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자기 앞의 생" by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지은이가 유별나다.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로맹 가리` 혹은 `에일 아자르`.

1956년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콩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가 `에일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1975년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고, 이 소설로 콩쿠르 상을 또 받게 되었다. 콩쿠르 상은 한 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상을 다시 주지 않으니 인류 최초로 콩쿠르 상을 두 번 받게 되었다. 그 콩쿠르 상을 두 번 받기 위해서 로맹 가리가 가명으로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 포함되어있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보면 더이상 비평가들과 독자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곰브리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313


"파리의 비평가들은 원래 텍스트를 꼼꼼하게 연구하는 일 외에 다른 일로 더 바쁜 사람들이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텍스트를 읽을 시간이 있을 뿐 아니라 수박 겉핥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p329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관심`과 `인정`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불편한 대목이다. 인류 최초로 콩쿠르 상을 받았고 그 가명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고해도. 저자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갈무리하고 모모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창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맡아서 키우는 `늙은 창녀`가 사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빈민촌에 그들과 같은 바닥의 삶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열네살 (줄곧 열살로 알고 있었던) 모모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 (창녀)를 죽이고 정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을 찾으러 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 때 모모는 자기가 10살이 아니고 14살인 것을 안다. 이 것은 그를 맡아서 키우던 로자 아주머니가 모모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부러 속인 것이다. 로자 아주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유태인이고 창녀였다. 늙어서는 창녀들의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을 키워주며 살고 있다. 프랑스의 지독한 빈민촌에서.

모든 것이 다 지독하다. 여기에 그것을 옮겨 쓸 수 없을 만큼 -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의 생은 지독할 뿐이다.

하지만, 그 지독함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의 하늘을 나는 애니메이션이나 꿈이 가득한 동화처럼 그 지독함은 `지독함`이라는 본래의 뜻을 무기력하게 잃고 개구지게 또 심지어는 청진하게 서술되어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여염집 아이와 할머니의 만담 이야기처럼 들리기도한다.


"나는 콜레라에 대해 잘은 몰라도 롤라 아줌마의 말처럼 그렇게 구역질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건 그저 병일 뿐이고 병에는 책임이 없으니깐. 나는 때로 콜레라를 변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콜레라가 그렇게 무서운 병이 된 것은 콜레라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콜레라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콜레라가 된 것이니까."

p158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새로 출시된 쿠페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처럼 14살 모모는 그 아이다운 눈으로 자기 생에 가득한 구역질 나는 지독함을 키즈 카페에 놀러간 하루의 일상처럼 들려준다.


...

...


눈에 몹시 거슬리는 - 올해 최악의 해설 상을 주고 싶은 - 해설까지 완독하고 책을 덮는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었을 때처럼 - 그래도 그 때는 유능한 해설가가 있었다 -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로맹 가리의 눈도 마음에 들고, 아랍인 아이 모모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로자 아주머니에게는 쿨레 거리의 자크씨네 향수 가게에서 그녀가 좋아할 향수를 한아름 사주고 싶다. 그 마음을 한 쪽에 밀어놓고 - 곧 잊어버릴 - 남은 팝콘과 메마른 콜라잔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극장을 나서기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카뮈나 카프카들의 서슬퍼런 부조리철학의 칼날을 아무것도 모르는 집도의처럼 댈 수도 없다. 모모에게.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댈까? 그러기에는 너무 지독하다. 오히려 마르케스의 아궁이 옆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닦고 조리하고 꼬깃꼬깃 쟁여 놓는 늙은 아낙의 고독이 걸맞아 보인다.


우리는 대체 자기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생을 알기는 한 걸까? `불쌍하다`와 `부럽다`를 사용할 만큼.

각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그대로 익숙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지독하게 구역질이 나든,

`영혼 회귀`는 무색할 만큼 바랜 여염집이든,

나라를 구해 천복을 받은 삶이든,

열네살의 `모모`이기 때문에 그의 생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또 볼수 있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 딱 맞춰 항상 복도를 쓸고, 기분이 내키실 때는 다른 상가의 쇼윈도까지 밀대로 - 하필이면 밀대로 - 깨끗이 닦아 주는 소년같은 할아버지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로자 아주머니가 죽은 후, 유복한 성우의 집에서 살게되면서 그 이전의 생이 희석 되는 결말이 못마땅하기까지 하다.

우리들 모두는 경중은 다르지만 - 그 다름도 상대적인 것일뿐 우리안의 절대적 기준에는 똑같은 것들이 아닐까? -

그렇게 모모처럼 우리 앞의 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든다.


`자기 앞의 생`

파리의 어느 지독한 밑 바닥의 삶을 열네살 모모의 특별한 시선으로 청진하게 그린 이 소설은 우리의 삶도 - 지금 내 주위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 그렇게 그려질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나도 모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눈도 저렇게 뜰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 그냥 정말 호기심에서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곰브리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313

"파리의 비평가들은 원래 텍스트를 꼼꼼하게 연구하는 일 외에 다른 일로 더 바쁜 사람들이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텍스트를 읽을 시간이 있을 뿐 아니라 수박 겉핥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p329

"나는 콜레라에 대해 잘은 몰라도 롤라 아줌마의 말처럼 그렇게 구역질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건 그저 병일 뿐이고 병에는 책임이 없으니깐. 나는 때로 콜레라를 변호하고 싶었다.
적어도 콜레라가 그렇게 무서운 병이 된 것은 콜레라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레라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콜레라가 된 것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콜레라가 된 것이니까."
p158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p7

"로자 아줌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암사자를 칭찬했다"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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