콜레라가 된 것이니까."

p158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새로 출시된 쿠페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처럼 14살 모모는 그 아이다운 눈으로 자기 생에 가득한 구역질 나는 지독함을 키즈 카페에 놀러간 하루의 일상처럼 들려준다.


...

...


눈에 몹시 거슬리는 - 올해 최악의 해설 상을 주고 싶은 - 해설까지 완독하고 책을 덮는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었을 때처럼 - 그래도 그 때는 유능한 해설가가 있었다 -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로맹 가리의 눈도 마음에 들고, 아랍인 아이 모모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로자 아주머니에게는 쿨레 거리의 자크씨네 향수 가게에서 그녀가 좋아할 향수를 한아름 사주고 싶다. 그 마음을 한 쪽에 밀어놓고 - 곧 잊어버릴 - 남은 팝콘과 메마른 콜라잔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극장을 나서기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카뮈나 카프카들의 서슬퍼런 부조리철학의 칼날을 아무것도 모르는 집도의처럼 댈 수도 없다. 모모에게.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댈까? 그러기에는 너무 지독하다. 오히려 마르케스의 아궁이 옆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닦고 조리하고 꼬깃꼬깃 쟁여 놓는 늙은 아낙의 고독이 걸맞아 보인다.


우리는 대체 자기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생을 알기는 한 걸까? `불쌍하다`와 `부럽다`를 사용할 만큼.

각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그대로 익숙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지독하게 구역질이 나든,

`영혼 회귀`는 무색할 만큼 바랜 여염집이든,

나라를 구해 천복을 받은 삶이든,

열네살의 `모모`이기 때문에 그의 생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또 볼수 있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딱 맞춰 항상 복도를 쓸고, 기분이 내키실 때는 다른 상가의 쇼윈도까지 밀대로 - 하필이면 밀대로 - 깨끗이 닦아 주는 소년같은 할아버지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로자 아주머니가 죽은 후, 유복한 성우의 집에서 살게되면서 그 이전의 생이 희석 되는 결말이 못마땅하기까지 하다.

우리들 모두는 경중은 다르지만 - 그 다름도 상대적인 것일뿐 우리안의 절대적 기준에는 똑같은 것들이 아닐까? -

그렇게 모모처럼 우리 앞의 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든다.


`자기 앞의 생`

파리의 어느 지독한 밑 바닥의 삶을 열네살 모모의 특별한 시선으로 청진하게 그린 이 소설은 우리의 삶도 - 지금 내 주위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 그렇게 그려질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나도 모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눈도 저렇게 뜰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 그냥 정말 호기심에서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곰브리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313

"파리의 비평가들은 원래 텍스트를 꼼꼼하게 연구하는 일 외에 다른 일로 더 바쁜 사람들이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텍스트를 읽을 시간이 있을 뿐 아니라 수박 겉핥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p329

"나는 콜레라에 대해 잘은 몰라도 롤라 아줌마의 말처럼 그렇게 구역질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건 그저 병일 뿐이고 병에는 책임이 없으니깐. 나는 때로 콜레라를 변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콜레라가 그렇게 무서운 병이 된 것은 콜레라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콜레라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콜레라가 된 것이니까."
p158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p7

"로자 아줌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암사자를 칭찬했다"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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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마지막 장을 덮고 뒤표지의 추천사 추천인의 이름까지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았다.
무슨 `무늬`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던 책 표지의 어른거리던 하얀 것들이 `꽃`이었다는 것을.
빛이 있었던 자리가 어둠으로 채워진 하얀 꽃들이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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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26 0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신형철평론가님과 안면(??)을...^^
자꾸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남자니 주의하셔요♡

초딩 2015-07-26 00:48   좋아요 1 | URL
ㅎㅎ 좋습니다~ 눈동자가 눈을 많이 - 가득은 아닌 - 메우고 있는 분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